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2022.3.11.
읽었습니다 115
‘잃어버린 나’를 찾아간다는데 ‘피를 빨아먹거나 몸뚱이를 뜯어먹어’야 하고, 피를 빨면서 언제나 살섞기를 해야 하고, 죽이고 죽는 다툼판이 끊이지 않는 줄거리로 짠 《쇼리》를 읽다가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이 푸른별에서 무슨무슨 ‘주의’를 내세우는 무리가 벌이는 짓을 ‘뱀파이어’로 빗대어 그렸다고도 할 테고, 정작 사람들이 사람다움을 잃고 싸우는 바보짓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고도 할 텐데, 오히려 이런 줄거리하고 얼거리는 우리 생각·눈길·마음을 ‘피빨기·살섞기·죽이기·뜯어먹기’에 가둔다고 느낍니다. 이 푸른별이 온통 피를 빨아먹는 노닥질판이라고 여기면서 쳇바퀴를 돌 수 있고, 이러한 글을 쓸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저로서는 이 푸른별에서 시늉질을 끝내고 사랑빛을 펴는 길을 생각하고 이러한 길을 글로 쓰려고 합니다. ‘sf’나 ‘연속극’이라는 이름으로 메스꺼운 이야기밖에 쓸 수 없다면, 이곳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서 꿈을 꾸지 못합니다.
《쇼리》(옥타비아 버틀러 글/박설영 옮김, 프시케의숲, 2020.7.15.)
ㅅㄴㄹ
이 책은
안 보이는 구석 밑바닥에
처박아 놓으려고 한다.
얼마 전에 읽었던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이 너무 재미있어서 이번 기회에 옥타비아 버틀러 시리즈를 깨보기로 했다. 국내에 어떤 책들이 출간되었나 보았더니 깨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겨우 네 권이었다. 그 중 한 권을 읽었으니 세 권이 남은 셈이다. <블러드 차일드>는 단편 모음집인 것 같고, <와일드 시드>는 중장편이고 그나마 <쇼리>가 장편이자 드라큘라와 관련된 소설이라는 말에 잽싸게 구입했다. 이번에는 어떤 SF세계를 보여줄지 기대되었다. 주인공은 겉으로는 소녀처럼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53세이다. 극심한 고통에서 눈을 떠보니 자신이 있어야 할 침대가 아닌 외딴 숲에 나체로 누워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허기를 느끼며 사냥을 하는 주인공은 언뜻 짐승과도 같은 모습을 보인다. 빛이 보이자 화상을 입은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것을 보면 이미 주인공은 사람이 아닌 뱀파이어가 된 듯 하다. 지난 번에도 느꼈지만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은 초반부터 전혀 지루함이 없이 흥미진진하다.
(읽은 지 좀 된 소설 리뷰는.. 정말 너무 힘들다 ㅋㅋㅋ 게다가 하이라이트 표시도 하나도 없다니.)
무슨 정신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예스북클럽 일자가 다 되어 가면서 편하게 읽을만한 소설을 찾다가 골랐던 것 같다. 아마 순위권에 있었던 책이어서 읽었던 것 같다. 크레마로 다운 받아서 읽었더니 (다 읽고 나서 표지 사진 찍을 때만 아이패드로 다운 받아서 찍는다.) 표지가 정확히 어떤 사진인지 몰랐다. 아주 짧은 머리를 가진 흑인 소녀였다니. 스스로도 놀라운 것이, 당연히 어리고 연약해보이는 백인 소녀를 상상하면서 책을 읽다가 책 뒤로 넘어가면서 묘사되는 주인공을 보며 아, 흑인이구나 했다. 그리고 표지를 보니, 아 역시 그렇구나 하는 이상한 생각. 어쨌든 표지가 몹시 강렬하다. 기울어져 벽에 머리를 대고 있고, 그림자는 꼿꼿이 서 있는 것 같고. 어쨌든... 인상적이다.
다 읽고 (충격에 헤매이며) 찾아보니 저자가 정말 유명한 사람이었다. 크레마로 읽으면 표지를 잘 안 보게 되는데 (저만 그런가요.. 어두컴컴해서 관심을 기울이기 힘든데..) SF계의 거장이었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to be continued)
이런 장르는 보통 여러 권으로 이어지는 거라, 시작하기 겁나서 꺼렸는데, 잠깐 찾아봤을 때, 이 책은 단 권이라서 좋았다. 기분전환 삼아 한 권 읽고 덮으면 좋겠다 했는데... 아... 정말 작가님 이런 탄탄한 세계관을 만들어 놓으시고 돌아가시다니요 ㅠㅠ 이건 결코 단권으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었다. 정말 내가 이래서 여러권 연결되는 책을 잘 읽지 않는데 스토리 세팅이 너무 탄탄해서 뒤 이야기가 너무 너무 궁금하다. 아오.. 뒤에 어떻게 될지 너무 궁금하다. 그들이 잘 정착할지, 남자 공생인들끼리 잘 지낼지, 다른 문제들은 생기지 않을지. 쇼리가 어떻게 성장할지 말이다. 너무 아쉽다.
솔직히 앞부분은 좀 지루하게 펼쳐진다. 여러 권으로 연작되는 책들의 첫권이 그렇듯, 이 책도 새로운 세계관에 대해서 많은 걸 설명해야 하기에 이 책에서도 그런 부분들이 보인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과 함께 그녀의 세상에 대해서 알아가는 이야기가 바로 쇼리 책이다. 10대 초반의 어린 아이로 보이는 사실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뱀파이어인 주인공이다. 실제 나이는 50대이지만, 뱀파이어 (책에서는 이나라고 한다) 세계에서는 어린 편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나와 전혀 다른 쇼리는, 그들의 부모가 인위로 만들어낸 인물. 덕분에 그들 사이에서 이물질처럼 여겨지고, 공격 받는다. 그로 인해 모든 걸 잃게 된 쇼리가 그녀 자신의 삶을 다시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이나들은 냄새에 민감한데 나도 모르게 읽으면서 자꾸 킁킁 거리게 된다. ㅋㅋㅋㅋ 이나, 공생인, 재판(회의였던가?) 등.
주인공이 흑인이라는 점. 여자 아이라는 점. 그들의 사회에서도 어떤 취급을 받는지를 그리고 있는 걸 보니... 저자가 좀 더 그려내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저자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만, 다른 리뷰들을 읽어 보면서 전작들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잘 드러냈다고 한다. 여하튼.. 개인적으로 이미 읽게 된 거 뒷 편들도 너무 궁금한데, 아쉽다.
역시 이런 장르는 함부러 시작하는 게 아니다. ㅋㅋㅋ
옥타비아 버틀러의 생애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기존의 뱀파이어 소설과 궤를 달리한다. 나에게 뱀파이어 소설하면 앤 라이스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물론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예외다.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에 한때 빠져서 정신없이 읽은 적이 있다. 장황하면서도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주는 재미는 대단했다. 그런데 옥타비아 버틀러의 흡혈귀는 기존의 뱀파이어와 종이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스스로 ‘이나’라고 부르고, 인간들과 함께 산다. 그들에게 물린다고 해서 뱀파이어로 변신하지 않는다. 다만 이나에게 물리면 강한 쾌락을 느끼고, 그들의 힘에 조정되는 문제가 있다. 작가는 이나와 인간들의 관계를 공생이라고 표현한다. 이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을 공생인이라 부르고, 상대방이 죽을 때 큰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이나와 공생인들은 무리를 이루고 산다.
쇼리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허기를 느낀다. 무엇인가가 나타나자 잡아먹는다.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피와 고기를 먹고 재생한다. 해를 보면 피부가 상한다. 밤에 동굴에서 나와 먹을 것을 사냥한다. 자신이 누군지, 불탄 집의 정체도 모른다. 그러다 도로를 걷다가 한 남자에게 발견되어 그의 차를 탄다. 그의 피를 마신다. 죽을 정도는 아니다. 그는 쇼리의 첫 번째 공생인이 되는 라이트다. 쇼리의 피부는 검고, 키는 150센티미터 정도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그녀는 라이트의 집으로 간다. 기억을 상실한 쇼리가 다시 세상을 만난다. 아직 자신이 정체와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피에 대한 갈증은 주변 사람들을 몰래 찾아가 마시면서 해결한다.
자신이 발견된 곳에서 기억을 더듬어 불탄 집을 찾아낸다. 그곳에서 다양한 냄새를 맡는다. 그녀를 찾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안다. 나중에 그의 정체를 알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다. 아버지와의 만남은 짧게 이루어진다. 과거의 기억을 잃은 그녀에게 이나의 문화나 능력 등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다. 몇 가지 간단한 정보를 얻지만 충분하지 않다. 다만 이나에게는 공생인들이 필요하다는 사실만 안다. 단 한 명의 공생인으로는 그들의 허기를 채울 수 없다. 성별에 상관없이 다수의 공생인과 함께 살아야 한다. 이야기 진행되다 보면 이 공생인들이 결혼하는 경우도 나온다. 재밌는 설정은 이나들이 영생을 살지 못하고, 기본의 흡혈귀처럼 햇볕에 약하다는 것이다. 낮에는 우리가 밤에 졸리는 것처럼 그들도 잠에 든다. 이것이 그들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에게 좋은 먹이감이 된다.
쇼리가 다시 아버지의 집에 갔을 때 집은 불타고 아버지와 형제들은 죽었다. 아버지와 형제의 공생인이 각각 한 명씩 살아 남았다. 그들이 살아남은 것은 그 당시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다른 이나에게 중독된 이들이 다른 이나와 공생하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 다행히 쇼리의 독은 강력해 이들이 쇼리의 공생인이 된다. 쉰세 살의 뱀파이어이지만 과거의 기억이 없다 보니 모든 것이 낯설다. 그녀는 공생인의 도움을 받아 다른 이나를 찾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이나들이 잠들어 있는 낮 시간에 낯선 무리들의 공격을 받는다. 하지만 쇼리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낮에도 돌아다닐 수 있고, 햇볕에도 어느 정도 저항이 가능하다. 인간과 이나의 경합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녀의 아버지가 이미 알려주었다.
작가는 화려한 액션이나 무시무시한 장면을 연출하기 보다 이나와 인간의 유전적 결합을 통해 태어난 쇼리의 존재를 두고. 인종 차별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다. 많은 이나들이 생각하기에 쇼리의 햇볕 저항력은 큰 축복이 분명하지만 아닌 이나들도 있다.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면 이런 사실들이 눈에 들어오고, 이것을 두로 벌어지는 논쟁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어떤 대목에서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나들은 성인이 되면 동성끼리 살아야 한다. 이성의 존재는 너무 강력한 유혹이라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여러 명이 함께 살아야 하는 문제도 있다. 이 소설에서 첫 공생인 라이트가 남성 공생인이 또 생기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이 문화의 문제라는 사실을 조용히 이야기한다.
작가의 작품 중에서 흔치 않은 독립 작품이다. 미국의 유명세에 비해 한국에 번역된 작품의 수가 너무 적다. 운 좋게도 이 작품까지 출간된 모든 작품을 읽었다. 어떤 작품들은 나의 이해를 넘어섰지만 가독성은 변함없이 좋고,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늘 매혹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와일드 시드>를 포함하고 있는 패터니스트 시리즈가 계속 나왔으면 하는데 과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만약 작가가 이른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이번 작품도 시리즈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나라는 뱀파이어 종족이 너무나도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읽고 <블러드 차일드>를 읽으려고 했는데, 이 책이 먼저 눈에 띄어 읽게 되었다. 한 여자아이가 영문을 모른 채 낯선 세계에 불시착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라서 <킨>과 비슷할 줄 알았는데, 웬걸 여자아이의 정체는 (<킨>의 다나처럼) 평범한 인간 여성이 아니라 사실은 53세인데 10세 정도의 외모를 지닌 이나(뱀파이어)였고, 성별을 불문하고 이 사람 저 사람과 성관계를 맺고 그들과 일종의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복잡한 존재였다.
책을 다 읽고 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싶어서 다른 분들이 쓴 리뷰를 살펴봤는데, '뱀파이어 물로 폴리아모리 이슈를 다루는' 작품이라는 글을 읽고 그제서야 조금 이해가 되었다. 동시에 두 사람 이상을 사랑하는 다자간 사랑을 일컫는 폴리아모리는, 한 번에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벅찬 나에게는 아직 어려운 개념이다. 생각해 보면 <킨>에서 다나는 현실에선 남편 케빈을 사랑하고, 타임 슬립한 과거에서는 백인 농장주의 아들 루퍼스와 연인 비슷한 관계를 이루었다. 이처럼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여러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도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어떤 장애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사랑이라면, 오직 한 번에 두 사람끼리만 사랑할 수 있다는 상식 역시 사랑으로 넘어서야 할 편견이 아닐까. 이런 식으로 낯선 개념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알아나가는 일이 즐겁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재밌게 읽고 나서 다음으로 <쇼리>를 읽게 되었다. 인종차별과 SF라는 두 소재의 만남만으로도 기대되었지만 <킨>을 따라잡기에 이야기의 스토리가 흥미롭게 느껴지진 못했다. 장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소설을 이끌고 있는 뱀파이어 집단과 그의 종족이 어떻게 구성되어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창의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단점으로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이 한 사람을 공유한다는 것 자체가 뭔가 거부감이 느껴져서 쇼리에게 일어난 일들에 응원을 하기 보다는 약간의 낯선 느낌이 있는 터라. 책을 읽은 많은 독자들이 지적하듯이 확실히 <트와일라잇>과 어느정도 겹쳐진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음, <킨>으로 인해 너무 기대를 했기 때문이지 큰 흥미가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우리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이나의 공동체에 대한 상상력은 매력적이다.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한 소녀가 극심한 고통 속에서 깨어난다. 소녀는 앞을 보지 못한 채로 자신에게 다가온 사람을 잡아 먹고 기력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동굴을 벗어나 숲을 지나 청년 라이트를 만나고 그를 물고 그의 피를 마신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단어나 사물과 접촉하면 그것이 무엇인지는 떠올릴 수 있다. 소녀는 라이트를 장악하고 라이트는 능동적으로 장악당한다.
『“이건 종교적인 상징이야, 르네···. 중요한 상징이지. 이건 뱀파이어를 다치게 하려고 쓰는 거야. 뱀파이어는 악하다고 여기니까. 이제껏 내가 본 모든 뱀파이어 영화들에 따르면 너는 십자가를 무서워해야 할 뿐 아니라, 그게 닿으면 피부가 타들어가야 해.”
“안 뜨거운데.”
“알아, 알아. 걱정하지 마. 영화에서 지껄이는 헛소리일 뿐이니까.”』 (p.91)
뱀파이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소녀는 라이트에 의해 르네, 라는 이름을 얻지만 곧 원래 자신의 이름이었던 쇼리, 라는 이름을 되찾는다. 소설에서 뱀파이어는 이나, 라는 명칭으로 불리운다. 이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뱀파이어와는 다르다. 이나는 공생인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사람들을 찾아 영속적인 관계를 맺는다. 한 번 물고 물리는 관계를 맺게 되면 공생인은 그 이나에게 소속된다.
“제시카 마거릿 그랜트. 나는 눈을 감고 기억 속에서 그 여자에 대해 뭐라도 찾으려고 애를 썼다. 뭐라도.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 인생은 전부 지워졌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이런 현실에 직면할 때마다 친숙하고 따뜻한 줄 알고 들어간 곳에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p.202)
하지만 쇼리를 다른 이나와는 조금 다르다. 이나에게는 인간 유전자가 들어 있다. 다른 이나들은 낮에는 활동을 하지 못하고 감각 기관이 무뎌진 채로 잠을 자야 하지만 이나는 깨어 있을 수 있다.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것만 아니라면, 후드티 등으로 잔뜩 무장한다면 빛이 있는 시간에도 움직일 수 있다. 쇼리를 흑인 소녀이고 실제로는 50살이 넘었지만 10살 정도의 나이로 보인다.
“... 대니얼에 따르면 전 세계의 이나 가족들은 내 가족이 유전공학 실험에 성공한 것을 두고 기뻐했다. 모두가 똑같은 방법을 이용해 자신들의 미래 세대가 낮에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 인간의 인종차별은 이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종이 그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어디서든 마음이 통하는 공생인을 찾았다. 오직 개인적 취향만 따질 뿐, 그 밖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p.227)
쇼리의 독특한 내력은 결국 쇼리와 관계가 있는 이나 집단 그리고 그 이나들에 딸린 공생인들의 절멸이라는 불행한 결과를 낳았다. 쇼리의 기억이 사라진 것도 그 결과물이다. 쇼리는 가까스로 살아남은 아버지의 공생인과 함께 다른 이나 집단에 찾아가고, 그곳에서 또 한 번의 공격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 공격에서 살아남은 쇼리는 범인 색출을 위한 위원회의 구성과 삼일에 걸친 회의에 참여하게 된다.
“... 대부분의 인간에게 너희를 만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너희들이 우리를 물면 그걸로 끝이야. 난 전혀 이해를 못했지.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헤이든이 매복해 있다가 나를 습격했어. 그가 나를 물었고 그 뒤엔 별 다른 수가 없었지. 내가 어떤 곳에 발을 들이는 건지 짐작도 못했어.” (p.303)
소설은 쇼리를 공격한 이나 집단이 가진 편견, 그러니까 뱀파이어 집단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편견에 대한 우화이고, 그러한 편견을 자신의 태생과 함께 깨고 있는 쇼리의 성장담이다. 소설을 읽으면 곧바로 영화 <렛미인>과 <트와일라잇>이 떠오른다. 이나와 공생인이라는 관계는 <렛미인>의 이엘리와 호칸(그리고 오스칼)을 연상시키고, <트와일라잇>의 벨라는 쇼리의 인간 엄마를 그리고 쇼리를 르네즈미로 연결된다. 소설 <쇼리>가 2005년 출간되었는데 두 영화는 2008년에 개봉되었고, <렛미인>의 원작 소설은 2004년, <트와일라잇>의 원작 소설은 2005년에 출간되었다. 어지간히 뱀파이어로 융숭한 시대였다.
옥타비아 버틀러 Octavia E. Butler / 박설영 역 / 쇼리 (Fledgling) / 프시케의숲 / 455쪽 / 2020 (2005)
뱀파이어는 누군가 심장에 나무 막대기를 꽂지 않는 이상 불멸이었다. 그러니 막대기가 꽂히지 않는다면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였다. 그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피를 마시고, 거울에 비치지 않으며, 박쥐나 늑대로 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피를 빨거나 인간에게 자신들의 피를 마시도록 해 뱀파이어로 만들었다. 마지막 설명의 경우 어떤 책을 읽느냐, 어떤 영화를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았다. 그것이 뱀파이어에 대한 또 다른 진실이었다. 즉, 허구의 존재였다. 민담 말이다. 뱀파이어는 없었다. 그러면 나는 뭐란 말인가? p.30
한 소녀가 어둠 속에서 눈을 뜬다. 숨만 쉬어도 온 몸이 쑤시고 아팠으며, 배가 너무 고팠다. 어디를 봐도 빛이라곤 없는 어둠 속에서 짐승이 다가왔고, 허기로 인한 고통 때문에 그녀는 놈을 사냥해 배를 채운다. 먹고 자고를 반복하다 보니 부상당한 부위가 조금씩 나아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랐지만 언덕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한다. 아는 사람도 없었고 기억나는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자신에 대해서도, 이전의 삶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다 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병원에 데려다 주겠다는 그의 행동을 저지하려다 무심코 그를 물어버린다. 피를 빠는 모습을 보고 그는 소녀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상한 건 피를 빨리는 동안 남자도 기분이 좋았다는 사실이다.
열한 두 살 정도의 외모를 가진 흑인 소녀 쇼리는 사실 나이가 쉰셋이었다. 극중 뱀파이어종족 '이나'에서 그 정도 나이는 아직 어렸다. 그들은 가임 연령이 일흔쯤 되어 시작하고, 총 500년의 세월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뱀파이어족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드라큘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뱀파이어와는 전혀 다르다. 뱀파이어가 인간을 죽이거나 뱀파이어로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나가 인간을 물면 두 존재는 연결되어 서로에게 중독되고, 생의 마지막까지 서로를 보호하고 책임져야 하는 공생 관계를 맺게 된다. 이나는 피를 얻기 위해 인간을 다치게 할 필요가 없고, 이나에게 물린 인간은 훨씬 건강하고, 강해지며, 수명도 늘어난다. 이나 종족은 몇 세기 동안 낮에도 버틸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해왔고, 쇼리는 그런 노력 끝에 탄생한 가장 성공적인 결과물이기도 하다. 유전자 조작으로 인해 절반은 인간이었기에, 그녀는 낮에 꼭 잠을 자야 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인간들은 우리가 어째서 그토록 장수하는지 알고 싶어 했어. 노화를 피하는 어떤 비밀스런 마술을 가진 건 아닐까? 그 비법을 알아내려면 무슨 짓을 해야 할까? 세월이 흐르면서 우릴 둘러싼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우리는 도망치거나 싸워야 했어. 그렇게 하지 못하면 악마나 엄청난 비밀을 숨긴 자로 몰려 고문받고 살해당했어.... 그런 식으로 어떤 문화권에서 우리는 '살아 있는 시체'나 '죽지 않는 자'가 되었지. 그걸 계기로 인간이 우리를 태우거나 참수하는 방법을 깨달은 거란다." p.283
기본 적인 서사는 기억을 잃어버린 뱀파이어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여정으로 진행된다. 나는 누구인가. 왜 우린 인간과 다른 건가. 인간과는 어떤 관계이며, 우리는 어디서 온 것인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가족들을, 이나들을 누군가 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애초에 그녀가 아주 심하게 다쳐 머리에 부상을 입은 것도 바로 그들에 의한 공격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그 공격으로 이나와 인간 가족들 일흔일곱 명이 죽고, 유일하게 쇼리만 살아 남았다. 쇼리가 아버지인 이오시프를 만나 그간의 일들에 대해서 듣고 나서 일주일 뒤, 또 다시 그녀의 남자 가족들과 여자 가족들 모두 불에 타서 재와 뼈만 남은 상태로 발견된다. 누군가 쇼리의 가족을 목표로 삼았고, 그녀의 친척들을 싸그리 죽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만약 이 일이 쇼리에게 인간적 특징들을 심어준 실험과 관계가 있는 거라면 주 목표는 그녀일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점점 그녀를 둘러싼 거대한 음모와 파괴 행위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옥타비아 버틀러가 사망하기 1년 전인 2005년에 출간되었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생애 마지막 소설이라는 점도 의미가 있지만, 말년에 그녀의 소설 세계가 다다른 곳을 가늠할 수 있는 작품이라 더욱 묵직한 감동을 안겨준다. 마지막 작품으로 뱀파이어 판타지를 선택해,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그야말로 독보적이고 신선한 뱀파이어물을 보여주고 있다. 기존에 만났던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들이 초능력자를 흑인 노예에 빗대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역사를 폭로하고,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의 비극을 그려내고, SF라는 장르가 미래나 우주뿐 아니라 시간 그 자체에 대해, 공간에 대해, 역사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 작품 역시 일반적인 장르물로서의 뱀파이어물을 훌쩍 뛰어 넘는다. 이 이야기는 젠더와 인종, 섹스, 중독 등의 문제를 시작으로 사랑과 쾌락에 기반해 차별과 폭력이 없고, 정의로우며 모계로 구성된 '공생의 공동체'라는 파격적인 여정으로 향한다. 그 어디서도 만난 적 없던 뱀파이어 판타지를 만나고 싶다면, 'SF계 작가들의 작가'라고 불리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생애 마지막 소설을 만나 보자.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만나게 될 테니 말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얼마전에 일본 작가 오리가미 교야의 『세계의 끝과 시작은』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흡혈종을 사랑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새로운 뱀파이어 소설 『쇼리』를 읽는데, 오리가미 교야가 이 작가의 소설을 모티프로 해서 새로운 흡혈종을 탄생시켰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 많은 작가들이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을 참고했을 것 같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도 그러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수많은 소설로 변주되는 뱀파이어 이야기는 우리를 두렵게 하면서도 호기심을 부른다. 무섭다고 소리치면서도 좀비 영화를 챙겨보는 이유와 같다.
이 작품 외에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을 세 권 읽었다. 모두 SF 소설로 몰입감이 좋고 감동과 재미가 있는 소설이었다. 『쇼리』는 뱀파이어 소설이란 게 호기심을 자아냈다. SF계에서 작가들의 작가라고 불리는 옥타비아 버틀러가 뱀파이어를 어떻게 그렸을까 무척 궁금했다. 작가는 다른 작품에서도 말했지만 흑인으로서 인종간의 갈등, 인간성 회복을 위한 소설을 많이 썼다. 이 작품 또한 작가가 세상을 떠나기 1 년 전에 출간된 작품으로 작가의 세계가 고스란히 드러난 작품이었다.
한 흑인 소녀가 숲에서 홀로 깨어나며 소설은 시작된다. 기억을 완전히 잃었으며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심한 허기로 동물을 몇 마리 사냥하여 허기를 채웠다. 며칠을 동굴속에서 지내다 숲속에서 나와 폐허를 발견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폐허는 왠지 그리운 곳이었다. 누군가가 폐허 속 집에 들어와 총을 쏘고 불을 질러 죽게했다.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 농가에서 옷을 훔쳐 입고 헤매다 한 젊은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에게서 좋은 냄새가 나 손과 목을 깨물어 피를 조금 마시고, 갈 곳이 없는 소녀에게 자기의 집으로 가자고 한다. 소녀가 아주 어려보였지만 젊은 남자는 소녀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품게 된다.
소녀의 정체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소녀는 열한 살 정도의 외모지만 쉰세 살을 먹었으며 그의 아버지라고 하는 이오시프와 만나 여자들끼리 머물렀던 소녀의 엄마들과 자매들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고 불살라졌다는 말을 듣는다. 소녀의 이름은 쇼리이며, 그들은 자신들의 종족을 뱀파이어가 아닌 이나라고 부른다. 라이트는 쇼리의 첫 공생인이 되었다. 라이트를 다치지 않으려 많은 피를 마시지 못하고, 라이트가 잠든 틈을 타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의 피를 마신다. 그 사람이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마시고, 더이상 피가 나지 않게 상처 부위를 혀로 핥는다. 이 과정에서 쇼리의 침에 진정과 쾌감,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쇼리가 선택한 사람은 쇼리에게 쾌락을 느끼고 그녀에게 피를 주는 행위를 갈구하게 된다.
이나들에게 피를 주는 사람들은 공생인이라 부른다. 이나는 공생인들을 한 사람당 일고여덟 명씩 두는데, 공생인이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이나는 공생인들을 보살피고, 공생인들은 이나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별로 구별하여 공동체 생활을 한다. 공생인들을 거느리며 자기의 자매들과 엄마들 그리고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까지 죽임을 당하여 쇼리는 누가 그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자 한다. 자기가 백인이 아니라서? 아니면 낮에도 버틸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유전자 조작으로 절반은 인간인 자신을 겨냥했단 말인가? 그것도 아니면 인종차별주의자들이 피부가 검은 쇼리를 겨냥해서 벌인 일일 수도 있었다.
공생인들은 이나의 보살핌을 받는다고 했다. 공생인이 되면 더이상 늙지 않을 뿐더러 상처가 나도 금방 치유되고, 인간들보다는 훨씬 오래 살 수 있다. 그런 점 때문에 스스로 공생인이 되고자 하는 인간들도 있으며, 성별을 달리하여 쾌락을 맛보고 싶어서다. 물론 공생인과 이나가 같은 성이어도 그 쾌감은 크다.
아무래도 영화나 소설 때문에 우리에게 조금은 친숙한 존재가 뱀파이어 인것 같다.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도 거부감이 없고 기대감마저 생긴다. 흑인 소녀는 자신의 가족들을 죽인 이들을 찾을 수 있을까. 위원회가 개최되는 부분에서도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문제를 일으킨 뱀파이어를 어떻게 해야할지 회의를 했던 장면 말이다. 어디서나 누군가를 질투하고,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배제하는 경우가 있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새로운 뱀파이어를 탄생시켰다. 아마 작가가 살아있었으면 시리즈로 계속 나오지 않았을까. 『쇼리』는 시리즈의 시작점에 있는 소설 같았다. 작가의 여러 작품들 중 시리즈로 된 게 많은데 유일한 단행본이 『킨』과 『쇼리』 뿐이라고 한다. SF소설을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은 흡입력이 강해 금방 이야기에 빠지게 되는 매력이 있다. 그의 새로운 작품을 더이상 읽을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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