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위안
론 마라스코, 브라이언 셔프/김설인
현암사/2019.12.5.
sanbaram
사람이 살다보면 누구나 슬픔과 마주하는 때가 있게 된다. 부모형제나 가까운 사람들과 사별하게 되는 때가 반드시 온다. 그럴 때 사람들은 저마다 슬픔을 느끼게 되지만 그 강도나 이겨내는 방법은 제각각 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슬픔의 위안>은 슬픔을 이겨내는 것에 대해 강의한 내용과 많은 사례들을 애통의 과정인 네 개의 기본 궤적을 각 장으로 구성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책의 목적이 ‘바로 당신이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슬픔의 위안>은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에서 시작되어 살아 있는 이의 삶으로 돌아오는 슬픔의 궤적을 찬찬히 묘사한다. 저자 론 마라스코는 연출가이자 작가로 활용하며 미국 로스앤젤레스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및 예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영화와 연극, 소설, 역사의 장면들을 ‘슬픔’이란 주제를 연구하는 한 방법으로 사용하여 강의를 해왔다. 저서로 <그곳에 있었던 개>, <배우에게 전하는 편지>가 있다. 공저자 브라이언 셔프는 미국 애리조나주 출신의 작가로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공동저자인 론 마라스코와 함께 영화와 드라마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 하였다.
<슬픔의 위안>에 담긴 모든 이야기와 정보의 존재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바로 당신이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전체가 네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애통의 기본 궤적이라고 생각한 순서다. 첫째, 슬픔의 무게에서는 슬픔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된다. 둘째, 정직한 대면에서 슬픔은 감정이 격화된 상태다. 셋째, 아홉 가지 위안에서는 슬픔에 빠진 사람이 위안을 찾으려 하는 아홉 가지를 생각해본다. 넷째, 슬픔의 흔적에선 슬픔이란 감정은 그 나름의 의지가 있어서 독자들 내면의 깊이 모를 곳에서 솟아나오는 것에 대해 알아본다. <슬픔의 위안>은 스물아홉 가지 의미의 틀에 두 저자의 통찰을 담아 사별의 슬픔을 입체적으로 형상하화고 인문적 사색과 성찰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저자들은 이를 통해 ‘슬픔에 대한 이해’를 독자와 나누고자 했다. 이렇게 살펴보는 모든 것이 독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중 하나 자기와 비슷한 상황을 찾아내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이 책의 존재 이유라고 한다. “사랑하는 이가 죽은 뒤 잃게 되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떠올릴 수 있는 한, 가장 소소하고 평범한 것들이다. 가장 익숙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우리 삶이라는 피륙 속에 가장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p.34)”라고 말하며 슬픔은 슬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슬픔을 이야기하라.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슬픔을 말하라. 빈 뒤뜰이나 샤워 커튼에 대고 슬픔을 이야기하라. 혼자 있는 차 안에서, 숲 속을 걸으면서 슬픔을 큰 소리로 외쳐라.(p.89)” 이렇게 하는 것이 슬픔의 토로다. 그러다 보면 슬픔에 대해 위안이 된다고 한다. 또한 순수한 휴식은 슬픔의 고통을 치료해 주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 중 하나다. 그러나 슬퍼하는 사람이 참 하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도 휴식이다. 자연은 슬픔이 일으키는 문화의 위협을 겪고 난 후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회복시키는 데 필요한 하나의 수단이다. 살다 보면 불편할 정도로 부자연스러운 여러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난생처음 뼈저린 슬픔을 경험하고 나면 정원에서 손에 흙을 묻히는 것이, 말 그대로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왜 위안이 되는지 깨닫게 된다. 함께 있기 편한 진실한 사람을 묘사할 때 “흙냄새 나는”이라는 말을 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비탄에 빠져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앞둔 사람 역시 섹스를 통해서든 다른 형태의 탐닉을 통해서든 생명의 힘과 재결합하고자 하는 욕망을 느낄 것이다.(p.191)” 죽어가는 사람은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시간에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에 관심을 보이고 병적일 만큼 집착하기도 한다. 오늘날은 남성이 야한 농담을 하면 성범죄로, 목소리를 높이면 공격으로, 여자 친구가 열변을 토하는데 딴 생각을 하면 용서 못할 잘못으로 여기는 시대다. 남자들은 모든 광고주와 대중에게 관계자들에게 너무 자신감을 잃어서 45킬로그램 이하의 체중에 마릴린 먼로의 음색, 수술로 도톰해진 입술에 머리는 텅 빈 돈 많은 여성만이 유일한 이상형이라고 똑똑히 보여주는 것으로 복수를 한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엄청난 충격에 빠진 많은 사람이 슬기롭지 못한 방법으로 정의를 추구한다. 정의란 것은 얼마나 강렬한지,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의 마음까지 움직일 수 있다.(p.238)” 오로지 정의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강렬한 모든 것은 동시에 위험할 수도 있다. 이것은 잘못된 방향으로 정의에 투신하는 개혁가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슬픔에 빠진 상태에서는 누구든 삐딱한 마음을 품기도 하고, 바보 같은 행동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해서 슬퍼하는 이들이 느끼는 뼈저린 소외감과 두려움을 덜어주고자 했다. 사별의 슬픔은 지극히 사적인 경험이지만, 동시에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자 불가피한 인간 경험이라고 말이다. 마음의 병으로 인한 고립 등 한 사람의 생을 타격하는 모든 고통과 슬픔의 근원은, 사랑의 상실과 결핍과 부재다. 인간은 매우 의존적인 존재라서 타인의 사소한 언행이나 부주의에도 쉽게 마음이 베인다. 한마디로 인간은 잠재적 슬픔에 항시 노출돼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제 당신이 잃어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 영혼 조각을 남기고 떠났는지 헤아려보라. 아마도 많이 남겼을 것이다.(p.309)” 그 사람 없이 살아간다는 의미는 이 조각들이 모여 새로 태어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된다고 말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슬픔을 갖고 있음을 알며, 나름대로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은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감정이지만 동시에 가장 사적이고 폐쇄된 감정이기도 하다. 타인의 슬픔이나 책과 영화를 통해 슬픔의 감정을 수없이 간접 경험하더라도 정작 자신 앞에 닥치는 슬픔은 극심한 고통과 생소함으로 찾아든다. 특히 사랑하는 이를 죽음으로 잃은 후의 슬픔은 당사자나 주변인들을 속수무책으로 만든다. 슬픔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음울하고 무거우며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 감정에 타인을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차라리 침묵을 지키고, 혼자만의 섬에 틀어박힌다. 이 책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와 충격으로 개인을 덮치는데도 혼자 조용히 해결해야 하는 것이 미덕이 되어온 감정, 남들 앞에 드러내거나 함께 나누는 것이 금기시되어 온 감정, 한시바삐 극복해야 하는 감정으로 처리되었던 슬픔을 인간의 근원적인 보편 감정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한다.
최근에 슬픈 일들이 많이 있어, 이 슬픔을 어떻게 해결하는 게 좋을지에 대해
한참을 고민하다가 슬픔에관련한 책을 사봐요.
읽고나면 저도 제 슬픔을 잘 정리할 수 있겠죠.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고의 충격으로 온 나라가 슬픔에 빠졌다. 너무 많은 학생들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이기에 그들의 가족과 이웃뿐 아니라 대다수의 시민이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했다. 진도 팽목항까지 가서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안산의 분향소에서 추모하는 이들도 많았다. 저마다 자신의 방법으로 슬픔을 공감하고 위로했다.
당시 내가 즐겨듣는 팟캐스트가 여럿 있었는데, 1~2주에 한 번씩 방송을 업데이트했다. 과학 상식을 다루거나 책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갑작스러운 세월호 사고 비보에 진행자들도 방송을 취소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데,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추모에 참여했다. 이야기를 나누고, 슬픔을 말하면서 그들 자신과 청취자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때 한 과학방송에서는 '별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주제로 광대한 시공간의 우주 속에서 작고 나약한 인간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인간은 별에서 와서 별로 돌아가고, 그 별도 언젠가는 우주 저 너머로 사라져 간다. 우리 개인의 삶은 유한하지만 나는 더 크고 지속되는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삶이 허무하지는 않다는 생각에 위로를 받는다.
책을 소개하는 방송은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진행한 <문학 이야기>였다. 원래 다루려던 내용을 내려놓고 그는'슬픔'을 진솔하게 들려주는 것으로 한 시간 반을 채웠다. 타인의 슬픔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이해해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슬픔은 공부해서라도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 공부에 필요한 내용이 이 책에 담겨있다.
신형철이 그때 방송에서 했던 말 중 일부를 대략 옮겨본다.
슬픔 앞에서 무감각하고 무례했던, 그래서 우리를 분노하게 했던 분들이 있다. 라면을 먹고, 기념사진을 찍고, 종북을 운운했던 분들, 그리고 상황을 지휘하고 이끌었어야 했던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 이런 것들은.. 슬픔에 대한 무감각은 그 자체가 폭력이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밖으로 드러날 경우에는 매우 폭력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흉기로 사람을 찌르는 것만큼이나 슬픔의 당사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 될만한 일이다. 당신들이 슬픔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 말은 내가 나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어서 나 자신과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그 슬픔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은 해야 한다. 노력할 수 있는 잠재력 정도는 우리에게 있다라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티브이에서 몇몇 언론인들이 방송을 진행하면서 목이 메어 침묵을 지키고 눈물을 흘리고 했던 그 장면을 보면서 그 모습 자체가 우리에게 감동적이었던 이유는. 인간이라는 게 이런 존재지... 세월호와 진도 vts 사이의 교신은 엉망이었지만, 슬픔이라는 감정의 교신은 이런 식으로 이뤄지는구나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느끼는 안도감 같은 것이 아니었나. 도무지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앞에서 예의조차 갖추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슬픔의 교신이 이토록 어렵구나라는 절망감을 느꼈다가 그 순간에 교신이 성공하는,, 완전한 성공은 아니겠지만, 모습을 보면서 안도감을 느꼈던 것이죠.
설명을 안 해주면 모를 때는 설명을 해줘도 모를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을 완벽히 100% 이해하고 완전히 공감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들일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라면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도 우리는 공부를 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저는 했습니다. 왜 이 중요한 것을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를 분노하게 했던 그분들, 그리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본질적으로는 다르지는 않을지도 모를 우리 자신이 슬픔에 대해서 더 많이 공부하기 위해서 도움이 될만한 그런 글들을 한번 읽어드려보면 어떨까. 그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중의 하나 아닐까.
지금까지도 그때의 방송을 가끔 듣는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위로할 수 없다고 신형철이 말했다. 따뜻한 인간애와 진실한 성의만으로는 위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감정을 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종종 타인의 감정을 읽는 데 실패한다. 어색하고, 난처해진다. 하지만, 방송의 이야기가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은 이해에 가까이 가려는 마음이었다. 마음을 느끼게 되면 정확히는 알지 못해도 위로에 가닿는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슬픔에 대한 다양한 에피소드가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은 책의 내용 중 기억에 남는 문장들이다.
반면에 "당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겠어요"는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말이다.
누군가가 다른 쪽 끝을 잡고 있으리라 믿고 붙잡을 수 있는 밧줄이다.
"밤새도록 휴대전화를 쥐고 있을게요. 당신 전화번호가 뜨면 언제라도 받을게요"라고 말해준다면 한결 더 낫다. 이는 그 사람이 알 수 있는 사실이고, 또 할 수 있는 일이다. 신뢰해도 되는 밧줄인 것이다.
새해가 되면 항상 올해는 독서를 열심히 할거라고 다짐하여
읽어보고 싶은 읽어야지 생각한 슬픔의 위안이라는 책을 한권 구입하였다
뒤에 적힌것 처럼 아직 책을 다 읽지는 않았지만 다 읽고 나면
나도 읽고 큰 위로를 작은 위로라도 받았으면 좋겠다
(저번 책과 마찬가지로 왜 책을 구입하면 항상 검정 자국이 남아있는지 하얀책이라 더 티가 잘 보인다
슬퍼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아무말 말고 그냥 옆에 있어주자 옆에 있어주는게 큰 힘이 될것이다
두 명의 저자에 의해 쓰인 이 책은, 상실의 슬픔에 빠진 이들에 대한 다양한 사례와 적절한 대응, 조언 그리고 위안을 담고 있다.
인간으로서 어느 누구든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슬픔에 대해 도움이 될만한 내용이었다.
다음은 이 책에서 기억에 남는 문장들이다.
"슬픔의 폭풍우 한가운데에 있을 때 반드시 떠올려야 하는 것들이 있다. 다시 유머를 즐기게 되리라는 것, 삶은 계속되리라는 것, 시계는 다시 똑딱똑딱 가고 별들이 다시 보고 싶어지리라는 것을. 그리고 숨 막히게 하는 슬픔의 미덕과 대결을 벌이는 중에도 맛있는 음식과 술을 즐기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이 책에서 조금 아슬아슬한 부분이 있다면 근래들어 많은 현대인들이 반려견이나 반려묘 혹은 반려새 반려오리 심지어는 반려로봇청소기까지. 하여튼 남다른 유대감을 형성해서 그 반려무엇들과의 이별에서 사람과의 이별 못지 않은 상실감을 느끼는 시대가 도래했기때문에, 저자의 문장 중에서, 그런 반려무엇들과의 이별을
사람과의 이별보다는 조금 축소시킨 발언이 있어서. 근데 저는 반려묘는 길러본적이 있기는 하나 저도 매우 사랑했고 고양이에 환장한 사람이긴한데 제 개인적인 취향으로 동물권운동가나 혹은 동물을 인간비슷하게 취급하는 것을 안좋아하기때문에. 근데 슬픔은 존중해야하니까. 뭐 그렇다고 치고.
뒷 부분에 남성과 여성의 애도과정의 차이에 대한 부분도 조금 아슬아슬하게 느껴지기는 했습니다만, 그럭저럭 납득이 아예 안가지는 않았고. 성별적 경향성에 관한 문제는 저도 답이 내려지지 않아서. 그런데 한쪽으로 지나치게 편중된 느낌은 아니었어서 만족스럽게 읽었습니다.
일단 카테고리가 깔끔하게. 주제의식에 맞게 전개가 산만하지 않아서 좋았구요. cs.루이스가 헤아려본 슬픔 이라는 작품에서 부인과 사별한 경험에 대해 쓴 에세이가 자주 인용되는데, 저도 그책 한 십년전에 봤거든여.
덕분에 간만에 그책도 다시 봤네여.
글을 보는 내내 느낀것이.
우울증을 비롯해서 많은 "슬픔" 의 증상을 가진 기분장애들도 이런 애도의 과정과 매우 닮아있구나.
하는 생각. 참 힘들겠다. 하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