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은 존재의 원풍경
당신은 사라지면서 대기가 된다.
나는 숨을 쉬고 그 대기를 마신다.
당신을 들이마신다. (84쪽)
<아침의 피아노>와는 성격도 인상도 다른 책이었다. 지독한 사랑앓이 없이 지나온 반백년의 생이 원망스러워진다. <이별의 푸가>를 읽는 내내 자괴감이 들어 고개를 푹 숙였던가. 사랑이 남녀의 이성애적 감정과 연애만을 지칭하는 것은 단연 아니지만 이 책에서는 그렇게 들렸다. 너는 얼마만큼 너를 내주고 내려둬 봤니? 자꾸 묻는 것이다. “음악마저도 그저 부재의 울림이고 흔적일 뿐(215쪽)”인데 인생 곡曲이 얼마나 되는지 털리는 기분.
삼월 한 달 동안 하루키의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을 사람들과 묻고 답하며 감상을 나눴다. 하루키 고유의 문학 세계를 떠나 지난 세월, 문학, 특히 창작 영역에서 여성이 펜을 쥔 남성에 의해 얼마나 빈약하게 일방적으로 때론 왜곡되게 성격과 특성이 부여되어져왔는지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만의 잘못은 아니지만 남성 인물들의 고독과 불안을 말하는데 소모되어온 여성의 자리가 뭇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지점들이 있었다.
시대적인 한계를 떠나 하루키의 소설이 전하는 철학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내게는 있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특정 이미지를 덧씌우는 게 어디 하루키만의 실수요 문제겠는가. 그런 연유에서인지 김진영의 <이별의 푸가>를 들으며 소설집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불쾌한 감정을 뒤로하고 보다 뚜렷한 메시지를 매만질 수 있었다. 거듭해 잡히지 않는 정체와 의미를 향해 한발 더 다가섰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문학뿐 아니라 철학도 철저히 남성 중심의 시선과 목소리로 점철되어왔다는 씁쓸함이 뭉쳤다(고인께는 죄송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그녀를 잃고 더욱 선명해진 그녀의 존재를 파고드는 이야기는 이미 익숙하고 세상에 널렸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읽고 감명 받고 되새기는 독자도 상당 부분 여자였으리라. 알게 모르게 남자의 눈과 입에 길들여지고 채워지고 남자의 입김과 터치에 의해서만 생명을 갖게 된 여자들과 그녀들의 사랑. 사랑과 애도와 부재에 대해 말한 철학자들도 거의 대부분 남자들이다. 마음을 끄덕이며 듣다가도 저 멀리 외따로 떠도는 여자의 실체가 아른거려, 여기 있는 것은 그녀가 벗어둔 허울이고 환영들뿐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바람직한 의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어찌된 영문인지 필립 로스의 작품을 통해 남성의 에고와 집착을 알아보고 이해했듯이, 그리고 이언 매큐언과 줄리언 반스의 분신들을 거쳐 남성이 여성에 대해 갖는 성적 판타지를 살펴보았듯이 하루키와 김진영의 책도 소화했다. 그들이 말하는 에고 집착과 창작욕에 나를 구겨 넣으며, 그들이 모는 자동차 조수석에 앉아 중도에 내리지 않았다. 베냐민은 독서는 쓰여 있지 않은 걸 읽는 일이라고 했다. 물살을 가르며 떠내려가는 것들 중에 이별 후에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를 건져냈다. 상대의 떠남으로 텅 비어버린 존재는 과거만 아는 육체의 ‘보챔’에 할 말과 밖으로 나갈 생의 의지를 잃고 갇힌다. 그 안에 새겨진 여자의 체취와 기억과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 남자는 무덤 같은 침대(공간)를 사수한다. 그녀는 없지만 모든 곳에 스며있기에.
그 시달림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골방에서 상처를 핥으며 아주 가깝지 않은, 영혼 교유가 차단된 제3자를 곁에 두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와 훈기에 자신의 아픔을 잠시 잊고 과거에서 벗어나 지금에 어설프게나마 살아있을 수 있다. 현실 세계의 현재를 사는(누리는) 존재들은 여자들뿐이다. 그녀에게 그는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있고 그리로 환승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대리 운전수를 조수석, 아내의 자리에 놓는다. <예스터데이> 제목이 암시하듯 남자들에게 애상과 회한과 멈춰버린 시곗바늘만 남는다. <독립 기관>에서는 여자의 정체와 무관하게 남자는 그 사랑을 진공 상태로 두고자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한다. 카프카의 단식 광대처럼 자신을 가두고 식음을 전폐한다. 아니면 베르테르의 키스와 자살이거나. 시선과 목소리, 그리고 육체와 말을 잃은 주인공에게 <셰헤라자드>는 그가 연명하는데 반드시 있어야 할 익명의 대상이다. 그의 에고가 사수되어야 하니 너무 진지하거나 순수한 관계여서는 안된다.
<이별의 푸가>를 읽으며 하루키의 소설들 사이에 흐르는 공통 주제를 발견했다. 음악의 선율이 되어 연주되는 분명한 음표들이 있었다. 무대 장치 위 배우처럼 다소 인위적이기는 하나 상상력을 발휘해 이별 이후의 성향(회피와 침묵)을, 부재와 단절과 고독의 집을 꿋꿋이 짓는다. <기노>에서는 상처 입은 한 남자의 되돌릴 수 없는 헤어짐과 ‘비의의 진실’을 깨우치는데 온 우주가 동원되는 신묘한 기운이 감싼다. 혼자서 살아가는 인생이나, 자기구원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누군가는 끔찍했을 셰헤라자드의 칠성장어 이미지도 다음 속성 때문에 되려 흥미로웠다. 그녀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인물이 아닌 추억의 통칭이 아닌가. “그때 추억은 매복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우리를 습격한다. 어느 거리, 어느 장소, 어느 소리, 어느 물건 속에 숨어 있다가 급습한다(36쪽).” 읽기 파트너들이 가장 좋아한 <기노>는 폭우에 떠밀려서라도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처럼 울 수 있는, 우리에게 절실한 미Me타임을 말해준다. “부재는 친숙한 일상이 된다. 실재라고 외쳐대는 시끄러운 세상의 소음들로부터 나를 숨길 수 있고 지킬 수 있는 도피처가 된다. 그렇게 부재가 부재해서 안전지대가 된다(113쪽).”
<사랑하는 잠자>에서는 카프카의 벌레로 말라죽은 잠자가 두발 직립보행 인간으로 재탄생하고 가족이 아닌 그가 살아남는다. 이런 역전에서 그가 기대는 것들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예스터데이>의 얼음달의 의미를 다른 소설들과 이어보며 파악하게 이끈다. 육체를 나누며 진하게 사랑할 때 그것은 비순수해진다. 이것은 철학자 김진명의 말이다.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 열네 살의 순정을 지우개 반쪽과 환한 미소로 되살리며 추억하듯이, <예스터데이>의 연인도 몸을 나누지 않고 결혼과 출산이라는 수순을 밟지 않았기에 얼음달로 여전히 출렁일 수 있는 게 아닐까.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과거지만 여전히 현재로 기억될 수 있는. 영원히 녹거나 지지 않는.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의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는 순간 이별은 이미 시작된다. 이 메시지를 하루키는 소설집에, 김진명은 단상으로 엮고 풀어내었다. 남자들이 지배하는 문장에서 비어버린 여자의 단어들이 못내 궁금해지면서, 역으로 남자(남성 창작자)의 입장과 에고를 좀더 치밀하게 살필 수 있었다. 현장에서 터득하지 않고 책으로 배운 내용들이지만 헛되지 않을 것 같다. 이것저것 재차 두리번거려야 하는 피곤한 현재(의 독자)지만 곁눈질하며 중얼거릴 수 있어 다행이고 지나온 시간들이 만든 오늘에 감사한 마음도 싹튼다.
그러나 나는 또 안다. 나는, 더 깊은 곳의 나는, 이별의 주체인 나는, 오르페우스도 오디세우스도 되려 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차라리 꿈에서 깨어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꿈에서 깨어서도 꼼짝도 않고 깨어난 자세 그대로 꿈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다시 꿈속으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거기에서 그 사람 곁에 누우려고 한다. 마르셀의 어머니처럼. 돌무덤으로 걸어가는 안티고네처럼: “오 돌무덤이여, 나의 신혼방이여, 나는 여기에서 그대 곁에 눕는다...” (32쪽)
나 또한 그렇다. 나도 추억의 통점이 내 몸속에 더 깊이 못 박히기를 바란다. 그 통점은 나의 장기가 되어 내 안에 살고 있는 그 사람이니까. 그 통점이 사라지면 그 사람도 영원히 나의 상관없는 부재의 존재가 되고 말 테니까. (39쪽)
하지만 이별의 주체는 해동의 주체이기도 한 걸까. 어느 날 나는 차가운 그 사람을 떠올린다. 냉동 인간처럼 꽁꽁 얼어붙은 그 사람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어느 겨울날의 그 사람을 기억한다. 너무 추워요, 몸이 꽁꽁 얼었어요, 라고 말하면서 겨울바람 속에서 떨던 그 사람. 내가 코트 안에 꼭 감추어주었던 그 사람. 이제 다 녹았어요, 라고 말하던 그 사람... 나는 차가운 그 사람을, 냉동 인간을, 다시 꼭 껴안는다. 따뜻하게 덥히려고, 부드럽게 녹이려고... (92-93쪽)
아도르노: “아이가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건 최초의 질문에 대해서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아이는 반복 행위에 스스로 지쳐버리거나, 금지가 너무 크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린다. 그렇지만 대답을 얻을 수 없었던 그 자리에는 보이지 않는 상처, 딱딱하게 굳은 상흔이 남게 된다. 동물이 그렇듯 인간에게도 눈 먼 지점, 희망이 정지된 지점들이 있다. (97쪽)
사랑은 그 사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하지만 어떡해야 그 사람을 조금도 아프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건 그 사람이 원하는 그대로 모든 것을 해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떡해야 그 사람이 원하는 그대로 다 해줄 수 있을까. 그건 나의 에고를 완전히 버리는 일이다. 에고를 조금이라도 남겨 가지면, 나는 그 사람을 아프게 하고 만다. 에고는 항상 자기를 주장하니까. 그 주장과 맞지 않으면 안 돼, 라고 말하는 게 에고이니까. 사랑은 그 사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이다―이 말은 사랑은 에고를 모조리 폐기시키는 일이다, 라는 말과 동일한 말이다. (99쪽)
그러나 또 하나의 말들이 돌아온다. 그건 내가 당신에게 했던 사랑의 말들이다. 당신이 온몸을 열고 들어주어서, 당신의 몸속으로 들어가 저장된 나의 말들. 당신은 떠나도, 당신은 기억하지 못해도, 내 사랑의 말들은 지금도 당신의 몸 안에 들어 있다. 당신의 말들이 내 몸 안에 들어 있듯이.
그리하여 너무 외로울 때,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도 갈 곳이 어디에도 없을 때, 나는 나의 말들을 다시 불러들인다. 당신의 육체 안에서 지금도 여전히 당신의 온기, 냄새, 촉감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내 사랑의 말들을. 나는 그 말들을 꼭 껴안는다. 그 말들을 만지고 냄새 맡고 느낀다. 그리고 어느 사이 달아오른 몸으로, 당신이 곁에 있는 것처럼, 혼자 중얼거린다. (107-108쪽)
요즘 일련의 주제를 갖고 독서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 중 사랑에 대한 책에 대해 알아보다가 이 책의 일부를 알게 되었고 결국 구입하기에 이르렀군요. 아주 짧은 한 문장에 반해서 산 책 치고는 굉장히 잘 읽었고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습니다. 다만, 요즘 책들이 으레 그렇듯이 가격에 비해 활자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아쉽다는 마음도 같이 느꼈습니다. 빽빽한 책은 절대 아니고 매우 널널한 책입니다.
결핍 : 부재의 형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부재. 당신이 떠났으므로, 당신이 더는 내 곁에 없으므로 남겨지는 공백이 있다. 마치 내 서가에 있던 한 권의 책을 누군가 가져가면 그 책이 남기는 텅 빈 자리처럼. 이 경우 당신의 부재는 `없음`이다. 또 하나의 부재, 당신을 여전히 욕망했기 때문에, 당신에게 여전히 애착하기 때문에 나에게 존재하는 부재. 이 부재는 당신의 없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주관적이며 상상적인 부재이다. 나의 욕망과 애착이 만들어 놓은, 그러나 채울 수 없으므로 반드시 채워져야 하는 결핍으로 존재하는 부재.
세월 : 오늘 같은 날, 햇빛이 너무 따뜻하고 맑은 날, 거리의 모든 것들이 찬란하게 빛나는 날. 걸어가는 여자의 종아리가 투명한 날. 나는 그만 펑 눈물이 터지고 말아요. 지나가도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라고 나는 말했었죠. 아니에요, 지나가면 사라져요.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당신은 말했었죠.
비극 : 우리가 지난 사랑을 그리워하는 건 그 사람을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누구나 삶 속에서 특별한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은 우리에게 생의 어느 특별한 비의를 가르쳐준다. 그러나 우리는 그 비의의 진실을 그 사람이 떠난 뒤에야 깨닫는다. 우리가 떠난 사람을 다시 그리워하는 건 그 진실을 이번에는 제대로 살아보고 싶기 때문이겠지만 그 사람은 이제 없다.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없고 그가 가르쳐준 비의의 진실만이 혼자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우리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떠나서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이 사랑과 세월 사이의 비극이다.
『이별의 푸가』의 단상들은 우리를 이별 속으로 끌어당긴다. 우리는 이별한 사람이 되어 이별 뒤에 찾아오는 여러 일들을 겪게 된다. 먼저, 말들이 사라진다. 이런저런 사람들과 만나서 말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진다. 그다음에는 꿈을 꾼다. 캄캄한 밤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더라도, 꿈속에서 당신을 보는 순간 불안이 가신다. 그리고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연락이 올까 봐. 연락이 오지 않을까 봐. 씻는 것도 싫어진다. 깨끗이 씻은 뒤에, 아름답게 꾸민 뒤에 누구에게 보여줄 것인가? 발작이 시작되기도 하고,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아무것도 먹기 싫어지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오면 한꺼번에 슬퍼할 수조차 없이 슬퍼지고야 만다. 그리고 그 슬픔이 지나간 뒤에 우리는 이별 뒤에만 남겨지는 길고 긴 피로와 맞닥뜨린다. 하지만 『이별의 푸가』에서 말하는 이별은 그 피곤함마저도 소멸할 때 일어난다. 그 피곤함에 온전히 몸을 맡기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당신의 부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랑에 빠진다는 게 내가 사라질 수 있다는 걸 깨닫는 것이라면, 이별을 한다는 건 조용하면서도 격렬한 물살을 따라 끝없이 떠내려가는 것이다. 당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순간은 어느새 지나가버리고, ‘이별의 주체’가 된 우리는 이제 뗏목을 타고 당신을 통과하고 초과한 채로 어디인지도 모를 곳에 다다른다. 『이별의 푸가』가 그리는 세상은 바로 그 끝에 있다. 꼼짝없이 남겨진 우리가 결국 다다르고야 마는 이별의 폐허다. 우리는 그 폐허의 현장을 산책한다. 길가에 피어난 꽃을 보기도 한다. 다만, 당신의 부재에 머무는 일만큼은 잊지 않는다. 우리는 울지 않고, 고백하지 않고, 시를 쓰지 않는다. 대신 당신의 부재가 당신보다도 더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당신이 옆에 없음에도, 당신과 함께하고, 당신의 부재 속에 머문다. 약속을 껴안듯이 희망을 껴안듯이 이별을 껴안는다. 우리는 이제 안다. 사랑이 끝나도, 그 사람은 오지 않아도, 이별의 계절은 결국 다시 온다는 걸. 우리는 본래 사랑의 주체가 아니라 이별의 주체라는 걸. 날마다 헤어지고 영원히 이별하는 우리에게 이보다 더 근사한 책이 있을까.
당신의 부재 앞에서 당신을 생각한다는 것, 그건 당신에게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멀리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매달려 있지만, 당신은 나에게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가장 뜨거우면서 가장 차가운 사람이다. 나의 머리는 온동 당신으로 가득해서 터질 것 같지만…… (170쪽)
이별,이라고 말해본다. 누구와의 이별을 말하는가. 가족, 연인, 그리고 이제는 당신이라 말할 수 없는 당신과의 이별을 가만히 말한다. 이별은 그저 아프다. 이별의 주체가 내가 아니어도 이별은 통증을 동반한다. 누군가는 좋은 이별을 말하지만 그런 이별은 얼마나 낯선가. 이별에 익숙해지면 좋은 이별을 할 수 있을까. 좋은 이별을 하기 위해 수많은 이별을 연습해야 한다는 가정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가. 나는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고 언젠가 쓰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별에 예의를 차린다는 것도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아닌가. 이 모든 게 철학자 김진영의 이별 일기 『이별의 푸가』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이별의 모든 것, 이별 후에 오는 것들, 이별과 함께 살아가는 일, 이별의 징표, 이별의 의미, 이별의 주체, 그리고 우리의 삶을 사유하는 글은 익숙한 감정을 자극한다. 그러나 철학자가 들려주는 이별은 때로 거대한 철학 같아서 따라가기 버겁다. 행간을 읽다가, 멈추고 다시 읽는다. 어쩌면 우리 생에 이별은 예정된 과정일지도 모른다. 당신과의 이별을 예감했듯이 말이다. 당신을 볼 수 없다고 해서 당신이 사라진 게 아니라는 걸 아는 안다. 부재로 존재하는 사랑을 나는 이미 경험했으니까. 그럼에도 이런 문장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무너진다.
사랑과는 이별을 해도 이별과는 이별할 수 없는 걸까? (86쪽)
이별과 이별하는 순간 생은 끝나는 것이기에 그런 걸까. 이별했지만 이별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는 이들을 안다. 어떤 이는 이별했지만 이별에 기대어 살아간다. 남겨진 물건 속에서 사랑을 보고, 같이 머물렀던 공간에서 당신의 흔적을 발견하고, 정리하지 못한 사진 속에서 사랑을 마주한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추억이라는 부르며 지우지 못한다.
추억은 하나의 세계다. 추억의 세계 안에 이별 이후의 너는 없다. 이별 이전의 너만이 그 안에 있다, 나는 그 과거의 시간을 꼭 껴안고, 그 안의 너를 꼭 붙든다. 그리고 돌아서서 그 시간의 문을 닫는다. 아무도 입장시키지 않는다. 너마저도, 그 이후의 너마저도 나는 입장을 금지시킨다. 너만이 아니다. 나마저도, 지금의 나마저도 입장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그 추억의 시간 안에는 이전의 너와 나만이 있다. (34쪽)
이전의 나는 이제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전의 나를 기억하고 이전의 나를 달래고 이전의 나를 원망한다. 그 이전이 바로 어제라 할지라도. 이별에 대해 글을 쓰면서 저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이별에 대한 글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랑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랑과 이별은 빛과 그림자처럼 함께 하기에.
산다는 건 시간 속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시간 속을 지나간다는 건, 매 순간 우리가 우리를 떠난다는 것, 우리 자신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매 순간 존재하는 단 한 번의 우리와 매 순간 이별하면서 매 순간 다음 순간의 우리로 달라진다는 것, 그것이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 그것은 매 순간 우리 자신과 이별한다는 것이다. (139~140쪽)
영원한 생이 불가능하기에 이별은 삶의 일부이고 남겨진 사랑이라 부른 건 아닐까. 어느 시절 나에게 유일했던 당신, 그러나 이제는 나와 무관한 당신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나에게 당신은 없다. 나의 세계에 당신의 자리에 이별이 앉았다. 당신의 세계에 내가 그러하듯이. 이제 이별을 말하는 대신 사랑을 말한다. 하루하루 자신과 이별하면서 살아가는 일, 그것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이다. 사랑은 그렇게 계속된다. 이별을 곁에 두고서.
<이별의 푸가>
그래서 야콥 타우베스도 말했어: 진정한 사랑은 무덤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다고.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썩고 썩어 완전한 부재가 될 때까지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고. -꿈 (P.30)
나 또한 그렇다. 나도 추억의 통점이 내 몸속에 더 깊이 못박히기를 바란다. 그 통점은 나의 장기가 되어 내 안에 살고 있는 그 사람이니까. 그 통점이 사라지면 그 사람도 영원히 나와 상관없는 부재의 존재가 되고 말 테니까. -통점 (P.39)
이별의 아픔은 그 사람과 헤어지는 아픔만이 아니다. 그건 약속의 기적이 깨지는 아픔, 약속과 실현이 해리되는 아픔이다. ... 사랑이 끝나면 약속은 사라지는가? 실현과 헤어지면 약속도 끝나는가? 아니다. 그래도 약속은 남는다. -약속 (P.59)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도 있다.
사랑의 시작이 있다면 반드시 이별도 있다.
우리는 사랑을 시작할 때 온 세상이 나와 함께 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이 끝날 때 온 세상이 나와 달리 반대로 가고 있는 듯하다.
이별의 푸가
이별이 가까워지는 사람이거나
이별을 하는중이거나
이별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책인 것 같다.
책에 나오는 내용 중
가슴에 박힌 글.......
추억
그 사람이 떠나면 추억이 남는다. 나는 그 추억을 꼭 붙든다.
추억이 나를 떠날까 봐 두려워서.
추억이 떠나면 나는 그 사람을 잊고 그 사람도 완전히 나를 떠나고 말까 봐.
나는 망각의 두려음과 맞서서 추억에 매달린다.
하루 종일을 추억으로 지새운다.
하지만 부재의 추억은 얼마나 허망하고 괴로운 것인지.
안개를 움켜쥐는 것처럼 그 사람의 부재만을 확인시키는 추억들.
누가 읽든
그들의 가슴에 박히리라 생각한다......
한번 읽어들 보라.
이별을 겪지 않는 생명은 없다. 이별은, 그 형태가 무엇이든 시기가 언제이든 생명을 부여받은 순간부터 예정되어있다. 죽음이나 등돌림, 손을 흔들며 떨어짐과 같은 육신의 분리이든 정신의 괴리든 수많은 이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맞이한 이별을 대하는 느낌과 방식은 천양지차일 테지만. 나는 늘 이별은 필연이므로 미련을 이별의 밑동에 매달지 말자고 생각한다.
책에서의 이별은 이별의 원인과 과정을 말하지 않는다. 이미 발생한 이별 상황을 완료하지 못하고 아직 그 상황 중에 있는 자신을 드러내기만 한다.
글쓴이는 자신의 곁에 없는 누군가를 온전히 놓지 못한다. 이별의 상황을 말끔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이별한 상대방에게 집착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나는 하루 종일 당신만 생각한다(p.147). 그러나 나는? 집착하는 나는? 내 슬픔은 에고의 슬픔이다. 히스테리다. (p.161) 얼마나 사랑이 깊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와 이별한 누군가가 이토록 절절하게 이별의 완성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면 무서울 것 같다. 육신은 더 이상의 접점을 찾지 못하고 완전히 떨어졌으며 헤어짐의 형식을 지나왔지만 그의 정신은 아직 상대방을 완전히 놓지 못하고 있다. ‘사랑했던’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누군가와의 이별은 완료되지 않았다. 그가 보이는 이별 감상은 종종 부재가 아니라 이곳저곳에 덕지덕지 말라붙은 미련의 오물 덩어리 같은 모습으로도 보인다.
물론 나는 안다. 너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걸, 너의 목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걸. ‘……없다는 것’, 그 부재를 나는 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다. 느껴지지도, 붙잡히지도, 만져지지도 않는다. 엄연하게 엄중한 사실이지만, 나는 그걸 너무 분명하게 알건만. (p.68 부재 全文)
소설가 김연수는 그 사람의 부재가 존재만큼이나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이 이별이 끝나는 때(책 뒷면)라고 하지만 글쓴이는 상대의 부재를 분명히 알면서도 그를 끊임없이 생각한다. 글쓴이의 이별은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읊어진다.
그러다 이별의 상황을 확장해서 사랑하던 시간을 돌아보고 함께하던 그 사람을 소환한다. 여전히 미련을 매단 채. 이 영역의 글은 이별이란 낱말을 직접 등장시키지 않으면서도 그의 부재로 인한 상심을 절절히 드러낸다. 그래서일까, 글쓴이가 겪는 이별의 미완성 상황에 공감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왠지 글이 풍기는 뉘앙스가 앞부분과 비교할 때 살짝 달라 보이는 것은 다 착각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리고 김진영의 육신은 이제 이 세상의 생명체에 속해있지 않다.
86편의 글 중 어떤 글은 마음에 잘 와 닿지만 어떤 글은 어색하게 다가온다. 대략의 느낌은 이별을 참 현학적으로 다룬다와 자기의 글을 쓰기 위해 글 재료를 많이 준비했다는 것이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글은 고백(p.151~158)을 비롯한 여러 편이었고 잘 와 닿지 않는 글도 여러 편이었다. 이런 글들은 따로 보관했다가 종종 꺼내보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침묵(p.41~44)에 이르러서는 식자우환의 모습을 엿보았다. 상대방의 사랑에 대한 해석도 일방적이지만 그 사람의 침묵에 대한 해석도 그러하다. 상대가 보인 침묵하는 모습을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 나오는 알리사의 침묵에 덧대어 사랑이라고 넘겨짚고 행복해한다. <좁은 문>이란 작품을 미리 알지 못했더라도 상대의 침묵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읽은 글이 자신에게 주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다 자기만족을 위해 사용되는 글은 편협해진다. 자신의 쓰린 마음을 달래기 위한 아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에세이에 마음을 빼앗기기에는 내가 너무 건조하게 나이 들어가는가 하는 걱정이 차올랐다. 이런 유의 글을 쉽게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이 부럽기도 하다. 그런 이들에게 김진영의 글은 정말 가슴 아리게 다가오는 글일 수 있겠다. 감수성이 풍부한 이라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 눈에는 정리하지 못한 채 집착하는 모습이 수두룩하게 보였다.
혹시라도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지금처럼 내리 읽기보다 서가 한편의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두었다가 가끔씩 꺼내어 한 장면씩 곱씹어 읽어야겠다. 한꺼번에 읽기에는 여전히 글쓴이의 이별 감상이 과하게 다가온다.
P.S. 책을 다 읽고 나니 잠시 읽다가 오래 덮어두고 있는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책에 등장하는 바르트는 모두 롤랑 바르트이며 김진영은 그의 애도일기를 번역했다―를 다시 펼칠까 하는 생각이 쑥 들어온다. 애도일기와 이 책이 완전히 같은 형식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비슷한 form을 보이기 때문일까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김진영 선생을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바르트? 이 책은 특히 '사랑의 단상'이 떠오른다. 그렇지만 한국의 바르트는 그를 너무 쉽게 보는 것 같다. 그를 어떻게 칭해야 할까? 그를 호칭할만틈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한다. 그는 매번 스스로 사랑이라는 길로 걸어갔고 이별을 잔인하게 통과했다. 인간은 양면적일 수 밖에 없다. 다정한면서도 냉정한 김진영 선생이라고 해두자. 하지만 다정에 방점을 찍는!!!
김진영선생의 책을 만날 떄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으로 깊다. 내 마음이 다다르지 못하는 의식이 포착하지도 못하는 깊은 곳에 울림을 주는 파장을 일으키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무엇때문일까?
깊은 사유의 문장, 단단하면서도 다정한 마음의 문장에 책과의 이별을 계속 연기하고 유예한다. 되도록 천천히 한땀 한땀, 한문장 한문장, 한단락, 한단락 읽는다.
나는 책과 영화에서의 사랑과 이별에는 몰입하고 눈물짓는 사람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진짜 사랑은 항상 어려웠기에 선택하지 못했다. 지금의 사랑은 막다른 길에 몰리자 살기 위해 한 선택이다.(하하하 - 이건 우리 옆 사람이 보지 않기를-그렇다고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시 사랑을 찾아나서기에는 지쳤고 이제는 그런 기회조차 오지 않을 것이며 기회가 온다고 한 들 여전히 선택하지 못할 것이다.
틀에 맞춰진 전형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나같은 사람에게 선생의 책은 내가 꽁꽁 싸매어둔 마음 깊은 곳을 들썩거리게 만든다. 마음이 시끄러워진다. 하지만 이런 들썩임이 시끄러워짐이 싫지 않다.
당신은 어떻게 내게로 왔을까?
쿤데라는 말한다. 모든 사랑의 만남도 떠내려옴과 건짐의 오래된 신화라고, 누군가가 대바구니에 실려 떠내려오고 누군가가 마침 그때 강가에 있다가 대바구니를 건진다. '마침 그때 거기에'라는 우연의 신화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만남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있다. 당신이 떠내려오고 내가 당신의 대바구니를 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어떻게 막아볼 수 없도록 이미 시작되는 것이 있다. 벌써 시작되고 이미 출발해서 아무리 재빠른 이후의 노력들도 아무 소용이 없고 아무리 간절한 멈춤에의 소망도 너무 늦어버리는 필연적인 것,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 또 있다
당신은 본래 사랑의 주체가 아니라 이별의 주체였다. 당신은 그 누구와 함께 있었지만 사실은 아무와도 함께 있지 않았다. 누군가와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와 이미 이별하고 있었다. 당신이 만나서 사랑하고 싶은 존재는 언제나 단 하나의 존재, 천진스러워 고독한 당신 자신뿐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그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을 강물삼아 늘 떠나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아무도 없는, 당신만이 알고 있는, 오로지 당신만이 존재하는 그 어느 곳으로..
우리가 지난 사랑을 그토록 그리워하면서도 그 사랑을 다시 시작하려 하지 않는 건 이미 그를 전처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처럼 그 사람을 사랑하지도, 사랑할 수도 없다. 이미 지나간 사랑은 또 한번 전처럼 사랑할 수 없다. 걸음마를 흉내낼 수는 있어도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 이것이 사랑과 마음사이의 비극이다. 그러면 다른 사랑을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떠난 사랑이 가르쳐준 사랑의 비의를 새로운 육체와 나누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육체는 무엇인가? 그건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새로운 육체가 옛사랑의 비의를 실현해주는 건 아니다. 옛사랑의 비의는 옛육체만이 실현한다. 새로운 사랑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사랑의 비의는 그 새로운 육체만이 가르쳐서 전수한다. 하지만 그걸 알았을 때 그 육체는 이미 없다. 이것이 사랑과 생 사이의 본질적 비극이다. 이 비극을 우리는 끈질기게 살아간다. 사랑이 이미 끝났다는 걸 알면서 사랑을 멈추지도 보내지도 못한다. 그렇게 사랑은 두번의 비극이다.
폴 발레리 "인간을 만들고 나서 신은 인간이 충분히 고독하지 못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인간에게 고독을 무한이 감당하는 능력을 다시 넣어주었다"
베냐민은 독서는 쓰여지지 않은 걸 읽는 일이다고 말한다. 아도르노는 말한다. 연주는 그려져 있지 않은 음표들을 연주하는 일이라고...
난 아직도 쓰여지지 않은 것은 읽지 못하지만
나는 책과 함께 계속 사랑할 것이고 이별할 것이다.
그래서 불행하냐고? 맞다 난 더 불행할 것이다. 하지만 난 더 깊게 행복할 것이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멂과 가까움
당신의 부재 앞에서 당신을 생각한다는 것. 그건 당신에게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멀리 있다는 것이다. 그건 어떤 상태일까. 나는 당신에게 매달려 있지만, 당신은 나에게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가장 뜨거우면서 가장 차가운 사람이다. 나의 머리는 온통 당신으로 가득해서 터질 것 같지만.....
계속 곱씹게 되는 문장입니다.
아침의 피아노라는 제목의 유고집으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 자연스럽게 이 책도 구매했습니다.
한없이 개인적일 수 있는 감정들이지만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문장들이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삶 속에서 만나는 이별에 대한 단상을 기록한 문장.
"산다는 건 시간 속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시간 속을 지나간다는 건, 매 순간 우리가 우리를 떠난다는 것, 우리 자신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매 순간 존재하는 단 한 번의 우리와 매 순간 이별하면서 매 순간 다음 순간의 우리로 달라진다는 것, 그것이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 그것은 매 순간 우리 자신과 이별한다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는 이별에, 우리는 불에 화상을 입은 듯 너무 놀라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자체가 태어남과 죽어감이 매순간 일어나는 자연의 원리인것을.
아프지만, 누구나 다 그렇다고.
나도 그렇고, 당신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며 언젠가 생과 이별하는 순간이 있다고 따듯하게 어루어만져주는 문장들이었다.
김진영 작가의 이별의 푸가 입니다. 전작인 아침의 피아노도 참 잘 읽었었는데.. 이별의 푸가도 참 마음 아프게, 따뜻하게 잘 읽었습니다.
배 속에 남는다. 그 사람은 사랑이 끝났어도 나의 타인이 아니다. 내 몸속에서 살아가는 장기, 숨 쉴 때마다, 먹을 때마다 내 몸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내 유기체의 한 부분이므로 추억의 습격이 적중하는 지점은 이 지점이다. 매듭이 맺어지는 장소는 바로 이 장기이다. 습격당하는 아픔, 그건 몸속에서 장기가 꼬이는 아픔이다. 그때 나는 바르트를 이해한다 : "나는 그 사람이 아파요"
페이지가 줄어드는게 아깝다. 너무 아름다운 글이고, 너무 아픈 글이고, 곁에 오래 두고 싶은 그런 글들. 여기에 내가 무어라 더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싶다.
짧은 글이지만 얼마 되지 않는 그 글들만으로도 마음을 울린다. 전에 읽었던 롤랑바르트의 애도일기도 좀 생각났는데, 어쩐지! 내가 읽은 그 롤랑바르트의 애도일기 책이 이별의 푸가 작가의 번역서였다. 확실히 번역에서도 작가의 느낌이 나서 신기하다. 내 글에서도 내가 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