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장을 보러 나간 김에 미용실을 들렀다. 지금은 안 되시고요, 이따 5시 반 넘어서 가능한지 전화 한 번 주시고 오세요. 앉아 있는 사람은 셋, 아무래도 코로나 때문에 현장 대기를 안 받는 모양이었다. 아마 시간대별로 예약자들이 줄을 서 있겠지. 끽해야 길이를 짧게 다듬는 게 전부인데도 퇴짜를 맞아감서 미용실을 찾아야 한다니 기분이 묘했다. 때마침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란 책을 읽으며 지금 내가 죽음으로 가는 길 어디 즈음에 서 있는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세수를 할 때마다 이마에 미세하게 형성된 주름이 자꾸만 느는 게 눈에 보여서 신경이 쓰이는데, 제멋대로 막 자라나는 머리카락을 보아서는 아직 죽음을 고려하기에 적절치 않은 시점인 거 같긴 하다.
사고를 중지하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 순간을 그저 뒤로 미루고픈 마음이 큰 거다. 과연 언제까지 그리 할 수 있을까. 나이 70을 넘어선 부모를 바라보면서 작년과 올해가 다르다는 걸 느끼고 있다. 그들에게 마지막이 있을 것이요, 나 또한 머지 않아 그들의 뒤를 따를 거란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았다. 남 이야기 대하듯 책을 읽었다. 구입은 2020년 초에 했으니 꼭 일 년을 그냥 묵혔다. 제목이 서글퍼서, 회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해서. 이유야 들라면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평균수명이 꽤 길다. 그래도 90을 넘어선 사람이 사망했다면 다들 한 목소리로 “호상”이라 말한다. “잘 죽었다”는 말의 뉘앙스는 참으로 이상하다. 좀 더 일찍 혹은 늦게, 시점에 차이가 있을 뿐, 죽었다는 사실은 동일하다. 저자는 남들이 무심하게 내뱉은 ‘호상’이라는 단어를 겪었다. 책에서는 그 자신도 충분히 나이가 들어 죽음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계속 등장했다. 실제로 그는 연명 치료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결단을 내렸고, 각종 보험을 점검하며 향후 자신의 병원비로 인해 자녀들이 괴로워할 가능성을 차단했다. 처음부터 그가 단호하게 죽음에 대처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통과하면서 그리 해야 할 필요성에 눈을 떴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듯하다.
어르신들의 시간은 고무줄과도 같다. 불과 며칠 전까지도 정정했던 이가 어느 순간 보면 배로 늙어 있다. 그의 어머니도 그랬다. 미리부터 준비하지 않았으므로 다섯이나 되는 형제들은 우왕좌왕했다. 처음부터 시설에 모시려곤 안 했다. 아무래도 늙은 부모는 직접 모시지 않으면 죄 짓는 거라는 의식이 그들을 짓눌렀다. 당사자도 그걸 원하진 않았다. 하지만 자식들에게도 감당해야만 하는 삶이라는 게 있었다. 더구나 엄마와 함께 늙어가는 중인 자식 입장에서 오롯이 엄마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퍼붓기란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저항은 완강했지만 짧았다. 현실에 적응하는 게 최선이었고, 다행이도 시설 관계자들은 친절하고도 정성스러웠다.
고생은 짧게 하고 떠나야 복이라던데, 저자의 엄마에게 마지막 순간은 길었다. 시간만을 놓고 보면 2년 정도였지만, 글을 읽는 내 마음조차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의식이 없다. 목에 자꾸만 끼는 가래를 제거하려 들면 고이 잠들어 있던 엄마가 괴로워한다. 병원에서는 금방 숨을 거두실 거 같다고 말을 하는데, 그제도 어제도 같은 말을 들었다. 차라리 고향 집에 모시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가도 막상 호흡기를 떼는 일은 꺼려진다. 병원에서도 우린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라며 그와 같은 결정에는 동조 않는다. 윤리적인 결정을 놓고 신음하기 훨씬 전부터 저자의 기록에는 엄마의 섬망이 등장했다. 빨리 죽어야 한다던 엄마는 평소 같았으면 결코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온갖 저주와 욕을 세상이 퍼붓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공통점이라던데, 저자도 나도 그런 모습으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싶진 않다고 울부짖었다.
소화해야만 하는 일정이 있었는데, 엄마는 고맙게도 그 일정을 소화할 수 있는 시간을 저자에게 허락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간 너무 힘들고 서러워서 막상 돌아가셨다는 말을 접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슬픔이 몰려오진 않았다. 경황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다. 충분히 슬퍼했다는 식의 표현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걸, 이후 남겨진 저자의 기록은 말해주고 있었다. 어찌 됐던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야만 한다. 한동안 죽음 이외의 소재에 대해선 생각조차 못했고, 예전 같았으면 하지 않았을 실수를 연발하며 제 나이 듦을 여실히 느꼈다. 그런 자신을 금방이라도 잃지는 않을지 염려하는 딸들을 바라보면서, 열렬히 자신의 죽음을 준비했다. 무엇이 괜찮은 죽음인지를 생각해볼 기회, 그건 엄마의 죽음이 저자에게 선사한 선물이었다.
나도 언젠가는 혼자가 될 것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아’가 되어 이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여전히 죽음은 피하고픈 화두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엄마의 죽음, 아빠의 죽음, 내 자신의 죽음, 세상 모든 죽음이.
우리는 이 인생에 모든 것이 다 처음이니까. 엄마가 되는 것도 처음이었고 그리고 죽음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이하는것이니까. 무엇이 옳은 것인지. 잘 보낸것인지 알수가 없다. 우선 다음부터 이런 슬픈 책은 사지 않겠다 다짐했다. 너무나 슬프다. 90세 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이란 참 나이들면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을 느꼈다. 죽음 거참 누가 차라운거랬니. 끼고 있던 슬픔이라느 장갑을 벗고 그 손으로 수저를 들어 밥을 먹게 하는 이야기가 참 맞는 책이다.
안녕하세요 깡이입니다.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요?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는 "공수래 공수거" 처럼
인생을 살아가는건 누구나 똑같은 방식일 것입니다.
오늘 소개할 책 역시 그런 인생의 허무함을 표현했습니다.
한번은 맞이할수 밖에 없는 가족의 죽음을 표현한 작품
"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 를 소개합니다.
이 책은 구순 엄마와의 마지막 2년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자식이 나이가 들어도 부모 눈에는 아기 같듯이,
자식이 나이가 들어도 부모를 잃는 슬픔에 익숙해질수 없다.
부모를 떠나 보낸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우리가 어릴땐 크면 당연히 부모님께 효도를 할수 있을줄 알았다.
또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고.
하지만 나이가 들고 자신이 책임져야할 가족이 하나둘씩 늘어갈때쯤에
아픈 부모가 조금은 버겁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 공감이 더 많이 갔다.
무조건 효도하는 이쁜모습만 보여주는것이 아니라
아픈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는 모습과 그 비용에 따른 부담감,
또 그런 어머니를 보며 아무것도 해줄수 없음에 느끼는 슬픔과
늙어가는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해줄수 없는 자신에 대한 화까지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겪을 일이다.
부모를 지고 간 지게에 내가 오를날이 올것이고,
그 지게를 내 자식이 지게 될것이고, 그 아이또한 지게를 지게 될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죽음과 가까워질것이다.
구순이 된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번씩 죽음의 문턱을 지나간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저자는 낯선 어머니의 모습을 마주한다.
사실 나도 누군가의 죽음을 이처럼 가까이서 본적은 없기에 조금은 무서웠다.
모든 사람은 죽기 직전에 욕을한다는말.
저승의 문앞에서 저도 모르는 죽음의 슬픔과 기쁨에 헷갈리면서
평생 쟁여놓은 욕설을 쏟아낸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엔 아마 그 욕을 하면서 자신의 한이 풀리는것도 있지만
이승에 남겨질 자식에게 원래 자신의 모습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마지막 정을 떼려했던 어머니의 배려는 아니였을까?
그렇게 죽을고비를 일주일 넘게 넘겨가며 어머니는 견디셨다.
어떤 한이 있어 가지 못하냐고, 이제는 편하게 가도 된다 생각했지만
막상 어머니가 곁에 없다고 생각하니 누군가의 엄마가 된 저자도 두려웠다.
그렇게 어머니의 마지막 곁을 지켜보는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어머니는 결국 돌아가셨다.
자신의 딸이 편히 출장을 갈수있도록,
자신의 죽음 앞에 어떠한 아쉬움 조차 남지 않고 일할수 있도록.
그렇게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그녀의 딸을 생각했다.
“ 한 부모는 여러 자식을 키울 수 있어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못 모신다.” 라는 말처럼
어릴 때는 당연히 할 수 있을꺼라 생각 했던 것들이
나이가 들고 현실이란 벽 앞에서 무너지게 된다.
이제는 어떻게 모실까, 어떤게 몸에 좋을까 보다
요양원 돈이 얼마인지 그러면 한달에 얼마를 모아야 하는지,
그러려면 지출을 얼마나 줄여야하는건지 계산기를 두드리는 내가 있을 뿐이다.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나, 내가 멀 잘못했나 생각이 들때도 많았지만
잠든 부모님의 모습을 볼때면 이젠 함께 산 날보다 살날이 더 적겠구나...
언제 이렇게 세월이 빨리 흘러버렸나 하는 맘에 눈물이 나기도 했다.
나이를 들어가는것은 자연스럽고 또 피할수 없는것이다.
부모를 귀찮아 하던 나처럼 나의 자식도 나를 귀찮아하고 부담스러워할 날이 올것이다.
내가 가졌던 마음을 내 아이도 가진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아프다.
늙어가는 부모 앞에서 늘 좋을순 없겠지만, 이별하는 그 순간 후회하지 않도록.
더 못해줬음에 가슴치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걷고 싶다.
#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내 죽음도 한번뿐이고 내 가족의 죽음도 한번 뿐이여서 그것이 어떨지 감히 가늠 할 수 조차 없다.
이 책은 작가가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엄마와의 시간을 추억하며 쓴 이야기이다. 엄마의 투병시간을.. 엄마와 함께한 시간들을 떠올리며 추억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엄마를 애도하는 시간이였던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 가족은 어릴적부터 매우 화목했고, 난 부모님의 싸움을 단 한번도 보지 않고 자랐다. 따뜻한 엄마, 다정하고 애교많은 아빠, 나의 절친 내동생.. 우리 가족은 내 세상의 전부이다. 그리고 난 그 누구보다 엄마 껌딱지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정말 많이 울었다.(도저히 카페에서 독서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뇌경색으로 쓰러져 요양병원에서 투병하다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가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작가의 구순엄마도 요양원에 들어갔다.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이다. 집에 아픈 엄마를 모시려고 해도 하루 왠종일 볼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이 요양원, 요양병원에 모신다.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생각이 되어 보내는 자식도 가야하는 부모도 내키지 않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서글프고 슬프다.
"아이고 나는 언제쯤 집으로 가니. 너는 그렇게 집으로 가는데."
구순엄마는 요양원을 나가고 싶어 하신다.
내가 기억하는 정신이 온전했던 우리 외할머니 마지막 모습이 그거였다.
집에 가고싶어, 봄이 되면 집에 가고싶어.
뇌경색으로 쓰러지셔서 몸의 절반을 쓸 수 없던 할머니가 그토록 원하던 건 집이였다. 찾아가면 그렇게 우시면서 집에 가고싶다고 하셨다...
구순엄마를 보내는 과정을 담은 책이여서 죽음으로 가는 모습에 대해 꽤나 자세히 쓰여있다. 한평생 착하게 살던 엄마가 죽음의 문턱에서 난폭하게 욕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작가는 당황한다.
모든 사람이 죽기 직전에 욕을 해요. 살아 있는 동안 가장 큰 고통을 느낄 때가 죽는 순간이랍니다. 그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 모르핀과 엔도르핀을 평소보다 천 배 이상 분비한대요. 물론 남은 마지막 몇 나노 그램까지 다 쏟아내는 거죠. 이승에서 못다 한 마지막 아쉬움을 욕으로 분출하는 거죠. 그러니 살아생전 고운 말만 쓰던 조신한 사람도, 착하디 착했던 나무 같고 꽃 같은 사람도 저승 문 앞에서 저도 모르는 죽음의 슬픔과 기쁨에 헷갈리면서 서리서리 평생 쟁여놓은 욕설을 쏟아내게 되는 거죠.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의 마지막 모습이 분노라니, 나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저승길에 마음이라도 홀가분 하라고 이렇게 만들어 진걸까... 과연 내가 죽을땐 누구에게 화가 나서 그 말을 다 뱉고 저승길을 떠나게 될까. 적어도 그 누군가의 죽음의 마지막 길에 나를 떠올리며 분노하는 사람이 없도록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구순엄마는 계속 고비상태이다. 몸상태가 모두 정상이라고 한다. 의식만 없을 뿐.. 간호사와 의사는 위독하세요, 곧 돌아가실거 같아요 라고 말하지만 엄마는 고통스러워 할 뿐 생명을 끈을 놓고 있지 않으신다. 살아날 거 같지 않은 엄마의 상태.. 아무것도 먹지를 못하니 영양제를 투여하고, 더이상 바늘을 넣을 혈관도 찾을 수 없는 앙상한 손에 또 다시 약을 투여한다. 엄마는 왜 편히 가질 못하실까, 이렇게 생명연장을 하는게 의미가 있을까 하는 마음에 가족들과 의견을 나누어 연명치료를 하지 말아달라고 의사에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병원은 사람을 살리는 곳이지 죽으라고 냅두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으면 집으로 모시고 가라는 거였다.
친한 언니의 어머니가 암으로 오랜투병 끝에 돌아가셨는데, 6개월동안 의식없는 엄마를 보고 끝내는 소극적치료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후 급격히 몸이 나빠지셔서 며칠만에 돌아가셨다. 언니는 죄책감도 들었지만 엄마에게 좋을 거 같아 그런 선택을 했다고 했다.
작가는 긴 투병끝에 떠나는 엄마를 보고 자기 딸들에게는 이런 고통을 주지 않겠다 다짐한다. 이런 잔인한 선택을 스스로 하지 않아도 되도록 정신이 온전할 때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썼다. 연명치료 거부의사를 미리 밝혀두는 것이다.
사람은 죽음을 생각할때 삶에 대한 의지가 더 확고해 진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그래서 매해 유서를 쓰는 사람도 있고, 새해에 죽음에 대해 생각하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죽음"이라는 상상만으로도 눈물밖에 나지 않고 너무 무서워서 제대로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작가가 엄마를 보내며 느낀 생각을 담담하게 이야기 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한번 용기내어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까 싶었다. 정말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언젠간 겪을 일이니까...
읽는 내내 10년전 떠난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그땐 내가 20대 초반이라 죽음에 대한 진지한 마음보다는 단순히 할머니가 돌아가신 슬픔과 소멸이란 걸 느꼈던 거 같다.
내 앞에서 눈물 한번 보이지 않던 엄마가 크게 울며 "난 이제 고아야" 라고 했던게 기억이 난다.
작가는 한없이 착하기만 한 엄마를 원망하고, 가난하고 멋없는 엄마가 부끄럽고, 요양원을 찾아갈때마다 우는 엄마가 나약해 싫고, 구질구질한 엄마를 지겨워했지만
엄마를 보내며 엄마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거 같아 마음이 뭉클했다.
엄마를 보내는 디테일 한 이 이야기는 슬펐지만 무겁지 않게 나에게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어 고마웠고, 읽는 동안 우리 가족이 떠오르며 이승에 있는 동안은 더 행복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엄마를 보내고 쓴 "저승꽃, 마지막으로 피는 꽃" 이란 제목의 시를 보고 펑펑 울었다.
다음에 이 책을 열었을 땐 내 마음도 조금 단단해져 있길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