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 소설가 최은영, 영화평론가 남다은, 변호사 김원영, 여성학자 정희진의 글, 김보라 감독과 미국의 작가 앨리슨 벡델의 대담 등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의 성공 이후 영화의 각본집을 출간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졌는데, 다른 영화는 몰라도 이 영화는 반드시 이 책까지 챙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최종 편집본과 오리지널 시나리오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최종 편집본은 주인공 '은희'가 느끼는 외로움이나 불안감을 더욱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설정을 바꾸거나 일부 장면을 삭제한 것 같다. 예를 들면 영화에서 은희는 가족 중 누구와도 친하지 않은데, 오리지널 시나리오에선 적어도 언니와는 함께 외출을 하거나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 등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친하게 지냈던 언니와 사이가 멀어지면서 은희가 느끼는 슬픔이 묘사되기도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애초부터 둘의 거리가 그렇게 가깝지 않았던 것으로 묘사되는 편이, 가정에서조차 고립되고 방치된 듯한 느낌을 받는 소녀의 아픔을 표현하기에는 더욱 적절한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오리지널 시나리오 상의 마지막 장면이 약간 다른데, 무엇이 왜 달라졌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이 영화를 감상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다.
둘째는 국내외 유명 작가들이 영화 <벌새>를 어떻게 보고 느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소설가 최은영의 글은 너무 좋아서 여러 번 다시 읽고 필사하기도 했다.
어른들은 남자아이의 아주 적극적인 수준의 가학성도 용인하면서, 여자아이가 자기 의견을 정정당당하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성격이 이상한 애'라고 규정짓곤 했다. 은희와 내가 요구받았던 착함은 '수동성'이었던 것 같다. 누가 널 때려도, 부당하게 대해도, 맞서지도 싸우지도 말고 그저 참고 삭이고 너의 감정이나 생각을 '거칠게'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가 '착함'이라는 규율로 여자아이들에게 강요되었다. (최은영, 209쪽)
한국 사회에는 상처를 미화하는 문화가 있다.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를 '극복'하고 강해지는 서사를 환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상처는 언제나 사람에게 좋은가. 사람으로 살면서 받을 수밖에 없는 상처가 있겠지만, 받지 않아도 될 상처는 최대한 받지 않는 편이 더 좋지 않나. 상처를 미화하는 문화는 가해자에게 언제나 얼마간의 정당성을 주는 것 같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그런 거야. 정말 그런가. (최은영, 213쪽)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쓴 변호사 김원영의 글도 좋았다. 그에 따르면 이 영화에는 소리 내어 우는 사람이 두 명 나온다. 한 명은 은희의 아빠이고, 다른 한 명은 은희의 오빠다. 이들의 눈물은 가정 내 폭력과 억압의 '가해자'인 남성도 때로는 슬프고 죄책감도 느끼는 인간임을 보여주는 장치로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울어야 할 사람들(은희의 엄마, 언니, 은희) 앞에서 남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울 수 있는 자유, 울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은희의 엄마도, 은희도 이렇게 울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울지 '못한다." 김원영, 233쪽) 여성학자 정희진은 중학생 은희보다도 중년인 엄마의 감정에 더 깊이 공감했다고 밝힌다. 장사하랴 살림하랴 아이들 키우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은희의 엄마는 오빠가 죽어도 슬퍼할 마음의 여유 따위 없다. 은희의 곁에 영지 선생님이 아닌 엄마가 남은 것이 은희에게 과연 좋은 결말일까. 많은 생각이 든다.
벌새 영화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일 정도로 너무 좋은 작품이었는데, 마침 또 시나리오 집이 나온다고 해서 얼른 구매했습니다. 스크린에서 보는 대사와, 시나리오 집에서 읽는 대사는 또 느낌이 다르더라구요.. 너무 좋았던 건 시나리오 이외에도 벌새 관련해서 여러가지 텍스트들이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앨리슨 벡델과의 벌새 관련 대담은 정말 감명깊었던 것 같아요. 영화를 보신 분들이 이 텍스트들을 읽으면 영화를 좀더 깊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영화 <벌새>는 한국영화 역사에 남을 만큼의 깊이와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김보라 감독의 시나리오 전문과 앨리슨 백델과의 인터뷰가 담긴
벌새 책이 발간된 건 우리에겐 굉장한 행운이자 복임에 다름없다.
김보라 감독의 지문은 대사 만큼이나 사려깊고 묵직하며
영상이 아닌 글 안에서 살아 숨쉬는 은희는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였다.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으로 희대의 명작을 만들어낸 김보라 감독,
이번엔 그의 문장을 감상해보시길 권한다.
좋아하는 영화는 여러 번 반복해서 본다. 이해력이나 기억력이 좋지 않아 영화를 한 번 보는 일 만으로는 놓치는 부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덕분에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이 말한, 영화를 사랑하는 3단계 가운데 첫 단계는 실천하는 셈인데 요즘은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서 시나리오나 스크립트를 활용한다. 시나리오나 스크립트에는 영화의 디테일까지 쓰인 경우가 많아 영상으로는 놓치기 쉬운 부분들을 효율적으로 파악하기 좋기 때문이다.
『벌새 :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은 제목 그대로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의 시나리오집이다. 최종 개봉된 영화에는 편집된 분량이 오롯이 담긴 원본 시나리오에 영화에 대한 네 편의 에세이와 한 편의 대담이 더해진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벌새』 시나리오집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영화를 먼저 보고 시나리오집을 읽었다. 벌새단이라 불리던 열성적인 팬들만큼 N차를 뛸 정도는 아니었고, 극장에서 한번, 김보라 감독님의 북토크에 가기 전에 시나리오와 인터뷰 한번, 영상자료원에서 상영할 때 한번 봤을 뿐이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 인물과 관계, 시대와 집단적 참사의 기억을 다루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94년이란 시대 특성상 삐삐나 카세트테이프, 미치코런던 등 추억의 아이템과 브랜드가 등장함에도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볼 수 있던 그 시대에 대한 추억의 정서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은희가 겪는 관계와 단절에 몰입했기 때문일까. 시나리오에도 추억의 아이템에 대한 특별한 강조는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아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94년의 김은희가 아닌, 열다섯살의 김은희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젊은 관객들에게도 공감을 얻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영화에서 헷갈렸던 부분에 대한 확신을 얻기도 했고 미처 하지 못한 생각들을 하기도 했다. 은희가 버스를 타고 가다 귀 뒤쪽에 난 혹을 처음으로 발견하는 장면이나 온 가족이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할 때 자기네 가게 고춧가루의 질에 대해 항의한 손님을 욕하던 아버지의 대사, 힘들 땐 자기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하나씩 움직여본다던 영지의 말 등에서였다. 특히 손가락에 대한 영지의 대사는 지금의 감독이 과거 은희 나이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로만 봤다면 영지가 은희에게 한 말로만 생각했을 장면에 왜 이런 감상이 들었을까. 시나리오를 읽는 일이 배우와 연출의 장막―말 그대로 스크린을 거둬내고 감독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가능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영화가 100주년을 맞이하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팔롱도르와 오스카를 거머쥔 2019년은 한국영화역사에서 중요하게 기록될 것이다. 그 기록에서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기생충>만큼이나 중요한 영화로 기록될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소감으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을 인용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 이란 말을 했다. 그 말은 곧 <벌새>를 두고 한 말에 다름 아니란 생각을 해본다.
영화 벌새를 보고 나서 마음에 파도가 일렁거렸다. 나의 소녀 시절과는 다른 시기, 장소의 이야기지만 나의 근본을 들킨 것 같은 마음, 영지선생님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나의 세계는 더 나아졌을까?
그나마 은희보다는 부모의 관심을 받았고 훨씬 더 나은 환경이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아이들 교육을 위해 강남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살지만 떡방앗간한다고 무시당하는 은희의 삶은 힘겹다. 일하느라 바쁜 엄마, 그런 엄마를 두고 춤바람난 아빠, 강북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해 부모의 관심밖인 언니 수희, 공부를 잘해 가족의 희망이지만 은희를 마구 때리는 오빠 대환, 단짝 친구 지숙, 남자친구 지완, 후배 유리와 함께 하는 중학시절은 잠깐 즐겁다 오래 쓸쓸하다. 남자친구가 있다는 이유로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날라리로 찍혀버린 딱 보통의 중학생 김은희
단짝의 배신도, 남자친구의 곁눈질도, 오빠의 폭력에도, 부모의 무관심에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가다 한문학원 강사 영지를 만난다. 서울대에 다니는 선생님도 자기가 싫을 때가 있냐고 묻는다.
(은희) "선생님은 자기가 싫어진 적 있으세요"
두 여자의 눈 마주침
이 아이에게 무엇을 말할까, 스산한 얼굴의 영지, 그 침묵을 힘겹게 깨고 영지가 말한다.
(영지)...응. 많이. 아주 많이. 나도 똑같아.
은희, 영지의 말에 놀라서 묻는다.
(은희) 선생님은, 그렇게 좋은 대학에 다니는데도요?
영지, 아이의 그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영지)... 자기를 좋아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
그 말에 마음이 움직이는 은희.
(영지) 나는 내가 싫어질 때 그냥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해.
이런 마음들이 있구나, 나는 지금 나를 사랑할 수 없구나, 하고...
은희야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도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얼굴에 혹이 자라 수술을 하고 혼자 퇴원하는 은희,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진 자리를 확인하러 간 은희, 은희의 상처는 그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이 모두 좋다. 시나리오는 영화에서 생략되었던 장면을 확인할 수 있어 좋았고 남다은은 영화를 지지하면서도 약한 점을 이야기하고 김원영의 글은 은희의 마음을 예민하게 포착한다.(그의 책을 사놓고 못 읽었는데 어서 읽어야겠다)
나도 힘들 때 가만 가만 손가락을 움직여봐야 겠다. 그래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지금도 읽으며 여운이 남네요 볼 수 있어 행복한 밤입니다.
늦은 리뷰나마 올립니다.
소장할 수 있어 좋습니다. 다른 분들께도 읽어보도록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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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리뷰나마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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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아주 유명했다. 기회가 없어 못 보았고, 사람들이 들먹일 때마다 책으로라도 봐야지 싶어 보았다. 왜 그렇게 유명했는지, 영화의 무엇이 사람들을 그토록 사로잡았는지, 시나리오를 읽은 나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영화를 못 본 탓일까, 내 감수성이 메마른 탓일까. (이런 기분을 느낄 때마다 나는 나를 의심한다. 내가 무엇을 못 보고 있나, 무엇을 놓쳤나, 어떤 마음이라 공감을 못하나...)
시나리오로 읽을 때와 영화로 봤을 때 작품에 다다르는 깊이가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훌륭한 작품이라고 하면 시나리오든 영화든 비슷한 수준에까지는 도달할 수 있을 것인데, 나는 어쩌자고 이리 무감한 것인지. 여자 중학생이 있고, 이 아이의 가족과 친구들이 있고, 1994년에 역사적으로 그런 사건들이 있었고, 사람들의 기막힌 죽음을 보았고, 납득하기 어려운 세상의 모습에 맞닥뜨렸고, 혼란을 겪으면서 자라고 있고, 그러하고, 그러하고......
줄거리가 다가 아니겠지. 영화 화면으로 보이는 무엇이 있는 것이겠지. 그걸 못 보고 글만 읽고 있으니, 영화에 무지한 내 상상으로는 이 작품의 진면목을 도저히 찾아내지 못하고 만 것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평범하게 읽힐 리가 없다.
영화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들의 깊고 넓은 정신 세계가 가끔 부러울 때가 있다. 그만큼 행복을 받아들이는 폭도 깊고 넓을 것이라고 믿기에. 크기는 작지만 빠르게 움직이고 혼자 생활하며 용감하다는 벌새, 이제부터는 벌새와 같은 젊은이들이 점점 더 많아질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겨야겠다.
예쁘지만 예민한 표정의 열네 살 아이, 은희가 현관문 앞에서 벨을 누른다.(p. 17) 아무리 벨을 눌러도 문이 열리지 않자 문이 부서져라 두드린다. 분노에 차서 소리도 지르는데, 문득 무언가를 발견한다.(p. 17) 호수가 달랐던 것이다. 멍한 표정의 은희, 자신을 가다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으로 한 층 올라간다.(p. 17) 비로소 집에 도착해 엄마와 마주한 은희는 아까까지의 사투를 얼굴에서 싹 지운다.(p. 17) 엄마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계속될 동안, 카메라는 은희의 얼굴을 응시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는 은희. 그러나 아이의 얼굴에 여전히 남은 불안함. 흔들리는 눈동자. 어떤 슬픔.(p. 17)
무엇보다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라는 문구를 처음부터 각인시킨다고 할까. 물론 영화의 표현은 은근하다. 플롯마저 그렇다. ‘1994년 10월 21일’에 이르기까지 은희의 일상을 잔잔하게 보여 준다. 하지만 그 내밀한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평온하다고 볼 수 없다. 부모의 무관심, 오빠의 폭력, 언니의 방황, 남자친구의 바람, 친구와 갈등, 하루하루가 전쟁이 아닐 수 없다. 은희는 그 전쟁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 은희가 큰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이제 혼자가 아니라며 자신에게는 세 명이나 있다고 낙서를 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는 냉혹할 정도로 은희를 다시 혼자 있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를 이야기한다. 은희가 다니는 노래방의 이름은 불어로 ‘함께’를 의미하는 AVEC다. 은희의 마지막 대사도 “네, 모두 다 있어요.”다.(p. 205) 초반에 불안해서 흔들렸던 은희의 눈동자가 옅은 미소를 지니게 된 데에는 영지의 힘이 크다. 영지는 은희를 어린 소녀가 아니라 동등한 인간으로 대한다. 불쌍해 보이는 사람들이 보여도 함부로 동정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알 수 없기에.(p. 134) 주제와 맞닿아 있는 대사도 영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
나는 내가 싫어질 때 그냥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해.
이런 마음들이 있구나, 나는 지금 나를 사랑할 수 없구나, 하고···
은희야,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도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p. 136)
우두커니 앉아 있던 은희, 문득 손가락을 하나둘 움직여 보인다. 스르르 움직이는 은희의 작고 여린 손. 은희, 손가락을 하나, 둘, 셋 움직여 보인다. 천천히, 마치 손가락을 처음 구경하듯이.
창문 너머로 가늘게 들리는 새들의 노랫소리, 피아노 소리, 한낮의 고요. (p. 197)
은희의 손가락은 벌새의 날개와 같다. 손가락의 움직임과 날갯짓, 둘 다 자세히 보면 신기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영지 역시 세상이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고 말한다.(p. 205) 그리고 알 수 없다고. 삶이 희미해진 야광별을 새것으로 교체하는 것만큼 단순하다면 조금 편해질까.
(v.o)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p. 204)
영지의 이 대사에 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 답이 아니더라도 살아갈 힘은 될 것 같다. 김보라 감독은 ‘작가의 말’을 통해 “벌새를 만드는 과정은 집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 비로소 집을 찾게 되는 과정이었다.”, 라고 토로하고 있다.(p. 10) 우리가 지금 살기 힘든 이유는 집이 없는데 없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자신이 힘들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지도. 이 책, 혹은 영화가 각성의 길로 인도하지 않을까 싶다. 각성 역시 쉽지 않겠지만, 꼭 필요한 것 같다. 함께 무언가를 나누기 위해서는.
은희야. 너 날라리가 되면 안 돼.
공부 열심히 해서 여대생이 돼야 해.
그래야 무시 안 받고, 영어 간판도 잘 읽고 캠퍼스에서 책 가슴에 이렇게 끼고 돌아다니지. 응?
그래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마.
함부로 동정할 수는 없어.
알 수 없잖아.
선생님.
제가 불쌍해서 잘해 주시는 건 아니죠?
엄마. 나 사랑해?
은희야. 너 이제부터 맞지 마.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같이 맞서서 싸워.
절대로 가만히 있지 마.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