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게 자신이 떠나갈 때를 알게 된 사람들과 여전히 떠날 때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나는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고, 언젠가는 찾아올 '나의 죽음'을 마주하게 하기 때문이다.
-p.7
죽음은 피해 갈 수 없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만 애써 외면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은 죽음과 거리가 먼 것처럼 생활하는 사람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장례식장에 여러 차례 가보았으나 나와 죽음은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 젊고,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며, 아픈 곳 없이 건강하기에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 또한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며 그날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음이 자명하다. 그렇기에 이 책이 나에게 더 크게 와닿았다. 죽음이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고, 스스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기에.
종양의 크기는 계속 커졌고 항암치료는 더 이상 효과가 없었다. 이제 쓸 수 있는 약이 없었다. 인생이 더는 자신의 통제하에 흘러가지 않고 모든 것이 암에 의해 좌지우지되기 시작했다. 생에 처음 찾아온 '끌려가는 순간.' 그는 아마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중략-
"당신은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열심히 살았습니까?"
-'너무 열심히 산 자의 분노' 중에서
주위를 보면 앞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정작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과정 없이 주어진 일에만 몰두하며 잘 살고 있다 착각하는 사람들. 하지만 가끔은 멈춰서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내가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지, 그것을 지금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한지를.
가끔 상담을 하다 보면 돈을 벌기 위해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거의 없어서 관계가 틀어진 경우를 보게 된다. 그럴 경우 돈을 버는 이유에 대해 물어보면 대부분 아이를 위해서라고 답변한다. 뭔가 이상하다. 아이와 함께 행복하기 위해 아이와 함께 할 시간을 내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데 관계는 점점 멀어지다니?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한 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선생님, 이제 엄마와의 작별의 시간이 다가오나 봅니다. 이제는 제가 엄마를 놓아드려야 하는 때가 온 것 아닌가 해요. 아버지와 저희 가족을 아프시기 전처럼 똑같이 챙기시던 대단한 엄마가 자꾸 약해져 갑니다.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 갈까요, 하고 선생님께 물었을 때 선생님이 엄마에게 딸 옆에 꼭 붙어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가 같은 아파트 단지로 이사 오셔서 저랑 함께 아이들 등원시키고 사우나도 가고 산에도 가고 했던 1년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 행복이 이대로 끝나버리는 건가 봐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너무 없네요. 불과 20일 전이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특별하고 위대한 마지막' 중에서
삶의 마지막이 눈앞에 놓인 상황에서 일상의 소중함은 몸소 느껴질 것 같다. 1년도 아닌 그저 20일 전 엄마와의 평범한 일상을 꿈꾸게 되다니. 이런 글을 보면서 지금 이 순간 소중한 이들에게 더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큰딸을 앞에 두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딸이라는 이유로 그런 아버지의 마지막까지 감당해야 하는 것이 참담했다. 어쨌든 환자가 죽음으로써 이 '부녀'라는 관계의 굴레가 드디어 종결된다는 것이 그녀에게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다. 부친의 죽음이 그녀의 삶에 찾아오는 첫 번째 행운 같았다.
-'혈연이라는 굴레' 중에서
나는 특별히 유명해지거나 훌륭하다고 찬사 받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주위 사람들이 나로 인해 불행하다는 이야기만 듣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아빠일까?'를 고민했다. 아무래도 아내와 아이들을 낳기 전 훈육은 내가 담당하기로 했기에 그저 무서운 아빠일 수도 있다. 그래도 아이들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려 노력하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편이다. '이런 나의 노력을 언젠가는 아이들이 알아주지 않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일흔 살의 노인 암 환자가 있었다. 그는 내게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 물었다. 의사로서 볼 때 6개월 이상 장기 생존은 어려워 보였다. 에둘러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때 그 환자는 담담히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다음 외래에 와서 말하기를,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얼마나 가능할지 모르지만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고 떠나야겠다며 자신의 결심을 말했다.
그 후로 그는 정말 매주 하나씩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 시작했다. 들어보면 거창한 일들은 아니었다. 아내와 바닷가로 여행 가서 해산물 요리 먹기, 종일 바다 보기, 좋아하는 노래를 모아 자식들에게 선물하기, 손주들에게 편지 쓰기, 고향 친구들에게 밥 사 주기, 예전에 싸웠던 친구에게 연락하기 같은 일상적이면서도 소소한 일들이었다. 그는 매주 병원에 올 때마다 지난주에 자신이 했던 일을 소상히 늘어놓으며 즐거워했다. 진작에 이렇게 살았어야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고, 사는 게 즐거워졌는데 얼마 남지 않아서 몹시 아쉽다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그가 들려주는 별것 아니지만 특별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중략-
"자, 당신의 남은 날은 00입니다. 이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시겠습니까?"
물론 이 문제를 다 풀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빈칸으로 남겨두기에는 아쉬운 일이다.
-'10년은 더 살아야 해요' 중에서
건강을 해치고 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심했다. 아이가 어려서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은 지금 다양한 경험을 하자고.
그 결심을 하고 나서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핸드폰에 아이와 함께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저장해 둔 것이 있는 데 그걸 모두 인쇄했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여행하고 싶은 곳'이라는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지역별로 나누고 키워드를 정리했다. 다녀오고 나서 아이와 함께 감상평&사진을 올리는 것이 목적. 하나씩 실행으로 옮기고 있다.
나는 간혹 환자 곁에 있는 보호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무슨 노래인가요?"
"아버지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실까요?"
이런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럴 때면 가족이어서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가족만큼 서로 모르는 존재도 없지 싶다. 타인은 모르는 대상이기에 예의를 갖추고 서로 알기 위해 대화하지만 가족은 날 때부터 가족이었으므로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고 착각한다. 무슨 문제가 생기든 결국에는 괜찮아질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상처 주기 십상이다. 언제나 '가족이니까'와 '가족인데 뭐 어때' 그 언저리에서 누구보다 가장 모르는 존재가 되기 쉬운 것이 가족인 것만 같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 환자도 자기 몸 상태에 대해 가족에게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다. 그렇지 않은 이유가 두려워서였던 가족을 위한 배려였든 결과적으로는 상처가 됐을 뿐이다. 늘 '죽음'으로 오는 관계의 끝을 지켜보는 의사로서 그것이 떠나는 사람에게나 남는 사람에게나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대화가 필요해' 중에서
사실 나도 모른다. 우리 엄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빠는 무엇을 하면서 생활하는지. 자주 연락은 드리지만 세세한 것은 모른다. 충청도 특유의 답답함? 나도 그렇지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걱정이다. 나중에 나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아이들을 보자 나는 그가 버티던 이유를 단박에 알았다.
아이들이 문가에서 주춤거렸다. 병실은 아이들에게 낯설고 두려울 것이다. 한참 동안 무거운 병실 공기를 탐색하던 아이들이 아빠 옆으로 다가왔다. 둘 중 큰 아이가 환자를 가만히 보다가 제 엄마를 돌아보고 물었다.
"아빠 머리에 혹 나서 아픈 거야?"
환자 머리에는 밤톨만 한 덩어리가 있었다. 혹이 아니라 암이 피부에 전이해서 뭉친 것이었는데 입원하면서 덩어리가 커져 밤톨만 해졌다. 아버지와의 영원한 이별을 일곱 살 난 아이에게 어떻게 이야기해 줘야 하는지 나조차도 난감했다.
"엄마, 아빠 이제 죽는 거야?"
아빠 없는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여섯 살, 여덟 살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병실에는 침묵이 가득했고 환자의 부인과 아버지는 말없이 울기만 했다. 흐느낌은 깊어졌다.
아이들의 눈에 비친 아빠의 모습은 이상했을 것이다. '아야 아야'해서 병원에 갔다는 아빠는 자기들이 왔는데도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잠만 자고 있고, 놀아달라고 아빠한테 안기고 싶은데 아빠 몸에 이상하게 생긴 줄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서 안기지도 못하겠다. 불러봐도 대답이 없고, 눈도 뜨지 않는다. 숨 쉴 때마다 그르렁거리며 꺽꺽 소리만 낸다. 엄마는 아빠 손을 붙잡고 주저앉아 엉엉 울고 할아버지는 벽을 붙잡고 흐느끼고 있다.
환자의 부인이 환자를 흔들면서 소리쳤다. 여보, 눈 좀 떠 봐. 눈 좀 떠 보라고. 애들 왔잖아. 얼굴 한 번 봐야지. 부인은 점점 더 세게 환자를 흔들었다. 그의 부친도 아들을 흔들었다. 내가 먼저 가야지, 네가 어떻게 저 어린 것들을 두고 먼저 가니, 이놈아. 이 매정한 놈아. 아이들의 눈에는 엄마와 할아버지의 울부짖음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미동 없이 누운 아빠가 더 이상하지 않았을까. 환자의 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아이들이 다녀가고 한 시간쯤 뒤에 환자는 숨을 거뒀다. 그제야 나는 이 환자의 늦어지던 임종이 이해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이 무척 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아이들이 올 때까지 버텼던 모양이었다.
-'임종의 지연' 중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어서일까? 이 부분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만약 지금 이 상황에서 죽게 된다면? 상상하기도 싫다. 아내한테도 늘 말하지만 지금 죽게 된다면 난 눈을 감지 못할 것 같다. 적어도 아이들이 20대는 되어야 죽을 수 있을 것 같다. 살면서 아이들로부터 상처도 좀 받고 해야 아이들을 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 요즘.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자식들이 있기에 난 더 건강하게 살고자 노력한다.
소아과 의사로부터 백혈병을 앓던 한 소아 환자와 보호자인 그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모든 치료가 실패했고, 의료진도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아이는 임종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느 날 아침, 간호사가 아이의 혈압을 재러 병실에 들어섰을 때 보호자인 엄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러나 간호사는 보자마자 아이가 이미 호흡을 멎은 것을 알았다. 아이의 얼굴이 이미 푸른빛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의 사망 사실을 알리면 의료진이 아이의 시신을 데려갈까 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로 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간호사가 나중에 말하길, 마지막 온기를 나누고 있는 그 모습이 흡사 성모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 같았다고 했다. 지난밤 아이는 열이 펄펄 끓고 호흡이 점차 거칠어졌고 마지막으로 "엄마..."라는 한마디를 내뱉고는 몇 시간 뒤 서서히 숨이 멎었다고, 아이 엄마는 나중에야 털어놓았다.
-중략-
나는 그때 알았다. 죽은 아이의 신을 버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사기도 한다는 것을. 그들은 그렇게 가슴에 아이를 묻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환자의 어머니도, 학생의 어머니도 매년 추운 겨울이 되면 따뜻한 겨울 점퍼를 새로 사서 태우지 않을까? 더운 여름이 되면 아이가 입을 시원한 여름 옷을 사서 태우지 않을까? 아니, 그들뿐만이 아닐 것이다. 어리고 젊은 자식을 잃은 부모는 대개가 그러하지 않을까.
-'아이의 신발' 중에서
어린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슬픔을 감히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식이 죽는다는 것만 상상해도 이렇게 눈물이 나는 데, 실제라면 어떨까? 그렇기에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더 행복하게 느껴진다.
오래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생명은 고귀한 것이라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행복하다고 이야기하기는 쉽다. 입으로 도덕을 외치고 윤리를 말하는 일도 참 쉽다. 똥 치우며 병수발하고 비용 부담하긴 어려워도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당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만 있을 뿐 인간다움을 완전히 잃는다면 그때에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혹 당신이 그런 상황이 된다면, 혹은 인지 기능 없이 단순히 숨만 쉬는 상태가 된다면 그런 상태로 몇 년 더 사는 것을 간절히 원하게 될까?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 중에서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생사의 갈림길,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 담고 있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까운 이의 죽음을 몇 번 접했다. 특히 할머니의 죽음이 기억에 남는다. 90살이 넘으실 때까지 할아버지와 함께 손수 밥도 지어먹으시고, 물레로 실도 짜시면서 활발하게 활동하셨던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무너지는 걸 봤다. 충격으로 치매에 걸리셨고, 오랜 기간 투병하실 때 자식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봤다.
사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자식이라면 아픈 부모를 간병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현실은 어려웠다. 투병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식들이 돌아가며 모시기 어려워했고 결국 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가끔 정신이 바로 돌아오실 때면 할머니 스스로도 힘들어하셨다. 과연 이게 올바른 걸까? 인간의 존엄이 무너질 만큼 무너진 상황에서 삶을 유지하는 게 옳은 일일까?
난 개인적으로 내가 그런 상황이라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가까이서 본 죽음은 너무나 참혹했기에. 나로 인해 내가 사랑한 사람들이 힘들어지고, 나아질 방법이 없어 더 나빠지기만 하는 상황 속에서 나에게 선택할 권리가 주어진다면 좋겠다.
책을 읽으며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내가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이를 슬기롭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지금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요즘. 나의 삶의 주제는 죽음과 삶이다. '삶과 죽음'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슬프게도 '죽음과 삶'이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죽음과, 죽음과, 즉음과, 즉음과,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일것이다. 쌓이는 절망과 허무함 속에서 책만이 나의 위로와 답이 되어 주고 있는 요즘이다. 그 속에서 만나게 된 책,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종양내과 전문의로서 매일매일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만나는 의사의 책이다.
어떤 상황에서 이 책을 만나냐에 따라 책에서 받는 느낌이 다를 것 같다. 본인이 암을 선고 받고 책을 만난 사람, 가족이 암을 마주하고 이 책을 만난 사람, 가까운 사람을 잃고 이 책을 만나는 사람, 그리고 연말을 맞이해서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인생의 교훈을 얻고자하다가 이 책을 만난 사람. 내가 어떤 위치에 있냐에 따라 이 책은 하나의 시시한 이야기거리들이 될 수 있고, 한 의사의 일기장이 될 수도 있으며, 또한 누군가는 또 오늘을 산다는 것에 대한 교훈을 얻어갈 것이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특별하지 않지만 일상적이지 않은 이 지점에 서 있는 내가 만난 이 책은, 그냥. 시시함이었다. 왜? 다른 사람 이야기니까. 하지만, 다시 말하자면 나는 내 인생에서 '특별'하지는 않지만 '특수한' 위치에 놓여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이렇게 수많은 환자들의 이야기들을 보면서 무언가 느끼기는 조금 힘든 위치에 있다. 혹시 나와 같이, '특수한' 위치에 놓여 있어서 인생의 위로와 답을 얻으려는 사람이라면 크게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싶다. 내 코가 석자인걸.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연말과 연초를 맞이해서 죽음에 놓인 환자들, 죽음의 문턱을 오고 간 환자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그럼에도 이렇게 나는 건강하게 살아가 있고', '나의 당연한 오늘은 누군가가 갈망한 오지 않을 내일'이었다는 것을 느끼고 싶다면 읽어볼만한 책이다.
위에 너무 냉소적인 후기를 쓴 것 같다. 그렇다고해서 이 책이 안 좋다는 것이 아니다. 목차만 보더라도, 이 책은 끌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실제로 암을 선고받거나, 항암이 치료가 아닌 연명을 위한 조치가 된 환자들, 우리 나라의 '죽을때까지 환자를 붙잡는' 의료체계,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 그리고 다시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많이 생각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암을 극복했더니(그렇다면 사실 죽음을 극복했으니 무엇이나 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것보다 더 냉혹한 현실(암을 앓은 사람이었다니, 약할까봐 채용을 꺼리는 사회 등), 혹은 당장 내일 죽더라도 사랑을 하고 싶은 내 짝궁의 이야기, 가족의 이야기 등. 여러 이야기들을 보면서 내가, 내 주변에 이런 일을 겪지 않았다면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혹은 죽기전까지 어찌했는지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면이다. 이 책의 저자도 인정한다. 600명의 환자를 돌보고 있다는 글에서 잘 이야기하고 있다. 이 의사에게 이 환자는 600명의 환자 중 한 명이지만, 이 환자에게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있는 이 의사 한명만을 바라보고 있다. 600명의 환자를 쳐다보고, 진료하고, '직업'으로서 출근과 퇴근을 하는 의사. 하지만 자신의 생명을 더 늘려줄 것처럼 의사를 바라보는 환자들. 저자는 이 관계의 선을 잘 이해하고 있고, 이 선에서 본인의 일에 최선을 다 한다. 누군가는 거부감을 느끼려나? 저자는 어쩌면 자신은 600명의 신자를 가진 교주와 같은 존재로 환자들에게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있으려나? 종양학과의 전문의, 특히 서울대학교 병원의 전문의라면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디 600명뿐이랴. 그 환자의 가족까지, 모두 "선생님, 제 발 좀 살려주세요."하고 이 전문의를 보고 있을 것이다. 의사는 교만함이 아닌, 환자들의 절실함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자신의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실제로 자신의 휴가를 이해해주지 않는 환자에 대한 서운함까지 표현하면 굉장히 솔직하게 이 책을 쓰고 있다. (사실, 당연한 것 아닌가. 의사라도 가족이 있고, 개인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사라는 것도 하나의 직업일뿐이다!) 이렇게 오해받을 수 있는 것들까지 솔직하게 쓰는만큼 종양내과 전문의로서 환자들과의 대화, 나중에 보게 된 환자들의 모습 등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앞서 이 책에 대하여 '나에게는' 크게 느낄만한 무언가는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나는 지금 앞으로 오는 시간도 지나가는 시간도 모두 양 손으로 붙잡고, 과거로 가지고 앞으로도 가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 책은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힐링이 될 책이다. 잔잔하게 지나가고 있는 2022년과, 앞으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2023년을 맞이하면서 한 번은 읽어볼만한 책. 나는 원하던 답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사람들에게 오늘과 내일, 그리고 오지 않을 어떤 날을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될것이다.
- 내 목숨은 내 것이 아니다.
내 삶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이란 다른 사람의 삶과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있어서 내 인생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결정을 오롯이 내 생각과 의지로 결정할 수가 없다. 나의 결정이, 선택이 나뿐만이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과 그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보통 20대까지는 부모님의 영향을, 30대에는 주변인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지 않나?
그래서 살다가 어느 순간.. 지난날의 선택을 후회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겠지..
그래.. 지난날 당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선택이 100% 잘못된 것은 아닐 거다. 아마 20~30% 정도의 부족함이 있을 수 있겠지. 그래서 온전히 행복하다고는 할 수는 없어도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불행은 아닐테지.
정말 미치도록 바꾸고 싶다면, 지금을 벗어나고 싶다면 다시 선택하면 된다. 선택에 있어 혼자 결정할 수 없다면, 관련된 사람과 상의하면 되는 거고..
말과 글은 간단하지만 실제 그렇게 한다 해도 선택이 쉽지 않다.
왜냐면 당신의 삶은 온전히 당신의 것이 아니고 당신과 가까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당신이 지켜야 할 것들 등 선택의 고려 사항은 이전보다 더 많아졌을 테니까.
작은 위로라면..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선택을 받는 사람보다 행복하다.
선택하고 싶은데.. 상황 때문에 선택을 미룰 수 있다. 선택 지연은 어쩔 수 없지만..
선택을 피하거나 보류하지는 말아라. 선택을 피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비겁한 행위이고 선택을 미루면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 내가 아닌 상황이 선택한다.
선택할 수 있었는데.. 선택하지 못하였다면.. 우울해진다.. 그 우울감이 쌓이면 가끔 부지불식간 화를 데려오기도 하지. 혹시 선택을 막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적의를 품을 수도..
사람을 미워하면 본인이 더 힘들어지니 미운 마음보다 덤덤함으로, 필요하면 무심함으로 대거리하는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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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저 글귀를 보고 '선택'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냥..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머릿속의 잡생각들을 버리기..
자~ 추천곡은 백지영의 선택.. 더 아는 노래가 없다..ㅠㅠ
- 습관은 관성이라는 가속도를 얹고 삶의 내용과 방향을 바꿔버리기도 한다.
- 피를 나눈 사이라고 해도 상처는 쌓이면 곪고 후회는 깊고 아쉬움은 길다.
- 가족이 가족이기 위해서는 솔직한 대화가 필요하다.
- 죽음을 앞둔 환자들은..죽음 자체보다 죽기 직전에 겪는 통증이 심히고 숨이 차서 힘들고, 외롭고, 고통스럽게 죽게 될까 봐 그게 더 두렵다고 한다. 주변 사람에게 너무 민폐일까 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을까 봐, 사회로부터 고립되진 않을까, 가족에게 짐이 되진 않을까 막연히 걱정한다.
-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 어른들은 늘 어른의 눈으로 아이들을 지레 짐작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들 이상으로 어려움을 잘 받아낸다.
- '마음을 정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는 질문'과 '정말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는 질문'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 보통 타인의 인생에 깊게 관여하지 않으려고 한다.
- 극단적 장기 생존 환자들은..긍정적이다. 과정과 태도에 대한 긍정..자기관리도 무척 잘한다.
- 암과 맞서 싸우는 오늘의 내 모습이 내일의 가족들에게는 살아가는 힘이 될 수도 있다.
- 모든 관계에는 거리와 선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관계를 맺으며 서로 적절한 선, 편안한 거리를 찾는다.
-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본디 불가능한 일이다.. 섣부른 공허한 말보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환자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 것이 더 낫다.
-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만났을 때는 무모하게 무턱대고 맞서 싸우기보다는 전략을 바꾸는 게 낫다.
- 지지 않고 버티기 위해서..무엇보다 현실을 냉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 뭔가 했다고 칭찬하는 사람은 있어도 하지 않았다고 칭찬하는 사람은 없다.
- 나와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타인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만드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 무한히 지속될 것 같았던 생이 유한하고 소중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가치관은 분명히 변한다.
- 타인이 그들의 잣대로 규정짓고 재단하려 할 때 슬픔을 견뎌야 하는 사람에게 더 큰 슬픔이 되곤 한다.
- 슬픔은 영원할 것 같지만 영원하지 않다. 어느 시점이 되면 다른 형태로 각자의 삶에 녹아들어서 새로운 형태로 전환한다.
- 사람은 일방적으로 불행하지 않다..불행은 그들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 내가 불완전한 사람임은 충분히 자각하고 있으며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을 찾아 도움을 요청며 배우며 나아가고 있다.
- 누군가를 돌보는 일을 오랜 기간 하려면 스스로를 돌보기도 해야 한다.
- 누군가를 돌볼 때에는 어느 정도는 이기족이어야 이타적이 될 수 있다.
- 나를 가장 먼저 돌볼 사람은 나뿐이다.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을 때 남을 돌볼 수 있는 능력과 여력이 생긴다.
-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여기고 지금의 내 흔적이 내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덜 어지르게 되고, 더 치우게 된다. 좋은 관계는 잘 가꾸게 되고 그렇지 못한 관계는 조금더 정리하기가 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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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되는 것은 밑줄..
김범석 작가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리뷰입니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는 대여로 읽었던 책인데 그동안 관심없던 책인데 대여이벤트에 뜬거보고 한번쯤은 읽어볼만하겠다싶어서 대여로 읽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죽음에 대해서 크게 생각해본적이 없었는데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를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던 책입니다.......
이 리뷰는 책을 읽고 쓰는 리뷰이기 때문에 내용에 작품에 대한 스포가 포함되어있을 수있고 개인의 호불호가 나타나서 다른 의견을 가진 분들에게 불편함을 드릴수있으니 열람에 주의해주시기바랍니다. 페이백으로 대여해본 작품입니다. 책 소개부터 마음이 아플것같은 느낌이었는데 주변지인이 긴 질병으로 힘들어하는모습을 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삶과 죽음에 대해 더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100% 페이백으로 구매하게 된 책인데 그래서 대여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으면 안 읽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책, 특히 이 책처럼 특별한 직업 때문에 죽음을 자주 접하는 사람이 들려주는 책은 흥미롭기도 하고 알아야할 것 같기도 한데 괜히 피하게 되고 미루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100% 페이백에 고전이나 읽어야지 하면서도 잘 읽지 않게 되는 좋은 책들을 소개해주는게 좋아요.
김범석 작가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리뷰입니다. 이 책은 오랫동안 의사로 재직하며 수많은 생명을 살리고 또 떠나보낸 작가가 암환자들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본인도 성장하고 또 삶을 성찰한 내용으로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대하는 예를 보면서 나는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었다. 좋은 이벤트로 잘 읽었습니다.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입장에서 쓴 글이라 그런지 상당히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평소에 죽음에 대해서 진지한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인데 이런 독서를 통해서 한번씩 성찰하고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매일 나에게 주어지는 시간과 기회를 좀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대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김범석님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리뷰입니다.
100퍼센트 페이백 이벤트를 통해 구입을 한 책입니다.
지난 번 유퀴즈에 나왔던 것도 알고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부모님이 치료를 받고 계신 의사선생님이십니다.
그렇다 보니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궁금해서 읽게 되었는데
대여로 구매를 해서 시간에 쫓기느라 자세하게 읽지 못해 그런 점에서 좀 아쉽네요.
서울대 암 병원 18년차 종양내과 전문의 김범석 교수가 만난 암 환자와 그 곁의 사람들, 의사로서의 솔직한 속내를 담은 에세이.
저자가 자신이 만난 환자들과의 에피소드에 대한 이야기였는데요. 암환자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각자의 사연이 있었습니다. 에피소드 중에서 사후 뇌기증이 있었는데, 사후 뇌기증이란 뇌질환 연구를 위해 자신의 뇌를 기증하는 것이라면서 실제로 뇌를 기증한 케이스를 처음 봤다고 했는데요. 그리고 저자의 환자였다면서 사후 뇌기증을 할 거라 전혀 생각을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선택을 떠올리면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해 왔고 또 준비를 해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의 결정도 대단하다 싶었고요. 지나온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리셋 버튼이라는 건 없다면서 하지만 언젠가는 환자분과 같은 순간을 무언가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자신이 떠나고 난 뒤에 타인의 기억에 남을 마지막이 어떻게 남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서인지 그걸 생각해 보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지금의 삶에서 드러난다고 했는데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간 이벤트로 빌려본 일상속 에세이와 달리 꽤 무거운 주제의 에세이라 어떨까 궁금하여 대여했습니다.그리고 예상대로 제목처럼 묵직한 글이었어요.암 진단을 받은 환자들의 저마다 다른 죽음과 삶에 대한 사연을 다루고 있습니다.막연히 먼 얘기같으면서도 생각보다 밀접한 주제라 보면서 많을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었구요.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면서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할지에 대한 생각도 들었습니다.한번쯤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