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 작가님의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를 읽고 쓰는 리뷰입니다. 제목을 보고 내용이 궁금해서 구매해본 소설입니다. 인스타그램이라기 보다는 현대 샤회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쓴 책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인스타그램을 사용하는 심리와 그와 관련된 사회의 변화에 따른 사람들의 행동 변화도 나와서 더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SNS와 관련된 우리의 소비 사회 등 흥미로운 내용이 많아서 금방 읽혔습니다!
처음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접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오늘날처럼 화려한 그래픽은 당연 없었고, 오로지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화면이 전부였다. 게다가 엄청나게 그려 터지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신기했고, 왠지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그 때만 해도 컴퓨터 쪽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인터넷을 이용할 거라 굳게 믿었건만, 이후 변화는 엄청났다. 오늘날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터넷 없는 삶은 아마 감옥과도 같을 거다. 직접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지 않더라도 꼬꼬마 친구들의 시선을 잠시나마 빼앗는 유튜브 화면 등도 인터넷이 아니라면 구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지하철, 버스 등에서 모두가 코를 박고 응시 중인 휴대폰 모니터 속 세상 또한 마찬가지다.
인스타그램은 오늘날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굉장히 많은 이들이 사용하는 SNS다. 사진을 올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멘트를 함께 다는 방식이다. 해시태그를 이용해 검색이 가능은 하나 자료 관리는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다. 그럼에도 인스타그램만의 매력은 분명 존재한다. 저마다 올린 사진을 볼 때마다 난 모방 욕구를 느낀다. 저들이 방문한 장소, 저들이 체험한 레포츠, 저들이 먹었다는 음식 등이 날 유혹하는 거 같다. 콘텐츠를 생산하는 이들의 매순간이 그리 화려한 건 아닐 텐데도 난 타인의 삶을 엿보며 그들과 비슷한 수준을 향유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는 한다.
인스타그램이라는 단어에 과도하게 꽂혔던지, 소위 과시하기 좋아하는 혹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실상 간의 간극이 존재하는 현 세대에 대한 일종의 비판 즈음을 기대했다. 물론 그와 같은 내용도 존재하기는 했다. 내면을 다져야 한다는 식의 조언이 유효하지 않은 시대라는 판단이 설 정도로 오늘날 사람들은 ‘보여주기’를 중시하고 있는데, 인스타그램의 인기몰이는 그와 같은 세태가 반영된 결과물이라는 식의 해석이 바로 그것이다. 콘텐츠의 생산 주체 또한 자신들이 보여주고자 만들어낸 생산물이 곧 자신의 삶 전부는 아니란 걸 잘 알고 있다. 어느 정도의 소비는 기본이 된 시대인 만큼 하루에 프랜차이즈 매장에 들러 마시는 커피 한 잔 정도는 어느 계층에 속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가 당연히 감당해야만 하는 일상이 된 지 오래라고 모두가 여기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과거 약 10년 정도의 시간을 나눠 특정 세대로 구분했던 것과 달리,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태어난 이들의 경우에는 비슷한 성향을 공유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인터넷을 사용해 왔기에, 인터넷 상에 존재하는 유사한 콘텐츠를 함께 소비하며 성장했다. 진정 같은 세대인지는 잘 모르겠고, 눈 뜨면 세상이 달라지곤 하는 오늘날과는 다소 모순되는 설명이라는 생각도 조금은 들었다. 그러나 확연히 다른 거 같으면서도 결국 하나의 점을 향해 소실(!)되어 가고 있는 것만 같은 사람들의 삶을 고려한다면 이와 같은 진단도 어느 정도는 유효하지 싶다.
책의 제목으로 사용되었으며 내 관심을 끌었던 이야기는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 저자는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의 다양한 분야를 바라본 이야기를 전개했다. 역차별까지 논의되고 있으나 여전히 여성이 비난 받으며 각종 어려움을 감수해야만 하는 시대라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는 것, 자신의 어머니에게 존재했던 유일한 세상이 가족이었다는 것, 가해자를 향한 분노만으로는 세상을 결코 뒤바꾸기 힘들다는 것 등. 소위 어른들은 오늘날 젊은이들이 세상을 고민할 줄 모르며 오로지 개인사에 매몰된 삶을 살고 있다 주장하지만, 밀레니얼 세대에 속하는 저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보임으로써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고 있는 청년 세대를 보여주는 역할을 자처했다. 능력이 부족한 것도, 그렇다고 마냥 나태했던 것도 아니다. 낙오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와중에서도 평균치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확인받고자 SNS등을 통해 제 삶을 드러내고 있는 게 바로 우리 세대다. 이미 숨이 가쁠 정도로 속도 내어 달리고 있는 말에게 끊임없이 채찍질을 가한다면 외려 역효과를 낼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사회가 청년층에게 혹 그리 굴고 있지는 않은지.
가끔 생각한다. SNS 세계가 가끔은 더 현실 같다고. 아. 아니. 더 현실이라고 믿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현실은 너무 지루하다. 잔인하고 좌절스럽다. 하지만 SNS는 달콤하다. 예쁘게 장식된 딸기 치즈 케이크처럼. 그러면서도 끝없는 우주 같다. 계속 연결된다. 새롭고 시선을 잡아 끈다. 벗어날 수 없게. 도망갈 수 없게.
생각해보면, 9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이런 세상은 없었다. 세계는 작았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누군가의 하루는 그냥 잊혀졌다. 작은 일기장에 혼자 간직하거나 어쩌다 찍는 필름 사진 속에 남겨졌을 뿐. 우리는 우리 안의 작은 세계 속에 살았다.
어느샌가 시대가 변했다. 문화가 변하니 삶도 변하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와는 다른 풍경들이 펼쳐진다. 특히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 때 IMF를 맞이했으며, 대학 무렵 스마트폰을 마주한 나 같은 세대. 80년대 초중반의 사람들은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이 변화를 만났다. 물론 이런 변화는 모든 세대가 마찬가지긴 하지만. 가치관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에 큰 변화를 맞이한 이들.
이들을 사회에서는
'밀레니얼 세대'라 부른다.
이 책은 밀레니얼 세대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저자가 바로 밀레니얼 세대이기 때문이다.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은 다양하다. 학자마다 다르다. 하지만 이전 세대인 X세대와 비교해보면 더 확실히 드러나는데, 어떤 이들은 이 둘을 이렇게 비교했다.
X세대의 경우에는
"나는 남과 다르다." 고 말한다.
한편 밀레니얼 세대는
"나는 나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밀레니얼 세대들은 나는 특별하다고까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은 그냥 나는 나 자신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냥 너는 너. 나는 나인 것이다. 이렇듯 자신을 중시하면서도 튀려고 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저자는 밀레니얼 세대를 어떻게 생각할까?
밀레니얼 세대는 특징은 분열증이다.
분열. 이들은 자라면서 정반대의 세계관을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분열된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로.
이들이 어렸을 땐 세상이 아름다웠다. 민주화가 시작되었고, 서태지가 등장했다. 꿈을 외치고 해외여행을 떠나기 시작하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들은 꿈을 좇기를 요구받았다. X세대가 만들어 놓은 '나는 특별해'라는 분위기 속에서 이들은 자기 자신의 꿈을 찾았다. 나도 생각난다. 어렸을 때 꿈이 지금처럼 의사이거나 공무원인 아이들은 별로 없었다. 다들 자기 나름의 꿈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꿈이 거짓에 불과하다는 듯이, IMF는 삶을 막 시작하려는 그들에게 불안감과 공포를 심어주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아. 꿈만 가지고는 살 수 없지. 현실과 타협해야 해. 밀레니얼 세대는 어릴 때 만들어진 공상 같은 꿈과 사춘기 때의 차가운 현실 속에서, 분열한다. 이쪽 저쪽에도 속할 수 없는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분열증의 특성을 꼽자면
환각을 마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밀레니얼 세대는 환각에 시달린다. 그 환각은 어린 시절의 꿈이기도 하고, 이상적인 현실이기도 하다. 저자는 그 환각 중 특히 '상향 평준화된 이미지'에 집중한다. 우리 세대는 최악의 양극화에 시달리는 시대의 청년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측면에서는 지극히 평준화된 이미지를 누리고 있다. 바로 SNS를 통해서이다.
어떤 이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보장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 시대 청년들은 학자금 대출부터 시작해 고단한 삶을 살아간다. 이 둘은 무척 다른 세계에 속해있다. 하지만 이 둘이 함께 가지는 묘한 '평등' 이 있다. 그것은 이 시대 청춘이라면 마땅히 누리는 것들, 이른바 '핫한' 것들을 함께 즐긴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무리 알바를 전전하는 사람이어도, 가끔 해외여행을 떠나거나 '호캉스'를 즐긴다. 모두 같은 '아이폰'을 사고, 가끔 '핫한' 카페에 가서 사진을 찍는다. 옷은 몇 천 원짜리를 사 입지만, 명품 가방이나 시계 하나쯤은 산다. 우리는 다른 세계에 살지만 가끔은 비슷해 보인다. 특히 SNS 세계 속에서는 더 그렇다.
이런 우리를 가장 깊은 우울로 떨어뜨리는 때는 언제일까. 저자는 SNS를 볼 때. 라고 말한다. 인스타그램을 켜면 화려한 이미지로 도배되어 있다. 휴가 때 다녀온 베트남 풍경, 달콤한 디저트를 맛보며 웃는 얼굴들, 그곳에선 모두 행복해 보인다. 그래서 우울해진다. 나는 왜 이러고 있지. 내 삶은 실패한 걸까. 우리는 어서 빨리 자신도 그 '이미지'에 속하기를 바란다.
SNS 속 이미지는 계속된다. 잡으려 해도 잡히질 않는다. 우리는 삶에서 이뤄야 할 것이 너무 많다고 느낀다. 그래서 불안해진다. 끊임없이 사진들이 유혹한다. 그 공간을 떠날 수 없게 만든다. 점차 강박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SNS와 현실 사이의 작은 공간을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한다. 어느 쪽이 현실에 더 가까운 걸까? 어느 쪽을 더 진짜 삶이라고 느끼는 걸까? 진짜 삶이 있긴 하는 걸까?
사실, 그렇다. SNS 안 하는 사람 요즘 세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SNS는 좋든 싫든, 이미 우리 삶의 배경화면이 되어 버렸다. 불안이 우리 삶의 배경음악이듯이. 따라서 중요한 것은 '조화와 균형'이 아닐까 싶다. 현실에 두 발을 두면서 이미지를 적당히 쫓는 것. 이미 이미지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즐기되 중독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아. 어렵다.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인문학자의 목소리가 궁금하다면 읽어보기 좋다. 그의 고민은 우리의 고민이기도, 시대의 고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같은 밀레니얼 세대의 작가의 책이라 공감도 많이 된다. 반갑다. 내가 하고 싶은 말 같다. 이 책을 통해 길을 잃은 우리 세대가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나와 같은 밀레니얼세대의 저자는 이 사회를 살아내고 있는 한 명의 시대인으로 증언을 남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가 경험하며 절실하게 느끼고 바라는 이 사회를 향한 목소리를 부드러운 어조로, 최대한 균형적 시각으로 전하고자 노력했다.
책 제목만 봐서는 단지 #인스타그램 에 대한 부정적인 면들을 다룬 내용일 거라 예상할 수도 있지만 주 내용은 크게 청년, 젠더, 개인주의와 공동체 3가지로 나뉜다.
저자는 삶을 눈앞에 놓인 여러 문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공간적 관점으로 보는 것이 우리 세대의 인생관이라고 하며 밀레니얼세대를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몽상가이자 현실주의자인 세대, 이상과 현실의 가장 극적인 분열을 겪는 환각의 세대라 일컫는다.
SNS에 치장되어 있는 온갖 화려한 이미지에 속하길 바라며 그러한 환각적인 이미지에 제때 도달해야만 안심을 한다.
#블루보틀 이 국내에 상륙한다 했을 때 그 이미지에 서둘러 닿고자 하는 욕망을 폭발시켰고 그 현상에서 우리는 삶에서 이미지가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었고 그 이미지에 대한 즉각적인 접촉의 욕망이 삶의 중심에 놓이게 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말처럼 사실 우리 삶이 실제로 놓여 있는 대부분의 시간들은 사진으로 찍었을 때 그렇게 화려하지 않으며 어떤 이미지로 전시된 자신에 대한 흡족함은 결코 지속 가능한 행복이나 기쁨을 주지 않는다. 그는 실제 삶과 이미지의 간극은 일상화되면서 절망, 우울, 분노가 극적이게 되어갈 수 있다고 염려한다.
이런 형태의 삶과 문화가 우리에게 무엇을 잃게 하거나 간과하게 하는지, 혹은 우리로부터 무엇을 앗아가는지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지금의 세대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현상들과 문제들을 언급하면서도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대변하기도 한다.
흔히 근래 청년세대는 회의주의에 빠져 있다고 진단하는 경우가 많지만 지금의 청년세대는 기성세대처럼 세상, 사회, 현실 전체의 변혁이나 변화에 대한 믿음을 지녀본 적이 없고 자기의 협소한 삶이나마 사라지지 않고 존재할 수만 있어도, 살아남을 수만 있어도 다행이라 믿으며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를 견뎌내고 있다고 말한다.
청년들은 홀로 남아 글을 쓰는 골방의 유령들처럼 각자의 삶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젠더 부분에서 나 또한 의문이 들었던 점은 왜 성욕은 푸는 것이라고 표현하는가? 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로 식욕, 수면욕, 성욕이 꼽히는데 식욕과 수면욕은 은유 자체가 채우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중 #성욕 에만 풀다 라는 술어를 붙인다고 한다.
영어에도 성욕에 대해 푸는 것과 관련된 어휘는 찾아보기 어렵고 성욕은 충족시키는 (satisfy) 것으로 받아들인다.
스트레스나 과도한 압박감, 부담감 같은 것에 쓰이는 풀어서 없앤다 라는 술어의 사용은 성관계나 성욕 자체에 대한 우리의 #태도 와 관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먹는 것으로 식욕을 풀지 않고 자는 것으로 수면욕을 풀지 않고 그보다는 먹는 것 자체가 나에게 들어와 내 몸을 이루고 채워주는 것이라 느끼며 잠도 우리를 채워주는 것이라 느낀다.
그는 성욕이 만약 채워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더 조심스럽게 대하고 소중히 대하며 우리를 보충해주는 무엇으로 여길 것이다 라고 한다.
상대를 통해 성욕을 푼다는 표현이 아닌 나의 성적인 욕망이 채워졌다고 말하는 것, 당신이 나를 채워준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서로에게 더 온당한 태도가 아닐까? 하며 질문을 던진다.
그에게 늘 바라는게 있었다면 삶을 정확하게 사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삶을 정확하게 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는 글을 쓴다.
나는 저자의 글에서 세상에 대한 큰 기대는 없을지라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온기를 나우어 가지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밀레니얼 세대.
요즘 상품 기획을 하면서 듣게된 말이다.
사실 인터넷 매체 등 트랜드에 민감하지 않아서, 이런 새로운 단어들은 언제나 거의 마지막에 만나는 편인 것 같다. 느린 사람.
밀레니얼 세대는 지금 30대를 핵심으로 앞뒤로 포진한 무리를 지칭하는 것 같다.
현실 소비보다는 나에게 맞는 소비. 나를 위한 소비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정지우 작가의 글은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전투적이거나 혁명적이지 않아서 좋다.
어느 현상에 대해 제대로 파악도 하기 전에 분노하는 사람들과 글에 지친 내게는 정지우 작가의 글이 위로가 도움이 되었다.
어떤 현상에 대한 설명과 그에 따른 생각의 방향을 길지 않은 글로 풀어낸 것을 읽다 보면, 현상에 대한 이해와 작가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고, 나는 이 현상에 대한 어떤 방향을 갖는 것이 좋을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좋다.
어떤 글에서는 작가의 생각과는 다르다 싶기도 하고, 너무 일반화 하려는 경향도 보이는 것 같지만. 작가에게는 작가의 생각이, 나에게는 나의 생각이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감상인 것 같다.
작가의 글을 페이스북에서 만나다가 이렇게 하나의 책으로 정리된 형식 안에서 만나니 또 새로운 만남처럼 반가웠다. 세상을 차분하게 파악하고, 함께 대화하기에 좋은 책을 만나서 기분이 좋다.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는다. 페이스북도 마찬가지. 소통에 관심이 없어서는 아니다. 단지 그 소통 방식에 적응하기 어렵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더해서 그 인터페이스를 사용해 주고받을 수 있는 내용에 의문이 들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마셜 맥루헌의 오래된 명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매체의 형식에 따라 커뮤니케이션의 내용이 결정된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이미지가 주 컨텐츠를 이루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오가는 의미는 어떤 것인가. 아니 그 인터페이스로 주고 받기에 최적화된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대면 커뮤니케이션의 메시지의 일부일까 혹은 전통적인 메시지를 초과할 것인가.
다른 의문도 있었다. 타인을 의식한 글에서 자기 전시는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까. 어디까지를 공유로 보고 어디까지를 과다 노출로 볼 것인가. 넘쳐나는 자발적인 개인의 노출을 보면서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개인들은 왜 자신의 사적 생활을 노출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을까. 이런 내용으로 지인과 대화한 적이 있다. 공개적으로 자신의 삶을 전시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나의 입장에 지인은 어디까지를 전시라고 보느냐는 질문을 건넸다. 대답할 수 없었다. 여행기나 소소한 가정 생활에 대한 글을 종종 방송에 투고하는 지인에게는 ‘사생활의 전시’라는 단어가 불편했을 것이다. 당시엔 그저 얼버무리고 넘어갔지만 사실 최근까지 지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정지우 저자의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는 SNS 세상에 대한 질문에 정답지처럼 보인다. 저자 정지우는 ‘분노’라는 키워드로 우리 사회를 분석한 『분노사회』와 삶을 견디는 고전읽기 『고전에 기대는 시간』등의 인문적 성찰을 담아낸 다수의 책을 펴냈다. 또한 팟캐스트 <정지우의 인문학적 순간>과 <뼈가 있는 책>을 진행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제된 목소리로 전한 바 있다. 이번 책에서는 저자가 청년세대라 정의한 밀레니얼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1부 환각세대: 우리가 원하는 것은’에서 저자는 ‘꿈’에 대한 강박과 ‘현실’에 대한 불안 사이에서 괴리를 겪는 자신의 세대를 ‘환각세대’로 규정한다. 밀레니얼 세대는 ‘최악의 양극화에 시달리는 시대의 청년들이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지극히 평준화된 이미지를 누리고’ 있다는 말이다. 이들은 ‘환각적인’ 이미지에 둘러싸여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고 거기서 멀어질 때 박탈감을 느낀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소외감을 선사’하는 그 이미지에 의존하는 반면 그것을 따라잡지 못함에 좌절한다.
청년 세대를 절망하게 하는 이미지는 ‘인스타그램’으로 대표된다. 어두운 현실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인스타그램에는 그늘이 없다. 저자는 ‘이미지와 실제 삶의 간극이 일상화되면서 어쩌면 절망과 우울, 분노가 더 극적이게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밝고 환하기만한 일상의 단 ‘한 순간’을 마치 삶 전체인 것처럼 인식하면서 청년세대의 삶은 팍팍해져만 간다. ‘삶과 이미지의 간극’을 알아보고 그 격차를 넘어서고자 고민이 필요하다.
저자는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긍정한다.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에 가린 시각에 비친 사회보다는 청년세대가 사회를 진단하는 통찰이 예리하다고 말한다. 윗세대에겐 이미 살아버린 시간이지만 청년들에게는 예정된 시간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앞으로 살아낼 사회에 대한 청년세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졌다. 저자의 말대로 이들에게 얼마나 믿음을 갖고 귀를 기울이느냐가 중요한 이유는 청년의 문제가 ‘결국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 시대 전체, 이 사회 전체에 대한 통찰이나 시야는 이미 기성에 진입한 존재들보다는 기성에 진입하기 이전의 존재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
사회 전체, 시대 전체, 이 세상 자체에 대해 ‘발언 권력’을 가진 기성세대는 사실 이미 이해관계에 얽혀들어 있으며, 그들의 하루하루를 지배하는 세상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고, 결국 이미 속하게 된 자신의 삶 안쪽을 향하는 시야 밖에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삶 앞에 선 청년, 자신들이 시작하게 될 삶의 조건을 그 누구보다 예민하게 응시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래서 그 누구보다 절박하게 시대 전체와 미래 전체를 마주하고 있는 청년들의 시야는 항해에 앞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항해사의 눈빛처럼 예리하고 투명하다. p.79
그런데 사실 양쪽에게 사회 문제란 아예 차원이 다른 문제인 것이다. 기성세대에게 그것은 자기가 믿는 사회의 정의이자 자기 정체성, 신념과 존재의 문제라면, 청년세대에게는 자기의 생존이자 사다리의 문제이고, 게임의 룰이 공정한지의 문제인 것이다. p.99
결국 우리 모두가 한 배를 타고 있다는 인식을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일이 필요하다. … 그러나 한편으로는 분리되어 보이는 문제들 또한 넓은 차원에서는 이어져 있고 뿌리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결국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이어진다는 인식에 계속해서 도달해야 한다. p.114
‘2부. 젠더에 대하여: 여성에 관해 덜 말해질 때란 결코 오지 않았다’는 페미니즘 이슈를 다룬다. 남성 저자, 특히 청년 세대의 남성이 말하는 젠더에 대한 시각이 새로웠다. 흔히 젊은 남성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에 시달리며 젠더에 대해 또는 페미니즘에 대해 거의 반감에 가까운 감정을 가진다고 여겨진다. 인류 역사 내내 지속됐던 가부장 문화에 기초한 정체성의 문제를 인식하려 하지 않고 전엔 가지고 있었다고 믿었으나 이제는 빼앗긴 것같은 권리에 집착하는 것이다.
최근 청년 남성의 분노는 ‘공정’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젊은 남성들이 화가 나는 이유는 ‘남성과 여성의 경쟁’이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문제의 근본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근본적인 뿌리는 가부장적인 문화구조다. 그 속에서 형성되고 강요받는 정체성이다. p.150
젠더 문제에 대한 저자의 제안은 ‘이해’다. ‘혐오와 매도’를 내세우기 전에 ‘끊임없이’ 이해하라고 주문한다. 젠더에 대한 논의는 기성세대에게는 체념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이 일깨운 인류 절반의 인식은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남성성’에 대한 뿌리깊은 믿음도 쉽게 해체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청년세대는 젠더문제의 해결을 향한 과도기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더더욱 저자의 제안이 유효하다. 적대적 인식보다는 ‘이해’를 전제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혐오와 매도 그리고 몰이해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끊임없이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지만, 이해하기 싫어서 이해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어떤 잘못의 대가를 치른다면, 그것은 이해하지 않은 일의 대가가 될 것이다. 이해하지 않은 일, 손쉽게 증오한 일, 속 편하게 이해를 포기하고 혐오를 택한 일에 대한 결과는 그리 우습거나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p.151
사회 전반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 ‘3부. 개인과 공동체: 우리는 서로 뒤섞이는 바다’에 이르러 인스타그램의 사생활 노출에 대한 질문의 답을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었다. 책 전반에 걸친 청년세대에 대한 분석은 그들과 SNS의 관계를 새롭게 볼 수 있게 했다. 청년세대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그 문제점, 기성세대와의 차이 등을 알 수 있었다. 청년세대와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위해선 ‘이해할 수 없음’을 전제해서는 안 된다. ‘이해를 거부’하지 않되 어떤 점을 ‘용납’하기 어려운지를 이야기해야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 ‘상호 이해’를 위한 전제가 마련될 것이다.
무언가에 대한 이해 자체를 거부하는 형식의 담론은 결코 이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이런 점에서는 이해가 가능하되 이런 점에서 용납해서는 안 된다’라는 식의 언술 행위가 자리 잡을 필요가 있다. p.284
저자 스스로는 자신이 청년세대를 지나쳤다고 말하지만 독자에게 그는 누구보다 청년세대를 대표한다. 우리 사회에서 청년세대와 기성세대가 이 책에서 다룬 주제들로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싶다. 청년세대에게 귀기울여야 한다고 말들은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책을 읽듯이 곰곰이 듣고 있을 수 있을까. ‘이해’하기 위해선 귀를 기울여야 한다. 청년세대에게 이 책이 자기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핍진하게 다뤘다고 여겨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기성세대로서는 그들에게 귀 기울여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이러한 ‘귀기울임’이 언젠가 ‘이해’에 가닿기를 바란다.
서평
*본 글은 서평단 활동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청년팔이는 가성비가 높다. 우리 사회에서 청년세대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약자화되어 있다. 절망과 포기, 좌절과 혐오 따위가 우리 사회에서 청년세대가 가진 주요한 이미지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약자'들을 위해 무엇을 발화한다는 자체만으로도 그 행위는 상징적인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이 책도 일종의 '청년팔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작가가 청년을 단지 무기력한 존재로 단정짓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안적인' 청년팔이다.
책에 따르면 청년들은 이미지에 닿길 원한다. 이미지를 소유하길 원하고, 그 이미지 속에 있길 바란다. 가장 핫한 이미지를 빨리 누리길 원하고, 그 이미지에 닿지 못함에 안달한다. 이들은 밝고 화려한 이미지에 둘러싸여 스스로를 전시하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이토록 화려하고 즐거운 인스타그램엔 절망이 없다. 사회에 만연한 청년세대에 대한 담론과는 너무나도 큰 간극이 존재한다. 이러한 간극이 존재하는 이유는 세대주의적인 청년론 속에서 청년의 주체성을 발휘하고자 하는 젊은 세대의 목소리가 위약적인 도구로써만 활용되기 때문이다.
최근 총선 관련 이슈에서 여당 영입인재를 둘러싼 데이트 폭력 논란이 이러한 현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막연하게 청년이라는 주어를 앞세우다 보니 그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차원적인 불평등과 배제를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세대 내의 불평등과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보다 많은 이들의 시야, 통찰, 능력을 사회 전체로 확장시켜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많은 청년들이 사회문제에 누구보다 절실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 방식이나 시야가 거대한 기득권의 대립에서 비껴나간 곳에 비스듬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젊은층을 '청년'의 이미지에 가두고 청년과 기성세대의 경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지금의 경향을 넘어서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소소함, 보통의 것, 일상, 오늘에 대한 긍정같은 인스타그램 속 이야기를 '극심한 경쟁', '팍팍한 현실', '불안정한 미래'로 인한 도피적 성향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자체에 대한 인식, 자기만족에 대한 섬세한 척도,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삶의 기준 및 성향에 대한 비판의식으로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할 때 비로소 청년을 능동적 행위자로 인식하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세대적 연결망을 읽어낼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