페스트는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다. 바로 현실이다. 우리에게는 코비드 19가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많은 위험을 느끼고,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 언론에 대한 불신, 많은 불안감 등을 가지게 되고, 자신의 악행을 보게 된다.
극단적인 이기 주의는 살릴 수 있는 사람을 못살리게 되는 아쉬운 일이 일어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기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놀라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책이라 읽어보기를 추천드린다
제목은 페스트, 작가는 알베르 카뮈. 어디서 많이 들어봤지만 읽어보진 않은 책. 이유는 어려울 것 같아서.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 이후 이곳저곳에서 '페스트'라는 책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자 왠지 나도 이 책을 읽어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역시, 책장을 넘기기는 어려웠다. 전자책 구독 서비스를 통해 언제든지 (거의) 무료로 읽을 수 있었는데! 그러다 독서 모임원들의 만장일치로 드디어 '페스트'를 읽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페스트'는 어려웠다. 읽다가 이게 무슨 소리야..? 하면서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뭔가 번역 문제 같아 출판사를 바꿔봤다. 여전히 어려웠다. 다시 바꿔봤다. 이제 조금 쉬웠다. 번역의 신비함을 느끼며 이번에는 후루룩 읽었다. 새벽 2시에 읽기 시작해 5시 즈음에 다 읽었다. 아쉽게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책이 아니라 실제로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재난을 겪고 있어서일까.
'페스트'는 19세기 유럽 한 도시에 페스트가 창궐하며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과 인간의 이면을 보여준다. 봉쇄된 도시 안에서 누군가는 범죄를 저지르고, 누군가는 환자를 돌보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누군가는 탈출하기 위해 애를 쓴다. 흥미로운 부분도 여럿 있긴 했다. 목사의 태도 변화, 재난에 대한 리외의 철학, 툭 치면 명언이 튀어나오는 엄청난 말빨 등. 하지만 펜데믹 이후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절망적인 뉴스들 때문인지 '페스트'는 코로나 긍정회로 버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재난은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의사 리외의 아내나 어머니의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은 것처럼.
작가는 아마도 부조리, 절망, 공포, 폭력 등의 '악'과 선의, 공감, 희생 등의 '선'이 공존하는 인간상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까. 인간은 서로 같은 불안과 희망을 느끼기에 인간다워진다. 마지막 순간 마음을 바꾼 랑베르가 그 예다. 전제조건은 '같은' 불안과 희망을 느끼고 마주한다는 거다. 외면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간다워진다. 이왕이면 제대로 마주하고 싶다. 재난과 재난으로부터 휘몰아치는 절망과 희망을.
지금 이 시국에 읽어 보면 딱 좋은 책이 아닐까 싶어 아이에게 물었더니 이미 읽어봤지만 또읽고 싶다고 해서 소장하게된 책입니다. 올해만 이 책을 몇번 읽었는지. 읽을때마다 정말 작가가 대단하다 느껴진다고 합니다.
좋은책이고, 책은 정말 많이 읽으수록 좋은것 같단 생각이 들게 한 책이라고 합니다. 소장하고 싶은책 손가락안에 드는 책이라며 강력추천하네요~
둘째도 어서 읽어 봤음 좋겠다고, 할 정도입니다.
4월에 시작한 오랑의 페스트는 12월에 수그러들기 시작해서 다음해 2월에 종식을 맞는다. 그 기간이 지금에 비하면 비교적 짧다고 해야 하나. 도시를 폐쇄해서 다른 도시로는 번지지 않는다. 소설가가 개연성을 유추하여 상상속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임에도 지금의 현실과 너무도 유사한 부분이 많다. 물론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페스트 자체가 아닐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현실로 인해 자꾸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주 옛날 언제 이 책을 읽었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기억 하나는 의사 류가 끝무렵에 죽었다는 것이었는데 지금 읽으니 의사가 죽은게 아니라 자원봉사자 장 타루가 페스트에 걸려 죽었다. 기억의 왜곡이었거나 잘못 읽었었나 보다.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타루: "단언하건대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각자 자신 안에 페스트를 가지고 있다는 건데, 왜냐하면 실제로 아무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무사하지 않으니까요."
지금의 코로나는 어떤가. 12월에 시작해서 여러차례 파동을 거치면서 더 심화되고 있다. 전 지구적 규모로 번졌고 끝을 알 수가 없다. 개인은 어떤가. 탈도 많고 말도 많다. 결연히 맞서서 싸우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이용하여 끝없이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는 사람도 있다. 무력감에 젖어 좌절하는 사람도 있고 아무런 고통도 못느끼는 사람도 있다.
"재앙이란 사실 공동의 문제이지만, 일단 닥치면 사람들은 쉽사리 믿으려 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페스트가 있어 왔다. 그렇지만 전쟁이든 페스트든 사람들은 늘 속수무책이다."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것으로부터 무사할 지 모르겠고 후를 기약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고 그후는 그럼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떻게 해야될 것인가?
"..리유는...페스트균은 결코 죽지도 않고 사라져버리지도 않으며, 가구들이며 이불이며 오래된 행주같은 것들 속에서 수십년동안 잠든 채 지내거나 침실, 지하창고, 트렁크, 손수건 심지어 쓸 데없는 서류들 나부랭이 속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다가, 인간들에게 불행을 주고 교훈도 주려고 저 쥐들을 잠에서 깨워 어느 행복한 도시 안에다 내몰고 죽게 하는 날이 언젠가 다시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랑에서도 사람들은 시간도 없고 생각도 짧아 사랑하는지도 모르면서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13쪽)
그렇다, 불행 속에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다. 하지만 추상적인 것이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할 때, 바로 그 추상과 제대로 붙어야 한다.(115쪽)
이 세상의 악이란 거의 대부분 무지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배움이 없는 선의는 악의와 마찬가지로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있다.(170쪽)
존경받을 만한 사람, 즉 어느 누구에게도 거의 병균을 옮기지 않는 사람이란 되도록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결코 해이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하단 말이죠!(324쪽)
그래서 나는 인간들의 모든 불행이란 그들이 분명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325쪽)
...... 마음이 평화에 이르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길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럼요, 공감이지요."(326쪽)
행복은 전속력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그 순간은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랑베르는 결국 모든 것을 단번에 보상받을 것이며, 환희란 음미할 새도 없이 마치 불에 데는 것과도 같으리라 깨닫고 있었다.(377쪽)
한데 말입니다, 페스트란 대체 무언가요? 인생인 거죠, 바로 그거죠, 뭐.(393쪽)
이 글은 완수해 내야 했던 것, 아울러 성인이 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재앙을 용납할 수도 없기에 그 대신 의사가 되려 애를 쓰려는 모든 사람들이 개인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공포와 공포의 지칠 줄 모르는 무기에 맞서 또다시 완수해야만 할 바에 대한 증언일 뿐이었다.(396쪽)
리유는 울고 있는 그 노인이 바로 그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았고, 자신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없는 이 세상은 마치 죽은 세상과 다를 바 없으며 사람들은 감옥이니 노동이니 패기니 하는 것들에 지쳐 버린 나머지 어떤 존재의 얼굴을 구하고 그 온유함에 마치 처음으로 눈뜨듯 경탄의 ㅏㅁ음을 간절히 원하는 때가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오는 법이라고 생각했다.(334쪽)
194X년 4월 16일 오랑에서 시작된 이 일을 서술하는 서술자는 마지막에서야 자신을 밝힌다. 누구라도 했어야 하는 일로 자신이 누구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듯, 자신을 객관화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서술자가 기이한 사건들이라고 표현하는 오랑의 페스트 상황도 객관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어떤 죽음 앞에서도 감정의 폭발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이 참혹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정이 철철 넘쳐 흘렀다면 한 페이지 한 페이지마다 가슴을 부여잡고 숨 고르기를 해야 할 것이다. 1913년 출생한 카뮈는 1941년 28세에 <페스트>를 준비하고 1946년 33세에 <페스트> 탈고, 1947년 34세 6월에 <페스트> 출간 1960년 47세에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는다. "카뮈는 <알제리 해안에 위치한 그저 그런 프랑스의 도청소재지에 불과한> 도시 오랑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점령하게 탄압받았던 프랑스를 상징하며, 등장인물 타루와 리유를 주축으로 하는 보건대는 레지스탕스 운동, 즉 항독저항 운동을 의미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399쪽, 역자해설 중) 이렇듯, 1347년에서 1352년 유럽 전역을 페스트가 휩쓸었다 해도, 전염병이 지구를 휩쓰는 것이 현실이 될 것을 염두에 두고 쓴 소설이 아니다. 2020년 페스트와 같은 전염병인 코로나 19가 지구를 휩쓸고 있는 것을 카뮈가 본다면 그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호했던 그의 <페스트>의 '반항'과 '긍정'의 주제는 현시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읽힌다. 신에 대한 '반항'과 삶에 대한 '긍정'으로 말이다. 13쪽의 카뮈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작가는 자신이 신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모르면서, 신을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는, 삶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계적인 제약 회사에서 코로나 19의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재래드 다이아몬드 박사의 말처럼 모든 예후는 단정할 수 없이 불확실하다. 코로나 19가 바꿔놓은 우리 삶이 되돌아 올 때 우리는 카뮈의 "그저 사람들은 전염병이 왔을 때 그러했듯이 또 그렇게 떠나는 것 같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345쪽)는 구절을 떠올리게 될지 모른다. "...... 인간이 페스트와 인생이라는 싸움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과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뿐이다."(372쪽)라고 의사 베르나르 리유가 말하는 것처럼 그저 '반항'하고 '긍정'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 모른다. 전쟁상황이든, 전염병상황이든, 인생이라는 참혹한 현실 속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 혹은 최대한의 노력인 '사랑'하는 것, 우리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지구를 사랑하고 우주를 사랑하는 것만이 우리가 지속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자 이유가 될 것이다.
신께서 고독하여 우리를 창조하였으므로 ...... .
페스트 La Peste
알베르 까뮈, 최윤주 역
2014.11. 열린책들
2020.09.30. 수. PM 7:10. 보름달에 소원 빌고 토끼가 쿵덕쿵덕 절구 찧는 ‘추석’ 전 날.
며칠 전
시사주간지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선정 되었다는 기사가 났다.
소개 글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밝힌 데로 “코로나19라는 팬데믹의 위기 속에서도
‘개방성', '투명성', '민주성'의 원칙을 가지고 방역의 최전방에서 국민들과 진솔하게 소통하여 K-방역을 성공으로 이끌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품위의 문제입니다.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페스트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품위 입니다.”
의사 리유가 신문기자 랑베르와의 논쟁 중에 주장한 것처럼 그녀는 ‘품위’있게 바이러스에 대응했다.
위험으로 들어 찬 폐쇄된 도시의 공포와 죽음, 이기 안에서 ‘품위’를 지키는 것. 그렇게 제 본분을 끝까지 수행 하기란 소설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페스트>에 나오는 군상처럼 가장 극한의 순간에 인간은 본성을 드러내고
큰 놈들은 언제나 작은 놈들을 먹어 치우고 공동체는 균열과 단합을 반복하고
신을 찾아 부르짖더니 이내 의심하다가 경멸한다.
이렇게 ‘품위’를 잃은 모든 민낯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진다.
이 모습은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지금 우리와 연결하지 않을 수 없는데(나는 까뮈가 미래에 들렀다가 다시 돌아가 글을 쓴 건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아니면 내가 ‘오랑’에 있거나)
오늘 기준
확진환자 33,537,260명
사망 1,006,161명
발생국가 영토 218개국에서 발생한 코로나19로 인해
유럽에서는 정부 방역 불신으로 ‘사재기’가 일어나고
미국에서는 코로나19로 무너진 중산층들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어있고,
인도에서는 취약층의 마스크 부족 현상과 부유층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마스크가 동시에 존재하는 아이러니가 지속되고 있다.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페스트균은 결코 죽지도 않고 사라져 버리지도 않으며…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다가, 인간들에게 불행도 주고 교훈도 주려고 저 쥐들을 잠에서 깨워 어느 행복한 도시 안에다 내몰고 죽게 하는 날이 언젠가 다시 오리라”
페스트가 힘을 잃고, 고립도 끝이 난 해방의 밤에
기뻐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리유의 마지막 기록에서 처럼
오랑의 사람들도, 지금의 우리도(우리는 현재 진행 중이기도 하지만)
전염병을 겪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언제 들이 닥칠지 모를, 이미 겪어 본 공포 속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글의 처음부터 말했던 것처럼 다시 시작 되더라도. 끝이 보이지 않아도.
‘품위’를 잃지 않고 서로를 지켜 나가길 바래본다.
매일 출근하던 일터, 매일 등교하던 학교, 더없이 평범한 집밥과 매일 마주 대하는 가족이나 친구, 혹은 동료등, 소위 일상이라고 명명된 너무 사소해서, 존재조차 인식이 되지 않는 것들은 잃어버리고, 금지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지금 전 세계의 인류는 “코로나 19”라는 전염병에 대항해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팬데믹이라는 들어 보지도 못했던 생소한 단어가 우리의 일상에 비집고 들어온지는 벌써 반년이 훌쩍 지나고 있고, 그 재난 앞에서 우리는 소중한 일상을 하나씩 잃어가고 있다.
“페스트”라는 소설이 출간된 때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70여년전 1947년이었다. 물론,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인류는 수많은 전염병으로 고통을 받았고,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 소설이 지금도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비단, 전염병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의 역경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의 선택지는 많지 않으며, 결국, “연대”만이 공동의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진리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이미 70여년전에 전염병의 무서움을 우리에게 경고했다. 만약, 작가의 경고를 엄중히 받아들였다면, 지금, 우리는 이런 현실을 맞닥뜨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작가의 경고를 무시하고 살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끝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며, 지구를 병들게 만들었다. 결국, 인간의 오만함과 끝없는 욕망이 빚어낸 비극은 작품의 마지막 문장처럼, 어딘가 숨어있다가 스멀 스멀 우리앞에 버젓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된 오랑이라는 도시 역시, 조용하고, 일상적이며,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도시였고, 이 비극이 시작 되었을 때는 그 누구도 감지 하지 못했다.
우리도 그랬다. 중국 우한에서 처음 코로나19가 발병 했을 때는, 정말 남의 나라 이야기인줄로만 알았다.
우리나라에서 몇 명씩 환자가 발생 했다고 언론에서 보도가 되기 시작헸을 때도, 그러다 말겠지하고 지나쳤다. 그러나, 우리 동네에서 환자가 발생했다는 경고 문자가 오고, 특정 지역에서 폭발적으로 환자가 발생 하고, 유럽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사망자와 확진자가 크게 증가하는 것을 매일 확인 하게 되면서, 우리의 무심함은 걱정으로, 그것은 다시 공포로 바뀌고 말았다.
오랑시의 의사 리유도 처음엔 전염병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멀쩡하던 병원 수위가 죽고, 거리에 쥐들이 나동그라지며, 외곽의 가난한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다. 그는 동료의사 카스텔과 함께 이 전염병이 “페스트”임을 인정하고, 시 공무원 그랑과 힘을 합쳐 대책을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원인도 치료법도 알 수 없는 전염병 앞에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과학이 이렇게 많이 발달했다고 하는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도 “코로나19”의 정체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 아직도 백신이나 치료제가 없다. 그나마 그 시절보다 개인위생이 나아졌고, 병의 전염 속도를 최대한 늦출 수 있다는 정도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취약계층이 이 재앙의 최대 희생자가 되고 있다는 것 또한, 똑같은 모습니다.
오랑시가 속한 행정구역의 도지사가 페스트를 공표하고 도시를 폐쇄하는 순간부터 페스트는 이제 오랑시민 모두의 문제가 되었다. 그들은 준비 없이 사랑하는 이들과 이별을 맞았고, 공포감을 느끼면서 유배되었다. 언제 이 유배가 끝날지 알 수 없다는 불안함이 시민들을 고통으로 몰고 갔다. 더군다나, 여행이나 업무등의 이유로 이곳에 잠시 머물게 되었던 이방인들의 고통은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현재는 견딜 수 없고, 과거와는 적이며, 미래는 빼앗긴 채, 이를테면 우리는 인간의 정의 또는 증오심 때문에 철창 위에서 살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과 참으로 비슷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
결국, 이 참을 수 없는 휴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상상으로라도 기차를 다시 달리게 하는 것, 완강히 침묵하는 초인종 소리를 계속 울리게 해서 시간을 가득 채우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괴롭히도록 했고,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고통과 한편이 되도록 만들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질병이 갖는 수법의 하나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 각자는 그저 하루하루 하늘을 마주한 채 외롭게 살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폐쇄된 오랑은 점차 경제가 멈춰가기 시작한다. 식량이나 휘발유가 배급제가 되고, 직장은 문을 닫는다. 할 일이 없어진 사람들은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영화관을 찾는다. 이렇게 상황이 바뀌면서 이런 위기를 기회로 삼아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주류도매업자이자 연금생활자 코타르이다. 그는 작품 초반에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한 자로 나오는데, 페스트가 창궐하고, 상황이 비정상으로 돌아가자, 오히려 삶의 활력을 찾고, 페스트의 종식을 바라지 않는다.
현재도 이 위기를 기회삼아 성장한 산업이 있고, 반대로 지는 산업이 생겨났다. 심지어, 위법의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는 집단도 있었다.
기자 랑베르는 이방인으로서 오랑시에서 탈출하고자 노력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나요, 선생님. 절 이해하시겠죠. 전 보도 기사나 쓰려고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여자와 함께 살기 위해서 세상에 나온 것 같기는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에 맞지 않습니까?”
랑베르의 이 탈출의 변은 우리에게 인생의 이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이렇게 탈출을 하고자 애쓰던 그는 그러나 결국, 스스로 오랑에 남아 리유와 그랑,여행자 타루가 조직한 보건대에서 활약을 하게 된다.
“저는 이곳에서 제가 늘 이방인이고 여러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겪을 만큼 겪고 보니 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제가 여기 사람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도 결국 우리 모두의 일이 되어 버렸다. 더 이상 바다 건너 먼 나라의 일도 아니고, 어느 한 곳 특정지역에 국한된 일도 아니다. 과연, 우리는 이 오랑시의 보건대원들처럼 서로 힘을 모아 이 고비를 넘길 수 있을까
신부 파를루는 페스트가 사람들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므로 더욱 신에게 의지해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설교하지만, 오랑시의 페스트가 점점 창궐하면서, 사람들은 종교에서 주장하는 절제대신 쾌락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세상의 질서란 죽음에 의해서 해결되니 만큼 어쩌면 신으로서도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 주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고, 게다가 그렇게 침묵하고만 있는 하늘을 올려다볼 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해 죽음에 맞서 투쟁하기를 더 바랄지도 모릅니다.”
리유의 말에서 사람들의 종교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음을 감지 할 수 있다. 전염병이 점점 맹위를 떨치게 되자 사람들은 폭력적이 되기도 하고, 무기력에 빠지기도 한다. 사망자는 점점 늘어만 가고, 사망자의 가족은 장례도 제대로 못 치르고, 격리된 상태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을 하게 된다.
노의사 카스텔의 혈청시험이 시작되었으나, 판사 오통의 어린 아들은 혈청주사를 맞고도 결국 고통스럽게 죽어간다. 파룰르 신부도 원인불명의 병으로 죽고, 페스트의 기세가 한 풀 꺽인 순간, 리유를 곁에서 돕던 타루마저 사망하고 만다.
거리엔 사라졌던 쥐들이 다시 나타나고, 고양이들이 함께 나타나며, 페스트는 갑작스레 후퇴하고 만다. 봄의 문턱에서 시작된 전염병과의 사투는 겨울을 지나 그 다음해 2월이 되어서야 겨우 막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의사 리유는 친구 타루와 아내를 한꺼번에 잃어야 했다.
도시의 문은 다시 열렸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재회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적어도 얼마간 그들은 행복할 것이다. 사람들이 언제나 절실히 원할 수 있는 어떤 것, 그래서 가끔은 손에 쥘 수도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애정임을 이제 그들은 알게 된 것이다.
모든 시민이 축제를 즐길 때 오직 한사람, 코타르만이 미쳐 날뛰며, 기뻐하는 사람들을 향해 총질을 하고 결국 경찰에게 끌려간다. 그는 다시 범죄자의 신분으로 돌아가게 된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의사 리유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한다. 동네 나이 든 환자집에 진료를 하러 갔을 때 노인은 타루의 죽음 소식을 전해 듣고 리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제일 좋은 사람들이 늘 먼저 떠나 버립디다. 인생이란 그런 거죠. 한데 말이죠, 그 양반은 자신이 뭘 원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 양반은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더군요. 아무튼 저는 그 친구분이 좋았습니다..... 남들은 이렇게 말하죠. <페스트야. 우리가 페스트를 견뎌 냈다니까.> 자칫하다간 이건 뭐 훈장이라도 달라고 할 겁니다. 한데 말입니다. 페스트란 대체 무언가요? 인생인 거죠, 바로 그거죠, 뭐.
도시로부터 들려오는 환희의 함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이 기쁨이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페스트균은 결코 죽지도 않고 사라져 버리지도 않으며, 가구들이며 이불이며 오래된 행주 같은 것들 속에서 수십 년 동안 잠든 채 지내거나 침실, 지하 창고, 트렁크, 손수건 심지어 쓸데없는 서류들 나부랭이 속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다가, 인간들에게 불행도 주고 교훈도 주려고 저 쥐들을 잠에서 깨워 어느 행복한 도시 안에다 내몰고 죽게 하는 날이 언젠가 다시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팬데믹이 다시 덮치지 않았다면, 이 소설을 다시 읽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에서 시민들은 준비도 없이, 그리고 대항해 싸울 무기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불행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들은 좌절하지 않고, 싸워서 이겨내려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들의 모습을 영웅시 하거나, 위대한 업적으로 포장하지 않고,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이 책을 덮으면서, 결국은 인생이란 무엇인지, 인생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평소에 너무 가볍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가치들, 사랑, 우정, 평화, 가족, 일상과 같은 것들을 깊이 있게 다시 생각해 볼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우리는 아직, 팬데믹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쩌면, 이 작품속의 페스트처럼 “코로나 19”도 어느 날 갑자기 그 기세를 잃고 사라질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비록,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 가지 못할 수도 있다.
왼벽하진 않더라도, 우리의 일상을 되찾기 위해 결국 우리는 흩어져 있는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개인 한사람, 한사람의 힘은 보잘 것 없어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그들의 힘이 합쳐져야만 이 고난을 이겨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시국에 가장 잘 팔리는 소설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지금 일어나는 일과 싱크로율이 거의 90%이상 일치해서 읽는 내내 신기했다. 마치 예언서를 보는 느낌이었다. 책 내용이 워낙 재미도 있거니와 번역이 매끄러워 읽기 쉬웠고, 카뮈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게 하는 매력이 있는 소설이었다.
페스트에 감염된 도시 안으로 바깥세상이 들여보내는 격려와 응원을 라디오에서 듣거나 혹은 신문에서 읽을 때마다 의사 리유의 생각은 적어도 그랬다. 비행기나 육로를 통해서 보내진 구호품들은 물론이고 동정이나 찬양 일색의 논평들이 이제는 외따로 버려진 도시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럴 때마다 영웅적 무훈담이나 수상식 연설과도 같은 어투에 의사 리유는 참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런 마음 씀씀이가 거짓이 아님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인간이 자신과 전 인류를 연결하는 그 무엇을 표현하고자 할 때 쓰는 상투적인 언어의 범위 안에서만 표현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를테면 그 언어는 페스트의 한가운데에서 그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하는 일상의 소소한 노력들을 표현해 낼 수 없었다.
학창시절때 꼭 읽어야 할 필독서인지라 읽어봤었나 기억이 가물가물 해서 일련의 시간을 내어서 다시 읽어보기 시작한 작품이다. 이방인은 기억에 남는 데 아마 이 작품은 어려워서 읽다가 포기했거나 엄두를 안 냈거나 했을 것이다.(중학교때는 어렵게 느껴졌었다.)
근래 메르스에 최근 코로나 사태를 보면서 다시금 재조명하여 읽게 되는 것이었다.
작품 전반에 페스트를 비롯한 인류의 해를 끼치는 전염병의 역사는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것 같다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 간 쉽게 읽히고 쉽게 잊어버릴 작품을 읽어와서인지 간만에 보는 고전은 쉬이 진도가 나가지 않아 독서의 편식이 얼마나 무서운 지 여실히 느껴가는 중이다.
쥐 한마리의 죽음이 방역과 은폐, 사람들의 두려움 이윽고 도시 전체에 퍼진 죽음의 그림자는 평화롭던 일상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지금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의 행동들과 탁상공론 각각의 상황에 대처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지금의 현상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높았다.
문학이 주는 깊은 고찰과 심상 이 계절에 곱씹으면서 더 몰입감을 주는 것이었다.
진도는 그리 빨리 넘어가지 않았지만, 한자한자 딱딱한 음식을 먹듯 불편한 이물감처럼 책을 읽어내려갔다. 앞으로도 이런 고전은 자꾸자꾸 찾아봐야겠다. 어려움이 희석되어서 유들유들해질 때까지...
죽음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진료실 앞에서 발견된 쥐의 시체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순식간에 번지는 전염병으로 도시가 폐쇄되고
혼돈과 공포에 빠진 인간들의 본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10개월 전에 내가 이 책을 읽었다면
지금 같은 느낌을 받았을까?
코로나 19로 일상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모습이 투영된
오랑의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지금 이 모든 일들이 꿈만 같이 느껴졌다.
단언하건대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각자 자신 안에 페스트를 가지고 있다는 건데,
왜냐하면 실제로 아무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무사하지 않으니까요.
또한 잠시 방심한 사이에 다른 사람 낯짝에 대고 숨을 내뱉어서
그자에게 병균이 들러붙도록 만들지 않으려면
늘 자기 자신을 제대로 단속해야 한다는 겁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병균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머지 것들, 예를들어 건강함, 성실함, 순수함 등은 …
결코 멈춰서는 안되는 의지의 산물이죠.
즉 어느 누구에게도 거의 병균을 옮기지 않는 사람이란
되도록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하단 말이죠.
우리가 마주한 일들은 결코 소설이 아니고
어떻게 해서든 관통해서 지나가야 하는 현실이며,
오랑의 시민들처럼 언젠가 '해방의 밤'을 맞이한다고 해도
과거의 모습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지만
페스트에 나오는 타루의 말처럼
우리는 지금 멈추지 않는 의지로 함께 이겨내고 있고,
이 연대로 현재의 '페스트'를 이겨낼 것이라 믿는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입니다. 이방인을 정말 재미있게 봐서 페스트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했엇습니다. 마침 코로나가 터지고 대여 이벤트를 하길래 얼른 보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작품은 유명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길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실 잘 읽히지 않앗습니다. 그런데 점차 현재의 상황과 비슷한 느낌에 몰입하여 후루룩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북이라 가지고 다니기에도 더 편하고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