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지극한 상실에서 시작하여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슬픔의 보편적 궤적
“슬픔에서 벗어나려면 이런 허위를 떨치고 슬픔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결해야 한다. 그런 다음 스스로에게 휴식을 허용하고, 자연을 가까이 하거나 책을 읽으며 황폐한 마음을 달랜다. 때로는 지독한 탐닉에 빠져드는가 하면 냉소가 뜻밖의 유용한 위안이 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슬픔의 흔적을 간직한 채 거듭나는 때가 온다. 이때 우리는 떠나간 이가 우리 삶에서 차지했던 의미를 차분히 되새기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슬픔의 위안』은 이처럼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에서 시작되어 살아 있는 이의 삶으로 돌아오는 슬픔의 궤적을 찬찬히 묘사한다.”
이 책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로 비롯된 슬픔의 궤적을 따라 네 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1장에서는 죽음으로 비롯된 슬픔에 맞닥뜨려 겪게 되는 엄청난 고통의 무게와 상태를 ‘측량’한다. 2장에서는 슬픔의 한가운데를 지나며 경험하는 여러 양상과 그 작용을 ‘관찰’한다. 3장에서는 다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사소한 ‘징후’들을 찾아 서서히 슬픔에서 빠져나오는 ‘치유’ 과정을 살핀다. 4장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새겨진 슬픔의 흔적을 기억하며 그로부터 삶의 미립, 곧 ‘작은 성찰’을 이끌어낸다.
슬픔에서 빠져나오기 급급하여 슬픔이라는 감정의 기승전결을 부정하는 대신 슬픔의 발생과 과정, 소멸과 흔적을 모두 다루었다는 점이 책의 무엇보다 큰 강점이다. 차마 꺼내어놓을 수 없는 비정상적이고 이상한 슬픔의 징후들까지 자연스럽고 담담히 다루고 있으며, 슬픔에 직면한 독자들은 실제로 책에 실린 모든 감정의 단계들을 거치고 경험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갑자기 찾아온 슬픔이 어떤 무게로 우리의 몸과 일상을 저절로 바꾸는지, 애도와 비통을 이겨내려는 사람의 말과 움직임은 어떠한지, 슬픔을 이겨내는 ‘위안의 기술’과 슬픔 이후의 삶의 표정들을 무엇인지를 빠짐없이 조명하는 동안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사건보다 더 힘겨운 고투인 슬픔의 과정을 이해하게 되고 실제적인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이고 사려 깊은 언어로 슬픔의 시작과 끝,
애도의 과정을 들여다보는 임상 인문학
이 책은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퍼하는 사람이 겪는 상황과 광범위한 문제들을 섬세하게 포착해서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슬픔에 대한 원론적인 해설이나 개념 정의보다는 개개인이 겪은 구체적이고 솔직한 슬픔의 경험담과 에피소드를 담았다. 모호한 개념어나 지나치게 감상적인 언어의 향연을 피해 쉽고 솔직한 구어를 사용했다. 의사나 심리학자, 상담사 같은 임상 전문가들이 직업적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구사하는 유능하고 건조한 조언보다는 쉽고 따뜻한 공감의 말 걸기를 통해 살가운 대화와 소통을 이끌어내어 담았다.
각 장은 앉은 자리에서 10분 정도면 읽을 수 있는 짧은 에세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에세이들은 모두 슬픔을 겪은 사람들의 구체적이고 솔직한 경험담이나 에피소드다.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례도 있지만 작가나 배우, 유명 인사들은 물론 일반인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일어난 비극적인 순간과 그것을 지나온, 혹은 지나고 있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상황들을 가감 없이 읽다 보면 과장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슬픔의 실체를 만날 수 있다. 수년에 걸친 다채로운 취재와 취재원과의 격의 없는 소통의 과정은 객관적인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이를 통해 슬픔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정색하거나 우울하게 다루기보다 오히려 유머와 위트를 사용한다. 이는 독자들이 감정의 균형을 잃지 않고 독서를 계속할 수 있게 하는 큰 미덕이다.
문학과 영화, 만화, 신문기사, 유행가 등에 스민 슬픔의 천 가지 양상
이 책의 저자는 정신분석가나 심리상담가가 아니다. 예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희곡과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는 작가들이자 창작자들로서 슬픔을 다방면으로 바라보는 색다른 시각을 선보인다. 이들은 슬픔에 직면한 사람들과의 인터뷰에 더해 각종 문학과 예술작품에 담긴 슬픔의 파편들을 그러모았다.
『햄릿』, 『안티고네』 같은 고전을 비롯해 수전 손택의 비평서에 담긴 깊이 있는 슬픔의 성찰은 물론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와 조앤 디디온 등 죽음과 슬픔에 천착한 작가들의 작품을 두루 살폈다. 셰익스피어와의 희곡에서 알베르 카뮈의 일기, 드라마와 영화의 명대사에서부터 잡지 만화와 신문 부고까지 다루었으며, 저명한 의학자들의 연구 결과에서 스포츠 단신, 유행가의 가사까지 슬픔의 그물에 걸리는 공감의 콘텐츠라면 시대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담아내었다. 본문에 실린 100여 편에 이르는 작품들은 슬픔의 보편적인 정서를 아우르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슬픔의 여러 면모를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슬픔이라는 주제를 다룬 다양한 시대와 정서의 스펙트럼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을 유려하게 옮겨낸 번역자는 20년간 우울을 앓아왔는데 이 책을 옮기면서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어째서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 책의 저자들이 다양한 슬픔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따뜻한 인간애와 진실한 성의만으로는 위로가 발생하지 않는다. 나의 감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제대로 아는 사람만이 ‘제대로 앎’ 그 자체로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
훌륭한 에세이는 훌륭한 시나 소설보다 드물다. 감히 말하건대 『슬픔의 위안』 은 지난 몇 년간 내가 읽은 에세이 중 최고의 것들에 속한다. 부디 당신의 슬픔도, 이 책이 알고 있기를.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