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급계층은 분노하는가] 부제가 눈에 띄어 손에 든 책이다. 내게 맞는 책이라 생각했다. 사회문제에 주장과 외침을 지르는 책이라 생각했다. 공존과 공동체 사회를 바라는 인식을 공고히 가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당연히 불평등에 관한 비평책이라 생각했다.
[책의 장르 구분에 과연 비평서일까]하는 의문이 든다. 자서전? 회고록? 반성문인가?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 빈곤과 불평등을 이야기한다. 대런 맥가비. 영국에서는 래퍼 '로키'로 유명하다 하고 저널리스트로 작가로 칼럼니스트로 일하고 있다. 33세에 어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지, 자서전은 여간 어려운 용기가 아니면 어렵다고 츠바이크가 말하지 않았던가. 보통의 자서전이 자신의 과거를 변명하거나 숨기거나 그러는……. 그래서 대부분이 가짜 자서전이라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완벽한 자서전이다. 자신의 치부와 지난 가족사, 그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그가 속한 빈민의 생활과 가난을 구제하려는 정부 정책, 사회적 통념, 그 극복의 대안등 통찰을 담아내었다. 영국 빈민가 출신으로 책 읽기도, 글쓰기도 배움이 없던 저자가 어찌 이런 문장을 낼 수 있는지. 래퍼로서 하고 싶은 말을 무수히 적어본 게 단련이 되었을까. 번역서라지만 그만큼 원서에서도 문장이 탁월했을 것 같다. 영국에서 매년 정치적인 글쓰기에 '오웰상'을 준다는데 2018년 수상했다. 받을 만하다.
[가난 사파리]. 협소하게는 저자가 자란 빈민가, 또 빈민계층을 쑤셔 넣은 타워빌딩을 지칭할 수 있고 넓게는 '가난'계층 전체를 지칭할 수 있겠다. 알코올과 약물에 중독된 엄마 밑에서 학대와 폭력으로 어린 시절을 보낸 저자다. 주변 모두가 이런 환경이다. 폭력과 죽음과 가난의 찌듦이 일상이고 여기에 무감각하다. 그래서 저자 또한 그렇게 약물과 알코올에 중독되어 산다. 사회복지사를 만나고 도서관을 다녔다. 도서관, 빈민가에 이만큼 정적인 장소는 꼭 필요하다는 저자다. 그리고 가난에 대해 랩을 하고 떠든다. 시민단체와 엮여 혁명과 불평등을 외친다. 알려지게 되면서 방송 출현도, 방송 진행도 한다. 그러면서 또 알코올에 찌든 삶을 산다. 노숙자까지 되고..... 현실을 극복할 수 없다. 그러는 사이 엄마와 키워주신 할머니까지 잃는다.
[가족이 그를 변화 시킨다] 불평등과 사회 부조리, 계층 간 이해 등 저자의 젊은 시절은 분노 그 자체였다. 이런 분노는 일부 그의 어린 시절이 오히려 도움이 될 정도다. 지역 복지사나 시민단체들마저 그에게는 비판의 대상이다. 인기를 얻지만 여전한 그. 더 강하게 비판하는 그. 그러다 깨달음의 망치를 얻어맞는 한 장면을 목격한다. 그가 비판한, 그래서 지역에서 고립되어 가는 사회 저명인사의 눈물. 그 속에 진실 어린 가난 극복의 의지를 보게 된다. 또, 개인이 가진 가장 급격한 변화.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 지금 나는 내가 사회에 할 수 있는 최선의 기여가 건강하고 행복하며 안정된 아이를 길러내는 것임을 깨닫는다.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먼저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그러면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전하는 방법을 찾는 것임을 깨닫는다.(...) 이 말은 저항을 멈춰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권력, 부패, 불평등에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는 뜻도 아니다. (...) 이것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구실이 아니라 21세기 급진주의다. 나는 내가 십대에 품었던 이상의 묘지라 할 만한 스타벅스에 앉아 있으면서 인생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는 편안함을 문득 느꼈다.(...) 사회가 내적 모순으로 가득하기는 하지만 내가 한때 믿었던 것처럼 그렇게 잔혹하거나 냉담하거나 내가 어쩔 수 없는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느 쪽이든, 이런 생각은 내가 가진 줄 몰랐던 본능, 즉 내 가족을 보호하고 내 아들의 삶의 질을 유지하려는 본능을 일캐운다. 지금 나는 중년이 다 돼가는데, 이 다음 단계에 내가 할 일은 책임 있는 부모로서 맞이한 삶의 새로운 현실을, 과거 내가 가졌던 이상주의와 조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한 개인이 일으킬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변화다. 분명 이런 말은 많은 사람들을 경악케 할 것이다. 이 책이 혁명을 요구할 것이라 생각하거나 내가 이 책을 이용해 가난의 책임을 하나의 정당에 지울 거라 생각한 사람들은 특히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실망시켜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책의 마지막 장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338쪽~344쪽 일부)
[평소 나도 소심하게 떠드는데...] 저자의 마지막 글에서 내가 처음 책을 선택한 기준을 생각했다. 분명 난 불평등과 부의 양극화를 짐작했고 그 분노에 동참하고 손뼉 칠 준비를 했다. 저자는 이런 기대 어린 독자에게 미안하다고 한다. 아니, 전혀. 배웠다. 많이 배웠다. 비록 저자처럼 치열하게 분노의 실천과 외침이 아니더라도 그 줄의 끝자락이라도 잡고픈 내게 저자의 통찰과 변화는 또 다른 배움이 되었다. 마지막 부모로서 맞이하는 변화를 그의 이상주의와 조화하려는 것은 어쩌면 변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변화 이전의 분노 어린 통찰과 외침에 진실성이 있기에 용서가 되고 21세기를 맞이하는 더 큰 발돋움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저자의 외침과 분노 그리고 그의 수준 높은 문장은 그의 진실성에 기인하는 것이리라. 진실 어린 뉘우침과 고백에서 오는 자서전이다. 저자 말처럼 나 또한 우리 사회에 헝클어진 길을, 울퉁불퉁 길을 투덜대며 걷기를 다짐한다. '가난한' 우리도 사회의 일부분이며 소중한 구성원이다. 부모가 되어 자신의 가난한 현실을 넘으려는 저자처럼 우리의 가난도 결코 우리가 넘지 못할 것이 아닐 것이다.
자신이 경험한 가난을 기꺼이 보여주며 사회를 보는 통찰과 비평을 담은 수작이다. 마지막 장일호 <시사 IN> 기자의 발문은 덤이다. 이 또한 별표 5개다.
조지 오웰이 살아 있다면 사랑했을 책. 책을 수식하는 표현에 마음이 사로잡혔다. 체 게바라가 그러하듯 조지 오웰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되는 하나의 상품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가난했지만 역경을 딛고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했다는 식의 글이 지난날 수많은 아이들의 인생을 이끌었던 것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과연 어떤 이야기를 난 마주하게 될 것인가. 유럽연합에서 벗어나 독자노선을 걷기로 선언한 영국이라는 나라와 가난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주제 같았다. 어느 사회에나 빈부 격차는 존재한다지만 적어도 나에게 유럽은 부유함의 상징인양 여겨졌던 게 사실이었다.
1984년생.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1980년대라 했을 때 절대 가난에 빠져 허우적거린 나라 중 영국은 없었다. 그는 배고픔을 모르고 자랐을 것이며, 훌륭하다고까지 보긴 힘들어도 어느 정도 갖추어진 사회 안전망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듯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풀록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의 설명이 옳다면 말이다. 아파트는 좁은 공간에 과도하다 싶을 만치 인구가 모여 사는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형태로 손꼽히곤 한다. 아파트 단지 안에는 기본 생필품을 구입할 수 있는 상점이 하나 이상 존재한다. 규모가 좀 큰 단지인 경우에는 초등 교육 기관도 위치해 아이들은 안전하게 걸어서 등하교 할 수 있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는 부동산 가격은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의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와도 같다. 영국에서 아파트는 선호하는 형태의 주거 지역이 아니다. 한 번 집에 들어가면 내려오기가 쉽지 않다. 위아래 옆집에서 누가 무얼 하고 있는지, 애써 귀 기울이지 않아도, 듣고 싶지 않음에도 들을 수밖에 없다. 가능하다면 기꺼이 다른 지역, 다른 형태의 집을 찾아 이주할 테지만 그곳은 어쩌면 사람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주거지일 수도 있다. 저자는 어떠한 이유에서건 사람들이 충분히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그와 같은 이유로 존중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아무리 논리에 매달려도 투박하다는 평을 듣는다.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얽매인 논쟁에서 곧잘 배제된다. 으레 그래도 상관 없다는 듯. 그리하여 모든 게 결정되고 난 뒤에 행하는 그들의 저항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기 일쑤다.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된 공동체는 힘 없이 무너지고, 다들 뿔뿔이 흩어져 서로의 존재를 잊고 살게 된다.
제3 자의 위치에 선 인물에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형태의 삶은 그저 난해하게만 여겨질 게 분명하다. 저자는 원하진 않았을 테지만 스스로 체득한 삶을 털어놓는 것으로 가난에 대해 서술했다. 오래 전 세상을 떠난 그의 어머니는 기록에 따르면 술과 온갖 약물의 도움을 받아가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는 아이를 낳았지만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 알지 못했고, 알려주는 이도 아마 없었던 게 분명하다. 무얼 해도 삶이 나아질 리 없다는 확신에 취해 있었기에 앞을 내다볼 시도 따윈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누릴 수 있는 쾌락을 탐하는 것도 버거운 이의 눈에 남(정녕 그 대상이 제 자녀였을지라도)이 보였을 리 없다. 잔인하게도 부모의 계급은 고스란히 자녀에게 이어진다. 그는 자신에게 행해지는 대우로부터 어떠한 이상도 감지하지 못했다. 어쩌면 주변의 다른 가족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진 않았을 수 있다. 차라리 부모가 없으면 낫을 거 같다는 합리적 의심에 빠져들기도 했다. 어린 아이의 눈에도 제 부모가 존중받지 못한다는 것만은 철썩 같이 보였던 것이다.
얼마든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지독한 부조리를 걷어 내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패망해야만 한다는 식의 극단적 사고를 견지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걸 기억했다. 노숙자로 길거리에 내앉을 상황에서 그에게 손 내민 건 다름 아닌 자본주의 사회의 안전망이었다. 자신이 사회를 증오하는 순간에도 사회는 어찌 됐건 자신에게 꾸준히 무언가를 베풀었다. 결정적으로 가정을 꾸리면서 더는 증오심으로 스스로를 불태우지 않게 됐다. 그가 택한 노선은 타협이었다. 하층 계급의 분노가 적절치 못한 반응이라는 식의 고백을 한 그를 과연 조지 오웰이 좋아했을지는 의문이다.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한 글도 물론 존재한다. 저자의 경우엔 제 안에 쌓여 가는 상처의 배출구가 필요했다. 현대 사회는 경쟁 사회라 약점을 드러내는 건 위험하다. 곧장 누군가의 먹이감이 될지도 모르는 위험 부담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펼친 용기야말로 이 책에 지닌 힘이 아닐까 한다.
왜 가난은 단절되지 않고 대물림돼는가?, 참으로 오래됐지만 새로운 주제다. 어떤 때는 게으른 개인의 탓으로, 또 어떤 때는 사회구조의 문제로, 분석의 대상과 촛점에 따라 술, 폭력, 범죄에 노출된 환경, 그렇다. 가난한 이들은 그들의 문화, 거주 환경 등 복합적인 요소가 결합돼 나타는현상이 가난이요. 그 환경에 대한 변화 없이는 대물림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책은 가난을 겪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지은이 대런 맥가비가 자신의 성장경험(열아홉 살에 어머니의 죽음을 겪으면서 우울증과 정신이상에 시달리며 오랫동안 약물과 알코올 중독자로 지냈다)을 바탕으로 아동청소년과 교도소 재소자 대상 랩 워크숍을 하면서 만난 빈민층, 하층계급의 이야기로 한 래퍼이자 사회활동가의 작은 성공담이다 "성공"이란, 가난이 만들어낸 감정의 늪을 정확히 파악하고 여기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바로 그 자체를 말한다.
지은이는 "가난탈출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스코틀랜드의 좌우파 모두에게 문제제기를 하고있다. 먼저 가난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력을 정확히 알아야한다고 말한다. 가난을 겪는 이들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가난에서 탈출하려 노력하는가, 그런데 왜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이 제대로 되지 않는지를 여러 각도에서 뜯어보고, 들여다보며, 톺아본다. 그리고 그는 나름대로의 해법을 제시한다.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점은 지은이가 어떻게 하나 하나 뜯어보고 분석해내는 지 그 과정이다. 성공유무가 아닌 가난이라는 현상과 그 원인, 그로부터 비롯된 모든 것들이 개인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말이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는 옛말은 이제 아니다. 가난은 나랏님이 아닌 가난에 빠진 자 스스로가 주변이 사회가 조금만 신경을 쓰고 진지하게 천착해준다면, 우리 모두 가난해지지 않을 수 있다. 절대적으로는 가난한 사람(일정기준 이하로 떨어진 사람들이 없다는 면에서)없더라도 상대적으로 가난함을 느낄 수도 있다(북유럽의 복지국가, 복지사회). 아직도 시행착오 속에서 실험은 진행 중이다. 가난의 문법은 필연적이지 않다. 바꿀 수 있는 힘은 가난한 자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며(강점기반 접근), 여러 이론을 바탕으로 가난한 이가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 판을 짜는 것이 중요하다.
작가이신 대런 맥가비님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남부에서 자랐고, 현재는 래퍼 Loki로 알려진 작가이자 칼럼니스트, 활동가입니다. 스코틀랜드 경찰 폭력 감소반의 첫 상주 래퍼로 일했고, 반사회적 행동과 가난의 근본 원인을 추적하는 스코틀랜드의 BBC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책은 쉽지 않습니다. 번역하신 분 제법 힘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래퍼들은 글 실력보다는 전달력이라고 생각했던 편견이 무너집니다. 극도의 문제환경에서 자란 분이 예리한 시각을 바탕으로 구석구석 빈틈없는 내용들로 책을 구성하셨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읽어 가야 합니다. 쉬운 듯 어려운 듯 좋은 책입니다.
조 매토널은 인정받는 지도자다(그는 자신을 관리자로 부르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매코널은 정치인들이 지역사회에 일어나길 바란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 행하는 것 사이에는 반비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청소년들에게, 그리고 이 아이들이 이른바 소프트 스킬을 개발하는 데에 장기적으로 투자하려는 의지가 여전히 크지 않은 것 같아요. 정부 차원에서,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를 위해 바라는 것과 이를 돕도록 배분되는 자원 사이에 괴리가 있는 거죠.”
이 부분의 문화는 특정한 문제를 감추려는 경향이 있는데, 매코널의 지적은 대단히 솔직하다. 재생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호의와 선의에서 나온 사회 프로그램일뿐더러 출세 기회가 많은 하나의 산업이기도 하다. 이 부문의 많은 사람들이 부인하지만, 이기심이 사업시행 방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것은 특정한 현태의 비판에 대해 냉각 효과를 갖는다. 실제로 비판 자체가 지역사회의 다른 많은 측면들과 마찬가지로 신중히 관리되고 ‘평가 과정’에 반영된다. 지역 주민들은 계획 과정과 마찬가지로 평가 과정에서 배제되거나, 작위적 또는 명목뿐인 방식으로 참여를 권유받는다. 보통 지역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보기에 부적적한 방식으로 지역 주민들이 비관하면 이들은 “좀더 건설적”이 되라고 말한다. 이게 무슨 상관인가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가 자원과 약간의 권한을 가지고 갑자기 우리 지역에 나타나 우리가 지역 사회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을 질책한다면 우리는 모욕감을 느낄 가능성이 크다.
「아웃사이더」 중에서
가난의 해결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적절한 해법을 아직 지구상의 어느 국가도 찾지 못한 느낌이 듭니다. SF영화를 보면 극단적으로 통치자와 비통치자로 구분되는 지구, 혹은 AI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지구가 등장하곤 합니다. 모두가 좋은 품질의 1등 제품을 선호합니다. 잭 웰치씨도 1등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빈부의 격차는 벌어집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 대런 맥가비씨가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그런 의미에서 꽤 유의합니다. 깊게 생각하게 합니다. 좋은 책 감사합니다.
지은이는 스코틀랜드 하층계급 출신이다. 이 책은 2017년에 영국 그렌펠타워에서 발생한 화재 이야기로 시작한다. 지은이는 끔찍한 인명 손실을 불러온 이 사건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을 ‘가난 사파리’라고 부른다.
이곳에 살던 하층계급 사람들의 존재는 오랫동안 보이지 않고 목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지만, 이 화재를 계기로 이곳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창이 열렸다. 처음에 그 뜻은 고귀했을지 모르지만, “진열창 앞 안전한 거리에서 원주민을 잠시 둘러보는 사파리가 끝나고 나면 모두가 그에 대해 서서히 잊어버리고 만다”고 지은이는 이 대목에서 문제제기를 한다. ‘가난 사파리’는 ‘서민 코스프레’를 하고 잠깐 체험하는 ‘가난 포르노’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한다.
지은이는 이렇게 볼거리로 전시되는 사람들의 감정과 관심사에 목소리를 부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는 다시 한 번 독자들을 일종의 사파리에 초대한다. 그러나 이곳엔 미학적 대상이 되어버린 가난의 풍경, 통계를 통해 추상화된 가난의 숫자, 또는 전문 정책가·연구자들이 채집한 가난의 유물이 없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왜 이렇게 분노하는지에 관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들에 공명”하고자, 독자들을 가난이라는 경험 내부로 깊숙이 안내하고 있다.
해마다 연말 이맘 때쯤이 되면 양로원과 고아원을 찾는 이들이 많다.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불우이웃을 돕겠다는 고마운 이들이다. 그런데 정작 도움을 받는 이들은 '그들'이 찾아오는 것을 그닥 달가워하는 표정이 아닐 때가 많다. 우리가 흔히 보는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도 그런 장면을 참 많이 다루고 있기 때문에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인 셈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그들'에게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구호물품'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정치인을 비롯한 유명인사들의 환한 표정에서 '진정성'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렇게 찍은 사진들은 주로 '언론사'에 배포되어 자신들의 치적(?)으로 이용될 뿐이라는 것을 양로원과 고아원에 머무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년에 딱 한 번 찾아오는 그들을 반갑게 맞아줄 수밖에 없는 '절실함'이 겨우 미소를 짓게 만들 뿐, 그들이 떠나고 난 자리에 따스함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정녕 '가난한 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없는 걸까? 이 방법을 찾기 전에 '가난'에 빠지게 되는 원인 분석부터 해야 할 것이다. 가난해지는 원인을 보통 '두 가지'로 보고 있다. 하나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견해다. 먼 옛날부터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할 수 없다면서 '개인의 문제'로 취급하곤 했다. 그러다가 근대화 이후에는 사회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개인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푸념하곤 했다. 가난한 이들 가운데 '성공의 문턱'을 넘은 사례들을 살펴보면, 두 가지 원인이 모두 맞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특별한 사례일 뿐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누구나 같은 방법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우선 '인식'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가 가난을 바라보는 '시선'부터 바꾸는 것일테다. 우리는 모두 교통사고를 당하면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는 '예비 장애인'인 것처럼 '가난'도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금수저'는 영원히 금수저일 것처럼, '흙수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대를 이어 흙수저일 것처럼 '부의 계급화'를 견고하게 쌓고 있다. 마치 '한 번 부자는 영원한 부자다'라는 믿음처럼 굳어져 버렸다. 하긴 아주 틀린 말처럼 들리지 않기도 하다.
그런데 왜 이런 생각을 '견고하게' 만들고 부수려 하지 않는 것인가? 그닥 훌륭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노력을 하면 그 대가를 반드시 보상받는 사회가 더 아름답지 않은가? 또한, 부자를 존경하고, 그들이 쌓은 부로 우리 사회를 더욱 행복하고 즐겁게 만드는 고민을 하려는 시도는 왜 하지 않으려 하는가?
이 책은 <가난 사파리>라는 제목을 달았다. '사파리'라는 말의 뜻이 자동차를 타고서 야생동물을 구경한다는 것인데, 주로 맹수들을 풀어놓은 동물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 '가난'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으니 '가난한 이들'을 마치 동물원의 위험한 동물, 또는 통제가 불가능한 무능력자들을 '구경'하기 위해서 부자들이 안전한 차량 안에서 지나가는 장면이 연상된다. 하지만 책 내용은 저자의 '불우한 경험담'이 대부분이다.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험난한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회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를 분석해서 가난에 쪄든 이들을 '구제'하려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행복할까? 중산층인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며 '가난한 이들'이 왜 노력을 하지 않는지, 불우한 환경을 왜 개선하려 하지 않는지 '지적질'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나도 비슷한 처지였어"라고 자조적인 말투로 공감을 표시할 것 같다.
저자가 표현하듯이 '하층 계급'이 가난한 까닭은 여러 가지다. 개인적인 노력을 최선으로 하지 않고, 불우한 환경을 탓하며, 사회나 국가가 자신들을 돕지 않는다고 불평불만만 늘어놓기 일쑤라고 말이다. 그런데 가난한 이들이 하소연을 할 때 들어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당장 가난한 이들이 부자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면 반갑게 맞아줄까? 국가에 청원을 하면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적극적으로 도와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가난한 이들을 벌레 보듯 불쾌해하며 적절한 도움을 주기는커녕 내몰아서 '격리(?)'시키기 바쁘다. 사회복지센터나 은행을 찾아가서 '가난 극복 프로그램'이 있는지 물으면 적절한 대답을 해줄까? 그렇지 않다.
그러면서도 '가난한 이들'이 나태하고 게을러서 그들을 도와주고 싶어도 도울 수가 없다는 헛소리나 지껄이기 일쑤다. '기부'를 통해서 도움을 주고 있지 않느냐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거액의 '성금'을 모아서 해마다 도와주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이들에게 물어보라. 그렇게 '기부'와 '성금'으로 도움 받은 것이 정말로 '가난 극복'을 할 수 있는 희망이 되고 있는지 말이다.
가난을 극복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누구나 아무런 조건도 없이 연봉 3000만 원 정도를 받고 살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라는 문구가 거슬린다면, 적당한 일자리를 마련해주면 될 것이다. 그런데 마련해준 일자리라는 것들이 '연봉 3000만 원'과는 거리가 멀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연봉 3000짜리' 직장을 구하기 너무 힘들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이 계속 발생하는 것이다. 정말로 정신 못차리고 헤롱헤롱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까지 구제해달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성실함'과 '정직함'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마저 가난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들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도 '있는 사람들'만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면 가난에 빠지지 않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구조적인 문제점'도 해결하려 최선을 다해야 하고, '개인적인 문제점' 따위는 기본적으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다. 가정이 불우하다면 '불우한 원인'을 파악해서 적극적으로 국가와 이웃이 개입해서 개선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마약이나 범죄와 같은 '잘못된 길'로 빠졌다면 엄벌과 함께 '갱생'할 수 있는 기회를 체계적으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 물론 '부적응자'로 판명되면 영원히 격리시키는 방안도 필요하고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을 살다가 '실패'를 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줘야 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소리'하지 말라는 비판도 할 수 있겠다. 적절한 비판일 수도 있겠지만 '단 한 번의 실패'로 인생이 망가지게 냅두는 사회는 참으로 불행한 사회라는 점을 상기했으면 좋겠다.
저자는 '랩 가사'를 쓰는 워크숍을 통해서 가난한 이들이나 불우 청소년들에게 나름의 희망을 심어주는 일을 했다. 그 희망이란 '자기 목소리'를 마음껏, 그리고 당당하게 외치라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은 '행복한 사회'는 다름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또는 불우한 이들이 직접 만들어나가야 한다. 국가시스템이나 사회고위층이 가난한 이들의 입맛에 딱맞게 세상을 바꿔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말한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지지만 '하층 계급의 분노'가 역사를 바꾼다고 말이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면 꼭 분노가 아니어도 충분히 바뀔테지만 말이다.
"조지 오웰이 살아있다면 사랑했을 책"
띠지에 소개된 문구가 퍽 인상적이어서 눈에 얼른 띈 것은 사실이었지만, 다분히 광고를 위한 광고 같다는 생각 또한 동시에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별 망설임 없이 구매 버튼을 누를 수 있었던 건 J.K.롤링의 추천 덕분이었다.
그래, 누구보다 가난이 어떠한지 잘 아는 사람의 추천이라면!
"가난 같은 문제는 온갖 사람들이 다 보는데 나 혼자만 보이지 않는 볼썽사나움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문제 속에서 살다 보면 그게 문제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법이다."
가슴을 쿵 내려치는 구절이었다. 저자는 가난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또 어떤 방향으로 접근하고 풀어가야 하는지 본인의 찐 경험으로 이야기 한다. 그는 가난 같은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믿고 싶은 것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라면서 이어서 말한다.
"사실 이런 복잡성을 무시하고 편리하게도 우리 자신의 이해관계와 보조를 같이하는 독단을 고수하는데 찬성하는 게 보통 우리한테는 좋다."
가뜩이나 복잡한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풀 것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단순화' 작업을 해서는 더욱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은 분명 개인적 책임과 사회 구조적 시스템 문제가 결합되어 여러 양상으로 불거진 문제인 만큼 어느 한 쪽만을 부각시켜 단순하게 접근하면 상황은 더욱 안 좋아질 것이다.
더구나 작금에 불어닥친 코로나 사태는 문제의 본질을 짚지 못한 정책이나 방책이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얼마나 더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지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비꼬는 말에서 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우리가 자랑하는 K방역은 K라는 모양이 보여주듯 한 쪽은 올라갈 수 있겠지만 동시에 한 쪽은 내려갈 수 있음을 담당자들은 명심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끝으로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이튼 학교 출신 반항아가 아니라 위건의 광부가 썼다면 이 책처럼 썼을 것이라는 폴 메이슨의 말에 동의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충분히 사유하고 관심 가지면서 공부도 하며 사파리를 또 찾게 되면 그 때는 달라져 있을까?
뻘밭을 지날 때는 장화에 뻘들이 찐떡찐떡하게 붙기 마련이다. 그게 싫어서 멈추면 자칫 더 깊이 발이 빠질 수도 있다. 지난하기 그지 없는 길이지만 반드시 지나야 하는 그 길,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은 무엇일지 그의 후속작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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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생각한다. “요즘 청소년들은 왜 저래?” 또는 “쟤들 부모는 대체 뭐 하는 거야?” 그리고 여기에는 간단한 이유가 있다. 우리를 언짢게 하지 않으면서 아동학대와 방치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 살균 처리된 이미지가 이 문제의 실체를 왜곡한다. 이런 사진은 희생자가 시간 속에 얼어붙은 채 우리가 그 안으로 손을 뻗어 위험으로부터 빼내어주기를 기다리는 영원한 아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낳는다.
이들은 어린아이로서 무한한 연민과 동정을 받는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법적 과실을 저지르는 순간, 이들을 대하는 우리의 전반적인 태도가 달라진다. 우리가 인정하든 않든 방치되고 학대받은 아이, 난폭한 청소년, 노숙인, 알코올 중독자, 약물 중독자, 그리고 끔찍하고 무책임하며 폭력적인 부모가 실은 삶의 다양한 단계에 있는 동일 인물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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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했던 내용이랑 전개와 양상이 달라서 조금 당황했다.
더 잘 읽었을 수도 있는 책 같은데, 마음이 멀리 있다보니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잘 이해했으면 별 다섯개를 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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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과 문화와 인종과 계급과 성별 등등에 따라
가난이란 이렇게 다르게 주어지는 구나 싶었다
가난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읽었는데
이책은 또 완전히 다른 결을 하고 있어 놀랐다
조금 느린 충격 이라고 해야하나
은근한 은은한 여파가 있어서 며칠 문득문득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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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챕터가 훌륭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다
응축된 에너지가 느껴지는 글들이었다
더불어 정일호 기자가 쓴 발문 아주 평범한 가난도
까지 완벽하게 좋았다
기한이 2주 전에 끝난 도서의 서평을 이제야 쓴다.
빨리 쓰고 싶은데 어떻게 써야 할 지 도무지 감이 안잡혀서 책을 몇 번이나 뒤적이다 그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이렇게 책 한 권을 놓지도 못하고 쩔쩔매며 오래 붙들고 있어보기는 처음이다.
저자는 영국에서 래퍼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1984년생의 남성이다.
스코틀랜드의 빈곤지역 출신으로 어린 시절 겪었던 가정불화와 학대의 기억을 하나 둘 꺼내 놓으며 험한 동네에서 자라며 온몸으로 체험한 '가난'과 '계급'에 대한 소회를 담은 책이다.
2018년 '한 해 동안 가장 탁월한 정치적 글쓰기'에 수여하는 '오웰상'을 받은데다 영국의 위대한 영화감독 켄 로치로부터 '변화를 위한 움직임에 힘을 보태리라는 점에서 소중한 책이다.'라는 평가까지 얻어냈다는 사실은 이 책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들어가는 글의 일부다.
저자의 집필 의도는 이렇다고 한다.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순간적인 호기심이 발동해 신청했지만 희한하게도 예상했던만큼 쉽게 읽히지가 않아서 읽다 덮다 하기를 반복하며 절반을 읽는데 보름이 걸렸음을 고백해야겠다.
왜 이렇게 안읽히는 것일까, 뭐 이렇게 어렵지? 하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아마도 난 래퍼라는 저자의 또 다른 타이틀에 얼마큼의 위트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다 혹시 내가 놓친 게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돌연 책의 끄트머리로 관심을 돌려 이 책의 추천사나 마찬가지인 <시사IN>의 장일호 기자님이 쓴 발문을 읽어 보았다.
그리곤 깨달았다.
내가 이 책에서 재미를 얻으려 했다는 것을.
도무지 재미를 구할 책이 아닌데 말이다.
나는 애초부터 이 책이 가진 취지를 오판했던 거다.
'가난'이라는 주제에 천착했던 1930년대의 오웰을 떠올리며 1990년대를 겪은 같은 나라 사람이 쓴 '가난'의 모습은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했던 건데 딱 거기까지였던 거다.
결국엔 나도 책의 제목이 흘겨보고 있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다른 이의 '가난'을 구경하려는 것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장일호 기자의 발문으로 말미암아 첫 페이지로 돌아가 대런 맥가비가 쓴 '들어가는 글'을 다시 읽어 보았다. 그리고 책을 받고 보름도 더 지난 시점에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방향을 고쳐서인지, 다시 읽어서인지 처음 책을 접했을 때보다는 책장이 쉽게 넘어갔지만 솔직한 평을 하자면 그래도 이 책은 어렵게 읽은 책으로 남을 것 같다.
역자가 사회학자여서인지 주석도 없이 학술용어로 짐작되는 용어들을 습관적으로 사용하면서 문장 또한 길고 복잡하게 쓰여진 것들이 많아 같은 문단을 여러 번 반복해 읽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안읽고 있는 느낌이 드는 당혹스런 순간이 꽤 많았다.
어떻게 보면 그런 문제는 내가 사회학에 대해 무지한 탓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책읽기를 어려워하는 이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는 대런 맥가비의 의도를 무색케 하는 건 분명 있어 보인다.
영어 원문과 대조해가며 확인할만큼의 영어 실력이 안되긴 하지만 과연 대런 맥가비의 글도 이렇게 어렵게 쓰여졌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책은 저자가 말한 의도와는 전혀 동떨어진 그저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는 책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별 세 개가 적당한 것 같지만 반쯤 읽고나서 포기할까했던 이 책을 새로운 자세로 처음부터 다시 읽게 만든 장일호 기자의 훌륭한 발문에 별 네 개를 준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