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불평등>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인 존 머터가 쓴 책이다. 그는 2005년 미국 역사상 최악의 자연재해라 불리는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그 이후 재난에 대처하는 불공정한 사회의 이면을 목도하고 사회과학으로 연구 방향을 전환하고 연구를 계속한 끝에 이 책을 펴냈다.
<재난 불평등>은 <자연재해, 선악의 중개자>, <지식 불평등과 재난>, <학살당한 아이티와 혼란에 빠진 칠레>, <물의 장벽, 죽음의 대양>, <미얀마, 무관심이라는 악행>, <충격에 뒤덮인 뉴올리언스>, <재난을 기회 삼는 이들>, <재난, 끝이 아닌 시작>으로 나누어져 있다.
저자에 의하면 폭풍과 달리 지진은 예측이 어렵다고 한다. 폭풍이 예측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매뉴얼에 따라 주민을 대피시킨다든가 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인명피해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아이티 지진이나 필리핀, 스리랑카, 칠레, 미국 뉴올리언스 등에 발생한 다양한 재난을 목도하고 그것이 남기고 간 피해와 그 이후의 모습은 저마다 달랐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재난 불평등>에 담긴 내용들은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충격적인 진실이다. 아이티, 미얀마 정부처럼 국민을 제대로 살피지 않는 국가에서의 부패와 재난 이후의 사건들은 그렇다 쳐도 미국의 한가운데에서 일어난 뉴올리언스의 비극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재난 불평등>은 재난이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 애초에 재난이 발생했을 때 가진 자들은 그것의 피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재난의 한가운데에 선 자들은 가진 게 없는 자들이다. 저지대에 사는 가난한 주민들, 그들이라고 그런 곳에 살고 싶겠는가. 아이티 지진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이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의 국민이었을 때 맞닥뜨릴 수 있는 최악의 비극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평상시에 가장 배려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재난 시에도 가장 큰 고통을 당할 가능성이 많다.”(142쪽)
그렇다면 미국의 한가운데에서 일어난 비극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 나라의 부와 관계없이 그들이 무능한 지도자를 가진 탓이었다고 해야 할까? 저자 역시 아이티에서의 상황과 뉴올리언스의 상황을 비교하는 게 애초에 무리라는 걸 인정하지만, 두 재난에는 닮은 구석이 너무 많다. 가난해서 저지대에 살 수밖에 없는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소수지만 대부분의 부를 거머쥔 백인들을 미국 국적을 갖고 있다고 해서 동등한 국민으로 보기엔 어려울 것이다.
가난 때문에 인종 때문에, 그들은 국가의 관심 밖에 있어야만 하는가. 저자가 개정판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2020년 전대미문의 전염병이 남긴 상처는 나라마다 달랐고, 개개인에게 남긴 데미지도 달랐다. 화이트 컬러는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며 전염병의 위협으로부터 충분히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지만, 몸으로 노동하는 이들은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터로 나가야 했다.
가난한 가정의 가장이 코로나로 목숨을 잃은 것과 중산층 가정의 가장이 목숨을 잃은 것 또한 그것이 남긴 상처와 회복의 과정은 같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재난이나 전염병조차 이토록 잔인하게 인간을 가려서 다른 무게의 고통을 주는 것일까. 지난여름 서울에 내렸던 비가 할퀴고 간 자리도 그랬다. 그들 중 누군가는 한번 빼앗긴 삶의 터전을 어쩌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뉴올리언스의 누군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한 나라의 부가 자연재해로 인한 최악의 피해를 막아주는 잠재적인 방패가 될 수 있듯이, 개인의 부 또한 방패가 된다. 같은 사건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재난이라도 다른 이에게는 그저 약간의 불편 이상이 아닐 수도 있다.”(141쪽)
단단한 삶의 기반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웬만한 타격을 입더라도 회복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경제적 능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 치자. 하지만 빈곤을 온전히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는 걸 감안하면 정부가 어느 정도 보완의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자신이 속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해야 할 세금 납부 같은 의무들을 기꺼이 수행하고 있는 것일 테다.
미얀마는 재난 이후 오히려 재건을 명목으로 국민들의 토지를 착취했다고 한다. 마땅히 정부로서 해야 할 국민을 보호해야한다는 의무는 하려고 든 적도 없으면서 오히려 국민을 갈취한 것이다. <재난 불평등>을 읽고 재난은 그 나라의 정부의 부패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티에서 건물들이 맥없이 무너진 것도 제대로 된 건축 규정에 따라 지어지지 않았던 탓이었다. 죽지 않아도 될 소중한 생명들이 스러져 간 것이다.
“아이티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가난, 가난한 사람에 대한 무관심, 강력한 정부의 부재 때문에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에 사람들이 깔려서 죽어나갔다. (…) 건물은 허술하게 지어졌기에 무너진다. 정말 그렇다.”(135쪽)
대한민국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엄청난 행운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아이티에서 태어났다면 성인이 되기도 전에 영양실조로 굶어죽었거나, 운 좋게 살았더라도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을 것이며, 고등교육을 받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한 사람의 처지를 개개인이 타고난 운에만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개개인 간의 차이를 줄이는 게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이 아닐까. 하지만 과연 그 차이가 언제쯤이나 조금이라도 좁혀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히려 갈수록 더 벌어져만 가는 건 아닌가 싶다. <재난 불평등>은 내게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 그 차이를 줄이기 위해 우리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부와 가난의 사회적·지리적 질서가 계급 사이의 물리적·경제적 차이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재난은 항상 저소득층에게는 피해를, 상류층에게는 단순한 불편만을 끼침으로써 그 차이를 더욱더 벌린다는 사실이다.”(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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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챠에서 본 영국드라마 years and years에서 가까운 미래의 모습들이 나온다. 기후이상으로 인해 계속해서 비가오고, 그로인해 빈민층들은 집을 잃게되고 다른사람들과 집을 쉐어해야하는 상황들이 발생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어즈앤 이어즈의 그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이 책은 재해가 단순한 자연현상에 그치지 않고 정치·사회·경제적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드러낸 책이다. 저자가 포착한 지점은 재앙이 낳는 ‘불평등의 민낯’이다. 이 책은 왜 재난 사망자의 다수가 빈민층인지, 그리고 재난 발생 당시와 그 전후의 극복 과정에서 사회의 불평등 구조가 재난에 투영되고 답습되는 이유를 찾아 나간다.
재난 속에서도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미 삶이 힘든데, 왜 재난의 결과를 고통으로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걸까? 이에 대한 의문이 이 책으로 이어진다.
코로나19같은 팬데믹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유한 나라에 사는 국민들은 무료로 n차백신을 맞고 마스크를 쓰면서 이겨낼 수 있지만 어떤 곳에서는 백신 한번 맞기도 쉽지 않다.
다만 개정판에 코로나 19에 대해 조금 끼워넣고 비벼보려고 하는 느낌도 조금 없지않았다.
P. 5~6팬데믹은 자연재해인가? 그런 질문은 부차적이다. 그게 어디에 속하는지가 정말로 중요한가? 어떤 딱지를 붙이든 괴물은 괴물이다. 팬데믹을 다르게 분류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여타 자연재해에 쓸 수 있는 물리적 도구를 가지고는 그 현상의 자연적 측면을 이해할 수 없어서일 것이다. 이것은 생물학적 현상이다. 다른 어떤 재난도 사람과 사람 사이로 전파하지 않는다. 재난에 백신이나 혈청을 사용하는 경우도 없다. 팬데믹은 다르다.
P. 56~57스톡홀름 국제경제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형태가 동일한 지리물리학적 사건이 발생할 때 부유한 나라의 사망자 수는 가난한 나라 사망자 수의 30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국가가 발전하면 재난의 위험과 사망률은 낮아진다. 부유할수록 더 안전해진다는 말이니, 최상의 재난위험감축 전략은 부유해지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왜 이런 연구 결과가 나오는지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가난한 나라에는 재난 대비나 피해 경감을 돕는 기관이 없거나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고, 사람들 대다수가 부실한 건물에서 산다. 그런 기관들은 대체로 부의 산물이며, 재난으로부터 부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자연재해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재난은 목숨을(때로는 비극적일 만큼 엄청난 목숨을) 앗아가는데, 가난한 지역에서는 그 수가 더 커진다는 것이다.
P. 278~279‘부자가 이기고, 가난한 사람이 진다.’ 불평등이 극심한 세상에서는 자연재해의 결과 또한 불공평할 것임을 확실히 짐작할 수 있다. 재난은 어떤 면에서는 부유하든 가난하든 모든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지만, 결코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하지는 못한다. 재난은 모두가 서로를 끌어 주는 계기가 될 거라고 믿고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각 집단에 끼치는 영향이 매우 다르고, 각 집단이 대응할 방법도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에, 재난은 각자를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각 집단이 재난을 활용하는 방법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 부자는 이용하고, 가난한 사람은 못한다. 슘페터의 광풍은 부자의 요트에 바람을 불어넣지만 가난한 자의 부실한 탈 것은 가라앉게 만든다. 부자는 더 멀리 피할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은 빈곤의 덫에 갇혀 있거나 덫 안쪽으로 더욱 미끄러져 들어간다.
재난 불평등 : 재난은 왜 약자에게 더 가혹한가
같은 규모의 재난이 발생해도 장소와 시기에 따라 다른 크기의 피해가 나타난다. 이 책은 자연 과학자의 시선으로 재난을 분석한 책이다. 우리가 가장 최근에 겪은 재난은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이라고 볼 수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동일한 조건으로 전 세계로 퍼져나가 피해를 입혔지만, 그 규모는 나라마다, 인종마다, 계층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재난은 기본적으로 불균등한 특성을 지닌다고 하나, 오늘날 이 재난은 자연적인 현상을 넘어 사회적인 현상이 되었다. 재해를 겪은 나라가 기 부를 원한다면, 사망자 수를 부풀릴 가능성이 있다. 피해 규모보다는 사망자 수가 기부자들의 동정을 더 이끌어낸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재해는 사회적 선악의 중개자 역할을 한다. 냉정하게 분석하자면, 자연재해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대부분 경제적 관계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 사람들이다. 경제난과 부패를 겪는 나라 또한 통제하기 어렵다. 자본주의 사회인 21세기를 살아가며 이러한 상황은 불가피하며 필연적인 것일까?
재난 불평등의 원인을 다양한 측면에서 다소 심도있게 다루고, 자연 재해를 이해하려면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흥미롭기는 했다. 하지만 같은 내용이 너무 반복되고 사례들이 좀 번잡하게 느껴졌다. 명쾌한 책은 아니라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 "재난"이란 말을 쓴다는 것은,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게 자연 발생하는 지구의 리듬에, 아무리 겪어도 자연의 움직임을 도저히 예상 못할 것 같은 인간 사회의 리듬을 엮어내는 일이다. 그러므로 자연이 인간 본성과 만날 때, 재난은 불가피하다. (20p)
- 지배층은 재난의 충격을 완화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소득의 변화를 겪지 않는다. 반면 가난한 사람은 죽고, 심하게 다치고, 집을 잃는다. 그들은 이전보다 더욱 더 고통받는다. 조금이나마 갖고있던 것을 모두 잃는다. 그들은 큰 타격을 받는데, 경제적 타격을 입지 않는다. 그들의 경제활동은 집계되지 않으며, 규모도 너무나 작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은 중요하지 않고, 그들의 고통은 주목받지 못한다. 지배층은 확실히 이득을 볼까? 직접적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 비해 잃는 것이 적고 더 빨리 복구할 수 있기에 가난한 이들과의 격차는 더 크게 벌릴 수 있다. 불공평한 사회가 더욱 불공평해지고, 권력과 부는 더더욱 편중된다. (164p)
- 이 모든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부와 가난의 사회적, 지리적 질서가 계급 사이의 물리적, 경제적 차이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재난은 항상 저소득층에게는 피해를, 상류층에게는 단순한 불편만을 끼침으로써그 차이를 더욱더 벌인다는 사실이다. (257-258p)
작가인 존 머터는 지진에 대한 현상을 연구하는 연구자이자 과학자인데, 연구 주제 중 진도가 비슷한 지진임에도 가령 2008년 중국 쓰촨성 지진과 2010년 아이티 지진의 피해 규모가 보인 엄청난 차이에 착안하여 여러 지표를 연구하였다. 결과적으로 자연과학만으로는 현대에 벌어지는 재난을 예측할 수도, 방지할 수도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자연재해는 자연과학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대표적인 주제”라고 언급한다. 존 머터는 2020년 개정판을 내면서 코로나 팬데믹 이야기도 추가하였다. 코로나라는 전세계적 재난은 무엇보다 이 책에 잘 아울리는 사례였다. 결과적으로 재난은 매우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차원에서 불평등하다.
이 책에서 일부 계량경제학 연구자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자연재해가 경제 성장을 촉진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읽었다. 특히 2022년 이후 아프리카와 인도, 유럽에 불어닥친 폭염과 작년 겨울 미국의 난데없는 한파로 기후재난은 일상의 공포로 다가오고 있음에도, 그러한 주장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미얀마 군부정권의 이야기도 본래 자세히 알지 못했던 내용이라 새롭고 충격적으로 읽었다. 미얀마는 석유와 가스, 보석, 광물과 같은 천연자원을 통해 부를 생성하는데, 이 자원들은 소수 민족의 땅에서 대부분 얻고 있다. 그러나 미얀마 군부정권은 소수민족들에게 자원을 착취하는 만큼의 이익을 그들에게 절대 주지 않는다. 또한 미얀마는 전형적인 불로소득 국가로, 재생 불가능한 자원이 풍부하지만 성장 둔화 또는 경제 침체를 겪는 나라가 처한 역설적인 상황에 시달리며 군부 정권은 일반 국민들을 빈곤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타 국가들의 원조에 부정적인 입장으로, 특히 2008년 나르기스가 미얀마를 강타했을 때, 미얀마 정부는 인도 기상청의 예보를 무시하고 국민들에게 정보를 전달하지 않아 큰 사상을 야기하기도 했다.
이렇듯 재난은 국가의 상태와도 관련되어 불평등하게 다가온다. 국가의 부나 자원뿐만 아니라 정보 전달과 정부의 대응도 재난을 키우거나 피해를 줄이는 큰 요건이 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재난의 빈도와 강도는 점점 커지고 있다. 세계 전반에 걸쳐 과학기술의 발달과 절대적 부의 증가로 사망자 수는 줄었지만, 1960년에 비해 2010년에 발생한 재난 건수는 9배로 늘었으며, 늘어나는 재난 속에는 전 세계 사람들은 재난을 재난으로 인식하지 않고 날씨처럼 받아들이게 될 거라고 작가는 말한다. 최근 이베리아 반도의 폭염사상사 수나, 영국의 상황, 미국의 모기떼와 같은 상황을 보면 특히나 이제 기후재난은 국가의 부와 상관없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미래가 암담해졌다
어릴 때의 나는 재난에 대한 책과 기사를 접할 때 늘 막연하기만 했다. 일본에서 지진이 나면 싼다는 재난가방도 나와는 멀어보였다. 이후 살면서 몇 차례 지진을 겪었을 때도 조금 흔들리는 정도인데 큰 지진은 얼마나 무서울까? 라는 생각에 마냥 두려워만 했었다. 그런데 포항의 지진과 동해안의 산불 등의 자연재해와 재해에 대해 안일했던 탓에 미흡한 대처로 인한 많은 피해들, 그리고 전 세계를 강타하고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전염병 등을 보면서 재난은 이제 내게서 먼 일이 아니라는 걸 차츰 실감하게 됐다. 재난에 대한 생각과 경험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의 불평등 상황에 대한 이슈를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던 내게 이 책은 또 다른 긴장감을 준 책이다. (이렇게나 내용이 길어야 했을까 싶게 진부했지만...)
국가간의 불평등보다 한 사회 내에서의 불평등으로 인한 재난 불평등이 나타나는 점이 가장 뼈아프게 다가왔다. 코로나 이전에 쓰여진 책이라 코로나에 대한 얘기는 없지만 마스크를 사는 거 자체도 힘들어했던 취약계층에 대한 기사도 생각났다. 나는 코로나로 마스크 많이 나와서 환경 어쩌나란 대화를 나눴었는데 누군가에겐 목숨이 걸린 일일 수 있고, 나는 이를 자주 잊곤 한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전반적으로 지루한 책이지만 재난에 대해, 그 속의 불평등함에 대해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준 책이다.
재난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은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게 자연 발생하는 지구의 리듬에 아무리 겪어도 자연의 움직임을 도저히 예상 못 할 것 같은 인간 사회의 리듬을 엮어내는 일이다. 그러므로 자연이 인간 본성과 만날 때 재난은 불가피하다.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은 셀 수 없이 많은 사회적 병폐와 경제적 재난이 발생하는 원천이다. 이는 우리 시대가 맞닥뜨린 거대한 도전 과제다. 재난으로 이익을 챙길 기회를 제거하는 것은 부정의를 바로잡는 일일뿐 아니라 멀어져 가는 우리 서로를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겨 주는 일이 될 것이다.
코로나가 다른 변이를 생성하며 다시 확진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지금. 코로나라는 재난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 궁금해져서 시작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이 책은 전염병을 비롯해 수많은 자연재해까지 다루고 있지만 이 재난이 왜 그리고 어떻게 발생하는지 어떻게 하면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는지 설명해 주지 않는다. 게다가 코로나가 터지기 전 2015년도에 쓰였고 이후에 서문이 추가됐을 뿐이어서 조금 아쉬웠다.
사실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재난이란 것 자체는 누구에게나 평등하니까. 지진, 가뭄,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와 다리가 무너지거나 배가 가라앉거나 사람이나 산업이 만든 인공재해 또한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하지만 이런 재해를 딛고 일어나는 속도와 회복 가능성은 모두 달랐다. 그 회복력은 정치 또는 권력 그리고 개인과 나라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데 그렇지 않은 약자에게는 전혀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만해도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포항, 큰 산불을 겪은 동해안의 피해자들은 아직도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또, 코로나가 터졌을 때 마스크를 제때 구하지 못한 경제적 약자들은 외출조차 하지 못했으며 간이 검사 키트도 구매하지 못했다. 책에서 나온 뉴올리언스에서처럼, 큰 태풍이 지난 후에 어떤 집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만 어떤 집은 그럴 수 없다. 밀려나서 결코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금세 돌아와 이전에 누리던 삶을 그대로 또는 비슷하게 누리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 재난은 전혀 평등하지 않았다.
재난후에 도움이 필요한 국가나 개인에게 정치적으로 중립을 가지고 대해야하는 것과 군대를 대동하면 부정적인 반응이 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충분한 상실을 겪을 시간도 주지않고 제자리로 회복하려는 사회 분위기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다시 한 번 느꼈다. 토론을 위한 도서로는 부족하나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였고 좋은 기회였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라는 말이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다.
-재난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은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게 자연 발생하는 지구의 리듬에 아무리 겪어도 자연의 움직임을 도저히 예상 못 할 것 같은 인간 사회의 리듬을 엮어내는 일이다. 그러므로 자연이 인간 본성과 만날 때 재난은 불가피하다.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은 셀 수 없이 많은 사회적 병폐와 경제적 재난이 발생하는 원천이다. 이는 우리 시대가 맞닥뜨린 거대한 도전 과제다. 재난으로 이익을 챙길 기회를 제거하는 것은 부정의를 바로잡는 일일뿐 아니라 멀어져 가는 우리 서로를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겨 주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코로나 19를 통해 재난은 모두에게 같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 코로나 19는 처음에 모두에게 동일하게 찾아온 재난이었다. 갑자기 감염병이 돌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일제히 멈췄고, 모두가 코로나를 두려워했다. 여기까진 같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약자들에게 훨씬 가혹했다.
모든 것이 일시정지하자,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빈곤층은 갑자기 생계 유지가 어려워졌다. 또한 이들은 집에서 머물러야 했기에 좁고, 답답하고, 푹푹찌는 단칸방에서 버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이들이 숨이라도 돌리려 밖으로 나가면 왜 나갔느냐고 손가락질 당할 수밖에 없었다.
불평등한 사회 진출 현실로 남편에 비해 경제력과 경쟁력 모두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커리어는 쉽게 단절됐다. 게다가 가정폭력은 증가했다. 가정폭력의 희생자는 대개 가정의 약자다. 여성, 아이들 말이다.
학교 밖 청소년들을 위해 진행되던 프로그램은 코로나 19 위험을 이유로 중단됐다. 학교가 일시정지하면서, 사교육을 받을 경제적 여력이 없는 가정의 아이들의 학력은 추락했다. 발달장애인들은 복지관에 다닐 수 없었고 오랜 기간 애써서 쌓아온 이들의 교육은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 코로나 19로 병원의 역량이 한계치에 도달하자, 투석이나 항암이 필요해 늘 병원을 다녀야 하는 아픈 사람들은 의료 사각지대에서 죽어가기도 했다.
지난 삼년 간 처절히 경험한 바, 코로나 19라는 재난은 불평등했다. 당장 떠오르는 일들만 해도 이렇게 많다.
재난은 그 사회가 품고 있는 불평등을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재난은 결코 모두에게 똑같이 다가오지 않는다. 지적,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계층에 따라서, 재난은 완전히 다른 강도로 찾아온다. 부당한 현실이지만 그렇다. 재난은 약자에게 더 가혹하게 찾아오며, 이를 회복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이토록 성공적인 종으로서 한때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협동과 공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재난이라는 위기가 찾아왔을 때, 시야가 좁아지고 당장 내 것만 눈에 보이는 것은 어쩌면 생명체로서 가장 본능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재난이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단면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가 무엇이었는지 외면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약자에게 공감하며 함께 나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으로서 성공적으로 생존해 온 검증된 방법이라고 나는 믿는다.
책 제목 '재난 불평등'을 보고 처음엔 의아했다. 재난은 인간이 다스릴 수 없는 자연재해인데 불평등을 논한다는 자체가 성립되기 어렵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만 책을 읽으면서 동일한 재난을 겪은 국가 또는 도시들이 재건 과정에서 격차가 발생하는 것, 재난이 권력과 자본, 정치적인 이유로 다루어지는 모습 등을 보면서 이해할 수 있었다.
먼저 발생하는 재난에 대해 과학적으로 '왜' 발생했는지는 연구할 수 있지만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기 답을 내리기 어려우며, 재난에 대처해야 하는 방법을 찾을 때 권력을 가진 이들이 이익을 위해 정치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보며 사실은 플라스틱 빨대가 해양오염의 주요 원인이라는 입장의 주장 이후 실제로 빨대는 주요 원인이 아니나, 일부 세력이 손해를 보지 않도록 거짓된 이야기를 꾸며내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며 정확한 정보를 알기 어려워 혼란스러워 했던 기억이 났다. 자본과 권력의 힘이 재난을 돈벌이 기회로 악용하려는 현상을 볼 때마다 혐오를 느낀다. 어디선가의 재난은 생존을 위협하고 있기에 이런 상반된 모습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또 하나 직면하여 안타까웠던 부분은 재난당 사망자 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가난이라는 점이다. 빈민촌에서 살며 위험 가까이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과 안전한 지역에 터를 잡는 부유한 계급의 차이는 재난의 앞에서 너무나 사실적으로 드러난다. 개인의 경제적 차이에서 넓은 범위로 보면 국가의 경제력도 중요한 원인이 된다. 재난을 관리하거나 예측, 복구하는 기관들도 대체로 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지루하기는 했지만 재난 관련해서 한번쯤 읽기 좋았다.
‘부자가 이기고, 가난한 사람이 진다.’ 불평등이 극심한 세상에서는 자연재해의 결과 또한 불공평할 것임을 확실히 짐작할 수 있다. 재난은 어떤 면에서는 부유하든 가난하든 모든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지만, 결코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하지는 못한다. 재난은 모두가 서로를 끌어 주는 계기가 될 거라고 믿고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각 집단에 끼치는 영향이 매우 다르고, 각 집단이 대응할 방법도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에, 재난은 각자를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각 집단이 재난을 활용하는 방법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 부자는 이용하고, 가난한 사람은 못한다. 슘페터의 광풍은 부자의 요트에 바람을 불어넣지만 가난한 자의 부실한 탈 것은 가라앉게 만든다. 부자는 더 멀리 피할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은 빈곤의 덫에 갇혀 있거나 덫 안쪽으로 더욱 미끄러져 들어간다. p.278~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