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욱 교수가 출간하는 책들은 나의 관심분야라 새로운 책이 출간되면 꼭 읽어보고는 한다. 이번 책은 고고학 여행이라는 제목답게 역사에 문외한이라도 흥미를 붙이고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는 기초안내서같은 느낌이다. 고고학이라고 하면 먼 옛날, 캐캐묵은 이야기라고 생각하게 된다. 저자는 고고학은 오랜 시간 공들여 과거를 관찰하고 또한 과거를 통해 현재를 비추어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1. 죽은 이를 위한 사랑의 흔적
2. 불에 깃든 황홀과 허무
3. 술, 신이 허락한 음료
4. 신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5. 마음을 울리는 소리 없는 음악
6. 빛바랜 유물에 숨어 있는 화려함
7. 지난 세월의 향기
8. 발해인들도 돼지고기를 좋아했을까
9. 중국 황제도 반한 고조선의 젓갈
10. 몸에 새겨진 시간의 기억
11. 파괴와 복원, 고고학 발굴의 패러독스
12. 고고학을 꽃피우게 한 제국주의
13. 전쟁 속의 고고학
14. 문명은 짧고 인생은 길다
15. 그들은 왜 유물을 위조했는가
16. 고고학자의 시행착오와 해프닝
17. 황금 유물을 둘러싼 운명들
18. 고고학이 밝히는 미래
에필로그. 어디에도 없는 혹은 어디에나 있는
목차만 봐도 흥미롭기 그지없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으로 향한다. 저자는 삶과 죽음 전반에 걸친 고고학 유적과 유물을 음악, 음식, 무덤 등 세부 주제를 통해 쉽게 설명한다. 죽음은 이야기하는 것이 터부시 되었지만, 우리 삶의 여정의 한 부분이므로 필연적으로 언급할 수밖에 없다. 옛 사람들의 무덤 양식을 살펴보면 떠나보내는 이에 대한 살아남은 자들의 애틋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박물관에서 그냥 스치듯 보고 지나가는 무덤출토 유물등에도 애틋한 이야기가 담겨있음을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p. 30
그런 의미에서 무덤은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나는 제2의 자궁과 같은 곳이다.(중략)독무덤은 전 세계적으로 어린아이가 죽으면 넣어서 묻는 풍습으로 널리 퍼져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의 관을 항아리 모양으로 만들었을까. 항아리는 곧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죽어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듯 몸을 구부려서 넣는 독무덤만큼 무덤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잘 표현하는 유물도 없다.
평소 박물관에가서 넋놓고 유물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독무덤을 보고는 왜 하필 항아리일까 의문을 가졌었는데, 이렇게 풀이될 수 있다니! 예전 사람들은 새는 하늘의 정령이라고 믿었으니 항아리를 곧 알이라고 봐도 될 것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시 알 속으로 들어가 하늘로 올라가 재생하기를 바라는 기원이 담긴 무덤형태가 아닐까?
P. 105
역사 기록에 따르면 발해의 음악은 당시 일본과 중국에도 널리 퍼졌다. 발해의 사신이 전한 음악은 일본 도다이지에서 공연할 정도이고,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중국의 송나라에서는 발해의 음악이 너무 유행해 이를 강제로 금지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도대체 발해의 음악에는 어떤 매력이 있어서 이렇게 주변 나라의 사람들을 매혹시켰을까 궁금했다. 구금이 등장한 것을 보니 발해는 초원, 중국 그리고 고구려의 여러 음악을 조화시켰던 건 아니었을까. 비록 과거의 음악은 복원하여 듣기 어렵지만, 그들이 이루었던 문화의 힘은 지금도 느낄 수 있다.
음악, 맛, 향기는 시간에 취약하다. 때문에 고고학에서 밝히기 가장 어려운 분야이기도 하다. 고고학에서 빛바랜 유물과 지금은 알수 없는 소리를 추적해가는 과정은 흥미롭기도하고 영겁의 시간을 읽어내는 학문이라는 생각에 매력적이다.
P. 210
우리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문화재 침탈과 그 영향은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 주변의 유적과 문화재에는 그들이 남긴 흔적이 너무나 크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에 동조한 학자들을 비판하면 ‘그들의 연구 성과는 좋다’ 혹은 ‘인격적으로는 훌륭하다’는 식의 일본 측 의견을 대변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비판해야 할 것은 개개인 학자의 성격이나 인격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바로 국가 권력에 앞장서서 다른 사람을 억압할 때에 그에 암묵적인 동조를 하고 따라갔던 그 모습을 비판해야 한다.
고고학은 아이러니하게도 발굴과 동시에 파괴하는 학문이다. 제국주의가 세계를 재패했을 때 특히 고고학은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신라시대 유물이나 백제 유물 등이 제대로 소중하게 발굴되지 못한 것은 아쉬울 따름이다. 특히 일본은 고고학을 통해 한국은 미개한 국가로 왜곡하는 것에 꽤 공을 들여 작업했다. 이 때문에 현재 한국의 고고학자들은 일제강점기때 잘못 정리된 유물과 내용을 다시 정리하고 있다고 한다. 재정리되는 과정에서 새롭게 바뀌는 것들이 더 많아지리라 기대한다.
P. 9
고고학의 매력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바로 유물을 통해 죽어 있는 과거에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고학적인 연구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그 유물들이 원래의 기능을 잃고 땅속에 묻혀야 합니다. 즉,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죽고 난 다음에 고고학자들은 다시 그들을 꺼내어 부활시킵니다. 생동감 있는 삶의 모습을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하는 셈입니다.
고고학은 과거를 살펴보지만 미래를 지향하는 학문이다. 고고학을 통해 우리의 미래가 한층 더 나아가는 방향으로 바뀔 수 있을까?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문득 궁금해진다. 고리타분한 고고학이라는 학문을 재미있고 친근하게 만나볼 수 있는 책이었다.
역사에 관심을 갖다가 선사시대 고고학에도 눈길을 돌리게했던 저자의 이전 책을 찾아서 구매하게 되었다. 인디아나 존스는 물론 비현실적 가상인물임을 안다고 해도 오랫동안 땅밑을 파들어가는 지난한 작업이 실은 최신 기술이 도입되는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학문이라고는 이 책을 통해 알게된다. 기록된 역사 이전의 문명의 증거들을 찾아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복원해가는 이 분야가 인디아나 존스와는 다른 의미로 낭만적임을 느낀다. 매달이 멀다하고 업데이트 되는 분야라면 몇 년 후에 저자의 또다른 책을 읽게되면 우리는 과연 어떤 새롭게 발견되는 이전 문명들의 단편들을 접하게될까. 오히려 너무 덜 학술적으로 느껴질 만큼 에세이에 가까운 글들이지만 한번 잡으면 놓을 수가 없다. 다른 책들이 또 기다려진다.
한 저자의 책을 읽을 때는 출판 시기 순서로 읽는 것이 저자들의 사고 발달 과정을 일을 수 있어 좋은데 이 저자의 책은 우연히(도서관에서 다른 책을 빌리다가 눈에 띄었다.) 읽게 되어 가장 최근 책인 '테라 인코그니타' 먼저 읽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도 고고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 우리가 '정설'로 알고 있는 고고학적 사실이 사실로 판단되기 까지 발굴의 역사, 해석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어 재미있다. 고고학적인 유물은 발굴되고 나서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무엇인지 인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어릴 때 서양에서 나온 공룡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는 공룡이 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나라에서도 공룡의 흔적들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서 중요한 것은 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자랄 때는 나라에 돈이 없어서 공룡까지 발굴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경제가 좀 여유로우니 공룡 연구도 하고 고고학 연구도 활발해 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최근에 경주의 한 무덤에서 180cm 되는 시신을 새로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혹시 중동이나 중앙 아시아인? 조사할 수 있는 DNA가 남아 있는지 모르지만 정말 흥미롭다.
또 저자의 책들을 짧은 기간에 함께 읽으므로서 각각의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문화를 기억하게 되었다. 중국의 홍산 문화는 내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약간 애매한 위치에 있기에 이걸 가지고 우리 민족과 연결 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중국의 한족과 연결 시키는 것도...... 그냥 먼저 살았던 사람들일 뿐이다.
목차
서문 고고학자의 비밀노트를 꺼내며
책에 등장하는 주요 사건들
프롤로그. 고고학, 과거와 미래를 잇는 현재라는 다리
1. 죽은 이를 위한 사랑의 흔적
30쪽
그런 의미에서 무덤은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나는 제2의 자궁과 은 곳이다. 무렵에 사람을 묻을 때에 우리는 죽은 사람이 완전히 라지는 것이 아니라 저승에서 다시 태어나는 부활을 기대한다. 러 다양한 무덤 중에서 항아리에 사람을 묻는 독무덤 (옹관묘)이 는 것이 있다. 이 독무덤은 마한시대에 우리나라 전라남도 일대 서 널리 쓰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이 독무덤은 전 세계적 로 어린아이가 죽으면 넣어서 묻는 풍습으로 널리 퍼져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의 관을 항아리 모양으로 만들었을까. 항아리는 곧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죽어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아가듯 몸을 구부려서 넣는 독무덤만큼 무덤의 의미를 상징적으 잘 표현하는 유물도 없다.
무덤은 매장과 제사라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죽음을 받아들이 그 의미를 체화시키는 상징이었다. 무덤이라는 거대한 제단에 정 적으로 제사를 지내면서 죽음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세계로 나아 가는 과정이 되었다. 즉, 무덤은 죽음이라는 원초적인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죽음이 다시 태어나는 황홀한 경험의 장eroricizing deat으로 만들었다. 사람의 죽음이라는 가장 꺼리는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으 로 무덤을 만들고, 그들을 기억하는 제사를 마치 축제처럼 지냈으 로써 고대 사회는 유지되고 발전할수있었다.
보통 대학의 박물관에 가면 옹관묘를 많이 볼 수 있었다. 볼 때 마다 궁금했었다. 왜 저렇게 만들었는지....
2. 불에 깃든 황홀과 허무
3. 술, 신이 허락한 음료
4. 신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77쪽
시베리아의 버섯 중에는 유독 빨갛고 예쁘게 생긴 것이 있다 대버섯으로, 환각작용도 크고 치명적인 독도 가진 위험한 버섯 다. 그런데 과거 사제들은 의식을 행할 때 이 독버섯의 약효를 하기도 했다. 시베리아의 시민들은 하늘과 맞닿는 엑스타시( 초월상태)를 일으켰는데, 이러한 정황은 유라시아 초원 일대의 입주 남아 있다.
알타이 칼바다시 암각화를 비롯해 다양한 입각화에 나타난 시민들의 모습은 공통적으로 머리가 버섯 모양이었다. 기독교나 불교교 할 것 없이 신격화된 모습은 머리 뒤로 아우라 같은 광채가 비치는 것으로 표현된다. 시베리아의 샤먼들은 광채 대신에 머리에서 버섯이 자라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다. 놀랍게도 이런 버섯 머리의 샤먼은 알래스카와 이어지는 북극해 추코트카 반도의 페그티멜 암각화에서도 발견되었다. 페그티멜 암각화는 한국에서도 제법 알려져 있다. 반구대 암각화와 마찬가지로 고래잡이를 하는 장 면이 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암각화에서도 이런 버섯머리의 샤먼이 발견된다. 이는 1만 5000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버섯을 이용한 샤먼 들이 유라시아 곳곳에 있었고, 이들의 일파가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는 증거일 것이다.
몽골 울란바토르 근처에 약 2000년 전에 만들어진 흉노 선우(왕) 고분에서도 버섯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바로 2007년에 발굴된 노 인-울라 20호 고분이다.
페그티멜 암각화 https://en.wikipedia.org/wiki/Petroglyph
5. 마음을 울리는 소리 없는 음악
93쪽
샤먼은 나무 근처에 마치 병풍처럼 그들의 세계관을 묘사한 신화를 표현한 가죽그림을 걸었다. 이로써 샤먼 의식의 준비는 마친 셈이다. 분위기가 고조된 순간 치장을 마친 샤먼이 다시 등장했다. 황금빛의 청동 방울과 거울을 몸에 주렁주렁 걸친 샤먼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영롱한 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샤먼의 가슴에 건 거울 은 햇빛을 반사해 마치 가슴에 태양을 품고 있는 듯했다. 샤먼은 천 천히 북을 치면서 낮은 목소리로 구절을 읊었다. 옆에서 악사들은 과정을 치면서 샤먼의 의식을 도와주고 있었다. 특히 심벌즈 같이 생긴 집에서 울려 퍼지는 그 영롱한 울림은 나를 홀렸다. 샤먼의 의식에서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제 의식을 보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세형동검 문화 시기인 2400년 전에 등장하는 동검과 청동방울, 거울도 바로 샤먼의 도구였다. 우리나라 세형동검문화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유사하게 생긴 청동방울과 거울은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의 샤먼들이 지금도 여전히 쓰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 국보로 지정된 팔주령(여덟 개의 방울이 달린 도구)과 장대에 다는 방울 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북처럼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악기 도 있었다. 둥근 거울처럼 생긴 청동기로, 이름은 원개형동기(둥근 모양의 청동기)라고 한다.
시베리아 샤먼 https://en.wikipedia.org/wiki/Shamanism_in_Siberia
부리야트 공화국 https://en.wikipedia.org/wiki/Buryats
101쪽
약 3000년 전을 전후하여 전차로 전쟁을 하던 시대가 끝나게 되면서 전차는 전쟁무기가 아닌 하늘의 전령사나 지혜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구약 성경에서 전차를 타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나 고대 인도에서 지혜로 세계를 통치하는 전륜성왕이 전차의 바퀴 로 표현되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렇게 전차가 하늘과 땅을 잇는 소통의 도구로 바뀌면서 전차에 달린 방울도 한반도를 포함한 유라시아 일대에서는 샤먼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샤먼의 도구로서 청동방울을 본격적인 악기로 발달시킨 나라는 중국이었다.
103쪽
바르간의 원리는 악기를 이빨 사이에 끼우고 철판을 튕기는 것 이다. 입은 공명통 역할을 하니 입 모양을 다양하게 해서 그 소리의 울림을 조절한다. 한국에서는 이 악기를 본 사람은 물론이고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유목민들에게서만 널리 유행했기 때 문이다. 유럽으로는 13세기가 되어서야 전래가 되었지만, 동아시아 에서는 이미 3500년 전의 무덤에서 구금이 출토되었다.
2014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한 고고민족학연구소에 자료 를 조사하러 갔다. 친한 고고학자 니나 레센코(그녀는 나와 몇 해 동 안 크라스키노의 발해 유적을 발굴했다)가 보여줄 것이 있다며 나를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머리핀처럼 생긴 손가락 크기의 철기 유물을 보여주었다.
"이게 뭔지 아시겠어요? 바로 바르간이에요. 발해유적에서는 처음 나왔답니다."
바르간 https://en.wikipedia.org/wiki/Jew%27s_harp
바르간이 서양에서는 유태인 하프로 알려져 있나보다.
106쪽가야금 이전에도 또 다른 현악기가 있었다. 서양에서 발달해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국과 한국으로 전래된 하프의 일종인 후이다. 이 공후는 동쪽으로는 알타이까지 이어졌다. 고조선 가요인 <공무도하가>는 공후를 타면서 부르는 노래다. 이 가요를 채록한 사람은 고조선의 하급관리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 당대 또는 고조선 멸망 직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그 지은이에 대해서는 뱃사공, 곽리자고,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 등 다 양한 설이 있는데, 아마 많은 노래가 그러하듯 채록되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이 <공무도하가>는 이후에도 계속 남아서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고대가요가 되었다. <공무도하가>는 1세기 때 채옹의 '금조',에, 1세기 초에 쓰여진 최표의 '고금주'에 이미 등장한다. 그리고 이후 동아시아 일대에서도 널리 사랑받았다.
<공무도하가>가 지금까지 전해지게 된 건 역설적이게도 고조선 을 멸망시킨 한무제의 역할이 컸다. 한무제는 음악을 관장하는 악 부를 설치해 사방의 노래를 체계적으로 수집했다. 당시 악부의 노 래 채록은 다양한 노래를 통해 군가를 제정하여 각지로 파견되는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려는 목적도 있었다. <공무도하가>는 서글픈 사랑의 노래로, 가족들을 고향에 두고 떠난 군인들의 심금을 울렸 을 것이다.
114쪽
여기서 주목되는 유목민들이 바로 앞서 언급한 중국 만리장성 지대에서 널리 흥했던 흉노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고조선을 흉노의 왼쪽 어깨라고 할 정도로 흉노와 고조선은 서로 통했다. 또한 기원전 4세기경에 중앙아시아에서 크게 번성했던 유목민족들은 실크로드를 따라서 만리장성을 따라 동아시아로 진출했고, 고조선과 맞닿았다. 이러한 고조선과 초원 지역과의 연관성은 황금, 철제 무 기와 마구에 잘 남아 있다. 중원을 거치지 않고 고조선이 직접 중 앙아시아 초원 지역의 유목문화로부터 공후를 수입했을 가능성이 더 큰 건 이 때문이다. 초원 지역과 많은 교류를 했던 발해 정효공주의 무덤 벽화에도 휴대용 공휴가 그려져 있다. 이렇듯 고조선 이 후에도 우리의 고대사에서 공후로 대표되는 초원의 음악은 계속 연 주되었던 것 같다. <공무도하가>는 이처럼 서역의 음악과 이어졌던 2000년 전의 교류를 반증해주는 귀한 자료이다.
고고학책을 읽다보면 한반도는 최소한 삼국시대 이전에는 중국의 영향 만큼이나 중앙아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동안 나의 역사적 사고가 너무 중국 중심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6. 빛바랜 유물에 숨어 있는 화려함
124쪽
2000년 전 유라시아의 최대 군사강국이었던 흉노를 무너뜨린 것은 강대한 군사력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간파하고 흔들던 중국의 화려한 사치품들이었던 것이다. 단조로운 초원의 빛깔에 싫증을 내 어 아름다운 빛깔을 탐한 결과가 나라의 멸망이라니. 진정한 경국 지색은 이런 것이 아닐까.
7. 지난 세월의 향기
137쪽
마늘은 한나라 때에 실크로드를 따라서 아시아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쪽마늘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건설하던 히브리 노예들이 즐겨 먹었던 음식이라고 구약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모세가 이 집트를 탈출한 엑소더스 이후에 히브리인들이 마늘이 없다는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적혀 있다. 실제로 투탕카멘의 무덤과 같은 고대 이집트의 여러 유적에서 건조된 마늘의 흔적이 발굴에서 발견된다.
대신에 유라시아 전역에서는 '야생마늘' 또는 '마늘'이라고 도 불리는 명이나물이 널리 애용되었다. 야생마늘은 학명으로도 'Allium ursinum L.'. 곰의 마늘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단군신화에 쑥과 마늘이 등장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마 늘은 아마 곰마늘의 일종일 가능성이 더 크다. 최근 연구에서는 유럽의 24개 언어를 조사해본 결과 공통적으로 명이나물은 '곰마 늘' 또는 '파'로 부른다고 한다.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은 공통적으로 봄에 알싸한 곰마늘을 즐겨 먹었다. 마늘은 유라시아 전역에 분포해서 극동의 한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니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마늘은 유라시아 전역에 서 자생하던 야생마늘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139쪽
이제까지 많은 연구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쑥과 마늘의 의미를 통과의례, 빛과 하늘의 신화. 글과 호랑이의 모텔 등 다양하게 해석 해왔다. 그런데 단군신화의 진짜 의의는 바로 유라시아의 보편성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핀란드에서 태평양 연안의 감사카까지 곰과 관련된 신화가 없는 부족은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지역에서 는 기나긴 겨울을 지나 등장하는 알싸한 곰마늘의 힘을 느낄 수 있 다. 어쩌면 곰마늘의 맛과 향에서 단군신화에서 잊혀진 또 다른 이 야기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 마늘이 우리가 지금 먹는 마늘이 아니었어?
곰신화를 가진 민족들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터키에도 곰전설이 있다는 것 정도로 알고 있었다.
8. 발해인들도 돼지고기를 좋아했을까
9. 중국 황제도 반한 고조선의 젓갈
10. 몸에 새겨진 시간의 기억
175쪽
대학원 시절 두만강 유역의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발견된 뼈로 만든 수백 개의 바늘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도대체 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였기에 무덤 안에 바늘귀도 없는 바늘 수백 개를 넣었을까 너무나 궁금했다. 하지만 그 바늘들이 침의 일종이라는 걸 밝혀낸 건 그로부터 20년이 훨씬 지난 2016년이었다.
서울대학교에는 과거 경성제국대학 시절부터 한반도는 물론 만 주 일대에서 모아둔 다양한 유물들이 있다. 다양한 컬렉션 중에서 도 특히 두만강 일대의 선사시대 유물과 발해의 유물이 많다. 그 이유는 1930년대 이후 일본이 만주 침략을 본격화 할 때 경성제국대 학의 사학과 교수들이 함께 만주 일대를 조사했기 때문이다. 이 뼈 바늘들은 경성제국대학 교수 후지다 료사쿠가 1938년에 두 강 부근의 연길 소영자 유적을 조사할 때 발견한 것이다.
당시 일본은 만주 일대를 군사기지화 하면서 소련과 접경한 연 변시 외곽에 비행기 격납고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약 3000년 전 의 고대 돌무덤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각 무덤에서는 10~30센티 미터 크기의 돌침과 뼈침이 수십 개씩 통에 넣어진 채로 발견되었고, 후지다는 그 유물들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놓았는데, 해방이 되면서 서울대 박물관으로 그 유물들이 고스란히 옮겨졌던 것이다. 후지다가 가지고 있던 자료들은 다행히도 1990년대 중반 최몽, 교수님이 되찾았다.
소영자 마을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11/2018011100165.html
11. 파괴와 복원, 고고학 발굴의 패러독스
12. 고고학을 꽃피우게 한 제국주의
13. 전쟁 속의 고고학
224쪽
미국 버지니아 출신 하워드 맥코드 대령은 직업군인이 된 이후 은퇴할 때까지 프랑스, 독일, 일본, 한국 등에서 전쟁에 참여하면서도 그 지역의 유적을 조사하던 열성적인 고고학자였다. 한국전쟁 참전 당시 그의 부대는 경기도 가평의 북한강 지류에 위치한 마장리와 이곡리 근처에 캠프를 설치했고, 개인참호를 파다가 땅속에서 고대 집자리의 흔적과 유물들을 발견했다. 당시 맥코드는 참호 벽에 무문토기가 박혀 있는 것을 보고, 그곳에 적어도 5개 이상의 집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예상 외로 대규모의 취락지임을 알아차린 그는 조사를 시작했다. 아쉽게도 전체 유적 발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참호로 파놓은 구덩이들을 샅샅이 조사하고 유물들을 수거했다. 또한 지층을 파악해서 이 지역의 마을이 두 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다는 것도 밝혔다.
14. 문명은 짧고 인생은 길다
238쪽
기원 전 3500년경 인더스강 유역에서 발달한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현재 파키스탄에 위치하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유명한 하라파와 모헨조다로가 있다. 일찍이 이 지역은 영국의 고고학자들에 의 해 20세기 초반부터 널리 알려졌다. 인더스 문명이 전성기에 달한 중기 하라 시기인 기원전 2500년경에는 약 1000개 이상의 도시가 인더스강을 따라서 형성되었다. 이 강의 지류를 통해서 멀리 메 소포타미아와도 교역을 했다. 그리고 강물을 끌어들이는 관개를 해 서 농사도 발달했다. 성 안의 주거지에는 상하수도가 발달하여 목 욕탕과 화장실이 있을 정도로 고도의 문명을 만들었다. 인더스 문 명의 주변에는 삼림이 풍부하게 발달해 있었고, 강수자원도 풍부했 다. 금속 귀금속의 매장량도 풍부했으며 바닷가에 인접한 덕에 해산물이나 소금 같은 자원을 얻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교역은 자연스럽게 발달되었다.
그런데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1500년경에 갑자기 사라졌다. 도시는 발달했지만, 궁전이나 무덤 같은 유적은 없었다. 발견된 무덤은 대부분 너무 소박해서 계급의 차이를 알아내는 것도 힘들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유적지에는 사원이나 군대의 흔적도 없었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다른 이론들이 제기되고 있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부터 서서히 멸망했다는 이론이다. 인더스 문명은 물길을 따라서 교역을 하고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다. 때문에 엄청난 토사를 매년 토해내는 인더스강에 기후 변화가 닥쳐서 갑자기 물결 이 바뀌면 그들이 쌓아놓은 거대한 문명은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물길이 바뀌어서 교역을 하던 배가 들어올 수 없고 농사를 지을 수 없다면 사람들은 재빠르게 각자도생을 구하면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자 료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 인더스 문명에서는 서로 전쟁을 했던 혼 적이 없고 강력한 왕도 없었다. 그들의 집이나 무덤의 크기도 일정 해서 사람들 사이에 계급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그러니 강력한 왕 의 지시나 전쟁으로 이 도시의 사람들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홍산 문명은 터키의 괴베클리 테베 문명과 비슷한 것 같다. 농사도 짓지 않으면서 거대한 신전을 남겼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4%B4%EB%B2%A0%ED%81%B4%EB%A6%AC_%ED%85%8C%ED%8E%98
터키의 괴베클리 테베 문명은 사냥과 채집을 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신전을 만들었었다. 조상 숭배가 아닌, 말 그대로 신을 위한 신전이다. 홍산문화는 거대한 조상의 위한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 현실적이지 않은 것을 추모하는 행위이지만 대상이 다른 것이다.
또 인더스 문명은 아예 신전이나 거대 무덤이 없었다.
다른 문화는 달리 동아시아는 꽤 오래 전부터 조상에 대한 숭배가 발달했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제사를 보아 온 한국인으로서 제사는 당연한 가족행사라고 믿어왔으나 그것이 인류의 보편적인 행위가 아닌 동아시아의 독특한 행태라는 것을 성장해서야 알게되었다. 따라서 현대에도 한국의 며느리들을 괴롭히는 제사가 꽤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이게 홍산문화 때문?
241쪽
만주에서 고도로 발달했던 홍산문화도 인더스 문명과 비슷하다. 인더스 문명과 비슷한 기원전 4000~3500년에 홍산문화는 번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문명의 차이는 크다. 인더스 문명은 물길을 통한 원거리 교역을 기반으로 상수도가 완비된 성과 도시들이 발달 했다. 반면에 홍산문화의 주민들은 움집으로 마을을 이루며 살았는 데, 마을의 규모는 작았고 성벽을 쌓지도 않았다. 대신에 제사가 고도로 발달해 거대한 무덤과 제단을 쌓은 것이 특징이다. 니우량 에서는 피라미드형 돌무덤과 직경 수백 미터에 이르는 제단과 무덤 그리고 가부좌를 틀고 있는 진흙으로 빚은 여신상 을 모신 여신묘 신전 등 대형 제사유적지 16곳이 반경 10킬로미터 이내에 모여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정작 이상한 건 유적의 100킬로미터 이내에서 사람들이 살 만한 성터나 마을이 아직까지 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니우허량 일대는 제사만 을 지내는 성스러운 지역이었던 것이다. 제사신전이 거의 없는 인 더스 문명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멸망의 과정만은 인더스 문명과 흡사하다. 홍산문화는 기원전 2700년 이후에 갑자기 사라졌고, 거대한 니우허량의 제사터는 그냥 버려졌다. 니우허량의 제사터들은 지금도 그 형태가 잘 남아 있는데, 홍산문화 이후 다른 사람들이 제사를 지냈던 흔적은 전혀 없다. 홍산문화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이 제사터를 완전히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244쪽
홍산문화의 다음에는 거대한 제단이 사라지고 작은 마을과 무덤만 나오는 샤오옌문화 기원전 2700~2200년)가 이어졌다. 샤오옌문화의 사람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고, 수렵과 채집을 주로 하며 살았다. 당시 기후가 극도로 추워 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구는 급격히 줄었고, 마을도 작아졌다. 이 렇게 바뀐 환경에서 사람들은 거대한 제단을 공동으로 건설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대신에 직경이 3미터밖에 안 되는 조그만 움집 안에 다양한 부적, 신상들을 모셨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샤오옌문화의 제사 관련 유물과 토기는 홍산문화의 전통을 고스란히 잇고 있었다. 홍산문화에서 제사를 지내 던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작은 마을 단위로 그 전통을 지켜나 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얼핏 보면 샤오옌문화는 기후와 환경의 변화로 인해 홍산문화가 쇠퇴한 결과로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전개되는 과정을 보면 샤오옌문화는 단순한 쇠퇴가 아니라 홍산문화의 전통을 이어가며 문화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과도기였다. 샤오옌문화는 중앙집중화 된 제사 시설을 만들지 않았다. 대 신에 작은 마을로 쪼개져서 각 마을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제사장 중심의 사회에서 탈피하여 지역 공동체 간 네트워크가 강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후에 기후 가 다시 온난해지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도시를 만들었던 사자덴하층문화의 사람들은 오기 대신에 청동기를 사용했고 강을 따라서 거대한 성을 수백 개나 건설했다. 계급도 뚜렷하게 나뉘었고, 평균 수명도 40세 전후에 이를 정도로 연장되었다. 중국 학계에서는 사자덴하층문화를 중국의 하나라에 비견하는 국가의 등장으로 본다.
요서지역에서 홍산문화로 시작되어서 비파형동검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문명의 흐름은 만주 일대에서도 아주 독특하여 세계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중국과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 서 매년 이 유적을 조사하는 것도 이 지역에서 독특한 문명이 발생 했던 이유를 규명하기 위해서이다.
홍산문화
https://ko.wikipedia.org/wiki/%ED%9B%99%EC%82%B0_%EB%AC%B8%ED%99%94
이 저자의 책들을 통해 홍산문화를 처음 알게 되었다.
15. 그들은 왜 유물을 위조했는가
16. 고고학자의 시행착오와 해프닝
17. 황금 유물을 둘러싼 운명들
284쪽
그런데 소련이 망하고 러시아가 들어선 후, 엉뚱하게도 트로이의 황금 유물은 러시아 푸시킨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 졌다. 히틀러의 패망이 가시화될 무렵 소련은 전쟁 중에 독일이 소련 영토 내에서 자행한 파괴를 보상받겠다는 명분으로 전리품 연 대Russian Alsos를 창설했다. 이 전리품 연대는 독일군의 핵무기, 첨단 무기뿐만 아니라 문화재 등 소련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자국으로 실어 날랐다.
어릴 때 책을 읽으면서 트로이의 유물이 전쟁 통에 사라졌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유물들이 사실은 소련이 전쟁 통에 훔쳐가서 숨겼단다. ㅋ ㅋ 남의 유물을 서로 뺏고 훔치고 있다.
18. 고고학이 밝히는 미래
에필로그. 어디에도 없는 혹은 어디에나 있는
책에 등장하는 유적지들
고고학이라고 명칭만 알고 있었지 막연하게 어렵다.. 나랑은 상관없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TV 프로그램에 나와서 너무 재미있게 이야기해주시는걸 보고 찾아서 구매했어요. 역사도 그러하지만 고고학 역시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살았던 그리고 죽어서 남긴 흔적들.. 그것들을 우리가 후대에 유물이라고 이름을 붙여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작가는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 해주고 있어요. 읽기 시작하기 전에는 어려우면 어떻하지 했는데 충분히 재밌습니다.
차이나는 클라스 강연을 통해 처음 접하고 마침 책이 나와있길래 챙겨두었다가 이제서야 완독. 저자의 고고학 관련 여행기를 담은게 아니라 고고학자로서 겪은 자신의 경험과 주요 고고학 유적지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자신의 생각을 엮어 에세이 형태로 담아낸 책이다. 그러니 사실 어느부분 부터 읽어도 상관없어보이는데 나야 늘 그렇듯 차례대로 읽어나갔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쓴 책이니만큼 발굴관련한 전문적인 이야기보다는 교양서로서 알아두면 좋을 지식들이 친절하게 녹아들어 있어 의외로 유익하게 볼 수 있었다. 사피엔스라던지 로빈 던바의 수 같은 다른 분야에서 접했던 지식과의 접점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었는데 대충 몇가지만 요약해 생각을 덧붙여 적자면.
- 직립보행은 목숨을 건 진화였다. 발달된 두뇌와 지혜를 얻는 대신에 너무나 많은 동물적인 장점을 포기했기 떄문이다. 이동 속도 등에서 손해를 봤다고 하는데 이게 직립보행을 한 결과물이 발달된 두뇌인 것이지 두뇌를 발달시키기 위해 직립보행을 한건 아닐것 같으니 뭔가 인과관계가 바뀐듯 한 느낌. 애초에 왜 인류의 조상은 두발로 걷고자 했으려나.
- 임사체험의 경험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 중 하나는 나비의 출현이다. 뇌과학자였던 이븐 알렉산더는 자신이 겪은 임사체험을 공개했고 뉴스위크지에 실리기도 했다고. 실제로 나비같은 매개체에 이끌려 저승으로 헤엄쳐가는 모습은 세계 각지의 무덤에서 관찰된다고 한다. 오래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무슨 책에서 임사체험을 관광상품화 한 소재를 다룬 기억이 난다. 아마 거기서도 나비이야기가 나왔던걸로 기억. 그러고보면 장자의 호접지몽이라는 고사성어에도 나비가 나오는걸 보니 정말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비는 죽음너머의 세계와 관련이 있는듯 하다. 그러고보니 나비 본지 참 오래되었다.
- 십수어년전 제너두라는 펜션을 갔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 펜션의 이름은 원나라가 건설했던 '여름의 수도'를 말하며 흔히 초원의 낙원을 상징한다고 한다. 제너두라는 활자를 읽는 순간 같이 갔던 엠티 멤버들이 생각나더라는.
-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마늘은 실제로 당시 '곰마늘' 또는 '곰파'라고 불리던 '명이나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명이나물 먹고 싶어진다. 명이나물 관련해서 최근 방송에서 다룬걸 본 기억이 나는데. 찾아보니 선을 넘는 녀석들이었다. 편집하고 보니 여기서는 '산마늘'이라고... 이름이 많았나.
그러고보니 명이나물 관련한 광고도 있었다는!
이 광고 오랜만에 다시 봤는데 또 피식하고 웃게 된다. 얼른 마무리하고 맥주한캔 하고 싶어지네.
그러니 후다닥 마무리. 건물이나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견된 유적을 공사를 중지하고 발굴하는 것을 구제발굴이라고 부른다고 한다는 것은 알아두면 좋을 듯하다. 몇년년 이슈가 되었던 강원도 레고랜드 이야기도 나오고 마찬가지로 부동산 개발로 많은 부분이 유실된 풍납토성 이야기도 등장. 인디아나 존스라는 영화를 일본에서 리메이크 한다면 우리나라가 배경이 될텐데 이걸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하는 부분에서는 그 영화가 달리 보이기도 했다. 일본의 우리나라 문화재 발굴 이야기, 후지무라의 유물조작 사건(방송에서도 다뤄졌다.) 등 에피소드 중심으로 되어있어 쉽고 재밌고 유익했던 경험이었다.
아 이문장을 마지막으로 인용하는 걸로 마무리.
- (전략) 수많은 무덤을 발굴하면서 이처럼 덧없는 인간의 욕망을 깨닫게 되곤 한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의 생에서 중요한 건 뭘까? 이 한 문장이 그 힌트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 공짜야. 그걸 누릴 줄 알면 부자인 거야."
저자는 먼저 고고학은 주요 연구대상이 인류이기 때문에 지질학이나 고생물학과는 다르다는 것을 언급합니다. 그런 만큼 이 책에 나오는 내용들은 과거에 죽은 자들의 무덤에서 발굴된 무덤이나 유물과 관련된 이야기들입니다. 특히, 무덤은 죽은 자의 주변 사람들이 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사랑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과거 사람들이 그 당시 모습을 찾아 낼 수 있는 것이 유물뿐이고, 이 책에서는 수 많은 유물을 통해 과거 사람들을 만나고 느끼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저자는 시베리아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한 대학의 고고학 교수로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의 이야기는 러시아, 몽골, 중앙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책 속의 주요 내용들은 5만년 전의 데니소바 동굴에서 발견된 인류 화석에서 시작하여 가장 최근에 발견된 공산성의 백제 갑옷 및 연천 무등리의 고구려 갑옷까지 담고 있다고 합니다.
유물 중에 집 근처에서 발견되는 조개무지는 그 지역의 쓰레기터라고 합니다. 이 지역이 중요한 것은 조개뿐만 아니라 생활쓰레기도 함께 발견되기 때문에 고대인의 생활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소중한 자료라고 합니다. 고고학자들에게 패총 발굴은 힘든 과제 중 하나라고 합니다. 작업이 까다롭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조개껍데기와 생선뼈들을 일일이 분석해야 하는 아주 지루하고 긴 시간이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조개마다 번식하는 수온이 다르기 때문에 당시의 기후를 알 수 있고 당시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므로 그들의 식성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함께 발견되는 동물뼈 흔적을 통해 식생활 자료도 발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패총이 나온 지역을 이으면, 그 당시의 해안선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고고학은 과거를 밝히기 위해 반드시 과거의 유적을 파괴해야 하기 때문에 역설적인 학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 번 발굴하면 다시는 되돌릴 수도 없고 유적을 발굴 전처럼 오래 보존할 수도 없기 때문에 발굴 과정에 수많은 도면과 사진을 남기며 신중하게 발굴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발굴을 하지 않으면 과거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없고, 가능한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발굴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것이 고고학 발굴이 지향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개발을 위한 과정에서 유적이 불가피하게 파괴될 때 공사에 앞서 미리 유적을 발굴하는 것을 구제발굴이라고 합니다. 한국의 경우 95%가 구제발굴이고, 발굴이 끝나면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어 영원히 자취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특히, 지금 논란이 일고 있는 강원도 춘천시 중도의 레고랜드 건설현장은 동북아 청동기시대의 연구에 중요한 비파형검동이 집자리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무덤이 아닌 사용이 일반화 되었다는 증거 등 수십 년을 두고 천천히 조사해야 할 유적지라고 합니다.
이제야, 고고학자들이 유적지에서 발굴하는 속도가 아주 느린 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한 번에 왕창 발굴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보존과 개발, 과거를 알아 가는 것 등 고고학은 그냥 발굴을 넘어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한국 이외에 아시아 지역의 유적을 접하게 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
사실 고고학이라고 하면, 어려운 내용이 될수 있는데, 고고학 여행이라는 제목에 어울리도록 내용을 잘 풀어 나간 책입니다. 아이들에게 교육용으로도 좋은 책입니다.
1. 좋은 글귀, 마음에 드는 가사 인상 깊은 영화 대사 등을 메모해 주세요. "과거의 유물은 단순한 화석이나 골동품을 떠나 현재의 인류를 있게 한 흔적이자 발자취인 까닭이다" 현재를 알기 위해서는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깨우침을 주는 내용 입니다 |
2. 출처를 넣어주세요. 고고학 여행에 나오는 내용, |
강인욱의 고고학여행
미지의 땅에서 들려오는 삶에 대한 울림
저: 강인욱
출판사: 흐름출판 출판일: 2019년 6월14일
내 어린 시절에 ‘인디애나 존스’는 대단히 인기가 많았다. 그 당시에 주연배우인 해리슨 포드의 멋진 모습을 보면서, 고고학자가 되겠다고 다짐한 어린 아이들이 꽤 많았을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사학과를 들어가서, 역사를 공부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에도 일부분 그런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본다. 대학시절, 고고학 수업을 들으면서, 최무장 교수님이 칠판에 열심히 그린 유물들의 그림을 노트에 열심히 따라 그렸던 기억이 난다. 최초의 인류로부터 현생인류까지의 발전. 구석기 및 신석기 시대의 다양한 유물들,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 한반도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들.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서 흥미를 가지지 않을 사람이 있었을까?
하지만 실제의 고고학자의 모습은 영화와는 전혀 다르다. 열악한 환경에서 유물을 발굴해야 되며, 여러가지 문제와 씨름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왜 이런 척박한 상황에서도 고고학을 포기하지 않는가? 그들에게는 고고학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로 다가올까? 강인욱은 ‘과거의 유물을 찾고 연구하려는 인간의 욕구는 보물찾기가 아니라 바로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였던’ 것이라고 말한다.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슐리만과 같은 황금유물을 찾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고학자들이 마주하는 것은 땅 속에 묻혀진 죽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책에 수록된 사진 한 장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서부 시베리아의 한 무덤에서 발굴된 두 손을 꼭 잡은 모자의 유골이 그것이다. 유골로만 남은 그들의 모습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저리게 한다. 4000년 전, 그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망자가 사후세계를 잘 여행하라는 뜻일까? 혹은 부활을 위해서일까? 배 모양으로 깍아 만든 관들은 사막의 한 가운데에 마치 선단을 이루어 모래사막을 헤쳐 나가는 듯 보였다. 인간의 운명,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한정적 존재. 죽음으로 인해서 헤어진 가족과 친구들을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다른 형태지만, 오늘날 우리라고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강인욱은 고고학의 매력이 ‘유물을 통해 죽어 있는 과거에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완벽하게 온전한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오늘날의 눈으로 과거를 재구성한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의 삶을 거기에 투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온전하게 과거 그대로를 재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은 흔적 하나로 과거를 따라가며 거기서 의미를 찾는다. 고고학은 종착지가 정해지지 않는 여행에 비할 수 있지 않을까?
안타까운 현실들도 있다. 어떨 때는 유물을 조작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고, 개발논리에 밀려서 소중한 고고학적 현장이 제대로 된 발굴도 하지 못한 채 사라지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파괴된 현장과 유물들을 또 얼마나 많은가? 고고학이 순수한 학문으로 이용되기 보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탈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어용학자들은 학문적 양심도 버린 채로 현재를 위해서 과거를 조작하기도 했다. 그것은 고고학이 가지는 과거의 재구성과는 전해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책을 읽고서, 고고학의 모습을 다시 생각해봤다. 그 자체가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인 고고학. 그 의미와 아픔까지도. 문득, 파지릭인들이 무덤을 만들 때 물싸리를 깔고 시신을 눕히고 그 위도 빽빽하게 덮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그리고 ‘시베리아의 에델바이스’라는 이 작은 노란색 꽃인 물싸리로 덮인 무덤을 만든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마치 거기에서는 초원의 향기가 나는 듯 느껴졌다.
제목: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지은이: 강인욱
펴낸 곳: 흐름출판
학창 시절 장래 희망을 적으라는 설문지에 늘 등장하는 내 단골 희망은 고고학자였다. 고고학자를 꿈꿨던 많은 아이가 그랬듯이, 나 역시 초등학교 시절 읽은 '세계 7대 불가사의'와 눈을 반짝이며 주말의 명화에서 시청한 <인디아나 존스>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대학 입시를 앞두고 전혀 다른 학과를 택했고, 뒤늦게 철이 든 건지 그토록 재밌게 보던 인디아나 존스가 실은 남의 보물을 훔치는 나쁜 놈 이야기란 진실에 눈을 떠버렸다. 탐험가 같은 차림으로 사막 혹은 정글을 거닐다 운명처럼 마주한 고대 유적! 그 속에 가득한 황금! 그래, 우리가 쉽게 상상하는 이런 상황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이 책의 저자인 강인욱 교수 역시 이런 환상을 지적하며 고고학은 생각보다 어럽고 고생스럽지만, 그 이상의 가치와 보람이 있는 학문임을 당부한다. 저자의 말을 빌려 사실을 직시해보자면... <인디아나 존스>를 일본이 리메이크한다고 가정해보자. 일본인 고고학자가 석굴암을 깨부수고 불국사를 폭파하며 자기가 원하는 황금 금관을 찾아간다면? 이런, 맙소사! 너, 이 자식! 이리와, 좀 맞자! 이렇게 생각하니 정신이 퍼뜩 들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비로소 고고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된 거다.
고고학자로서 드물게 유라시아를 전공으로 삼은 저자. 덕분에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 가까운 이웃 국가를 넘어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다양한 유적지를 탐사하며 지구만이 묵묵하게 목격했던 인류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다. 이 방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했는데, 어쩜 이렇게 말을 재밌게, 아니 글을 재밌게 쓰시는지 그간 잊고 있던 고고학을 향한 애정이 퐁퐁 샘솟는다. 두 손을 꼭 잡고 죽은 4천 년 전 모자의 유골이 발굴된 무덤, 불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 막걸리와 맥주 같은 술의 출현, 귀한 약재였던 인삼과 감기약으로 쓰인 마황, 독버섯의 환각작용을 이용한 샤먼들과 버섯 머리 사람이 새겨진 암각화, 절대음감을 지닌 세종대왕이 석경 연주를 듣고 음률이 틀림을 지적했다는 에피소드, 벽화는 과거의 봉인을 해제하고 현재의 공기가 들어서는 순간 급격하게 색감을 잃는다는 사실, 다양한 약초, 부의 상징이자 에너지원이었던 돼지, 미용 및 치료 목적으로 이뤄진 문신, 경제 개발과 4대강 사업 앞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려버린 유적지, 일본이 우리 유적에 저지른 참상, 도굴, 국보 274호가 영구 결번이 된 이유, 마지막으로 고고학의 의미와 미래까지. 군더더기 없이 딱 중요하고 유익하며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한 이 책, 정말 칭찬합니다!
주제와 소재가 다채롭고 풍부한 사진 자료 덕분에 눈이 즐거웠던 시간. 방대한 유라시아 대륙을 누비며 다양한 시기의 특별한 유적을 앞에 두고 귀동냥으로 듣는 귀한 고고학 수업. 강인욱 교수는 고고학에 관한 관심과 애정을 유도할 뿐 아니라, 안타까운 역사적 사건을 제시하며 경종을 울린다. 우리가 얼마나 역사에 무지하며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깨닫는 순간,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질 정도. 수십 년 전, 단 며칠 만에 발굴됐던 무령왕릉의 발굴 책임자는 그 안타까운 순간을 잊지 못하고 오래도록 후회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우리는 더 많이 배우고 기술도 발달했지만, 여전히 그런 실수를 범하고 있다는 현실에 어찌나 허탈하고 화가 나던지. 이제부터라도 관심을 두고 챙겨볼 문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거닐던 고고학 여행이 숙연한 분위기로 애국심을 한껏 고취한 채 마무리! 아, 너무 재밌었는데 어쩌지. 책을 다 읽고 아쉬워서 자꾸만 페이지를 주르륵주르륵 넘겨본다. 고고학이 이토록 매력적인 학문임을 일깨워준 강인욱 교수께 감사를 표하며 바로 인터넷 서점 검색에 돌입했다. 2015년에 출간된 <유라시아 역사 기행>과 2017년에 출간된 <진실은 유물에 있다>. 강인욱 교수님,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 다른 책에서 또 뵙겠습니다! 정말 재밌는데 이 재밌음을 뭐라고 더 표현할 길이 없어 안타까운 이 책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사심 가득 담아 추천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었다.
그래서 뭣도 모르고 초등학교(실제로는 국민학교다) 시절 장래 희망이 고고학자였다.
만약 그때 이 책을 보았다면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고민했을 것 같다. ㅎㅎ
고고학은 나처럼 꼼꼼하지 못한 성격인 사람이 하면 안될 것 같은 학문인 듯 하다.
저자는 정말 역사를 사랑하고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작가의 감정이 잘 전달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짧지 않은 책이지만 쉼 없이 한 번에 다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책의 절반 정도는 작가가 직접 체험하고 관찰했던 유적과 유물들에 대해 경험담 형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서 어떻게 보면 딱딱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재미있는 이야기처럼 쉽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깊은 통찰과 지식은 지적 흥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저자의 전공 분야인 유라시아를 배경으로 시베리아와 몽골 중앙아시아 등의 유적과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덕분에 새롭게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이쪽으로도 다른 책을 더 읽어봐야겠다.
나머지 절반은 고고학 전반에 관한 이야기가 주로 나온다. 그 중 가장 집중되었던 부분은 고고학을 학문적인 목적이 아닌 정치적으로 혹은 국가의 권위를 위해, 아니면 개인의 명예심이나 재산 증식의 방식으로 활용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유물과 유적을 위조하기도 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마구잡이로 파헤쳐 놓기도 했으며 제국주의 열강들이 보존을 명목으로 소중한 식민지 국가의 보물들을 강탈해 간 것들 등은 심히 마음을 아프게 했다.
마지막으로 점점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것들이 더 발견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우리가 배웠던 역사가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고 하는 점은 정말 놀라웠다. 현재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청동기 시대의 역사가 발견된지 고작 50년 정도밖에 안되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최첨단 과학기술과 AI의 도입으로 앞으로 더 많은 발전이 있을 것이고 지금까지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역사가 눈 앞에 펼져질 것 같다. 황량한 사막, 시베리아, 초원에서 인류의 역사의 조각들을 찾아가는 고고학자들의 열정이 정말 대단해 보인다. 마치 탐정이 추리를 해 가는 것처럼 작은 파편 하나하나를 맞추어 가며 과거의 모습을 상상해 내는 그들의 모습에 존경의 감사를 보낸다.
'데이비드 로웬델 교수는 과거는 낯선 나라다 라는 책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과거에 대한 이해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과거는 하나의 고정된 역사가 아니라 계속 바뀌어가는 낯선 나라 라고 말했다'
'기술이 발전하면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인력이 줄어들 가능성이 존재한다. 때문에 현대의 고고학자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부여되는 것이다. 고고학자로서의 안목과 식견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다 공짜야. 그걸 누릴 줄 알면 부자인 거야.'
역사학과 출신이다 보니 고고학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없었다. 인디아나존스나 보물찾기는 결국 범죄의 현장이거나 고된 노동의 결과임을 안다. 발굴 현장에 참가(본인은 참가라 했지만 아무리 얘기를 들어봐도 단순 아르바이트)했던 친구의 말로는 순전히 육체노동이라 했다. 그리고 철저한 계급이 있는데 고참이고 관리자일수록 발굴도구가 가벼워진다고 했다. 친구처럼 초짜나 아르바이트생은 삽을, 전문가일수록 붓이나 솔 같은 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고. 내가 직접 참여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진실인지 아닌지 전혀 모르겠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군복무를 한 친구도 비슷한 증언을 했으니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겠지만, 그 친구들이 과장을 했을 수 있다. 어쨌든 고고학에 대한 개인적인 이미지는 고된 육체노동이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경주나 로마와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발굴 현장은 험한 곳에 위치한 경우가 대부분이니 당연한 결과다.
학생시설 답사 중에 유적 발굴현장을 먼발치에서 바라본 기억이 있다. 희미하지만 그때 느낌은 마치 재개발 현장 같았다. 자연의 모습은 파괴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어떤 규칙성은 있었다. 네모 반 듯 한, 건물이나 유적이 있었던 흔적에 따라 땅은 참호와 같이 가지런히 헤집어져 있었다. 저자는 고고학은 이 파괴의 행위가 있어야만 유물을 찾을 수 있고, 과거의 사람들을 불러낼 수 있다고 말한다. 역사도, 고고학도 멸망과 파괴를 공부하지만, 고고학이 좀 더 직접적이다. 파괴와 멸망의 흔적을 공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고고학은 인간의 흥망성쇠와 그 운명을 같이하는 학문이(p.642)”라 정의한다.
고고학과 역사학은 서로 유기적인 학문이다. 사실상 서로 떼어낼 수 없다. 개인적으로 역사학보다 고고학이 더 흥미롭다. 배워보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아마도 ‘상상력’의 범위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새로운 발견 앞에서 최대한 상상력을 억제하고 최대한 논리적으로 생각해야 한다.(p.547)”지만 “실제 유물을 앞에 놓고 있으면 없는 상상력도 일어나기 마련(p.547)”이라고 고백한다. 그만큼 상상력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더 크다. 따지고 보면 영상보다 문자의 빈 공간이 더 넓다. 문자보다 유물의 빈공간이 더 크다. 빈 공간의 넓이만큼 상상력이 발휘될 여지가 많다. 역사가 그렇듯 고고학도 유물과 유물 사이를 더 그럴싸한 상상력(가설)로 채워나가야 한다. 물론 그 사이를 역사학보다 좀 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신기술들을 통해서 메워나가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고고학이 역사학보다 더 어려운 학문일 수밖에 없다. 상상력이 많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만큼 간극이 크다는 말이다. 간극만큼 오랜 시간을 헤매어야 한다.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그렇기에 과거를 연구하지만 미래를 바라본다고 말한다. “고고학이 다른 어떤 학문보다 미래를 지향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자료로 과거들을 공부하기 때문이다. 고고학이 미래를 지향하는 학문인 이유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고고학은 더욱 더 진보할 수밖에 없기 때문(p.629)”이라고.
역사학과 고고학은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 결국 “고고학이 보물찾기가 아니라 유물을 통해 사람을 찾아내고, 그 사람들이 우리와 다를 것 없는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소중한 깨달음(p.649)”을 얻는 길이다. 고고학이 그러하듯 역사학도 그러하다. 결국, 우리가 어떠한지를 배워가는 것이다. 결국 인문학은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사람을 배워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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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는 모은 땅 속에 있어야 하지만 머리는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훨훨 다녀야 하는 사람이다. 세상의 모든 경우의 수를 꿰고 있어야 하고 상상력이 풍부하여 끊임없이 가설을 만들고 검증하는 만능학자이기도 하다. p.7
고고학의 매력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바로 유물을 통해 죽어 있는 과거에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고학적인 연구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그 유물들이 원래의 기능을 잃고 땅속에 묻혀야 합니다. 즉,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죽고 난 다음에 고고학자들은 다시 그들을 꺼내어 부활시킵니다. 생동감 있는 삶의 모습을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하는 셈입니다. p.18
우리의 과거에 대한 기억은 죽음으로 수렴이 되어 망각이 되고, 망각되어(p.20)버린 기억은 다시 유물이라는 몸으로 부활합니다. 고고학자에게 유물이란 다시 살아난 기억의 편린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고고학입니다. p.21
무덤은 죽음이라는 원초적인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죽음이 다시 태어나는 황홀한 경험의 장으로 만들었다. 사람의 죽음이라는 가장 꺼리는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무덤을 만들고,(p.54) 그들을 기억하는 제사를 마치 축제처럼 지냄으로써 고대 사회는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 무덤에는 이처럼 인류의 생존 비결이 담겨 있다. p.55
무덤 하나하나는 곧 내세에서의 복을 기원하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 산 자가 남긴 마지막 사랑이다. p.55
로버트 던바는 요리를 통해서 인간에게 필요한 사회적인 시간을 충족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불을 통한 요리의 사용은 이렇게 복합적으로 인간의 진화에 작용하고, 인간의 사회성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p.96
재를 보면서 불을 느낀다는 것은 얼핏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고고학자가 발굴하는 유적은 마치 타고 남은 재와 같다. ... 지금 남은 것은 불을 태운 흔적과 재뿐이다. 하지만 그 불의 흔(p.99)적을 가진 흙들을 발굴하다 보면 그 위에서 벌어진 수많은 의식, 요리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p.100
중요한 것은 화려한 겉모습이 아니라 자기 안의 뜨거운 열기를 꺼드리지 않는 것이다. 불과 재는 둘 다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다. 단지 형태만 다를 뿐이다. 내 안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여겨질 때, 재 속을 헤집듯 자기 안을 천천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될 때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된다. p.103
이 자그마한 뼈로 만들어진 인삼 채취(p.144) 도구는 발해사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주요한 단서이다. 역사를 보면 발해는 추운 극동 변방 지역의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지역은 최근까지도 사람들이 살기 어려울 정도로 험한 산악 지역이다. 이런 곳에까지 왜 발해가 진출했을까 하는 궁금함은 바로 경제가치가 높은 물품들(인삼, 모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 사소한 유물들이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p.145
지식이라는 것에 사유, 성찰 그리고 자기의 절제가 더해져야만 지혜는 생겨난다. p.171
음식에 대한 탐닉은 단순히 먹는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진화를 이끄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p.293
진화인류학자들은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서로의 몸을 쓰다듬는 과정은 중요한 요소였음을 지적한다. 특히 로버트 던다는 이러한 행위를 ‘그루밍’으로 규정짓고 인간 역시 서로를 어루만지고 느끼는 과정에서 사회적인 유대를 키웠으며, 여기에 음악과(p.351) 언어가 더해지면서 현대 인류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p.352
고고학자들은 발굴을 ‘수술 자국이 작을수록 좋은 외과수술’에 비유하기도 한다. p.391
문화재 조사의 핵심은 ‘불가역성’, 즉 한번 발굴한 것은 되돌릴 수 없다는 데에 있다. p.404
상처 입은 조개가 진주를 만든다는 속담이 있다. 고고학도 그러하다. 과거의 유적이 파괴되어 우리에게 그 속살을 보여 줄 때 비로소 우리는 과거인들의 모습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 상처를 당연시하고 발굴에만 급급하게 된다면 후대에 물려줄 유물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p.406
다른 사람의 행복을 침해하여 이득을 얻으면 그 욕심에 편승한 또 다른 개인이 등(p.426)장한다. 그 개인들이 모이고 모여 집단이 되고,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맹목적인 광기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단순히 하나의 거대한 이념으로만 집단 이기주의를 판단한다면, 그것은 언제든 다시 출현할 수 있다. p.427
전쟁과 고고학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파괴를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전쟁이 현(p.429)실 사회의 구조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고고학은 지층의 구조를 파괴하여 그 속에 있는 유적과 유물을 꺼낸다. 전쟁은 서로를 파괴하는 행위를 통해서 새로운 사회의 질서를 부여한다. 고고학은 땅을 파헤쳐서 자연에 숨어 있는 유적과 유물을 꺼낸다는 점에서 유적을 파괴한다고도 볼 수 있다. 전쟁에서 승자가 그 이후의 세상을 재편하듯이 유적을 파괴하고 그 속의 유물을 꺼내서 과거를 다시 재편하는 고고학자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서로 닮아 있다. p.430
너무나 많은 전쟁의 과정이 자신들의 논리에 맞게 일방적으로 서술되었다. 고고학을 동원해서 그 과정들을 객관적으로 남겨 놓는 것이 필요하다. 수백만 명이 쓰러져간 그 과정을 어떻게든 기록해서 전하는 것은 우리 고고학자들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p.471
우리 주변에 사라지는 것들은 너무나 많다. 이 시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생겨나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때문에 우리는 소비할 뿐, 남기거나 간직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이어져야 하는 건 이어져야 할 이유가 있는 법이다. p.481
“문명이란 어둠과 혼돈의 깊은 바다위에 떠 있는 얇은 얼음장과 같다.” - 위너 헤어초크(독일 영화감독) p.483
인류 역사의 원동력은 과거 익숙해진 것과의 결별에 있었다. 지리나 환경의 변화를 거부하고 지나치게 이전의 사회나 문화에 집착을 했다면 현생인류는 완전히 멸종되었을지도 모른다. p.484
“조상의 위대함이 나의 위대함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정예푸(중국 인문학자, 작가) p.507
고고학자들의 어떠한 주장이든 유물에 기반이 되어야 한다. 고고학자에게 진실은 유물에서 시작해서 유물로 끝난다. 고고학자들은 새로운 발견 앞에서 최대한 상상력을 억제하고 최대한 논리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사실 실제 유물을 앞에 놓고 있으면 없는 상상력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유물을 두고 논리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고고학 유물의 가변성에 있다. 문헌을 주로 연구하는 역사와(p.546) 달리 고고학이 대상으로 하는 유물들은 매일 새롭게 쌓인다. 언제나 고고학자들의 주장을 뒤엎는 새로운 발견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한두 개의 발견으로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험하다. p.547
고고학자에게 명성은 마치 헤엄치는 고래와 같다. ... 너무 오랫동안 수면 밑에 있어서도 안 되지만 수면 위에 계속 머물러서도 안 된다. p.547
많은 사람들은 고고학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역사를 밝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고고학의 목적은 역사 기록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과거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밝히는 것이다. p.572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다 공짜야. 그걸 눌릴 줄 알면 부자인 거야.” p.627
고고학이 다른 어떤 학문보다 미래를 지향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자료로 과거들을 공부하기 때문이다. 고고학이 미래를 지향하는 학문인 이유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고고학은 더욱 더 진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p.629
기술이 발전하면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있(p.641)어야 할 인력이 줄어들 가능성이 존재한다. 때문에 현대의 고고학자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부여되는 것이다. 고고학자로서의 안목과 식견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의 본연의 목적인 ‘과거의 유물을 통해 사람의 본질을 연구하는 것’에 더 집중해 사유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사람을 연구하는 고고학의 진정한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p.642
고고학은 인간의 흥망성쇠와 그 운명을 같이하는 학문이다. 인간이 생존을 거듭하며, 자신의 현재와 과거를 느낄 수 있는 지각이 사라지지 않는 한 고고학은 이어진다. p.642
고고학이 보물찾기가 아니라 유물을 통해 사람을 찾아내고, 그 사람들이 우리와 다를 것 없는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소중한 깨달(p.649)음을 여러분께서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책을 펴냅니다. p.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