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정말 열심히 읽었다. 작가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인간에 관한 인간의 어떤 힘에 대해 느끼게 하는 글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에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게 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무시하고 있었던) 그 깊은 곳에 있는 작은 희망의 빛이 있다. 심해생물이 지닌 빛과도 같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보였다 사라졌다 깜빡거리는 그 빛이 오늘은 유독 더 깨끗하고 환하게 느껴진다.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
바다라는 배경 자체가 주는 망망대해와 심연의 감각. 희망적이지도 절망적이지도. 어찌보면 그냥 절망적인데 그가 놓지 않는 낚시줄에서 느껴지는 힘과 삶, 고통과 패기, 의지가 경이롭다. 희망이란 결국 그런 것이지 하면서도 버릴 수 없는게 희망 아니던가. 결국 희망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이 책에는 <노인과 바다> 이외에도 7개의 소설이 같이 들어있다. 그중에서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이란 단편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모든 것이 <nada y pues nada y pues nada(허무 그리고 허무 그리고 허무)> 였다."
초등학교 6학년이 끝나갈 즈음 학급문고에서 <노인과 바다>라는 책을 꺼내들었다. 수업시간에도 책상 서랍에 숨기고 책을 보았는데 노인의 사투로만 그려진 이 책이 정말 재미있었다. 다 읽고서는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학급문고에 내다니.'라는 생각을 했다. 한 해 동안 없어지는 책이 많아서 학년이 끝날 때 찾아가지 못하기 때문인데 나도 생각해보면 친구들과 나누고 싶어서 재미있는 책을 내고는 했고 책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노인과 바다>는 학년이 끝날 때까지 꽂혀있었고 아마도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찾아갔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과연 선생님이 내가 수업을 듣지 않고 <노인과 바다>를 읽고 있는 것을 모르셨을까 싶다. <노인과 바다>는 그 때 접했지만 헤밍웨이의 작품은 그 후로 한 권도 읽은 적이 없다. 그 유명한 <무기여 잘있거라>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도 읽어보지 못했다. 흑백영화로 tv에서 해줄 때 본 것은 같은데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노인과 바다>도 바다에서 노인의 모습과 그 눈부신 해변의 모습만 기억이 남는다. 이웃분들이 올리시는 리뷰를 보며 나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어 삼십이년만에 다시 읽어 보았는데, 역시나 재미있는 책이었지만 웬지 처음 읽었을 때 놀라고, 기쁘던 그런 마음과는 같지 않아서 서운했다.
노인은 종종 고기를 장기간 못잡는 때가 있는 것 같다. 소년의 말에서 전에도 87일 동안 한마리도 낚지 못하다가 그후 3주 동안 큰 물고기를 낚았던 적이 있다. 현재는 84일째 고기를 못잡고 있다. 다섯 살 때부터 노인을 도왔던 소년의 현재 나이는 나오지 않은데, 현재도 그리 큰 아이는 아닌 듯이 느껴지지만, 아이의 말이나 행동은 어른 못지 않다. 소년과 노인은 서로 깊이 신뢰하며 우정을 나누는 사이이다. 노인은 말린과 사투를 벌이면서 '소년이 함께 있었다면은' 하고 바란다. 하지만 소년의 부모는 고기를 낚지 못하는 어부와 함께 배를 타지 못하게 한다. 노인이 말린을 잡아오고 소년은 이제는 함께 배를 타겠다고, 부모의 말은 소용이 없다고 노인에게 말한다. 노인도 자신의 고집을 버린다면 조금은 작지만 물고기를 매일 낚을 수 있는 어부일 것이다. 현재 노인에겐 자신의 몸을 뉘울 잠자리 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소년이 준비해주는 것으로 근근히 살고 있는 샘이다. 자신의 말벗이 돼주고 자신을 염려해주는 소년과 가장 좋은 것을 나누고 싶어하고 소년에게 가장 좋은 것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말린은 자신의 증명이지만, 소년과 함께 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저 그런 물고기를 잡는 어부를 소년은 바라지 않는다. 가장 큰 물고기를 잡는 노인을 소년은 믿고 따른다. 때로는 굶기를 반복하더라도 말이다. 후세대와 대화가 통하면서,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고집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며, 가장 큰 물고기를 잡는 노인은 드문 존재다. 소년은 노인의 가치를 알아보는 아이다. 6학년 때 노인의 모습은 정말 놀랍게 느껴 졌다.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그때는 더욱 더 그랬다. 말린을 잡은 끈을 끊고 싶은 때가 분명 수도 없었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낚시줄에 긁혀 손바닥에 피가 나도 노인은 낚시줄을 놓지 않았다. 그런 일은 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이 책에는 <노인과 바다> 외에도 단편의 대가라는 헤밍웨이를 대표하는 단편 7편이 더 실려 있다. <킬리만자로의 눈>,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고 행복한 생애>, <하얀 코끼리 같은 산>,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살인자들>, <세상의 빛>, <인디언 부락>이다. 전부 혹은 완전히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작가를 느낄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들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었다고 착각하고 있었고, 그것도 매우 지루한 장편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흰고래 모비딕>이랑 착각한 것은 아닌지, 한도 끝도 없는 독백이 대양처럼 이어지고 혼자서 하는 치열한 물고기와의 투쟁을 읽는 몹시도 힘겨웠었던 기억이 완전한 무에서도 자라날 수 있는 것일까? 때때로 기억은 심한 왜곡을 거쳐 전혀 새로운 사실로 태어나기도 한다지만, 노인과 바다를 지루하고 읽기 힘든 소설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펼쳤는데, 단편과 중편 사이의 짧은 소설이었고, 하드보일드 문체라던 짧고 남성적인 헤밍웨이의 문체를 사랑하게 되었다.
노인과 바다의 주요 배경은 대양이고, 등장인물은 노인과 그를 상대하는 거대한 물고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매우 중요한 인물로 소년이 나온다. 제목이 노인과 바다지만 노인과 소년이라고 했어도 소년과 노인의 관계 속에서 주제를 충분히 캐어낼 수 있을만큼 소년의 존재는 이 소설에서 큰 울림을 준다. 노인은 낡은 오두막에서 가족도 없이 혼자 살며 고기잡이를 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오래도록 고개를 잡지 못한 노인의 집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노인과 함께 어릴 때부터 고기잡이를 배워온 손자 같은 소년은 노인을 걱정하고 따르는 유일한 대화 상대다. 노인은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를 깨우고 둘은 이제껏 함께 고기잡이를 나섰지만, 80일이 넘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낛지 못하자 소년의 부모가 아이를 노인에게서 떼어내어 다른 고기잡이 배로 보낸다. 다른 배에서 일하게 된 소년은 여전히 노인의 집에 들락거리며, 먹을 것과 마실것, 그리고 미끼로 쓸 정어리들을 구해다 준다.
까만 새벽에 소년과 헤어진 노인은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간다.
그는 언제나 바다를 <라 마르 La mar> 라고 생각했다. 그건 사람들이 바다를 좋아할 때 스페인어로 부르는 말이다.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때로는 험담을 하지만, 그런 때에도 언제나 바다를 여성으로 말한다... 노인은 바다를 언제나 여성으로 생각했고, 엄청난 혜택을 줄 수도 있고 거두어 가기도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노인은 바다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바다와 대화한다. 바다, 물고기, 그리고 그 자리에는 없는 소년과 말하듯 혼잣말을 한다. 그의 그러한 독백이 혼자서 이끌어나가고 있는 소설에 생동감과 인물의 입체적 캐릭터를 부여한다. 미끼를 향해 움직이는 고기를 향해 대화하듯, '좀 더 먹어' '아주 잘 먹으라고' 라는 등의 말을 하다가는 거대한 고개를 낛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 깨닫는 아이의 부재를 아쉬워하며 '그 애가 내 곁에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라고 혼잣말을 했다가는 소년에게 말하듯 ' 내가 저 놈을 낛싯바늘로 건 게 정오였어', '저 놈들은 좋은 놈들이야'. '함께 놀고 농담을 하고 사랑을 하지' 라는 말도 한다. 결국 혼자서 거대한 고개를 낛는 것이 힘에 부치고 몸도 다치자 다시 또 아이를 환기한다. 그 애가 내 곁에 있었더라면 나를 도와주고 또한 이 광경을 함께 보았을텐데.. 사흘 밤과 낮동안 계속되는 물고기와의 사투동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때마다 노인이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 그 애가 내 곁에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다.
80여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낛지 못하는 운없는 배에서 자신과 운명을 함께 하던 아이에 대한 아쉬움과 자랑스러움, 낛시와 함꼐 했던 전 인생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며 아이가 없다는 사실,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환기하며 아이의 부재를 깨닫는 것이다. 그는 눈밑이 찢어져 피가 흐르고 손가락에 쥐가 나서 오그라들어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손가락에게도 말을 걸고, 슬슬 힘이 빠져가는 죽어가는 물고기와도 말을 건넨다. '기분이 어떠냐 손아?' '아직은 알 수가 없냐? 조금만 참아, 널 위해서 이렇게 먹는거야' 자
그가 잡은 거대한 물고기는 적으로서 대적해야 할 상대지만, 게임의 상대처럼 노인은 그 물고기를 의인화하여 이야기를 이어가지만, 나중에 상어에게 조금씩 뜯겨나가게 되면서 그에게는 다시 친구 같은 존재가 된다.
'절반 남은 고기야' 그가 말했다. '너도 과거엔 온전한 물고기였지. 바다에 너무 멀리 나가서 미안하구나. 내가 우리 둘을 망쳤어. 하지만 너와 나는 많은 상어들을 죽이고 또 다른 상어들에게 부상을 입혔어. 물고기야. 너는 얼마나 죽였냐? 창 같은 부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지는 않았겠지... 그는 그 물고기를 생각했고 만약 저 물고기가 자유롭게 헤엄쳤다면 상어에게 어떻게 했을 지 상상했다.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간 노인은 잡은 물고기에게 끌려다니며 떠돌다가 잡은 물고기가 상어에 다 먹혀버릴 때까지 사투를 벌이다가 겨우 살아 오두막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찾아와 발견한 사람은 소년이다.소년은 매일 습관처럼 노인의 집을 들렀고, 노인이 몇일 만에 살아 숨쉬는 것을 확인하자 울기 시작한다. 노인을 위해 커피를 가지러 조용히 밖으로 나와 길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에도 계속 소년은 운다. 혼자서 바다로 나가는 노인을 향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와 안스러움이 작품의 초반에 살짝 비쳐지지만, 이렇게 사투끝에 살아돌아온 노인을 향한 애틋함이 애잔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가 쓴 <노인과 바다>는 둔 소설로 헤밍웨이가 낛시 동호회에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소설로 구상에서부터 집필까지 15년 걸렸다. 헤밍웨이가 밝힌 그 내용은 1936년 거대한 말린을 낚은 작은 조각배로 낛시하던 노인을 동료 어부들이 발견했는데, 그가 낚은 말린은 절반 이상이 뜯겨 나갔으나 남은 부분만으로도 8백파운드에 달했으며 사투끝에 잡은 고기는 상어 떼가 달려들어 살점을 뜯어간 것으로 그를 발견했을 때 노인은 배에서 살점이 뜯기는 것이 가슴아파 울고 있었다고 했다.
이 책에는 <노인과 바다> 외에도, 헤밍웨이의 대표적 단편 7편 정도가 더 실려 있다. <킬리만자로의 눈>,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고 행복한 생애>, <하얀 코끼리 같은 산>,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살인자들>, <세상의 빛>, <인디언 부락>이 그것이다. 그 중 밀리만자로의 눈과 노인과 바다가 가장 인상 깊었고, 역시 가장 많이 알려진 노인과 바다가 독보적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여기 실린 작품들은 헤밍웨이 스스로가 대표작이라고 밝힌 단편들과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소설들이라고 역자는 밝히고 있다. 기복이 심하여, 노인과 바다 이전에 쓴 두 개의 장편 소설은 평단과 독자들에게 철저하게 외면을 받았으나 <노인과 바다>로 여론을 뒤짚고 1953년 퓰리처상을 받았으나 다음 작품에 대한 부담감으로 극도의 우울증과 피해 망상에 시달리다가 결국 62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상을 떠돌며, 수많은 연인들을 사귀고,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면서 불꽃처럼 살아간 헤밍웨이. 그가 남긴 유명한 '빙산' 관련 일화는 이렇다.
헤밍웨이는 『오후의 죽음Death in the Afternoon』이라는 논픽션에서 상징에 관하여 이런 주목할 만한 언급을 했다. 〈만약 소설가가 자신이 쓰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아주 잘 알고 있다면 그는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생략해도 무방하다. 정말로 그가 글을 잘 써놓았다면, 독자는 마치 그것(소설가가 일부러 생략한 것)이 명백하게 진술되어 있는 것처럼, 그에 대하여 뚜렷한 느낌을 갖게 된다. 빙산의 움직임이 위엄을 획득하는 것은 8분의 1만이 수면 밖으로 나와 있고 나머지는 물속에 잠겨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기가 잘 모르는 것을 생략한 작가는 그의 글 속에 공허한 공백만 남겨 놓는다.〉 |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찌 <노인과 바다>를 건너 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노인의 시선을 외면해왔다. 그가 청새치를 잡든 말든, 상어에게 먹히든 말든.
도서 정가제 이후 신중하게 구간을 골라 5만원을 채우고 할인 쿠폰을 적용 받고 2,000원 추가 마일리지를 받을 수 없는 탓에 회사 근처 서점에서 한 권 한 권 야금 야금 책을 샀는데, 이게 은근한 맛이 있다. 쓱 훑어보다 괜찮은 책 한 권을 들고 첫 문장을 읽는다. 선택은 대개 여기서 판가름 난다. 그 때 <노인과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걸프 해류에서 조각배를 타고서 혼자 낚시하는 노인이었고, 고기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날이 이제 84일이었다. 고기를 못 잡은 처음 40일 동안에는 한 소년이 그와 함께 배를 탔다. 하지만 고기를 못 잡은 지 40일이 지나자 소년의 부모는 노인이 틀림없이 가장 불길한 살라오일 거라고 말했다(p.9).
<노인과 바다>는 이 가장 불길한 살라오가(재수 없는 자) 마침내 그 어떤 어부도 잡아 본 적 없는 거대한 청새치를 낚고 배에 실을 수도 없는 그 물고기를 끌고 오는 동안 상어떼의 습격을 받아 모조리 뺏기고 만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을 해석하는 틀은 노인을 고난 받는 예수 그리스도로, 고군분투 작품을 창조하는 소설가로, 산티아고 노인을 죽음의 신으로, 그에게 걸려든 청새치를 헤밍웨이 자신으로 보는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공감이 가는 건 역시 노인을 소설가로 해석하는 것이다. 노인이 소설가라면 청새치는 소설, 무자비하게 물고기를 뜯어 먹는 상어는 여지없이 비평가가 된다.
1950년 헤밍웨이는 십년 만에 <강 건너 숲속으로>라는 작품을 내놨지만 "이제 헤밍웨이는 끝났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혹독하고 끔찍한 비평에 시달려야했다. 그 후 2년을 절치부심한 끝에 탄생한 소설이 <노인과 바다>다. 그러니 어찌 저 해석을 지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헤밍웨이는 1954년 그러니까 이 소설을 출간한 2년 뒤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을 것이다. 돌팔매를 이겨내고 꿋꿋이 일어서 자신을 둘러싼 불한당, 고기를 스스로 잡지는 못하면서 남이 공들여 잡은 고기만을 탐욕스럽게 뜯어 먹는 비평가들을 하나 하나 노려보며 꽉 쥔 두 주먹을 치켜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산티아고 노인을 헤밍웨이 자신으로 해석하는 건 1961년까지만 유효하다. 이 남자는 그 해 엽총으로 자살한다.
헤밍웨이의 삶과 <노인과 바다>의 정수는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라는 문장으로 압축될 수 있다. 이 말은 인간은 실패할 수는 있지만 포기하지는 않는 거야 라는 진부한 진리를 해밍웨이 식으로 표현한 것일테다. 그렇다면 자살은 어디에 속하는 걸까? 헤밍웨이는 파괴된 걸까, 아니면 패배한 걸까?
그의 막내 아들 그레고리는 "아버지는 그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을 감행함으로써 자신의 용기를 보여주었다"라고 했고 역자는 이 해석에 동의한다고 했다(p. 302).
헤밍웨이는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한 불길한 살라오였고 마침내 거대한 청새치를 낚은 위대한 어부일 수는 있겠지만 상어떼에게 고기를 모조리 뺏긴 뒤에 또다시 바다로 나가는 산티아고 노인은 아니었다. 그는 대작을 써야 한다는 부담과 초조에 시달리다 엽총을 입에 넣고 방아쇠를 당겼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에겐 자살을 패배에서 파괴로 비약시킬 용기가 없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소설이 지루했다. 나에게 <노인과 바다>는 딱 거기,
그러니까 산티아고 노인이 84일째 고기를 잡지 못한 가장 불길한 살라오일때까지였다.
어릴 적 생칡을 먹어 보았는가.
반뼘정도의 길이로 통째로 톱으로 자른 다음 들고 다니면서 입으로 쭉쭉 찢어서 껌 씹듯이 씹는다. 물은 삼키고 건더기는 뱉어 버린다. 칡에는 참칡과 개칡이 있다. 참꽃과 개꽃이 있듯이. 씹어서 단물이 다 빠지면 끝인 칡이 개칡이다. 참칡은 씹으면 단물이 다 빠져도 끈임없이 가루가 나온다. 그래서 오래 씹을 수 있다. 참칡과 개칡은 육안으로는 구분할 수 없다. 처음부터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인지 성장과정의 문제인지는 알 수가 없다. 씹어봐야 안다.
문학도 그럴까? 한 번 읽으면 끝인 작품이 있고 읽어도 읽어도 또 읽는 작품이 문학의 참칡이 아닐까? 물론 문학은 객관적이기보다는 독자의 취향, 성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몇 번 읽었다. 전에 읽고 이번에 읽고. 어떻게 보면 지루할 수도 있고 또 어떻게 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야기의 전개와 구성이 단순해서. 분량이 짧고 배경은 광활해서. 언어는 정제되어 있지만 내용은 매우 쎄고 거칠다. 마초적이며 비릿하다. 그러면서도 주인공의 내면은 순하디 순하다. 그러면서도 싸운다. 멀린을 취하고 상어와 싸우고 바다와 싸우고 자신과 싸우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지만 내면은 소년이다. 꿈을 꾼다. 사자꿈, 칼리만자로의 정상으로 향하는 표범의 꿈...
의식의 입으로 마치 참칡을 씹듯이 질걸질겅 씹는데 단물만 빠지고 끝이 아니라 씹을수록 粉이 새어나와 입안이 넉넉해진다.
'희망을 버린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희망이 없다는 건 죄악이야. ...죄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마. ... 어쩌면 물고기를 죽이는 건 죄악일지 모르지 생계를 유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했더라도 그건 죄악일 수 있어. 그렇다면 모든 게 죄악이야. 죄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마.'
'...생계를 꾸리거나 살코기를 팔기 위해서만 고기를 죽이는 건 아니야. 네가 어부고 또 어부라는 자부심 때문에 고기를 죽이기도 해. 너는 저 고기가 살아 있을 때도 그를 사랑했고 그 이후에도 사랑했어. 네가 그를 사랑한다면, 그를 죽이는 건 죄악이 아니야. 아니, 더 큰 죄악이 되는건가?'
요즘 덕분에 세계문학들을 대면할 기회가 잦아지는것 같습니다. 학창시절 써머리형태의 팜플릿으로 접했던 명작들을 새삼 완독해 보니 알고 있는 내용과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는 느낌 강하게 받고요, 의무감으로 읽었던 기억들의 왜곡이 상당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네요. 이번에 접한 노벨상수상작가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역시 이 범주에 속하지 않나 싶네요. 정확한 기억속에는 없지만 어렴풋이 망망대해속을 가르는 돛단배와 배 고물쪽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청새치 그리고 세월의 세파를 달관한 표정의 노인.... 뭐 이런 장면을 어디선가 보았고 나중에야 그게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를 영화한 거란 사실을 알게되었을 정도로 헤밍웨이의 작품을 대면해 보지 못했지만 뇌리속에는 강한 像을 심어놓은것 같네요. 195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미국 정신(프론티어 스프리트) 을 대변하는 작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F.스콧 피츠제럴드, 윌리엄 포크너와 더불어 미국을 대표 하는 작가로 지금까지도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죠. 물론 세계적으로도 많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고 지금도 그의 작품들이 곳곳에서 읽혀지고 연극, 영화로 리메이커되듯이 세계문학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작가입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야 헤밍웨이의 원작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무릇 스포트라이트를 꾸준히 받는 작품을 접할때 가장 염려스러운 부분이 작가나 작품의 뒤에 걷어낼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후광의 빛을 좀처럼 걷어내지 못하고 작품을 보게 된다는 점 그래서 순수하게 작품의 사유를 느끼기가 만만치 않다는 점(기존의 유명 리뷰어들이나 작품의 해설등 엄청나게 쏟아낸 평을 무시할 수 는 없으니까요) 을 빼면 나름 작품의 바다속을 목적지 없이 항해하는 책읽기도 또 다른 감흥을 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몇자 끄적거려 봅니다.
<노인과 바다> 뭐 워낙 알려진 작품이지만 대부분의 독자들(물론 저를 포함해서요) 뇌리속에 남아있는 <노인과 바다> 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청새치를 배에 달고 귀향하는 극히 한정된 씬일 것입니다. 작품 전반을 통틀어서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고 상어떼들의 공격보다 더한 파토스를 남기고 있는 서사이기에 <노인과 바다> 하면 딱 그 장면이 고착화되어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솔직히 달리 떠오를 만한 테제가 없을 정도로 <노인과 바다> 는 저 개인에게는 굉장히 비쥬얼이 강한 작품속에 들기도 하고요. 왠만한 거장들의 명작품과 비교해봐도 이런점은 눈에 띌정도로 강하게 독자들 뇌리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영상으로 이 작품을 대하지 않더라도 독자들 머리속에는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장면이라는 말이죠. 인생에서 성공이라는 꼭지점에서 끝이없는 나락으로 일순 떨어지는 허망함과 더불어 모든것을 놓고 가야 한다는 당위성 사이에서 밀려드는 그런 느낌으로 말이죠.
사실 작품 전체적인 내러티브는 특별한 이슈가 보이지 않을 만큼 밋밋한 느낌을 주는것도 사실입니다(뭐 속된 말로 찰랑찰랑 파도 치는 바닷가에 발다금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노인과 소년 그리고 노인과 노인의, 노인과 고기라는 구조는 세대와 세대, 자신의 정체성과의 사투, 대자연과 인간이라는 또 다른 플롯을 상상케 하는 이중적 구조로 그리 난해하지도 않죠. 그리고 스토리를 전개상 두번의 클라이막스를 엿볼 수 있죠, 첫번째는 거대한 청새치와 사투에서 독자들은 손에 땀을 쥐면서 노인과 청새치의 전쟁의 결과를 주목하게 되고 노인의 승리로 막을 내린 1차 전쟁에서 희열을 공감하게 됩니다.(뭐 낚시광이라면 이 부분이 엄청난 느낌을 가져다 줄 정도로 헤밍웨이의 서사는 일품입니다) 그리고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바다는 그야말로 세상모든 것을 품을듯한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독자들 역시 노인과 더불어 편안하게 고른숨을 내쉬게 하지만 곧 이어지는 상어떼의 공격과 자신이 온힘을 다해 잡은 청새치를 지키는 2차 전쟁의 모습을 사뭇 다르게 전달됩니다. 헤라클레스같은 지혜와 힘으로 청새치를 굴복시켰던 노인은 온데간데 없고 무기력하게 상어떼에게 자신의 포획물을 헌납하는 순수한 노인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독자들의 심장의 박동 강도도 느려지고요 실상 내러티브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극적인 반전이지만 막상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강도는 한없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무기력함을 느끼게 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설정이 헤밍웨이의 사유가 집약된 부분일거란 생각이 들구요. 등장인물들과 화자의 설정에서 이중적 구조를 보여주듯이 이러한 반전을 통해서 헤밍웨이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사슬구도를 암시하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합니다. 이는 소년과 노인과의 대화 노인과 노인(고기가 현현한 노인으로 봐도 무방하겠죠) 의 대화는 육지와 바다라는 구도와 일맥상통하기도 하죠. 뭐 평론적으로 파고들면 끝도 한도 없이 복잡한 구조를 말해야겠지만 겉으로 들어난 구조상으로도만 보더라도 많은 부분을 대변하고 있는 설정들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들어가면 사실상 재미없는 논쟁만 남을테니까요.
제목 자체로만 보면 독자들 머리속에는 쪽빛 같은 적도의 바다와 강렬한 태양에 반사된 눈부신 수평선 그리고 세상을 다품을 듯한 노을빛등 서정적인 묘사가 먼저 떠오르지만 내러티브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서정적인 서사와는 무관한 사실주의적 서사들을 대면하게 됩니다(아마 이부분이 작품해설과는 상반되는 부분일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낚시 장면, 생선을 해부(해체)하는 장면, 청새치와 사투하는 장면등...에서 서정적인 서사는 찾기 힘들어지고 그저 무덤덤하게 사실적인 면을 강조하죠. 뭐 작품 해설자는 하드보일드 기법이라고 하지만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헤밍웨이는 이런 사실주의적인 서사속에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증폭시킨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죠. 노인과의 감정이입을 통해서 마치 바다위에서 실재로 청새치와 사투중에 느끼는 손맛이랄까요. 뭐 그런 상상의 나래속에 우리 독자들도 무임승차한다는 기분으로 슬쩍 다리하나를 걸치면서 나름이 감정을 흡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낚시중 노인이 내뱉는 코믹한 멘트나 바다 낚시의 생생한 묘사는 마치 살아있는 고기를 낚은 현장에서 리얼타임으로 생중계를 하는듯한 서사가 일품입니다. 만세기를 낚시로 잡는 장면과 해체하는 장면은 정말 실감나죠. 마치 생선의 비릿한 냄새마저 느껴지게 하면서(예전에 읽었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사냥장면에서 화약냄새을 느낄 수 있었던 만큼이나 생생합니다) 생선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솔직히 입안 가득 군침마저 돌게 하구요. 마치 자갈치 시장에서 생선을 정리해주는 아주머니의 손길을 눈앞에서 처다보는 느낌마저 자아내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노인에 대한 애잔한 감정들 그리고 고기와 사투에서 느껴지는 비장함등 왠지 모를 일체감일까 뭐 그런 느낌들을 자아내게 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 를 통해서 사실적인 서사와 더불어 감정적인 서사가 절묘하게 내러티브 전반에 깔려 있기에 스웨덴 한림원에서 대표적인 작품으로 노벨상을 수여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정로 문학적인 격이 높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단편들을 제각각 읽고 감상을 쓴 거라 중구난방.. ㅠ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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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은 일은 오래가지 못하는 구나,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차라리 이게 꿈이었더라면. 저 고기를 낚지 않고 차라리 신문지를 깐 침대 위에 그냥 누워 있었더라면.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
- 노인과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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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망가진 사람들을 그동안 죽 경멸해 왔다. 그걸 잘 이해하기 때문에 그걸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어떤 것도 물리칠 수 있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내가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나를 해치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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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함께 있고 싶은 사람들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아니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너무 오래 하거나 너무 늦게 하면, 옆에 사람들이 있어 주리라고 기대하면 안 돼. 사람들은 모두 가버렸어. 파티는 끝났고, 너는 안주인과 함께 남아있는거야.
- 킬리만자로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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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작품은 노인과 바다가 전부였는데, 오랜만에 읽어서 그런가 옛날 만큼의 감동은 없었다.
노인과 바다 보다는 ‘킬리만자로의 눈’이 조금 더 내 취향. 내가 헤밍웨이 취향이었구나,, 느낌.
특히 킬리만자로의 눈은 진짜 좋았다. 허밍웨이의 자서전 같은 느낌.
노인과 바다에서 인간은 파괴 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고 했는데,
킬리만자로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주인공 해리가 나온다. 헤밍웨이 스스로 패배가 아닌 스스로를 파괴한 사람이었으니 조금 더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었을 작품이라고 생각되었다.
헤밍웨이의 문학사조를 사실주의라고 해야 하나,
20세기 그 시대의 한계이면서도, 마초적인 성격의 헤밍웨이 자체의 한계일수도 있겠지만 군데 군데 보이는 여성에 대한 묘사가 거슬리기는 했다. 그렇다 해도 작품 전체에 대한 평가가 바뀌지는 않았지만,, 여성은 창녀 아니면 성녀만 등장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생각나기도 하고.
2.
가장 흥미로운 작품은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고 행복한 생애”
사자 앞에서는 두려워하여 도망치지만, 상대적으로 몸집이 크기 때문에 속도가 느린 물소 앞에서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주인공이 웃겼다. 그리고 그가 물소 앞에서 용기 내 설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안에서 나오는 힘이 아니라 현대 문명인 지프 자동차로 인해서 물소의 속도를 뛰어 넘어서 총을 쏘아 넘어뜨릴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도.
그의 짧은 인생이 물소도, 사자도 아닌 다른 것에 의해서 끝나게 되는 것 마저도 아이러니했음.
3.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은 이전에 읽었던 것 같은 기억이 있는데,, 기시감이 느껴지는 작품 이었다.
노인이 자살을 하려고 한 이유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깊은 절망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아무것도 아닌 이유는 그가 돈이 많기 때문라는, 허무하고도 허무한 이야기. 허무 그리고 허무 그리고 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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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 = 허무
나다에 계신 우리의 나다. 그대의 이름은 나다. 그대의 왕국이 오시고, 세상 모두가 나다이오니 그대의 뜻이 나다 속에서 나다가 되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나다를 주시고, 우리가 우리의 나다를 나다하오니 우리의 나다를 나다해 주소서. 우리를 나다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우리를 나다에서 구해 주소서. 아멘 나다, 나다에 가득 한 나다를 찬미하라. 나다가 그대와 함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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