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알고 있던 그것은 행복이 아니다! 행복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진화의 산물 열렬히 사랑한 두 사람이 있었다. 둘은 결국 헤어졌고, 남은 것은 실연의 아픔이었다. 울며 지새는 밤이 얼마나 흘러야 가슴속 상처가 아물 수 있을까. 이별에는 ‘시간이 약’이라지만 그보다 빠른 약이 있다. ‘타이레놀’이다. 돌팔이 처방 같겠지만, 과학적 근거가 있는 얘기다. 진통제로 마음의 아픔을 줄일 수 있다는 논문이 최근 발표됐다. 심리학자 네이든 드왈은 심적 고통을 겪는 62명을 대상으로 21일간 실험을 했다. 한 그룹에게는 매일 타이레놀을 2알씩 복용하도록 했고, 또 한 그룹에게는 아무 약효가 없는 약을 처방했다(물론 양쪽의 약 성분은 미리 공개하지 않았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다. 타이레놀 그룹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의 아픔을 느끼는 정도가 눈에 띄게 감소한 것이다. 인간은 왜 행복을 느끼는가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우리 뇌는 심리적 고통과 신체적 고통을 똑같이 받아들인다. 몸과 마음의 고통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생존, 그리고 번식. 모든 생명체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인간 역시 이 명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단지 생존하기 위해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다. 이별의 고통을 알지만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아픔을 감수하고서라도 얻고 싶은 무언가를 위해 인생은 계속된다. 꿈을 위해, 사랑을 위해, 결국 행복을 위해 우리는 살아간다. 행복은 모든 사람이 바라는 삶의 최종 목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인간은 정말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이 확고한 신념이 만약 허상에 불과하다면? 꿀벌은 꿀을 모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도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벌도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며 이 자연 법칙의 유일한 주제는 생존이다. 꿀과 행복, 그 자체가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 둘 다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간단히 말해,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감을 느끼도록 설계된 것이 인간이다. (서문 발췌) 행복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는 기존의 통념을 전복시키는, 행복의 진실에 대한 역설이자 반기다. 저자가 그 근거로 삼은 것은 다윈의 진화론이다. 행복 분야의 권위자 에드 디너 교수(미국 일리노이 대학)의 지도 아래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인용되는 행복 심리학자 중 한 명이다. 저자 역시 ‘인간은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고차원적인 존재’라는 철학적 관점에서 20년을 연구해왔다. 그런 그의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바로 다윈의 진화론이다. 깊은 고민과 연구 끝에 얻은 결론은, 인간은 지능이 높을 뿐 타조나 숭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100% 동물이라는 것. 이 새로운 시각은 행복에 대한 근본적 생각을 뒤흔들어놓았다. 그리고 저자는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힌다. ‘인간도 동물인데, 이 동물은 왜 행복을 느끼는 것일까?’ 『행복의 기원』은 이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결론이다. 행복은 생존을 위한 수단 왜 인간은 행복을 느끼는가? 저자는 난데없이 개 한 마리를 등장시킨다. 인간과 가장 친숙한 동물인 개. 인간은 야생의 개를 집안으로 들이면서 교육과 훈련을 시키기 시작한다. 개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무척 이기적이다. 눈썰매를 끌라 하고, 마약 탐지를 시키고, 집 지키는 것도 모자라 온갖 쓸데없는 개인기까지 보여달라고 조른다. 캘리포니아 해변에 사는 주인을 만나면 서핑을 강요당할지도 모른다. 이건 뭐, 끝이 없다. 하지만 이 철없는 개 주인의 입장은 이렇다. 공놀이도 하루 이틀이고, 뭔가 기막힌 재주를 가르치고 싶다. 미개척 분야인 서핑을 택한다. 문제는, 어떻게? 서핑은커녕 바다에 들어가는 것조차 꺼리는 개를 어떻게 서퍼로 만들 수 있을까? 다행히 주인은 자기 개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다. 특이하게도 그것은 새우깡이다. 갑자기 희망이 생긴다. (본문 65~67쪽) 자, 이제부터는 조련이 시작된다. 개가 물가로 오면 새우깡을 하나 준다. 그리고 물에 발을 담그면, 서핑보드에 한 발짝 올라오면, 또 새우깡을 준다. 한 단계씩 미션을 완수할 때마다 상을 주는 것이다. 결국 개는 서핑을 하게 된다. 서핑을 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지만, 자기도 모르게 서핑을 하고 있다. 개는 단지 새우깡이 먹고 싶었을 뿐이다. 저자는 개가 서핑에 성공한 이유가 ‘새우깡을 먹을 때 뇌에서 유발되는 쾌감’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 쾌감을 계속 느끼기 위해 개는 새우깡을 자꾸 먹으려 했던 것이며, 그 결과가 서핑의 성공이라고 말이다. 자연은 기막힌 설계를 했다. 내 생각에, 개에게 사용된 새우깡 같은 유인책이 인간의 경우 행복감(쾌감)이다. 개가 새우깡을 얻기 위해 서핑을 배우듯, 인간도 쾌감을 얻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인간이 음식을 먹을 때, 데이트를 할 때, 얼어붙은 손을 녹일 때 ‘아 좋아, 행복해’라는 느낌을 경험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또다시 사냥을 나가고,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 (본문 68~69쪽) 먹고 자고 사랑할 때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이유. 결국은 생존을 위해서다. 행복, 즉 쾌감을 느껴야만, 혹은 쾌감을 느끼기 위해 인간은 먹고 자고 사랑하는 데 몰두한다. 이 관점으로 보자면 행복은 삶의 최종 이유도 목적도 아니다. 생존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행복은 ‘강도’보다 ‘빈도’가 중요하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그게 우리의 현실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어쨌든 우리는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대학 간판을 위해, 연봉을 위해, 집 평수를 위해 분투한다. 아마 많은 이들의 소원이 ‘로또 1등’일 것이다. 그러나 조사 결과, 실제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은 1년 뒤 느끼는 행복감이 보통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인간의 감정은 어떤 자극이나 변화에도 ‘적응’을 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한 방’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쾌락은 곧 소멸되기 때문에, 한 번의 커다란 기쁨보다 작은 기쁨을 여러 번 느끼는 것이 절대적이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affect)’. 저자의 유학 시절, 지도 교수가 쓴 논문의 한 구절이다. 저자는 이것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진리를 담은 문장이라고 강조한다. 살아가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행복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고민이 ‘어떻게?’에 그치는 삶과 ‘왜?’를 고민하는 삶은 분명 다를 것이다. 이 책에 대해 사회심리학자 허태균 교수가 쓴 추천의 말이 그 의미를 요약한다. “이 책으로 우리는 결코 행복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지 않고서는 왜 행복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
2017.09.22. 트레바리에 올렸던 내가 쓴 독후감
자기계발서 만을 탐독하며 남들에게 잘 보이기만을 바라며 시작한 회사생활. 그리고 10년 후 번아웃을 경험하며 퇴사를 했다. 하루하루를 공허함과 왠지모를 우울함 속에 같혀 지내다 인문학이라는 한줄기 빛을 찾았고, 종교와 철학 그리고 심리학 서적에 빠져 지냈다. 그런데 이들 분야는 읽으면 읽을수록 지난 10년의 반추는 커녕 더 높은 이상을 향해서 가라는 강요아닌 강요를 느꼈다. 내가 추구하던 행복 또한 이상향 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동양철학은 군자가 되었을 때 느끼는 행복이 최고의 선이라는...물론 그나마 나 자신에 대해서 돌아보며 분석하고 개선점을 찾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것은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책들 덕분이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내가 살아 숨쉬는 이유는 너무 뻔한 대사이니 패스, 그렇지만 아직도 내가 행복을 왜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언제나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답을 찾으려 했을 뿐..
"행복의 기원"이란 책의 서문을 읽으면서 한 눈에 이 책이다!!!를 알아보았다. How가 아닌 Why를 그리고 진화론에서 그 이유를 찾아준다니! 얼마전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며 알게된 사실 하나, 크로마뇽인과 호모사피엔스 간의 전쟁에서 호모사피엔스가 승리함으로써 지금의 현생 인류가 존재할 수 있었으며, 크로마뇽인과 대비되는 호모사피엔스의 특징이 바로 소심한 성격 그리고 집단주의이다.(다른 말로는 사회성이 크로마뇽인보다 우월하다는 것. 최근의 나는 사회성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이고EGO의 집단화된 결과로만 보인다.) 본 책의 후반부에도 호모사피엔스의 이동에 대해서 잠깐 언급되는데, 왜 크로마뇽인과 호모사피엔스 얘기를 하느냐면 그들의 행동 특성에 따라 행복을 느끼는 정도가 달랐다고 한다. 크로마뇽인은 끊임없이 옮겨다니며 맹수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때 행복을 느끼는 반면, 호모사피엔스는 정착하고 집단을 구성하고 그 구성원과의 끈끈한 결속력을 얻었을 때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이 역시 이론에 불과하지만 어떻게 보면 호모사피엔스의 출현은 곧 이고EGO의 출현과 일치하는 것인가... "행복의 기원"의 저자 서은국 교수는 수많은 연구 결과와 실험 사례를 바탕으로 인간의 본능과 행복을 구체적으로 연결시켰고, 그 덕분에 나는 더이상 어렵고 복잡하게만 표현하는 정신세계와 존재하지 않는 이상이라는 우물 속에 같혀있지 않고 본능이 지배하는 현실세계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결말까지 읽은 독자라면, 한번쯤은 생각해 볼만한 것이 바로 에피쿠로스 학파 또는 쾌락주의이다. 저자도 잠깐 언급한 쾌락이라는 개념이 사실 우리들에겐 매우 거북하고 음흉한 개념이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사실 성욕에 관련된 쾌락은 쾌락주의의 일부분에 불과한데...나는 오히려 에피쿠로스의 저서를 다시금 읽고싶어졌다. 기원전 하고도 몇 백년 이전에 그는 이미 인간의 본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에 놀라울 뿐이다. 이 책의 결론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생존과 번식 그리고 사회적 결속을 통해 느끼는 쾌락이 곧 행복이라는 것이고, 지금 내 머리 속의 커다란 화두인 '강박, 눈치, 미래'에 대해서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행복은 추구한다고 얻어지는 결과물이 아니고, 내 삶의 이유 또한 찾는다고 찾아지는 정답이 아니기에 나는 지금 이순간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지금 내가 속한 네트워크, 원하던 원치않던 상관없이, 이 네트워크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상처받을까 두려워하지도 않겠다.. 어차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생겨나는 상처니까. 맞다! 게보린이 있으니까. (참고로 마음이 상처받아 괴로울 때 진통제가 효과 있다고 함. 팩트임. 궁금하면 구글링.)
2021.02.25. Revised
이 책을 읽은 이후 3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사실 그동안 위에서 내린 결론 "지금 내가 속한 네트워크에 원하던 원치않던 상관없이 최선을 다할 뿐이다"를 실천했지만 오히려 내 속에 강력하게 자리잡은 EGO의 도전과 설득을 끊임없이 당했다.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도 EGO는 틈만나면 나를 설득시키려 했고, 그 결과 나를 둘러싼 장벽(나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EGO가 만들어낸 내 자아를 가두는 우물같은 개념)만 더 두꺼워졌다. EGO는 언제나 나에게 미래의 시나리오를 상기시키며 나를 조종하려 했다. 새로운 인연을 무시하던 그리고 나만의 우물 속에서 내 상황을 합리화시키는 나를 꽤 자주 목격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앞서서 내린 결론을 수정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어떤 일이나 임무나 행위에 대한 것일 뿐, EGO에게 휘둘린 최선은 진정한 최선이 아니다. 인간의 본능 역시 EGO가 애용하는 강력한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지금의 결론은 "지금 내가 속한 네트워크에 그리고 언젠가 새롭게 생겨날 네트워크에 원하던 원치않던 EGO에 휘둘리지 않고 나를 내맡기자" 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인데, '호모사피엔스가 과연 크로마뇽인보다 더 진화된 인류가 맞는가'라는 의심이 든다. 현생인류 역시 호모사피엔스의 후손이며, 현재 돌아가는 인류 사회를 보면 호모사피엔스의 특징이자 차별화 포인트인 그 사회성이 진화(?)한 결과 집단 이기주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대다수가 본인이 확증편향의 본능에 휘둘리는 것 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각자의 극단에 서서 상대 집단을 부정하고 욕하고 폄훼시키고 있다. 과연 이것이 그 사회성이란 특징이 진화해서 이렇게 된 것일까? 솔직히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윤리와 도덕성을 들이대도 확증편향에 빠져버린 이상 본인의 양심과 윤리사상에서 올라오는 목소리는 결코 본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게다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치닫는 상황으로 가는 것이 사회성을 지닌 인류가 진화하는 아주 자연스러운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크로마뇽인이 지구를 정복했더라면 어땠을지가 너무나도 궁금하다. 아니 오히려 집단 이기주의나 확증편향 같은 부작용은 없었다고 긍정 아닌 긍정적 기대를 해본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가 호모사피엔스라는 인류의 최초의 조상이 아닐까... 아무튼 현생인류는 호모사피엔스니까 그토록 원하는 행복은 지금 내가 속한 사회 속에서 찾자. 그 사회가 편향적일수록 행복은 점점 멀어질 뿐이다.
저자는 심리학과 교수이자 대표적인 행복 심리학자이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행복에 대해 학자로서 이론적인 정의를 내리고 설명을 해준다. 행복의 정의하기에 앞서 다윈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보면, 행복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와 진화론의 다윈은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
즉, 모든 인생사가 향하는 최종 종착지가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적 관점의 아리스토텔레스와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생존을 위해 행복이 필요한 도구라고 주장하는 다윈을 보았을때, 이 책은 후자에 더 가깝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동물이며, 생존을 위해 행복이라는 도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저자는 심리학과 교수이자 대표적인 행복 심리학자이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행복에 대해 학자로서 이론적인 정의를 내리고 설명을 해준다. 행복의 정의하기에 앞서 다윈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보면, 행복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와 진화론의 다윈은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
즉, 모든 인생사가 향하는 최종 종착지가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적 관점의 아리스토텔레스와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생존을 위해 행복이 필요한 도구라고 주장하는 다윈을 보았을때, 이 책은 후자에 더 가깝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동물이며, 생존을 위해 행복이라는 도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한 행복에 관한 것에 완전히 반대가 되는 내용이지만, 책을 보면 어느정도 이론적인 뒷받침이 있기 때문에 공감이 되는 부분도 많았다.
인간이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물질적인 것은 쉽게 잊혀지고 오래가지 않는 반면 사람과의 관계를 통한 만족, 사회성이 행복의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그리고, 일상에서 작은 기쁨을 많이 경험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결론을 맺을 때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행복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어서였다. 우선, 행복은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쾌락에 뿌리를 둔, 기쁨과 즐거움 같은 긍정적 정서들이다. 이런 경험은 본질적으로 뇌에서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철학이 아닌 생물학적 논리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둘째, 행복에 대한 이해는 곧 인간이라는 동물이 왜 쾌감을 느끼는지를 이해하는 것과 직결된다. 인간만큼 쾌감을 다양한 곳에서 느끼는 동물이 없다. 쇼팽과 셰익스피어도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쾌감은 먹을 때와 섹스할 때, 더 넓게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다. 진화의 여정에서 쾌감이라는 경험이 탄생한 이유 자체가 두 자원(생존과 번식)을 확보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행복도 오컴의 날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행복은 가치value나 이상, 혹은 도덕적 지침이 아니다. 천연의 행복은 레몬의 신맛처럼 매우 구체적인 경험이다. 그리고 쾌락적 즐거움이 그 중심에 있다(Diener, Sapyta, & Suh, 1997). 쾌락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것을 뒷전에 두고 행복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선 문화라는 것을 잠깐 되짚어보자. 문화에 대한 여러 학문적 정의가 있지만, 핵심적인 개념은 '공유된 이해 shared understanding'다. 생각, 가치, 규범이나 행동 방식에 대한 문화 구성원 간의 암묵적 합의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고 자연스러운 것인가에 대한 공감대가 서로 구축된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가령 '혼자' 영화를 보기 위해 산 티켓은 '고독-경험' 구매가 되고, '친구들'과 놀기 위해 게임기를 사는 것은 '사회적-물질' 구매가 된다. 이런 경우 어느 쪽이 더 행복감을 줄까? 위 연구에 의하면 친구와 놀기 위해 게임기를 살 때 더 행복하다. 결국 무엇을 구매하느냐 보다 구입한 물건 혹은 경험에 다른 사람이 개입되느냐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최근 등장하는 행복 지침들은 이런 식으로 행복의 증상을 원인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긍정성 또한 행복한 사람들이 이미 갖고 있는 증상인 경우가 많다. 누군가를 어느 정도 '이미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상당 부분 타고난 기질이다(Archontaki, Lewis, & Bates, 2013).
쾌락은 생존을 위해 설계된 경험이고, 그것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본래 값으로 되돌아가는 초기화가 반드시 필 요하다. 이것이 적응이라는 현상이 일어나는 생물학적 이유다. 그리고 수십 년의 연구에서 좋은 조건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장기적으로 훨씬 행복하다는 증거를 찾지 못한 원인이기도 하다. 아무리 대단한 조건을 갖게 되어도, 여기에 딸려왔던 행복감은 생존을 위해 곧 초기화 돼버리기 때문이다.
창을 들고 동굴 밖으로 다시 사냥을 나서는 이유는 사실 잃어버린 쾌감을 다시 잡아오기 위함이다. 이 무한 반복의 생존 사이클이 지속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 중 하나가 쾌감의 소멸이다. 소멸되지 않으면 동굴에 마냥 누워 있을 것이고, 계속 누워 있다보면 결국 영원히 잠들게 된다.
영어로 표현한다면, 'becoming(~이 되는 것)과 'being(~으로 사는 것)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재벌집 며느리가 되는 것(becoming)과 그 집안 며느리가 되어 하루하루를 사는 것(being)은 아주 다른 얘기다. 하지만 우리는 화려한 변신의 순간에만 주목하지, 이 삶을 구성하는 그 뒤의 많은 시간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공하면 당연히 행복해지리라는 기대를 하지만, 실상 큰 행복에 변화가 없다는 사실은 살면서 깨닫게 된다.
돈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 준다. 그래서 초콜릿 같은 시시한 것에 마음 두지 않게 하고, 이런 자극을 음미하는 능력을 감소시킨다. 심지어 사람이라는 자극에도 관심을 덜 갖게 한다. 돈을 생각할수록 카페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덜 하고(Mogilner, 2010), 어려움을 당해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사양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
우선 감정이라는 것은 어떤 자극에도 지속적인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계속 반응을 해서도 안 된다. 그 이유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어쨌든 이 '적응adaptation'이라는 강력한 현상 때문에 아무리 감격스러운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일상의 일부가 되어 희미해진다. 2002년 월드컵, 안정환 선수의 기적적인 골. 우리 모두의 심장을 멎게 했던 그전울도 사실은 며칠을 가지 못했다. 복권도 예외가 아니다.
감정의 또 다른 특성은 상대적이라는 점이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UCLA의 알렌 파르누지Allen Parducci 교수는 복잡한 개념을 범위 빈도 이론 range-frequency theory 소개했지만 (Parducci, 1995) 요지는 간단하다. 극단적인 경험을 한번 겪으면, 감정이 반응하는 기준선이 변해 그 후 어지간한 일에는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첫째, 행복은 객관적인 삶의 조건들에 의해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둘째, 행복의 개인차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그가 물려받은 유전적 특성,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외향성이라는 성격 특질이다.
우리 조상이 물려준 생존 패키지의 두 번째 내용물은, 우리의 관심사인 '쾌감'이다. 고통과 같은 부정적 경험이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면, 긍정적 정서의 기능은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생명체가 오래 생존하지 못하는 것처럼 쾌감을 상실한 동물 또한 문제가 생긴다.
왜 이토록 인간은 서로를 필요로 할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막대한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바로 생존. 세상에 포식자들이 있는 한, 모든 동물의 생존 확률은 다른 개체와 함께 있을 때 높아진다. 물소들은 사자들이 우글거리는 아프리카 초원을 수 십만 마리의 동료들과 함께 횡단한다. 서로 잡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결국 개는 서핑을 하게 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새우깡의 절대적 역할이다. 이렇게 특정 반응(서핑에 필요한 단계적 행동들)을 증강시키는 자극(새우깡)을 심리학에서는 '강화물'이라고 부른다. 새우깡이라는 이 강력한 강화물이 없다면 개의 서핑 묘기는 탄생할 수 없다.
드디어 결정적인 질문을 던질 때가 왔다. 행복감 또한 마음의 산물이다. 창의력과 마찬가지로 행복도 생존을 위한 중요한 쓰임새가 있는 것은 아닐까? 행복은 삶의 최종 목적이라는 것이 철학자들의 의견이었지만, 사실은 행복 또한 생존에 필요한 도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마치 피카소의 창의성 같은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팀 윌슨Tim Wwilson은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도 "이방인" 같은 낯선 존재라고 했다(wilson, 2002).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말 모르는 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멍청해서가 아니고, 우리의 많은 선택과 결정은 의식을 거치지 않고 진행되기 때문이다. 의식은 아주 한정된 용량의 값비싼 자원이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만 선 생각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시어머니의 생일 같은 것.
지금까지의 얘기를 정리해보자. 이성적 사고를 하는 것은 분명 인간의 탁월한 능력 중 하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모습도 아니고, 그 역할이 생각만큼 절대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의식만이 우리의 눈에 보이기 때문에 생각이 항상 좌우한다고 착각한다.
인간이 농경생활을 하며 본격적으로 문명을 가진 것은 길게 잡아야 6천 년 전부터다. 세대로 따지면 약 250세대. 인간과 침팬지가 진화의 여정에서 갈라진 것은 대략 600만 년 전이라고 한다. 약 30만 세대 전.막연한 숫자다.
이렇게 바꿔보자. 시간을 1년으로 압축한다면, 인간이 문명생활을 한 시간은 365일 중 고작 2시간 정도다. 364일 22시간은 피비린내 나는 싸움과 사냥, 그리고 짝짓기에만 전념하며 살아왔다. 동물이기 때문에.
일례로 방글라데시가 매우 행복한 국가라는 언론 보도는 학계의 결론과 다르다. 너무나 똑똑한 현대인들의 실수는 그 단순성을 외면하며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돈을 벌고 출세하는 데 삶을 바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늘이 어제보다 더 행복하지는 않다. 행복의 본성과 궁합이 맞지 않는 삶이기 때문이다.
꿀벌은 꿀을 모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도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벌도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며 이 자연 법칙의 유일한 주제는 생존이다. 꿀과 행복, 그 자체가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 둘 다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간단히 말해,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감을 느끼도록 설계된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 이 둘의 공통된 원천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연의 아픔을 달래는데 진통제가 효력 있다는 연구도 있고, 따스한 스프를 먹으면 덜 외로워진다는 논문도 있다.
종의 각 개체는 유전적 변이 등에 의해 조금씩 다른 모양과 특징을 가지고 태어난다. 60억 인구의 생김새와 성격이 서로 다르듯, 이런 특성 중 어떤 것은 특정 환경에서 생존하는 데 더 적합하고, 어떤 것은 불리하다. 후세에 대물림(유전)되는 개인 간의 '매우 사소한 모든 형태의 차이'가 결국 진화의 긴 과정에서 증폭되어 생존 여부를 가르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섬의 씨앗이 모두 단단한 껍질로 싸여 있다고 하자. 이 섬에서 태어나는 참새는 튼튼한 부리를 가지는 것이 유리하다. 이 섬에서는 큰 부리 참새들이 많이 살아남게 되고, 그들이 후손 중에는 '큰 부리 유전자'를 가진 녀석들이 점덤 많아진다. 이 과정이 수백, 수천 세대에 걸쳐 지속되면 이 섬은 결국 큰 부리 새들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다윈이 갈라파고스 군도의 핀치새들을 관찰하며 얻은 영감이다.
그러면 개는 왜 그토록 새우깡을 먹으려고 했을까? 새우깡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먹을 때 개의 뇌에서 유발되는 쾌감 혹은 즐거움 때문이다. 개는 이 쾌감을 다시 느끼기 위해 새우깡을 계속 원하게 된 것이고, 그 과정의 누적이 서핑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사실 나는 개도 서핑도 관심 없다. 하지만 이 예시는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본질적 속성을 아주 쉽게 설명한다. 한마디로 행복의 본질은 개에게 서피을 하도록 만드는 새우깡과 비슷하다. 차이점은 인간의 궁극적 목표가 서핑이 아니라 생존이라는 점이다. 서핑과 생존. 차원이 다른 두 목표지만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이 필요하다. 개 주인이 사용한 수단은 새우깡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이 생존에 필요한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자연은 기막힌 설계를 했다. 내 생각에, 개에게 사용된 새우깡 같은 유인책이 인간의 경우 행복감이다. 개가 새우깡을 얻기 위해 서핑을 배우듯, 인간도 쾌감을 얻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조상이 된 자들은 이 강렬한 기분을 느끼고 또 느끼기 위해 일평생 사냥과 이성 찾기에 전념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게 된다. 유전자를 퍼뜨리려는 거창한 포부 때문이 아니라, 개가 새우깡을 통해 얻는 쾌감을 인간도 최대한 자주, 많이 느끼기 위해 고기와 이성에 몰두한 것이다.
"행복감을 인간이 왜 느낄까?" 나의 간결하고도 건조한 답은 "생존, 그리고 번식"이다.
행복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제공해 준 [행복의 기원]
생각보다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어서 조금 놀랐고,
그에 비해 그의 행복론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 또 한번 놀람.
1. 우리 뇌는 심리적 고통과 신체적 고통을 똑같이 받아드린다. 사랑에도 타이레놀이 도움이 된다.
--> 그렇지 않다는 연구도 있다. 이 해석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2.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뇌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살기 위한 기본적 행동을 할 때 행복하게 느끼도록 뇌가 설계 되었다는 것.
인간도 동물이다. 생존욕구이지 고차원적 의식이 행복이 아니다.
3. 자연은 기막힌 설계를 했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유인책이 행복감(쾌감)이다.
음식을 먹을 때, 이성을 만날 떄 행복한 것은, 그래야만 또 사냥을 나가고 이성을 만나
종족이 생존하고 번식하기 때문이다.
행복이 목적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는 틀렸고, 모든 것은 생존과 번식의 수단이라는 다윈이 옳았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사는게 아니고 생존하기 위해 행복한 거라고.... (진화학자 장대익)
--> 난 잘 살 수 있도록 행복감, 항상선을 준 것은 신의 섭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오히려 갖음보다 갖음을 느끼는 것이 더 행복하고,
갖았다고 느낄 때 비슷한 행복 호르몬이 나오도록 (착각) 뇌는 설계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4. 행복, 쾌락은 곧 소명되기 떄문에 로또 1방보다 매달의 월급이 행복을 줄 수 있다.
5. 행복해지려고 의미를 찾거나,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는 조언은 공허한 말장난이다. 이는 손에 목이 박힌 사람에게 아프지 않다고 생각해라! 라고 말하는 조언과 비슷하다.
--> 긍정에 대해 나의 관점은 다느지만, 이성적 능력을 과대평가하거나 모든 것이 생각만으로
해결된다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행복은 나한테 항상 어려우면서도 늘 가까이에서 이야기하는 단어이고, 존재이다.
내가 처음으로 '남'과 행복에 대해 갑론을박했던 것은 20대 초반 대학생 시절이었다. 당시에 나랑 정말 안맞는 친구랑 카페에서 너의 행복은 정말 행복이 아닐 수 있어라며, 그 어린 나이에도 꽤 심오한 대화를 했었다. 나는 소소한 것들에 대한 행복이 진짜 행복이라고 생각했고, 그 친구는 원대한 꿈을 이루는 것을 진짜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본인의 주관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당신의 감정이 진짜다, 가짜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최근 같이 일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된 팀장이 설문조사 회의 중에 '행복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더 우울하고 불행해진다. 상대에게 행복하냐고 묻는 것은 또다른 방식의 폭력이다'라고 말했는데 그때 많은 충격을 받았다. 난 항상 아무한테나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행복한 상태인지 물어봤는데 이게 폭력이라니.
그 후 인터넷을 하다가 우연히 알게된 이 책은 지금까지의 일련의 사건들과, 동시에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나에게 정말 유혹적인 단어의 조합이었다. 행복의 기원.
다행히도(?) 행복의 기원에는 그에 대한 답을 알려주는 구절들이 많았다. 인간은 결국 찰스 다윈의 위대한 이론, 진화론을 따라 발전하고 있고, 지금까지도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택한 수단 중 하나가 '행복'이라는 것이다. 쾌락이나 즐거움, 본인의 과시욕마저도.
회사에서 만난 불행하다는 사람들은 보통, '돈이 없음', '집이 없음', '차가 없음' 등을 읊으며 본인의 불행요소들을 설명한다. 본인의 빈틈을 보며 이게 없으니 슬프다고 하기보단, 그래도 이정도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음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하는 책이다.
책의 결론은 결국 20대 초반의 내가 하던 생각이 좀 더 원초적인 행복을 가져갈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줬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내 쾌락과 내 즐거움을 누군가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고, 장황하게 보여줄 필요도 없다. 행복을 생각하면 난 왜 행복하지 않은지 불행해지고 우울해진다면, 본인이 가진 것에 대한 만족감과 그것을 좋아하고 누리는 정도가 얼마인지 다시 돌아볼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내용이 길지않아서 술술 잘 읽었습니다. 항상 행복이란 뭘까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그 궁금증이 조금은 풀린 것 같습니다. 행복도 쾌락의 한 종류라는 견해가 인상깊었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을 추상적인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쾌락이라고 하니 이해가 쉽게 되었습니다. 거창한 것이 아닌, 사소하지만 경험을 통해 얻었던 기쁨과 즐거움이 쾌락이고 곧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대부분 알려진 내용이라서 휘리릭 읽을 수 있었다.
일반인 대상의 실험이나 사건들도 저자가 주장하려는 내용이 충분히 예측가능하기에 새로울 것도 없었다.
인간은 동물이라는 점, 식욕과 성욕을 충족하여 생존과 번식을 달성하기 위해서 뇌(유전자)가 행복감을 느낀다는 점. 그리고 행복감이 지속되지 않고 쉽게 적응되기에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가 더 중요하다는 점.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은 유전자의 전달을 위한 생존기계라고 이미 언급되었다. 오히려 행복의 기원에서는 책 말미에 집단주의를 설명하며 생존과 번식을 위해 사회성을 가지는 인간을 설명하며 사회구조의 한계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가장 엉성하고 이해가 잘 안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외향적 인간과 내향적 인간에 대해 구별하면서 외향적 인간이 더 행복감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서 상술된 맥락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책 말미에서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불행이 잦은 빈도로 발생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무언가 앞뒤가 논리적으로 딱 들어맞지는 않아서 공감이 잘 안되었다.
종합하면, 큰 틀에서 인간은 동물에 불과하고 생존과 번식을 목적으로 식욕과 성욕을 자주 (빈도) 충족시키는 것이 행복한 삶을 위한 바람직한 방향이며, 이를 위해서는 사람들과 많이 어울리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인 듯 싶다.
너무 일반적이고 이미 알려진 사실을 정리한 느낌이었고, 책 내용도 좋은 내용이며, 분량도 얼마 안되니 킬링 타임용으로 읽으면 딱이라는 생각이 든다.
행복에 대한 고민을 하던 중 이 책을 읽었습니다. 진화적인 관점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분석하고 행복에 관한 이야기 합니다. 새로운 관점으로 사람과 행복을 보는 법을 깨달았습니다. 이 책을 읽고 책 읽기의 즐거움을 깨달았다고 할 정도로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내용을 쉽게 서술하였고, 분량도 많지 않아 가볍게 읽기에 좋습니다.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더 많은 내용을 포함하여 두꺼운 책으로 나왔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은 사람이라는 동물의 목적이 행복이아니라 행복은 수단일뿐이고 진정한목적은 따로 있다고 서술하고있다. 그 근거로 다른 동물들의 훈련을 들으면서 개에게 훈련을시킬때 보상으로 먹이를 줘서 행복감을 주어 조련을 시킨다는 식의 근거를 대고있지만 조금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여 의심을하게되며 읽었다.
어렸을 때 소원을 빌 때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 ' 라고 소원을 빈 적이 많다.
행복이 뭔지 명확하지 않았을 때에도, 무조건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행복은 도대체 뭘까?
삶의 최종적인 목표가 '행복하게 살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기 '행복하게'에 방점이 실린 것이 아닌 '살기'에 방점이 실린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저자는 행복이라는 것이 목표가 아닌 최종적인 목표인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생존하기 위해 행복을 찾는다는 것.
살기 위해 행복을 느낀다는 것.
행복이라는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개념을 객관적으로 생각해 본 기회가 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