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방은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로 알려진 버지니아 울프가 1929년 펴낸 책으로 케임브릿지와 뉴넘 대학에서 강연했던 것과 여성과 픽션에 관한 논문 등을 바탕으로 수필로 엮은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을 통해 여성이 작가가 되거나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함을 이야기하며 여성의 창조성이 가난과 억압에 얽매이지 않는 미래를 그려냈다.
▣5-6장
버지니아 울프는 현존하는 작가의 작품들이 보관된 서가에서 이젠 남성 작가의 책만큼 많아진 여성 작가의 책들을 발견한다. 게다가 한 세대 전에는 손댈 수조차 없었던 다양한 주제의 책들도 많아졌다.
그 중 버지니아는 무작위로 소설 한 권을 고르고, 그녀가 고른 소설은 메리 카마이클의 [생의 모험]이었다. 메리의 첫 작품인 것 같은 그 책은 '클로이가 올리비아를 좋아하는' 내용이었다. 버지니아는 놀란다. 메리의 문장들은 관습에서 벗어난 것들이었다. 이전까지 남성의 시선으로만 재단되던 여성들의 관계가 여성의 시선으로 새롭게 표현된 것이다. 만약 그녀가 다른 남성 작가들처럼 더 많은 교육의 기회와 연간 500파운드라는 경제적 안정, 그리고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있었다면 더 멋지고 정리된 글을 앞으로 쓸 수 있을 것이라 버지니아는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각각의 내면에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지고 있다. 그 둘이 조화를 이루고, 영적으로 협력할 때, 우리 존재는 편안한 상태가 된다고 버지니아는 말한다. 시인이자 수필가인 콜리지는 위대한 마음이란 양성적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양성적 마음을 가진 작가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성을 초월하여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투과성이 좋은 글을 씀으로 모두에게 인정을 받는 존재가 될 것이다. 버지니아는 당대에 이런 양성적 글을 쓴 작가로 셰익스피어와 프루스트를 언급한다. 여러모로 인정받는 작가들이다.
이제 양성적 마음을 가진 남성의 글과 함께 양성적 마음을 가진 여성의 글들도 많이 나와야 한다고 그녀는 언급한다. 그러기 위해선 여성들에게 지적 자유와 다양한 주제를 쓸 수 있는 경험과 사색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4장
16세기 엘리자베스 시대에 시를 쓸 수 있는 여성은 없었다. 시간이 흐른 후 지위도 높은 귀부인이 자신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출간하였더니 사람들에게 괴물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의 시에는 증오와 두려움이 표현되어 있다. 그녀는 높은 지위였으므로 주변으로 부터 제인 오스틴과 브론테 보다 격력와 지지를 받았을 터인데도 말이다. 그녀에게 증오와 두려움의 감정을 불러일으킨 대상들은 남성들이었다. 그들은 그녀가 글을 쓰는 것에 대해 비난하고 조롱할 힘이 있었다. 그녀, 레이디 윈칠시는 단지 글을 쓰는 것만 원했는데도 말이다.
18세기 끝 무렵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중산층 여성들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부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귀족만이 아니라 일반 여성들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여성들에게 마음을 소리 내어 말할 권리를 가져도 된다는 것을 확인해 준 것이다. 또한 글을 쓰는 것이 생계를 위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중요한 변화였다.
19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여성들의 작품으로만 온전히 채워진 서가가 드디어 만들어진다. 그런데 그 책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소설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궁금해진다. 왜 여성들은 시를 쓰지 않았던 것일까? 이는 19세기 중산층 가정의 여성들이 글을 쓰는 장소가 온 가족이 공유하는 거실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언제든 누구든 드나드는 공간에서는 희곡이나 함축적인 의미를 담은 시보다는 산문이나 픽션을 쓰기가 수월하다.
또한 그녀들의 소설 소재는 언제나 제한된 공간만 다루고 있다. 이는 글을 쓰는 당사자가 제한적인 외출만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에게 이동의 자유가 이루어졌다면 그녀들의 글은 어땠을까? 또한 그녀들의 소재가 되는 글이 왜 남성들의 소재보다 평가절하 되는 것을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버지니아는 분노하고 있다. 그녀의 분노는 어떤 방향으로 어떤 결말에 이르게 될까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지음) | 최설희 (옮김) | 앤의서재 (펴냄)
남존여비, 삼종지도. 요즘의 아이들은 이 말의 뜻을 알까?
역사의 흐름 속에 많은 여성들의 몸부림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권리를 박탈당한 차별에서 여권신장을 거쳐 (진정한 평등과 페미니즘에서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남녀평등, 페미니즘에 이르렀다.
글을 쓰는 행위가 여성에게는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 쓰고 읽는 것을 감추어야 했던 여성들이라고 해서 그것들에 대한 욕구마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자신을 드러내고 당당하기를 원했던 여성들은 시대를 앞서갔다는 이유로 많은 질타와 모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갔던 여성들은 똑똑함을 인정받지 못하고 되바라짐의 대표 명사처럼 되었다. 나혜석,전혜린. 외국의 여성들에게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그리 멀지않은 과거에 남자들은 여자들을 무식하다며 무시하는 일이 종종 있곤 했다. 하지만 여자라서가 아니라 교육의 기회를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여성들도 공평하게 교육의 기회를 갖는다. 더 이상 여자라서 무식하다는 얘기는 없다.
진정한 페미니즘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것이다. 동등하게 대우받고 공평하게 기회를 갖는 것이다. 여성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 여성이라는 이유가 차별과 냉대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되지만 무조건적인 배려와 보살핌을 받는 특별한 존재가 되어서도 안된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나는 여자다.
여성이 자유와 최소한의 권리, 자존심을 지키기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만의 공간과 돈이라고 버지니아 울프는 말하고 있다. 주방과 거실처럼 공용 공간을 제외하면 개인적인 공간이 없기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꼭 여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자기만의 방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롯이 즐기고 느끼며 쉴 수 있는 시간(취침을 제외하고)을 가지기가 어렵다.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무형의 재화인 시간과 맞바꾸기 때문이다. 일을 하며 월급을 받고 돈을 모아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하고 행복한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시간과 맞바꾸는 일은 자기만의 공간을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줄어드는 아이러니가 되어 버렸다. 이제는 자기만의 공간이 집에 국한되지 않는다. 혼자있는 장소가 아니더라도 본인이 즐기고 있는 곳, 여러가지 취미를 즐기는 곳이라면 그곳이 자기만의 방이 아닐까?
▣3부
그녀는 새로운 의문이 든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남성들은 아름다운 노래와 소네트를 만들었는데, 왜 뛰어난 문학 작품을 쓴 여성들은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영국의 위대한 작가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은 건강과 돈, 집 같은 물질적인 것이 연결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버지니아는 해석한다. 당시의 여성들은 남성의 소유물로 여겨져 자신의 의지에 따라 무언가를 결정할 수가 없었을 만큼 하찮은 존재였다. 배우자 선택은 물론 글을 쓰겠다는 의지를 결정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여성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은 혐오스러운 일이라는 관습이 존재했기에 , 그녀들의 피에는 익명성이 흐르게 된다. 조롱의 대상이 되며, 글을 쓸 나만의 공간도 존재하지 않던 시대 어떤 여성이 온전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따라서 엘리자베스 시대 여성의 글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이고 있는 나를 깨닫는다. 그녀는 이 글을 쓰며 부르르 떨었을 것이다. 여성을 대하는 차별적인 세상을 분노하면서 말이다.
127. 그녀는 글을 쓰기 위해 멀리 떨어진 시골의 한 방에 스스로를 가두고는~(중략)레이디 원칠시에 대해 알아보려고 해도 늘 그렇듯이 그녀에 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녀는 우울증으로 끔찍한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작년에 읽었던 단편집 <누런 벽지>가 생각났다.
글쓰는 것을 금지 당한 여성의 자아가 무너지고 우울증이 정신분열에 이르게 되는 이야기다. 글쓰는게 무슨 대수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마는 오직 글쓰기로써만 자아를 드러내고 형성하는 이들도 있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쓰는 행위에 대한 금지는 자아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강제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금지당해야만 했던 것들이 어찌 글쓰기 뿐이었으랴.
결혼조차 제 뜻대로 할 수 없던 여성들에게 가능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85. 아이를 여덟이나 길러낸 유모는 10만 파운드를 버는 변호사보다 세상에는 덜 가치 있는 사람일까요?
직업의 귀천에 대한 고민과 질문은 몇 세기를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말로는 직업에 귀하고 천함이 없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냉대와 무시가 존재한다. 오히려 더 다양하게 같은 직업군에서도 연봉으로 등급을 나누고 사는 지역과 집의 평수로 또다시 사람들의 등급을 매긴다.
돈이 많다고 해서 인격이 높은 것도 아니고 직업에 따라 그 사람의 선악이 결정되는 것도 아닌데. 가치의 기준은 저마다 제각각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단지 버지니아 울프가 얘기하던 그때와 지금의 차이점이라면 성별의 차이에서 오는 차별이 줄었다는 것이다.
80. 투표권과 돈, 둘 중에서 돈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중요하게 보였다는 걸 인정합니다.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장기적인 변화의 투표권보다 끼니를 해결해 줄 돈이 더 크게 느껴질 것이다.
흔히들 돈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전부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돈이 인생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틀림없다. 몇 푼의 돈을 위해 자존심을 접어야 하고 수치심을 느껴본 적이 있다연 그 갈증은 더하다. 단지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여자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직업과 사유재산. 이제는 이것들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남녀노소 얼마나 될까.
49. 큰돈을 벌면서 열세 명의 아이를 낳는 것, 그걸 해낼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신생아 사망률이 높던 옛날에는 아이를 많이 낳았다. 운이 좋으면 자녀를 하나도 잃지 않고 키울 수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낳기 전 뱃속에 품고 있는 순간부터 여러가지 행동의 제약이 따르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도 주위에는 공동 육아라고는 하지만 육아의 대부분은 엄마의 몫이다. 일과 병행하게 되면 양쪽 모두를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게 된다. 여성의 지위가 지금과 달랐던 예전이야 말해서 무엇하리.
여성단체에 기부금을 내고 싶어도 재산도 없고 일을 할 수도 없으니 여성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게 되는 악순환인 것이다.
▣2장
그녀는 다양한 의문에 빠진다. 왜 남자들은 와인을 마시고 여자들은 물을 마시는 걸까? 한 성별은 부유한데 또 다른 성은 왜 가난한 걸까? 가난은 픽션에 영향을 끼칠까? 예술작품 창조에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P.56)그리고 왜 남성 학자들은 여성 학자들에 대한 글을 왜 이리 많이 남긴 것이며, 반대로 여성들은 왜 남성들에 대한 글을 남기지 못한 것일까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진다.
그녀는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 남긴 글들이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여 읽어본다. 그리고 남성들이 여성들에 대한 글을 썼을 때 분노하였을 것이라 짐작한다. 상대를 미워하고 혐오하면 상대를 묘사할 때 추악하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버지니아의 표현으로 유추해보면 여성들에 대한 묘사들이 어떠했을지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여성들에 대해 묘사한 남성들의 글이 무가치하다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진실의 하얀빛이 아닌 감정의 붉은 빛 아래 쓰였기 때문이라고 표현한다. 멋진 표현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가진 편견으로 상대를 서술한 글들이었을 것이다. 취재 없이 책상에 앉아 생각만으로 끄적인 문장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