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우리는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단계를 통과했다. 그 순수한 물음은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창조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어떤 목표를 성취하는 것으로 삶을 이해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삶과 고통, 고통받는 것과 죽어가는 것까지 폭넓게 감싸 안는 포괄적인 것이었다.” - 본문 p.125~126
인간이 죽음을 향한 열망을 드러내는 경우는 보통 삶의 의미를 상실했을 때이다. 삶의 권태만으로는 부족하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간에 유한한 인생 속에서 저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일상생활을 영위해 간다. 하지만 야스퍼스가 명명한 한계상황, 즉 전쟁, 질병, 재해 등 예고 없이 급작스럽게 찾아오는 피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면 자신이 지닌 ‘삶의 의미’라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게 된다. 자신의 의지로는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는 삶 자체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마저 포기할 수 있다. 그 어떤 극단적인 처지에서도 놓치지 않을 ‘삶의 의미’라는 게 과연 있을까? 있다면 찾을 수 있을까? 찾는다면 가질 수 있을까? 나와 비슷한 의문을 가진 이들에게 그 구체적인 사례가 여기 있다며 당당하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을 드디어 만났다. 바로 이 책이다.
신경의학자이자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은 2차 세계 대전 중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로서 지옥 같은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이 책의 1부에 생생하게 기록했다. 다수의 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와 비슷한 경험이 전무한 나로서는 상상력이 조금 요구되었지만 그나마 여건이 유사한 20여 년 전 군대 복무 - 저자의 고통에 비하면 아마 1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 시절을 떠올리며 저자가 처한 입장과 시련을 최대한 저자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인간이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서 솟아나는 상실감, 좌절, 충격, 냉담, 혐오감, 모멸감, 무감각 등 온갖 부정적인 정서의 집합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위대함의 한 측면을 드러내는 수용소 안에서의 예술과 유머, 상대적인 행복, 세상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구원을 향한 희망에 이르기까지 삶과 죽음의 간격만큼이나 벌어진 극단을 간접적으로 맛볼 수 있었다. 한편으로 즉각적인 기록이 불가한 강제 수용소에서 경험 자체를 넘어선 감정과 사색까지 기억해 내고, 이를 타인을 위한 교훈으로 남기고 학문적 발전에 기여한 저자의 초월적인 인내에 경이로운 존경심을 느꼈다.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크고 작은 고통들은 사람마다 상대적이겠지만, 저자의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만큼 극도의 한계에 미치는 경험을 해본 이가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이들 중에서 과연 몇이나 될까
이전의 인생 전부를 박탈당하고 벌거벗은 실존 외에는 남은 것이 전혀 없는 비참함 속에서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가?’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변한 저자는 삶에 대한 의지와 인간성을 잃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모든 육체적 자유를 박탈당했어도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 즉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진리를 증언했다. 나아가 자신의 고통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정신치료 요법으로 ‘로고테라피’를 창시했다. 그렇게 그의 시련은 시련으로 끝나지 않고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심리학적, 의학적으로 난해할 수 있는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을 이 책의 2부에서 다루고 있는데, 많은 현대인들이 겪는 좌절, 노이로제, 우울증, 공허, 신경증, 자살 유혹 등의 치료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로고테라피의 핵심 단어를 여기 독후감에 몇 소개하자면 미래, 존재의 의미, 인간 의지, 이상과 사명, 그리고 책임감과 잠재력이다. 이를 삶에 적용함에 있어 명심하거나 유의해야 할 점을 진술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인격 수준과 지적 탁월함에 또다시 감탄하게 된다.
명문이 너무 많아서 거칠게 요약하는 것조차 어려우니 우연으로라도 이 책을 만난 독자가 주변에 있다면 자기 삶의 의미와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을 주제로 깊은 대화를 나눠볼 것을 권한다. 그 이유로는 첫째, 우리는 (어쩌면 앞으로 경험할지도 모를 다양한 형태의) 죽음의 수용소에 아직 가본 적이 없으며, 둘째,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언제든 경험할 수 있는 절망스런 상황과 피할 수 없는 운명과 제한된 조건 안에서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될 것인가 하는 결정에 대한 통찰과 교훈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을 리 없기 때문이다.
2년 전에 수감자들의 생활이 여실히 담긴 소설책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읽었기 때문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책을 펼쳤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담담한 어조로 차분하게 강제 수용소의 생활을 전하는 저자의 문체에 적지 않게 놀랐다. 현장에 있던 그의 목소리에는 분명 깊은 슬픔과 뜨거운 분노가 담겨 있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저자의 통찰과 혜안이 묻어나는, 보고서 형식의 깔끔한 문장들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저자의 관점과 가치관이 녹아있는 문장들, 인용된 문구들에서 그의 겸손하고 따뜻한 ―인간적인 매력도 느낄 수 있어서 되도록 천천히 읽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독자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만약 강제 수용소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이것이 입증된다면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겪은 일을 기록해 놓을 책임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1984년판에 부친 서문
<제1부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제2부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제3부 비극 속에서의 낙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2부는 저자가 주장하는 정신 치료법(로고테라피) 이론을 보다 충분히, 보다 직접적인 설명을 곁들여 얘기해 달라는 독자들의 요청을 받고, 모두 20권에 이르는 독일어판에 들어있는 방대한 자료들을 저자가 작은 분량의 지면에 압축해서 정리한 것이다. 3부는 1983년 6월, 서독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 열린 제3회 로고테라피 세계 대회에서 저자가 발표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것으로, <2부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과 겹치는 내용이 많다.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가슴 찡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삶에 의미를 찾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기로 다짐하게 된다. 삶의 의미를 잃었는가? 이 책을 만나면, 달라진 자신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제1부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이 책은 저자가 강제 수용소에서의 일상이 평범한 수감자들의 마음에 어떻게 반영됐을까 하는 질문에 답하려고 쓴 것이다.
수많은 수감자가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것을 기록해 놓은 방대한 자료를 조사해 보면, 수용소 생활에 대한 수감자의 심리 반응이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수용소에 들어온 직후이며, 두 번째 단계는 틀에 박힌 수용소 일과에 적응했을 무렵, 세 번째 단계는 석방돼 자유를 얻은 후이다.
첫 번째 단계의 특징적인 징후는 충격이다.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은 첫 번째 단계에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인간이 더는 어느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정서와 감정의 둔화를 의미하는 무감각은 수용자들이 보이는 정서적 반응의 두 번째 단계에서 나타나는 징후이다. 수감자들은 마침내 매일같이 반복되는 구타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진다. 이런 무감각을 수단으로 삼아 사람들은 곧 주위에 꼭 필요한 보호막을 쌓기에 이른다.
무감각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이 불확실하면 오로지 한 가지 과제에 모든 노력과 감정이 모아진다. 즉 내 생명과 친구의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과제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원시적인 생활을 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는 일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 수감자들의 정서가 완전히 메마르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수용소에서는 즉석에서 카바레 비슷한 것이 만들어질 때가 종종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시를 낭송하고, 촌극을 하는데 그중에는 수용소 현실을 풍자한 것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은 현실을 잊게 하려고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실제로 현실을 잊는 데 도움이 됐다.
강제 수용소에는 이러한 예술뿐만 아니라 유머도 있었다. 비록 그 흔적이 아주 희미하고 몇 초 혹은 몇 분 동안만 지속되지만,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수용소 체험으로 저자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즉 무감각 증세를 극복하고 불안감을 제압한 경우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인 독립과 영적인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
수용소에서 수감자가 입은 정신 병리적 상처를 정신 요법이나 정신 위생학적 방법을 이용해 치료하려면, 그가 기대할 수 있는 미래의 목표를 정해 줌으로써 내면의 힘을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수감자 중에 몇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스스로 그런 목표를 찾아내기도 한다.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기대를 갖기 위해 때때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음에도, 인간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수감자를 치료할 기회가 있을 때, 그들이 처한 끔찍한 현실을 어떻게든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려면 그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 즉 목표를 얘기해 주어야 한다. 모든 충고와 격려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하는 전형적인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내 인생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요.”
이런 사람에게 어떤 대답을 해 주어야 할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 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의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각각의 개인을 구별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독자성과 유일성은 인간에 대한 사랑처럼 창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수감자들이 보인 심리적 반응의 세 번째 단계, 즉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에 대해 설명할 차례가 됐다. 자유. 지난 몇 년간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면서 얼마나 자주 이 단어를 입에 올렸는지 이제는 그것이 의미를 잃고 말았다. 현실이 우리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자유가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다. 우리는 글자 그대로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앞으로 천천히 그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며칠 동안 견뎌야 했던 극도의 정신적 긴장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이 아무런 장애 없이 순탄했던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깊은 물 속에서 일하던 잠수부가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올 때 가장 위험한 것처럼, 엄청난 정신적 억압을 받다가 갑자기 풀려난 사람은 도덕적, 정신적 건강에 손상을 입을 위험이 크다.
이들에게 정신적으로 용기를 주려면 그가 미래에 기대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보여주어야 한다. 저자는 삶이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고, ’사람‘이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 세상에서 신(神) 이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다.
<제2부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로고테라피는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말하자면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이다. 동시에 로고테라피는 정신 질환을 일으키는 데 아주 커다란 역할을 하는 악순환의 고리와 피드백 기제(feedback mechanism)를 약화시킨다. 그렇게 해서 정신 질환 환자에게 전형적인 자기 집중 증상이 발생하고 심화되는 것을 막는다.
로고테라피에서는 환자가 삶의 의미와 직접 대면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이렇게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깨우치게 도와주는 것이 정신병을 극복할 수 있도록 환자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
로고스(Logos)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로고테라피 혹은 다른 학자들이 ’빈 제3정신 의학파‘로 부르는 이 이론은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 나가는 인간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로고테라피 이론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본다.
인간이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그 사람의 삶에서 근본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이지 본능적인 욕구를 2차적으로 합리화시키려고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 의미는 유일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반드시 그 사람이 실현시켜야 하고, 또 그 사람만이 실현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 자신의 의지를 충족시킨다는 의의를 갖게 된다.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는 사회 과학자들이 48개 대학 7948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통계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이 예비 보고서는 국립정신건강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2년 동안 진행된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작성된 것이다. 설문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학생 16퍼센트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대답한 반면, 78퍼센트는 첫 번째 목표가 ‘자기 삶의 목표와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 의지도 좌절당할 수 있다. 이것을 로고테라피에서는 ‘실존적 좌절’이라고 한다. 실존적 좌절 역시 정신 질환을 초래할 수 있다. 정신 의학에서는 그동안 심인성 노이로제(psychogenic neurosis)라고 했지만, 로고테라피에서는 이것을 누제닉 노이로제(noogenic neurosis. 그리스어로 noos는 ‘마음’을 뜻한다.)라고 부른다. 누제닉 노이로제는 병의 원인을 심리적인 것에 두지 않고 인간 실존의 정신론적 차원에 둔다.
누제닉 노이로제는 욕구와 본능의 갈등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인 문제 때문에 생긴다. 그 원인 중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이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 의지로 선택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긴장이 없는 상태)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돼야 할 의미가, 다른 극에는 의미를 실현시킬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낡은 아치를 튼튼하게 할 때, 건축가는 오히려 아치에 얹히는 하중을 늘린다. 그래야만 아치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이 서로 잘 밀착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환자의 정신 건강을 증진시키려는 심리 요법가는 삶의 의미를 갖도록 지도하는 과정에서 환자 마음에 어느 정도 긴장을 유도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삶에서 마주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한다.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짐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본다.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잠재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사람의 의미는 인간 내면이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란 끊임없이 변하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이 일회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삶의 일회성이 우리 책임 아래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일회적인 잠재 가능성을 우리가 어떻게 실현시키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을 무위로 돌리고, 어떤 것을 실현시킬까
로고테라피에서 활용되는 ‘역설 의도(paradoxical intention)’ 기법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것이다. 즉 마음속 두려움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일을 생기게 하고, 지나친 주의 집중이 오히려 원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신경 질환은 그것이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상관없이 예기 불안과 피드백 기제가 근본적인 발병 원인인 것 같다. 어떤 증세가 공포를 낳고, 그 공포가 다시 증세를 유발하고, 이번에는 반대로 그 증세가 공포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다.
예기 불안은 역설 의도로 좌절시켜야 하고, 과잉 의도와 과잉 투사는 역투사의 방식으로 좌절시켜야 한다. 하지만 역투사는 환자가 자신의 삶에 주어진 특정한 과업과 사명을 바라보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다. 자기 연민이든 멸시든 간에 환자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치료의 핵심은 환자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데 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네‘라고 대답하는 것’, 이 말은 독일어로 쓴 저자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
‘인생의 4분의 1을 종합 병원 신경 정신과에서 근무’했으며, ‘수용소 네 곳을 전전하면서도 끝까지 삶의 품위를 잃지 않고 성자처럼 버티어 나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하게 생환해 온 산증인’인 저자가 들려주는, 다음의 이야기는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하는지, 어떠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준다.
인간 존재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에게는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가능하다면 세계를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
‘문학적인 가치는 물론, 철학적인 가치까지 지닌 이 책은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정신 의학의 동향을 알 수 있는 유익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는 고든 W. 올포트(하버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를 역임.)의 추천의 글에 깊이 공감하면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추천한다.
-
고급스러워 보이는 금색과 검은색 디자인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를 더욱 무게감있게 전하는 듯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던 책이었지만 부끄럽게도 읽어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책이었다. 내용도, 책 제목도 그 당시 어린아이였던 내 입장에서는 너무나 재미없어 보이는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릴 땐 그저 재미있는 소설책에만 관심이 많았던, 그야말로 책 편식이 심했던 시절이었다. 뭐, 요즘도 아니라고는 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좋은 기회로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저자인 빅터 프랭클이 수용소에서의 생활과 경험을 토대로 창시한 '로고테라피'라는 정신분석 요법에 관한 책이다. 1장은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2장은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3장은 비관 속에서의 낙관.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제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학교 수업 시간, 각종 매체들에서 접했던 내용 그대로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자유가 억압된 그 참혹함 속에서도 인간의 마지막 자유는 존재했다. 인간의 마지막 자유란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이다.
악마와도 같은 수용소 안의 감시자와 카포에게 굴복하여 짐승처럼 살아갈 것인지,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성자'와 같은 삶을 살 것인지. 이것은 개인의 선택이며, '자유' 의지이다.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모든 환경에 적응할 수 있지만, 환경으로 인해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그것은 개인이 선택하고 규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운명이 자기 대신 결정해 주기를 원한다. 나도 그 보통 사람들에 포함된 평범한 사람이다. 피할 수 없는 시련 속에서 낙관을 찾기보다 운명이 나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내 팔자를 탓했다. 운명에 나의 마지막 자유를 맡긴 것이다. 그러면서 자유를 빼앗겼다 울부짖었다.
성인이 된 이후 나는 자기계발 서적과 에세이 등을 탐닉했다. 자기개발 서적을 읽었던 가장 큰 이유는 화려한 스펙과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찾아오는 허무함과 허탈함은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싶은 의문을 남겼고, 자연스레 다른 사람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지 궁금해져 에세이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순 없었다. 타인의 삶을 바라보며 많은 공감과 교훈은 얻었지만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도무지 발버둥 쳐도 해결되지 않는 답답함과 미래에 대한 희망은 꺼져갔고 우울증이 찾아왔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극단적인 생각까지(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하게 되었기에 스스로 심각한 상태라고 느꼈다.
일적으로 바쁜 탓도 있었지만 '정신병원'이라는 단어가 주는 두려움이 전문적인 치료를 받지 못한 원인 중 하나였다. 하루하루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것에 지쳐있었고, 당시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하기 싫은 일을 기약도 없이 억지로 맡아서 해야만 했기에 우울증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우울증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행동에서부터 서서히 치유되어 갔다. 그것은 바로 '그림'이었다. 어느날, 예쁜 그림을 보고 아무 생각없이 따라 그렸던 적이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잘 그려져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내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인터넷이었다. 당시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나누는 카페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내가 그린 그림을 조심스레 업로드했다.
결과는 무척 따뜻했다. 빈말일지라도 잘그렸다는 칭찬과 나를 인정해주는 말들이 큰 위로가 되었다. 그 뒤로 나는 의욕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며 살아갈 거야'
어릴 적 막연하게 생각했던 나의 작은 목표. 잊고 있던 '꿈'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살아가야 할 이유'가 생겨났다. 솔직히 '왜' 살아가야 하는지는 아직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된 것만 해도 전과 달리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마음을 울리는 구절들을 하나 둘 적다 보니 어느새 하얗게 비어있던 공책을 빼곡히 채웠다.
책을 읽고 난 후 돌이켜 생각해보니 '피할 수 없는 시련' 속에서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수많은 운명이 존재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처한 좋지 않은 환경 때문에 이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운명을 탓했는데 사실 스스로 운명에게 내 삶의 주도권을 넘겨준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또한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을 부른다'라는 책 속의 구절처럼 나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아 극단적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기약 없이 억지로 짊어진 일을 해야 했던 그 시절,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당장 눈앞에 놓인 일들을 해치우는데 여념이 없었고 내가 꿈꾸는 미래는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자는 목표가 생기자 하루 종일 일하기 싫다는 생각만 했던 지난날과는 달리 퇴근 후 그림을 그릴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비록 아직도 원치 않은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나는 변화하고 있다.
p109.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p168. 상황을 더 이상 바꿀 수 없을 때 우리는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내가 자기개발 서적에 열중했던 또 다른 이유는 '타인과의 비교'에서 비롯되었다. SNS 속 화려하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현실에선 그것들은 실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간극을 메꾸기 위해 나는 다른 부분에서라도 자신을 '포장'해야 했다.
행복하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처럼 보였고, 내세울 것 없는 초라한 내 모습은 남들 앞에서 당당할 수 없는 '결점' 그 자체였다. 이와 같은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지금도 여전히 남들이 하는 것을 쫓게 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p170.
오늘날 정신 건강 철학은 인간은 반드시 행복해야 하며, 불행은 부적응의 징후라는 생각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가치 체계가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점점 더 불행해지면서 피할 수 없는 불행의 짐이 더욱 자우되는 상황을 만들어 온 것이다.
시련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불행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불행하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시련에 수치심보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그것을 품위 있는 것으로 여길 수 있는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고 있다.'
나는 '불행하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불행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되어 행복하지 않아도 행복해 보이게 포장한다. 그러다보면 허무주의에 빠지기 쉬워지는 것 같다. 거짓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행복하지 않은 나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인가.
그럼 삶의 의미란 무엇이며,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삶의 의미를 찾는 세 가지 방법이 등장한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꼭 시련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피할 수 있는 시련은 피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를 학대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불행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시련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고통의 실체를 알게 되면 시련은 시련이기를 멈춘다.
나는 아직 내게 주어진 시련이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림을 그리며, 창작활동을 하면서 삶의 의미를 조금씩 명확하게 규정해 가고 있지만 내가 겪고 있는 시련에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하지만 나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나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고, 앞으로 시련이 주는 삶의 의미와 시련에 대한 태도를 찾아나갈 것이다.
--
글을 마치며 <죽음의 수용소에서> 본문 내용 중 기억에 남는 일화를 소개하려 한다. 발진 티푸스로 죽음을 앞에 둔 여인이 빅터 프랭클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게 뇌리에 박혔다. 여인은 프랭클에게 나무가 자신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프랭클은 여인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생각하고 안타까워하며 여인에게 물었다. 나무가 어떤 대답을 하느냐고.
여인이 말했다.
"나무가 이렇게 대답해요. 내가 여기 있단다. 내가 여기 있단다. 나는 생명이야. 영원한 생명이야."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플랭클은 정신의학과 의사였는데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세계2차대전에 아우슈비츠에 끌려가서 살아남는다. 그때 겪은 수용생활을 담담하게 회상하면서 쓴 책이 이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서술한다는 점에서 아니 에르노의 화법과 정말 비슷했다! 그래서 그런지 더 와닿는 내용도 많았고.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는 공간, 30명이 들어갈 공간에 100여명이 들어가 생활을 하고, 매일 빵 1개로 목숨을 연명하고, 매일같이 추위와 싸우면서 맨발로 흙을 파고 일을 해야했던 수용소 삶에서 인간으로 존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경험을 회상하면서, 가혹한 환경에서 인간이 내면의 자유를 유지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답을 내려본다.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는 동물이라고 한다. 내 주변이 풍요로울 때는 마음도 여유롭지만, 내가 척박한 환경에 놓여 있을 때는 상대적으로 마음이 여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잠도 잘 수 없고, 음식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생활을 몇년이나 지속하는 환경 속에서 인간에게 정신적 자유란 존재할까? 환경에 의해서 내 정신도 조종되지 않을까.
그런데 빅터 프랭클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기 행동과 정신에 자신 스스로가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드물지만 자신의 빵을 나눠주거나,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스스로의 내면을 지켜나간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육체가 아무리 힘들어도 내 내면의 영혼만은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 존재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나는 수용소에서 이 말을 자주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시련과 죽음은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를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은 빼앗기지 않은 영혼의 자유이다
빅터 프랭클이 말하는 공'空'과 선'?'
인간이 시련을 겪는 이유와 시련을 극복하는 방법
빅터 프랭클이 놓였던 상황은 불완전함의 극치였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도 살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언제까지 이런 삶이 지속되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기에 약속되지 않은 미래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그럼에도 내면의 선이라고 해야할까, 양심이라고 해야할까, 이 개념은 "?"보다는 "善"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세상이 불완전함에도 누군가가 만들어 놓는 이미지, 이런 잔혹한 세상에서는 누군가를 밟아야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전쟁 논리, 그런 이미지에 속지 않고 내 진정한 모습, 내 자아를 간직하려고 노력한다는 면에서 공'空'과 선'?'의 개념과 같다고 생각했다.
빅터 프랭클은 이런 상황에서 제 정신을 유지했던 사람들은 모두 내 내면의 모습에 집중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주변 환경이든, 타인의 말이든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기력이 쇠해지고 인간으로 점점 멀어져 가지만, 아주 작게 남은 최소한의 의지로 최소한의 인간다움, 내 안에 남아있던 나의 모습을 유지하려고 했다고 적는다. 불완전함 속에서 조금이나마 나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고통에 대한 이야기, 우리가 겪었던 이 세상의 불완전함과 시련을 무엇이었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말을 남긴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 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수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실제 삶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렇게 지고한 도덕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수감자 중에 서 아주 적은 사람만이 충만한 내면의 자유를 지키고, 시련을 견딤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얻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과제들, 즉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상황은 그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갖는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비롯된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단 하나만 있는 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 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 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그래서 내가 정리한 것은, 이 세상은 불완전해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시련이 찾아오지만 그럼에도 이 시련은 분명 유리에게 의미가 있다. 이것을 과제로 받아들이기는 무척 힘이 들지만 그럼에도 고통을 짊어지고 나만의 방식으로 이겨내보겠다고 다짐한다면 진정한 내 자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이 책이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불완전함의 완전함, 현실과 이상, 공'空'과 선'?"의 개념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 존재가 유일무이한 한,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자신의 숙명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존재란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을 찾아 계속 걸어가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너무 좋다고 추천들을 많이 해주셔서 구매하게 되었다.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하는 책! 인간의 삶은 생각보다 너무 짧다. 이 유한한 시간 속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최근 나의 삶에 대해 그리고 나에 대해 탐구를 많이 하는 중이다. 책을 읽으면서 뭉클한 순간도 많았고 많은 사유를 하게 되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진중하게 성찰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삶은 딱 한번뿐이라 매 순간을 더욱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그 삶은 개인마다 각자 다른 자신들만의 삶의 의미를 바라보며 산다.
과거에 내가 해온 경험들은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 내가 만나는 모든 경험은 성취만큼 가치있다. 특히 누군가를 사랑하는 경험은 인간의 가장 깊은곳까지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므로 특별하다.
현재의 나는 지금 내게 주어진,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나만의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해내다 보면 삶의 의미가 생길 수 있다. 삶의 의미를 찾을때 힘들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긴장은 인생에 꼭 필요한것이므로 두려워할 필요없다. 인간은 평온함을 느끼기위해 사는것이 아닌, 삶의 의미와 목표를 위해 사는 존재다.
아무리 힘든일이 생길지라도, 고난을 직관적으로 바라보고 거기서 어떻게 가치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그 순간이 가치있어지고 삶의 의미가 생긴다.
예전에 유튜브에서 빅터 프랭클이 토크쇼에 나와서 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토크쇼에서 빅터 프랭클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열악한 환경에 놓인 아우슈비츠 수감자들 중에서는 자살하려고 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복지국가인 오스트리아에서는 많은 젊은이들이 자살을 하며 거기에서는 심지어 10대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사회 현상의 원인을 무분별한 소비와 향락주의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고 진단했습니다.
그의 주장처럼 이 책에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극한 환경에서 누구는 살아남고 누구는 죽었는지에 대해 관찰하고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의 소견으로 이 책에서 빅터 프랭클이 내린 결론은 사람이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희망'과 '목적'이 분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희망'에 관해서 빅터 프랭클은 수감자와 관련된 이야기 하나를 합니다. 그 수감자는 음악가로서, 자신이 꿈속에서 해방되는 날짜를 계시 받았다고 믿고 있었으며 프랭클에게 그 날짜를 얘기하면서 조금만 참으면 우리 모두 이 수용소에서 풀려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음악가가 예언한 날짜가 지나도 수용소에서 풀려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음악가는 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프랭클은 이 음악가의 사망 원인을 희망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목적'에 관해서는 빅터 프랭클 자신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프랭클은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논문을 써야겠다는 목적을 세웁니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종이를 열심히 찾고, 수감자들을 관찰하고 그들과 대화를 하면서 수용소 생활을 버텨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이 프랭클이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발생한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힘과 인내를 제공했다고 말합니다.
요즘과 같은 시대는 클릭 몇 번이면 타인의 사생활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이버 세계에서 보는 타인의 생활은 자신과 비교해볼때 너무나 화려하고 닿을 수 없는 존재처럼 보이고 합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게되면 자신이 타인에 비해 뒤쳐져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아무 생각없이 타인을 발자취를 쫓아가는 경향이 생기는거 같습니다. 그 결과 우리 삶 자체가 공허해지고, 물질적으로 가득 채워도 마음 속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만약 자신이 이러한 느낌이 든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정말 자신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 반추해보면서 삶의 목적을 다시 설정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과거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운 요즘 시대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살자는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아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용소에 관한 책은 소설로만 접해봐서 이렇게 인문학을 읽는 건 처음인데 이 책이 나에게는 조금 더 현실적으로 절망적인 부분들이 가깝게 와닿았다.
테헤란에서의 죽음처럼 수용소에서 한순간의 선택만으로 운명처럼 목숨이 좌우되는 상황과 고통스러워하는 눈앞의 사람보다 굶주림으로 인해 자신의 빵에만 정신 팔려 있는 부분을 보고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 힘들 정도로 극한의 상황에 놓여 있는 화자가 삶의 이유를 말하며 포기하지 않고 극복하고 삶을 살아가는 방향에 대해 말하는 건 동료들에게 말한 것과 다르게 독자들에게 대단한 정신력을 심어준다.
다른 사람은 아닐지라도 일단 나에게는 도움이 된 책이었다.
삶에 대한 의미. 이 말에 이끌려 이 책을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TV에서 추천을 받아 깊은 고민 없이 구매를 했어요. 알고 싶었습니다. 삶에 대한 의미라는 게. 요즘들어 계속 인생을 끝까지 살아내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거든요. 왜 끝까지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해야 되나... 그래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계속 읽어볼 생각입니다. 두고두고.
책을 읽고 원서까지 찾아서 읽어본 몇 안되는 책이네요. 오래 전에 읽고 이사가면서 책을 버렸다가 최근에 유튜버 독거노총각이라는 분 영상을 보면서 이 책이 떠올라 다시 구매해 읽었습니다. 이 유튜버는 주변에 자살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니 자살을 선택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최근에 본 다른 책 루비 페인의 <계층이동의 사다리>도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 부지불식간에 낮은 계층의 불문율을 지키며 살게 되구요. 그러다보니 가난과 낮은 신분이 대물림됩니다. 이런 상태를 벗어나기위해서는 어떤 동기부여와 교육이 필요하구요. 동기부여의 종류로는 '목표나 비전', '너무 고통스러운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 '후원자나 롤모델의 등장', '걸출한 재능의 발견'을 말합니다.
이 책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저자의 절망적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삶을 기록했구요. 절망 속에서도 누군가는 의미와 희망을 가지고 현재 상황을 인내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절망 속에서 자살을 선택합니다.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정신적 에너지를 '삶의 의미'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는 로고테라피는 수용소에서의 경험에서 탄생했습니다.
인생은 업사이드와 다운사이드가 공존합니다. 항상 행복할 수는 없고 대부분의 시간이 어쩌면 고통스러울수도 있습니다. 다운사이드에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삶의 의미와 미래에 대한 희망'임을 저자의 수기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깊은 고민 없이 집어들었다가, 결코 길지는 않은 이 책을 참 힘들게 읽었습니다. 이 책 속에 담긴 '사람'의, 혹은 '사람들'의 삶이 그렇게나 힘겨웠기 때문이겠지요. 아우슈비츠 혹은 제 2차 세계대전 안에서의 홀로코스트는 결코 낯선 사건이 아닌데도(이 사건의 존재 자체를 모르기는 힘들 테니까요) 늘 그러하듯이, '그런 사건이 있었더라'고 듣는 것과 그 사건 한복판에서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정말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수용소에 들어가서, 작업실행과 수용소행으로 나뉘고, 몸 하나만 남아서, 번호로만 취급되며, 그저 살아가는 것. 그리고 한순간의 결정으로 갈라진 죽음과 삶 사이. 테헤란의 죽음 이야기.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Sub specie aeternitatis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기대를 갖기 위해 때때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음에도, 인간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로고테라피에 의한 삶의 의미 찾는 법 세 가지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죽음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혹은 그렇기 때문에, 삶을 생각하게 하는 책입니다. 한번쯤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책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