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스트라면
<아무튼, 하루키>를 읽고
아무튼 시리즈 세계관에는 다양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흥미롭게도 실존 인물을 다룬 책은 현재까지 두 권이 나왔는데 무라카미 하루키, 장국영 순으로 출간되었다. '하루키스럽다', '하루키스트', '하루키 월드' 등과 같은 신조어는 물론,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때마다 열성 팬들이 모여 결과를 기다린다는 소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루키는 현대 문학계에 살아 있는 레전드로 불리고 있다. <아무튼, 하루키>는 그의 원서를 읽기 위해 일본어를 전공하고 그의 책을 의뢰받는 날까지 번역을 계속하겠다고 말할 만큼 그를 좋아하는 저자가 쓴 '하루키스트의, 하루키스트에 의한, 하루키스트를 위한' 책이다.
책장을 넘기기 전, 책표지에 그려진 '곰'과 '맥주' 그리고 '이지수'라는 왠지 낯설지 않은 이름을 한참 들여다 보았다. 최근 읽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쓴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와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의 옮긴이로서 역자의 말에서 만났던 터라 구면이었던 것이다. 하루키의 작품에 등장했던 곰이 하루키가 즐겨 마신다는 맥주병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이의 이름이 '김참새'라니 여러모로 예사롭지 않은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타나베: 봄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처럼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또랑또랑한 귀여운 아기 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놀이 안 할래요?'하고. 그래서 너와 아기 곰은 서로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어때, 멋지지?
미도리: 아주 멋져.
와타나베: 그만큼 네가 좋아.
(331쪽, 『상실의 시대』 中)
"맥주의 좋은 점은 말이야, 전부 오줌으로 변해서 나와버린다는 거지. 원 아웃 1루 더블 플레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거야."
(24쪽,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中)
저자는 책의 원고를 쓸 때면 하루키의 책이 등장하는 자기 인생의 장면들을 머릿속에서 뒤져봤다고 말한다. 홀로 타향의 침대 위에서 읽었던 『노르웨이의 숲』을 떠올리며 청춘의 일과 사랑을 추억하고, 하루키의 미국 생활이 담긴 에세이 『이윽고 슬픈 외국어』 속 한 문장인 "외국어를 말하는 작업에는 많든 적든 '안됐다면 안됐고 우스꽝스럽다면 우스운' 부분이 있다"처럼 '낭패(狼狽)투성이'였던 일본 유학생활을 들려준다.
또한 육아로 인한 손목 통증을 견디며 귀중한 시간을 바쳐 읽었던 『기사단장 죽이기』에 대해서는 실망감(을 넘어선 배신감)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찐팬으로서 다음 작품은 하루키스럽길 바라며 계속 응원하기로 한다. 『1973년의 핀볼』의 문장은 반려묘 '디'와 처음 만나서부터 헤어지기까지 그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되돌아보게 하는데, 하루키가 고양이에 관해 쓴 에세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건 오래전에 죽어버린 시간의 단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 안 되는 그 따스한 추억은 낡은 빛처럼 내 마음속을 지금도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이 나를 사로잡아서 다시금 무의 도가니에 던져 넣을 때까지의 짧은 한떄를 나는 그 빛과 함께 걸어갈 것이다.
(107쪽,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다」-『1973년의 핀볼』中)
무엇보다 현재 번역가로 활동하는 저자가 회사와 출판사를 거쳐 마침내 번역하는 사람이 된 마법같은 순간과 번역하는 일에 대한 고민을 하루키의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하루키가 어느 날 야구장에서 타자가 친 2루타를 보고 자신도 소설을 쓸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 것처럼,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찾은 송정역 맥도날드 2층에서 저자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원문을 한 줄 쓰고 번역하기를 반복하다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번역은 기본적으로 기술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대체로 일상적으로 할 수 있다"와 『장수 고양이의 비밀』에서 "처음부터 독특한 맛을 내려고 노린다면 번역자로서는 이류이며, 번역의 참된 묘미는 세세한 단어 하나하나까지 얼마나 원문에 충실하게 옮기는가에 있다"는 하루키의 말들에 적극 공감하며 저자는 시대를 견디는 번역을 해나갈 것을 다짐한다.
구달: 난 일문과 학생들이 하루키 팬이라는 걸 숨기는지 밝히는지가 궁금해.
(<아무튼, 양말>을 쓴 그 '구달' 작가다.)
지수: 우리 세대는 다들 좋아했으니까 그냥 좋아한다고 말했어. 나도 일문과 왜 왔냐고 물어보면 하루키 좋아해서 왔다고 하고. 근데 다자이 오사마는 좀 다른 것 같아. 다들 다자이는 속으로만 좋아하지 겉으로는 떳떳하게 말을 못 하더라고.(웃음) 너무 자기도취에 빠진 것 같고, 풋내 나는 청춘 느낌이 있어서겠지. 하루키는 그런 면에서 자기 연민이나 자기도취 없이 담백하잖아.
(145쪽, 「작가에게 바라는 것」-『양을 쫓는 모험』中)
군복무 시절 선임의 관물대(내무반에서 옷이나 물품, 장비 따위를 정리하여 놓는 장) 한 편에 꽂혀 있던 <상실의 시대>를 보고 난 뒤 호기심이 일어서 휴가 때 찾아 읽었던 것이 나와 하루키의 첫 만남이었다. 이제는 흐릿해진 스무살 청춘의 멜랑콜리를 알려준 책이었고, 뒤이어 <해변의 카프카>와 <1Q84>를 끝으로 그의 소설은 더이상 읽지 않고, 이따금 에세이를 집어들어 하루키의 일상을 엿보고 있다. 어쩌면 책속에 저자와 출판계 친구들의 대화처럼 그 말랑말랑함이 예전엔 좋았으나 하루키도 변했고 나도 변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하루키는 하루키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떠난 게 아니라 작가와 번역가 그리고 루티너로서의 다양한 삶을 계속해서 작품들 속에 변주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의 바람대로 여러 세대의 하루키 팬들 안에 잠재된 그에 관한 기억이 저마다의 이야기로 <어쨌든, 하루키>, <여하튼, 하루키>, <좌우간, 하루키>와 같은 책들로 새롭게 태어나길 바라본다.
《아무튼, 하루키》
: 그만큼 네가 좋아
이지수 지음 [제철소]
짤막한 독후기 - ‘아무튼, 하루키’
‘아무튼’ 시리즈는 특정 소재에 대한 애정을 지닌 저자가 해당 주제에 대해 글로 쓰는 프로젝트다. 연필 혹은 떡볶기 같은 일상의 소재들도 대상이 된다. 다만 이런 주제로 책 한 권을 써 내는 일은 대상에 대한 애정이 아니면 쉽지 않을 것 같다. 덕후가 된다는 것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아무튼, 하루키》를 읽어보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무겁고 버거운 주제의 책을 읽고 난 후 집어든 책이었다.
하루키와 관련하여 한 권의 분량으로 에세이를 써낸 저자는 하루키 덕후다. 학창시절에 하루키를 읽었고, 원서로도 읽고 싶어 일본어를 전공한 사람. 물류회사, 책과 관련한 직업을 거쳐 번역가로 일한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라는 표현 그대로, 하루키의 작품들은 저자의 삶(공부와 일)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셈이다. 하루키의 모든 작품을,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그의 문장이 입에 맴도는 정도라면 진정한 ‘하루키 덕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책으로 삶의 방향이 결정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할 테다.
저자는 불타던 학창 시절의 연애담도 솔직하고 담백하게 풀어놓았다. 나는 “슈뢰딩거의 파스타”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과 전공자의 비애다. 대학을 졸업한지 오래되었건만.. 이런 부분에서 웃다니...(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만 웃는다.) 내가 처음 하루키를 만난 것은 대학시절일 텐데, 아마 《상실의 시대》였을 것이다. 책 전반을 흐르는 묘한 정서가 꽤 오래 남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하루키를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몇 년 전에 읽은 달리기에 관한 에세이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하루키는 성실하고 노력하는 작가다.
《아무튼, 하루키》에서 저자가 반려묘와 사별한 부분을 읽을 때, 한 달 전 세상을 뜬 우리 집 반려견도 생각났다. 한 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집에 온 녀석은 17년을 우리 가족과 함께 했다. 나이가 들어서 대소변을 잘 가리던 녀석이 집 안 아무데나 누기 시작하고, 걷다가도 주저앉기도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항상 녀석의 소변을 밟을까 조심하던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우리 가족을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다가온다. 식구들이 집을 나가거나 올 때면 항상 현관에서 맞아주던 반려견이었다.
번역가로서 자신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저자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번역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을 통해 다져진 직업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에서는 저자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었다. 매일 번역의 세계와 반려묘의 세계, 그리고 하루키의 세계를 넘나들며 분주하지만 순간순간 정성껏 살아가는 저자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밋밋할 수 있는 우리의 삶 속에서 때론 바둥거리면서도 특정 대상에 대한 애정이 먼저인 사람의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있었다.
누군가가 특정 대상에 대한 덕후라면, 그 대상은 이미 삶의 일부가 되어있는 상태일 것이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잡다한 지식 이전에, 그에겐 대상에 대한 사랑이 무엇보다 먼저일 것이다. 대상의 좋은 점과 부족한 점 모두를 속속들이 알고, ‘그럼에도’ 그 대상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것,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판단기준에 그 대상이 중심이라는 것. 만약 덕후의 조건이 이런 것이라면, 저자야말로 ‘하루키’ 덕후인 셈이다.
나는 책을 사는 것만 좋아하고, 읽지는 않는 스타일이다. 오죽하면 책을 사놓고 방치해서 종이색깔이 노랑이로 변하고서야 슬쩍 서문부분만 보고 닫고, 책의 존재를 까먹어버린다.
그러다 잠실의 한 서점을 갔는데, 거기에 '아무튼' 시리즈 책들이 매대에 참말로 이-쁘게 나열되있었다. 한 눈에 사로잡힌 나는, 하나씩 제목들을 읽어보았다. 다양한 주제의 에세이를 내고 있더랬다. 그 중에 눈에 확! 돋보였던 책은 《아무튼, 하루키》였다. 책 표지에 곰돌이가 맥주를 들고 나와 한잔 하려는 듯 보고 있고, 또 그 푸근한 인상으로 오늘 하루 어땠는지, 조근조근하게 내 얘기도 들어줄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게 종이가 노랑색으로 바뀔정도로 책을 펴보지도 않는데, 과연 내가 읽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집에서도 생각나면 사야겠다. 했는데, 다음날까지 책 내용이 궁금해서 예스24로 구매해버렸다.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광팬이었던 저자가 그 책과 연관된 자신의 에세이를 적었다.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무라카미 하루키를 잘 모른다. (표지에 끌려서 산 사람) 책 내용은 과연 나한테 재밌을까? 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 재밌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문학을 모르는 알고 있을 정도의 소설가이며, 그의 책들을 읽어온 '광팬' 독자였던 작가는 그 책에 맞는 추억거리를 하나씩 풀어주었다. 에세이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데, 이 작가님의 이야기는 왜 이렇게 흥미진진한지 모르겠다. 성공담도 아니고, 구구절절한 아닌, 그냥 일상얘기를 하듯 하루키 책과 연결된 지난 추억을 얘기하는데, 그게 더 많은 흥미를 끌게 해주었다. 중간중간 90년대 이야기로 공감을 하기도 했고, 감명 깊어 줄까지 쳐놓을 정도로 마음을 울리는 내용도 있었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다 똑같지 뭐, 라고 생각했는데, 또 완전히 똑같은 것만은 아니었다. 앞길을 먼저 겪은 인생 에피소드, 그냥 언니한테 이야기 듣듯이 보았다.
아-이래서 표지에서 곰돌이가 나한테 맥주 한잔 하자고 한걸까?
맥주 한잔하면서 보기 딱 좋은 책이라고. 그렇게 나한테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앞에서 구구절절한 사랑이야기가 아니여서 좋았다고 했지만, 사랑 이야기가 안들어가는 건 아니다. 덤덤하게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무라카미 하루키의 「한밤중의 기적에 대하여, 혹은 이야기의 효용에 대하여」 와 함께 소개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인상깊은 구절도 여기서 나온다.
p.46
우리가 서로에게 기쁨만을 주었던 시작점으로 올라가 그 애의 자전거 소리가 한밤의 기적 소리 같았다는 생각에 이르면, 이제는 그 장면이 작고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느껴진다. 흔들면 기적 소리가 나는 그 유리구슬은 가끔 꺼내 보면 예뻐서 좋지만 그 매끄러운 표면은 더 이상 나를 아프게도 가렵게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에 작은 슬픔과 거대한 안도를 동시에 느낀다.
사랑에 죽고 사는 로맨스파는 아니지만, 손에 꼽는 연애(거의 안해봄)를 해봤지만, 참 공감되는 말이였다. 예전에는 그게 특별하다고 느꼈고 가슴 아픈 연애였다 싶었어도 시간이 흘러 ‘그때는 그랬지’하며 하나의 추억처럼 회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참 이쁘게 비유했다. ‘작고 투명한 유리구슬’ .
두 번을 보게 되는 마성의 아무튼, 하루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p131~p160은 그 책을 읽어본 사람만이 공감하며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을듯 하다. "양을 쫓는 모험" 나도 한번 읽고서, 다시 에세이를 읽어봐야겠다. 그럼 더 재밌어지지 않을까? 말로만 하지 말고, 바로 구매해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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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를 나는 두가지의 특징으로 단순화 시켜 버린다. 하나는 세련된, 서구적인 감성의 이미지이다. 재즈와 위스키도 일반화 시킬 수 있는 감성이다. 그는 재즈를 비롯한 서양 팝 음악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또 서양 작가들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배경으로 소개한다. 하루키의 많은 외국에서의 경험 그리고 글로벌 면을 보여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섹스 어필하는 퇴락한 이미지, 역시 60대 분위기인 히피를 연상시키는 이미지이다. 이것이 알콜로 맥주가 나오고, 혹은 재즈가 나온다. 하지만 이미지는 매우 고급이다. 그래서 이것을 재즈와 위스키로 일반화 시킨다.
다른 하나의 이미지는 성실함이다. 앞의 이미지로 보아서는 뭔가 일탈을 꿈꿀 것 같지만, 하루키의 이미지는 성실이다. 그는 계획적으로 일하며, 꾸준하게 일하다. 매일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 달리기를 하며, 작가인 소설가로서의 매일 성실한 글쓰기를 한다.
이런 이미지가 한국의 작가에게서도 나타난다. 아무튼 김연수, 혹은 아무튼 김영하가 나와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영하 작가가 가장 비슷한 이미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가 산책자 시리즈를 낼때 하루키를 따라 가나 했다. 아마 가장 인기가 있고, 가장 세련된 작가가 아닌가 생각한다. 학생 운동 세대인 것도 비슷하고, 그는 시대를 이끌어 나간다.
이 책은 하루키를 좋아하는 번역가인 이지수 번역가의 에세이이다. 이지수 번역가의 생애의 주요 부분을 하루키의 소설과 연결시켜 잘 구성하였다. 이 책에서 우에노와 시부야가 나왔을 때 약간 흥분하였다. 아직까지도 나는 우에노는 영등포보다 익숙하고, 시부야는 홍대보다 익숙하다. 그리고 대담에서 요시모투 바나나의 "키친"과 에쿠리 가오리의 "낙하하는 저녁"을 보았을 때, 그때 정서는 비슷했구나 생각해본다.
나는 앞 부분에서 책 내용과는 거의 관계없는 나의 하루키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특히 하루키하면 음악을 빼 놓을 수 없고, 재즈가 가장 일반적인 것이다. 작가를 보는 눈이 다를 수 있고, 나와는 많이 다르구나 생각하였다.
나는 최근에도 하루키 책을 읽고 있다. 올해 읽으려고 한 것이 "노르웨이 숲"이였는데 읽다가 포기했다. 앞 부분을 몇번 읽고 만다. "상실의 숲"을 어떻게 읽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나를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나이들어 읽기 힘든 부분이 확실하게 존재한다. 지금은 두꺼운 하루키 책을 시간날 때 하나씩 읽고 있다. 하루키 잡문집이라는 빨간 책이 있다.
이 책을 읽고, 하루키의 첫 작품을 읽지 않았으니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번역가님도 이 작품을 추천하고, 제일 많이 소개하고 있다. 오전에 유튜브를 보니 편집자 K 영상에 이지수 작가님과의 함께하는 영상이 소개되는 것이 아닌가! 물론 나는 편집자 K의 구독자이다. 그래서 유튜브가 참 많은 부분을 감시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었다.
이 책은 중학교부터 시작된 작가와의 팬심이, 대학 전공을 이끌고, 또 직업으로 번역을 삼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 하루키가 많은 작품을 쓰고, 또 재 번역되는 것도 많으므로 작가님 팬심에 따라 하루키의 작품을 번역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잘 읽었다.
어떤 분야에서 커다란 업적이나 성과를 보인 한 사람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바뀌는 건 어쩌면 흔한 일일지도 모른다. 인생이란 적어도 자신이 추종하고픈 누군가의 삶을 알게 모르게 선망하면서 자신의 삶을 천천히 꾸려나갈 테니까. 인생의 롤모델까지는 아니어도 세상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유지해오던 관심의 물꼬를 순식간에 돌려놓을 만한 사람은 언제든 나타날 수 있고, 그렇게 바뀐 관심으로 인해 삶은 조금씩 변화하는 게 아닐까. 그게 좋은 방향이든 아니든 그 당시로서의 나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을 테니까 말이다.
나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림에는 문외한일 뿐만 아니라 관심조차 없던 내가 후기 인상파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의 서간문을 엮은 책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읽은 후 반 고흐의 그림과 미술사에 대해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게 된 걸 보면 나의 인생 역시 빈센트 반 고흐로 인해 조금 달라졌던 게 아닐까. 나와 같은 경우는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 흔하디 흔한 사례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키는 분야는 비단 미술 분야에서 그치는 게 아니고, 음악이나 문학, 정치, 경제, 역사 등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전 분야를 관통한다.
<아무튼, 하루키>를 쓴 이지수 번역가 역시 그러한 케이스인 듯싶다. 열다섯 살 중학생 시절부터 하루키 소설에 빠져들었고, 하루키를 누구의 중개도 없이 읽고 싶어서 '히라가나'도 모르면서 일문과에 진학하였고, 대학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한 후 돈을 모아 교환학생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고 하니 용기도 가상하고, 이만하면 하루키 덕후로서의 자격은 충분하지 않을까. 물론 하루키스트를 자처하는 편혜영 작가, 김연수 작가, 임경선 작가 등 하루키 문학의 덕후를 자처하는 작가들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지수 작가에 못지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임경선 작가는 하루키의 흔적을 따라 일본 여행을 했을 정도로 하루키에 대한 각별한 팬심을 드러낸 것으로 알고 있다.
"하루키는 나에게 작가가 독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근사한 경험을 안겨줬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그 작가의 저작과 함께 보내게 해준 것. 그리하여 나의 내면과 삶이 실제로 어떤 변화를 일으킨 것. 그것만으로도 노벨문학상을 받든 말든 하루키는 나에게 언제까지나 가장 특별한 작가일 터다." (p.166 '에필로그' 중에서)
이 책의 구성은 하루키의 초기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비롯하여 <노르웨이의 숲>, <양을 쫓는 모험>, <스푸트니크의 연인>,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기사단장 죽이기> 등 하루키가 쓴 장편소설을 위주로 다루고는 있지만 <이윽고 슬픈 외국어>, <무라카미 라디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등의 에세이와 <1973년의 핀볼>과 같은 단편소설도 등장한다. 지면만 허락되었더라면 작가는 어쩌면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벽돌책 한 권도 뚝딱 써내려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여담이지만 하루키와 미즈마루의 일화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기차 식당 칸에서 비프커틀릿을 먹는 로멜 장군'의 삽화에 관한 이야기다. 하루키는 어떤 삽화든 척척 그려내는 미즈마루가 한 번이라도 고심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기차 식당 칸에서 비프커틀릿을 먹는 로멜 장군'이라는 주제로 글을 썼으나 미즈마루는 손쉽게 그려버렸다. 이에 하루키는 설령 '수염을 깎는 카를 마르크스를 따스한 눈길로 지켜보는 엥겔스' 같은 난도 높은 주제를 던져도 미즈마루에게는 누워서 떡 먹기일 거라며, 그렇다면 아예 단순한 주제로 골탕을 먹여보자 하고 두부에 관한 글을 세 편 연속 썼지만 미즈마루는 이 역시 아무렇지 않게 쓱쓱 그려버렸다." (p.128~p129)
사실 이 책을 접하는 많은 사람들은 작가가 하루키 문학에 대한 한 사람의 팬으로서 사심 가득한 편파적 평가의 글로 지면을 가득 채우지 않았을까 하고 지레 의심할 수도 있다. 책을 펼치기도 전에 '아마 그럴 거야.' 하고 색안경을 낀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지극히 사랑하는 한 명의 애독자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쓴 성장담이자 지금까지의 인생 후기쯤으로 읽힌다. 작가의 성장과 더불어 하루키의 작품이 늘 곁에 있었을 뿐이다. 나 역시 하루키 문학의 애독자로서 작가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았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한 사람의 롤모델을 발견한다는 건 자신의 삶을 긍정적인 쪽으로 변화시키고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자 행운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그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 지금만 극복하면 봄이 오는 거야.
나가 걷고 돌아오는 길에 아직 속울음이 함께 한다. 혼자서 보행한다는 감격과 걸으며 밀어닥치는 상념과 추억들 사이에서 마음이 마음대로 일렁인다. (수컷) 매미도 아니면서 늦여름 바보 같이 혼자 운다. 접이식 우산은 아픈 팔로 아령처럼 들고 국민체조를 하듯 걷는다. 겉은 헛둘헛둘, 실상은 뒤뚱뒤뚱.
어제는 라디오 짤에서 심리학자 김경일의 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피피티에 띄우는 글귀처럼 잘라 말하는 쇼잉을 경계하다가도 오락가락하는 정신에는 역시나 짧고 굵은 말이 위력을 발휘함을 깨닫는다. 진행자가 자가격리를 겪은 뒤 우울감이 생겼다고 하니 모든 증세를 ‘코로나 블루’ 안에 집어넣지 말라고 지적했다. 여자들의 대화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침!ㅋ 과연 지금 느끼는 심리상태가 코로나 이후에 발생한 것인지 먼저 따져 묻는 거리두기를 요구했다. 그래도 코로나19가 물 밑 아이스버그를 더 드러나게 하는 건 맞을 터인데^^.
김경일 선생님의 말씀에 내가 왜 <아무튼, 하루키>를 읽으려 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기존의 루틴이나 리듬이 깨졌을 때는 다른 리듬을 만들어 회복하면 된다는 현실적인 대응이 딱 겹쳐졌다. 나약하게 편리한 거대 이름 뒤에 숨기 전에 삶을 정리하고 자잘한 성취물을 다시 정하라는 것이다. 내가 아는 작가 중에 성실과 지속성(항상성), 자기취향과 방식을 하루키처럼 강렬하게 뿜어내는 사람도 없다. 흔들리지 않는 스타일. 그렇다고 꼰대처럼 고루하게 무게 잡고 말하지도 않는다. “시대 보정”을 요하는 불편한 부분이 있지만, 감각적인 문장으로 일상에 생기와 유희를 더할 줄 안다. 하루키 소설에는 거의 까막눈이고 산문을 주로 읽은 나에게 <아무튼, 하루키>는 담백하고 진솔한 감동을 주었다. 책의 기획과 구성이 저자의 삶의 키포인트와 ‘턴’을 적절히 관통하고 있어(바람이 잘 통하는) 좋았다.
하루키가 좋아 일문학을 전공하고 그의 소설을 번역하는 날을 꿈꾸며 번역가로 살아가는 저자가 넘나 사랑스럽다. 투명하고 긴 호흡이 필요한 꿈을 머금고 달려온 지난날을 하루키 작품을 거점으로 가볍게(명랑하게) 밟아나가는 걸음. 그 길에 소녀와 여자와 중년 워킹맘이 스쳤다. 누군가의 성장과 아직 멈추지 않은 여정을 바라보는 것은 감동적이다. 이십대 초반에 닥치는 대로 읽어댔던 어느 소설가와 죽기 전에 해외에서 포스트닥을 밟고 싶은 흐릿한 그림까지.. 그녀의 회상과 비전 속에 내 꿈의 단편들과 재회하니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다.
번역가 이지수는 편집자K의 유튜브 방송에서 먼저 보았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독서 모임으로 끝나는 설정이 끈끈한 울림을 준다. 저녁 동네를 산책하다보면 중년 이상의 사람들이 함께하는 모습에 유독 시선이 머문다. 각자의 길을 가며, 중간 중간 나란히 걷는 찐우정이 아름답다. 테이블 위에 놓인 책은 단연코 최고의 피피엘이 아닐까한다. 그들이 다소 험난할 변곡점 삼십대 후반을 슬기롭게 등반하여 사십대에도 각자의 영역에서 반짝거리길 기도한다. 하루키스트들의 “하루키적 모먼트”와 우테크여, 잠들지 마라!(Hear the wind sing).
[밑줄 긋기]
# 소화시키지도 못한 채 통째로 외워버려서 마음에 엉겨 붙은 문장들이 완전히 융해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쩌면 지금도 융해되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상상은 매번 바닥없는 늪에서 나를 건져 올려줬다. 나의 불완전한 이해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던 그 느슨한 구원의 손길을 나는 지금도 느낄 수 있다.
# 하루키의 문장은 언제까지고 나를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충직한 개처럼, 끈기 있는 스승처럼, 배신하지 않는 연인처럼.
# 노크도 없이 휙휙 들어오는 K의 이런 말들에 나는 매번 움찔하면서도 속으로는 반가웠다. 어쩌면 무람없이 내게 그래주기를 바랐던 것일 수도 있다. 나 역시 어느 순간 담백함을 던져버리고, 끈적하게 굴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우리 사이가 밀착되어 있지 않은 것이, 서로에게 크고 작은 비밀이 있는 것이 좋다. 딱 붙어 있기만 하면 서로의 표정을 잘 살필 수 없다. 적당한 거리에 있어야 팔을 떼어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등도 토닥여줄 수 있다.
# 예전에는 주인공들이 삶에 허무를 느끼고 세상과 거리를 두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제 보니 항상 자신을 단련하고, 일상성을 유지하고, 군살을 체크하고, 운동하고, 그런 행동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인 것 같아.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할까.
곰이 맥주병을 들고 있는 귀여운 표지에 더해 하루키라는 작가에 대한
이야기라니~ 아무튼 시리즈를 이제는 한권씩 꼭 찾아보게 되면서
기다려졌던 책이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재미나게 읽어볼 수 있었다.
나의 한 시대를 한 작가와 함께 그것도 청춘의 시작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참 부러운 일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생때부터 주욱 함께 해오고 일본어를 전공으로 하면서 이제는
번역까지 하고 있는 작가를 통해 알아본 하루키의 여러 소설이야기만
읽어도 소개된 소설들이 궁금해서 찾아 읽어보고 싶어진다.
사실 하루키를 학생때 접해보지 못했고 처음 본 소설이 상실의 시대였는데
이름이 알려진 소설이었지만 와 닿지 않았다. 너무 늦게 읽어버린 탓이었을까?
2009년에 나온 1Q84를 찾아읽고 하루키의 새로운 소설이 나오면 읽기 시작하면서
에세이를 읽게 되고 하루키라는 소설가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거 같다.
독특한 이야기의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좋아하지만 흡입력있게 읽히는 소설도
조금씩 좋아하게 되었다.
작가의 첫 시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부터 기사단장 죽이기까지
실망하게 되는 소설은 있어도 그 시간들 속에 깃든 추억과 이야기에
푹 빠져 읽게 된다.
하루키 소설은 젊었을때 읽어야 한다고 책에서 누군가가 그랬다지만
그래도 아직 읽어보지 못한 소설들을 찾아서 읽어보고 싶어진다.
국내 비행을 자주하는 편이라 아무튼 시리즈는 한시간 짜리 비행에 맞춤한 책이다.
가볍게 들고 비행 중에 딱 읽을 수 있는 분량이 좋다.
아무튼 시리즈를 대체로 다 읽은 것 같고, 가장 최근에 나온 하루키 편도, 하루키에 대한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다시 읽어보게 됐다.
하루키는 개인적으로 대학생 시절 독서와 글쓰기에 취미를 갖게 해준 고마운 작가이기도 한데,
그 추억으로 여전히 신작이 나오면 예약을 걸어두고 다급히 받아 허겁지겁 읽게 된다.
그런 추억들을 저자와 공유할 수 있어서 읽는 내내 흐뭇했다.
한 시대를 같이 공유한 작가가 있다는 건 소중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