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문화를 과학적인 시선으로 분석하는 책입니다. 서가명강 시리즈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배울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홍성욱 저자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철학, 세계, 사고관을 알 수 있고 또 이를 통해 제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견해를 곱씹어 볼 수 있었어요. 도서를 읽고 나서 좋은 문구나 구절을 곱씹고, 인상 깊은 부분을 메모하는 것을 즐겨하는데 그럴 거리가 많은 좋은 책이었습니다.
과학을 일상에서 배우는 방법!
크로스 사이언스는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이자 소통하는 과학기술학자, 홍성욱 교수의 교양과학 강의를 바탕으로 한 책으로 서가명강시리즈 두번째 책입니다. 과학이라는 분야를 알고는 싶으나 어렵다는 선입관을 갖고 있었는데 쉽고 친근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공각기동대〉 등의 영화와 <프랑켄슈타인>, <멋진 신세계> ,<1984> 등 우리가 읽었던 현대의 고전들 속에 숨겨진 과학의 쟁점과 색다른 시선을 발견하게 됩니다. 과학을 학교에서 공부할 때처럼 복잡한 이론과 공식을 달달 외워서 배우는 것이 아닌 우리 삶과 문화, 작품 속에서 발견하고 융합적 사고력을 높여주고 과학과 대중문화의 크로스 cross 교차가 된다는 흥미로운 책입니다.
p.163 1984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결국 전체주의, 그 당시의 독일이나 소련 같은 국가에서 볼 수 있었던 전체주의적 정부의 위험성, 사고 통제의 위험을 강조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여기에서는 미디어를 믿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책이 쓰인 1948년이라는 시점이 컴퓨터나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기 이전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보통신기술이 고도로 발달했을 때 그것이 감시의 테크놀로지로 사용될 수 있다는 미래 전망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 통찰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 보이지 않는 빅브라더가 당신을 보고 있다:
p.242 영화 〈공각기동대의〉 주인공 쿠사나기는 사람이 사람이기 위해서는 굉장히 복잡한 많은 것들이 필요하듯이, 사이보그인 자신도 진정한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는 얼굴과 목소리, 눈 뜰 때 응시하는 손, 어릴 때 기억, 미래에 대한 예감, 방대한 정보, 넓은 네트워크 등등. 그녀는 이런 것들 전부가 사이보그인 자신의 일부이면서 자신의 의식을 만들어낸다고 보았던 것이다. 즉 자신과 같은 사이보그도 인간만큼 복잡하게 자기 조직화 과정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사람과 마찬가지로 영혼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 것이다.
- 사이보그는 인간인가 기계인가
플랭클린은 하늘에 얇은 쇠줄로 된 연을 날려서 그 연줄을 통해 전기를 끌어 당겨서 일종의 축전지인 라이덴 병에 담습니다. 이 발견은 현대 피뢰침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프랑켄슈타인의 소설의 모티프가 된 첨단과학 우리가 과학과 대중문화의 결합 cross 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과학이 사실만을 다루지 않고, 인문학이 가치만을 다루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상 생활과 과학은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한번 다시 생각해 보는 책이었습니다.
크로스 사이언스는 책 제목처럼 한줄평으로 '문이과 통합의 책'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을 통해 정확한 과학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그 시대상과 관련된 지식과 편견 등 여러 견해에 대해 알 수 있는 책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문학과 과학을 분리하여 생각하며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문과와 이과로 나뉘는 현재를 봐도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그러나 여러 과학자들의 학문적 성과에 자연과학적 지식 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지식과 자질이 커다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으며 우리는 인문학적 지식과 자연과학적 지식의 융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대한 이분법적 구분이 아니라 두 영역간 균형잡힌 발전과 교류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인상 깊은 책이였습니다.
리뷰를 쓰지 않는 편이지만, 이 리뷰를 쓰기 위해 블로그를 개설했다.
이 책은 과학만!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학!만 얘기하는 것도 아닌,
진정한 문이과의 융합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에 알고 있었지만, 조금 아쉬운 부분들에 대해서 과학적인 지식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고,
특히 그 시대상과 관련된 지식들을 알 수 있어서 너무 유익했다.
앞으로도 이런 책들이 많이 출판되었음 한다.
뼛 속까지 문과생인 저는 과학 관련 서적은 물론 기사, 뉴스, 다큐멘터리 등 과학관련 컨텐츠와는 담을 쌓고 지내왔습니다. 그저 사업적 필요에 의해 IT 기술에 대해 사업적 관심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정확히 이야기 하면 유시민 작가의 공감필법이란 책을 읽으면서 독서와 지식 탐구에 편식이 있어서는 안되겟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화학과 생물 교과서 이후 과학과는 담을 쌓았던 처지라 처음부터 어려운 책을 읽을 생각은 하지 못했고, 가볍게 읽을만한 책을 찾던 중 이 책 "크로스 사이언스"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이 책 속에서 영화 속에 등장한 과학자에 대한 이미지를 통해 일반인들이 과학자들에게 가지고 있는 편견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과학의 발전이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아니면 불행을 키웠는지, 다윈의 진화론에 기반한 우생학을 통해 과학이 사회의 지배적인 질서 구축 및 유지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등에 대해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과학은 사실, 인문학은 진실을 추구한다는 이분법적 사고의 오류에 대해 지적하며, 과학 역시 예술 못지 않게 인간의 상상력에 기반하여 발전을 이루어왔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 견해에 대해 개인적으로 크게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애초 인류의 학문은 과학, 철학, 문학, 역사 등으로 구분되기 이전 철학이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들은 순수한 인문학 위주의 철학자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아우르는 철학자이자 과학자, 수학자, 예술가였습니다. 인간과 자연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유적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과학과 인문학을 구분이 없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이 알아야 할 지식에는 인간 자신과 그를 둘러싼 자연과 우주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학문은 인간이 가진 호기심과 상상력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호기심과 상상력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인류의 문화, 문명의 발전도 없었을 것입니다. 애초 단일한 뿌리에서 출발한 인문학과 과학은 인간의 지적 능력의 발전에 따라 세부적인 분야로 분화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분화가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인문학과 과학 사이에 커다란 장벽이 쌓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류 사회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과학자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학문적 성과에 자연과학적 지식 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지식과 자질이 커다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폰을 개발한 스티브 잡스는 엄청난 인문학적 지식을 갖고 있었고, 그 자신이 인문학적 지식을 쌓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인문학적 지식과 자연과학적 지식의 융합이 왜 필요한지 알게 해주는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이과와 문과를 분리해 진로를 결정합니다. 인문학 경시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많은 학생들이 이과를 선택합니다. 사회진출에 유리하다는 실용적 판단 때문입니다. 대학에서도 취업이 안된다는 이유로 인문학을 다루는 학과를 폐지하기도 합니다. 융합이 필요한 시점에 편중이 심화되는 분위기입니다.
자연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원초적인 학문적 호기심과 상상력에서 출발했다는 작가의 생각에서 출발해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대한 이분법적 구분이 아니라 두 영역간 균형잡힌 발전과 교류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과학의 문외한인 제게 대중문화 속에 나타난 과학적 사실, 그러한 과학적 사실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흥미롭게 이야기 해준 책 "크로스 사이언스"였습니다.
이 책은 서울대 학생들이 듣는 인기 강의 ‘서가 명강’ 시리즈 중 두 번째 책이다. 저자는 『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 『그림으로 보는 과학의 숨은 역사』,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 등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다양한 매체로 소통하는 과학기술학자다.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이라는 용어가 좀 생소하게 느껴졌다. STS는 과학기술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규명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사회가 과학기술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그 내용과 방향을 어떻게 바꾸는지 반대로 과학기술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분석한다는 것이다.
1부 대중문화와 과학의 크로스
2부 세상과 과학의 크로스
3부 인간과 과학의 크로스
4부 인문학과 과학의 크로스
크게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학작품이나 영화 등을 통해 나타난 과학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이해하기 쉬웠다. 각 장의 주제를 보더라도 과학은 우리와 동떨어지지 않으며 일상의 문화 속 어디에나 스며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전이 된 『프랑켄슈타인』을 언급하면서 그동안의 과학자의 이미지가 미쳤거나 괴짜로 굳어지게 된 사례를 이야기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자신의 피조물을 만들어내고 결국에는 그 피조물로 인해 곤란을 당하게 되는 이야기다. 새로운 지식을 발견한 대가로 고통을 당하는 ‘현대판 프로메테우스’라는 평을 받기도 했으며 차후 과학자의 이미지로 굳는데 일조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수많은 작품이나 영화에 정형화된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신의 영역에 도전한 인간이 자신의 피조물, 즉 지식을 얻은 후에 어떻게 사용 하였는가 등 인간의 책임감이 중요하다는 것을 들고 있다.
2부에서는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변화되는 사회의 모습을 여러 작품으로 이야기한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한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결과 일어날 수 있는 변화를 보면 그다지 환영할 수만은 없는 것이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사회의 불평등을 야기하고 세상을 양극화 시킬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어 한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나오는 세상은 과학기술의 발달이 아니어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인간에게 필요한 자질로 덕(德)을 내세운다. 반면 100년 후에 나온 프랜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에서는 과학기술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어서 흥미를 끌었다.
이렇게 유토피아를 향한 작품은 꾸준히 나오는데 1888년 미국에서 출간된 에드워드 벨라미의 『뒤를 돌아보면서』에 이르면 이런 시스템이야말로 유토피아가 아닐까 싶었다. 빈부가 없기 때문에 사회적, 정치적 갈등이 없고 범죄가 없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런 미래상을 이야기하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사람들의 핀잔 속에서 잠에서 깨어나며 소설은 끝난다는 이야기다. 이런 유토피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시스템이 작동되어야 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디스토피아적 사회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고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전체주의와 닮은 모습이라고 했다. 『1984』, 『멋진 신세계』에서 이야기하는 디스토피아를 피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하고, 지금껏 어떤 길을 밟아서 여기에 왔는지, 즉 우리의 과거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로써 자신이 누구인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속한 세상이 미래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에 대한 통찰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또 우리의 풍성한 언어를 지키고 언어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3부에서는 과학의 혁명의 시대에 인공지능이나 로봇의 역할과 그에 따른 인간관계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크리스퍼(CRISPR)는 ‘유전자 가위’로 이해하면 되는데 유전자에서 원하는 부분을 잘라낼 수 있는 기술을 말한다. 병을 유발하는 특정 유전자를 잘라서 비활성화 하면 그 병의 진행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이런 기술이 발전하게 된 계기는 바이러스와 박테리아 연구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박테리아는 처음 공격한 바이러스의 DNA조각을 기억하고 있다가 나중에 똑같은 것이 공격하면 그 바이러스의 DNA조각을 잘라버린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기술적 방안을 고안해 냈다고 한다.
사이보그 인간과 로봇이 등장하는 영화로 보여주는 미래의 모습은 좀 두렵기도 했다. 인간과 초지능의 중요한 차이를 말하는 부분에서 섬뜩함이 느껴졌다.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랑, 명예, 우정, 행복 등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인간처럼 진화를 거친 것이 아니라 기계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말이다. 하지만 사이보그의 고전이 된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예를 보면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을 살려주고 인간다운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으로 나온다. 4년으로 설정된 수명을 연장하고 싶어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목적 달성을 한 후에는 그냥 아무런 죄책감 없이 버려도 되는 것인가, 인간의 이기심은 아닐까 생각되었다. 여러 영화 속의 과학과 만나면서 과학을 소재로 한 영화에 관심이 생겼다.
마지막 4부는 인문학 속에 들어있는 과학의 이야기다. 전기, 전차, 활동사진 등이 들어오면서 작품에 많은 소재로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무정』, 『경성 유람기』, 『술 권하는 사회』 등 여러 작품이 언급되고 있다. 처음엔 어두운 밤을 밝히는 신기한 것으로 묘사되다가 나중에는 개인과 사회에 비싼 대가를 요구한다는 생각이 나타나며 그렇지 않아도 힘든 식민지 일상의 불편함이 문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으로 묘사된다. 보통 과학은 사실에 근거를 두면서 다소 차가운 느낌이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과학에도 상상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루트번스타인의 『생각의 탄생』에서는 노벨상 수상자를 연구한 이야기의 사례를 언급하고 있다. 노벨상 수상 과학자들 중에는 사진, 음악, 미술, 공예, 작가 등 거의 대부분이 한 가지 예술에 준 전문가적으로 깊게 몰입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창의적인 과학자일수록 예술을 병행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보여 주며 이는 과학이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활동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했다.
‘푸른 구슬’이라는 지구의 모습을 담은 사진 <블루 마블>을 보면서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완전히 바꾸게 했다고 한다. 멀리 떨어져 보면 우주 속에 작은 점 같다는 지구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웅다웅 살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과 인문학의 결합은 나를 둘러싼 조건들을 이해하고, 그런 조건들 속에서, 또 그런 조건들을 이겨내고 극복하는 적극적인 삶을 위해서 필수적인 일이다.’(P345)
문학 작품과 영화 등 다양한 문화 속에 들어 있는 과학이야기를 읽으면서 과학은 결코 어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 장마다 궁금한 내용에 대한 QA가 있는데 마지막에 나온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대중문화로 과학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주의할 점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영화나 문학에 나오는 내용을 사실이냐 아니냐에 가치를 두는 것보다는 여기서 무엇을 전하려는 것인가, 그 메시지를 파악하며 고민하는 것이 훨씬 의미 있다는 것이다. 다가오는 시대의 변화가 두렵기도 하지만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과학의 연결점을 이야기하는 책들이 자주 나오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자세는 우리에게 필요한 몫이라는 것을.
한여름 <프랑켄슈타인>을 재독하고 테드 창을 읽을 생각에 자료검색을 하니 이 책이 검색되었다.낯설고 어려운 과학을 교양의 눈높이에 맞춘 터라 흥미롭게 읽었다. 정재승의 <열두 발자국>만큼이나 유익한데, 편집이, 다시 말해 전체 구성과 흐름이 연결성이 없어 좀 아쉽다. 전문영역을 대중 독자의 관심에 맞춰 말하는 것에는 높은 점수를 주지만 반대로 전공심화과정(층)이 얇아지고 약해지는 건 안타깝다. 스스로 알아보고 파고드는 공부보다는 누군가 포인트를 잡아 먹여주는 학습에 길들여지는 것 같아서다. 언제부턴가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 학문과 지식은 폐쇄적이고 무익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아예 안 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면서도 염려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정보가 흔하고 접할 기회가 용이하다 보니 어떤 갈망이나 호기심이 줄어드는 것 같다.
유독 소설에 ‘미친 과학자’의 이미지가 많은 데에는 갑작스런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두려움이 투영된 것이면서 동시에 과학을 다루는 사람의 책임 있는 윤리의식과 성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에 동의한다.
사실 과학자에 대한 신격화를 문제시하는 부분에서 굳이 많은 사례 중 몇 안 되는 여성 과학자를 언급해야 했는지 납득이 잘 가지 않았다. 딸이 기록한 전기에는 딸의 ‘문학적 상상력’이 가미되어 퀴리 부인의 실상이 폭로되는 대신 여신화되었다고 지적하는데 어디 이런 문제가 그만의 경우겠는가 싶은 것이다. 저자의 설명을 들으며 오히려 남자 파트너가 같은 분야에 종사하지 않을 때는 빛을 보기 힘들고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사정이 더 안타까웠다. 미망인인 퀴리 부인이 유부남 제자와 바람이 나고 남편과 사별 후 감정 격발이 잦고 따뜻한 엄마가 아니었던 것이 다른 점보다 우선적으로 다뤄져야 하는지 불만이 일었다. 물론 저자가 과학자도 영혼과 육체를 가진 인간임을 강조하고자 빗댄 점은 잘 안다.저자의 생각을 전개함에 있어 여성주의적 시각과 젠더 감수성이 고려되었더라면 더 열린 글이 되었을 것 같다.
그의 논지 중에 차이를 내세워 위계와 경계를 짓는 과학(사)은 ‘사이비 과학’이라는 정의가 크게 와닿았다. ‘신중한 과학’은 “‘인종의 자연적 차이, 인간성과 지능의 유전적 차이, 고정된 성차에 대해서 회의적이다(117).” 그리고 다른 나라와 달리 4차산업혁명을 남용하며 교육 시장화하는 강박 현상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인력으로 지탱해온 국력인지라 대량해고의 바람이 두렵고, 경쟁하지 않으면 이미 불안한 사회로 옮아간 뒤이다.
저자가 유토피아 소설과 디스토피아 소설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전자는 예전부터 있었고 후자는 근래에 쓰인 장르라는 사실에 놀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트럼프 대통령 집권으로 미국에서 조지 오웰의 <1984>가 다시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는 언급에 우리 사회의 가짜뉴스와 이상한 당파 논리가 떠올랐다. 진리부의 역사 조작과 당의 전체 슬로건, 그리고 집단행동으로 내보는 행태가 어딘가 익숙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은 생각하고 사랑할 시간과 역사의식과 언어감각을 박탈하기 위해 유해한 사람들이 내지르는 무식함과 옹졸함이다.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하고, 지금껏 어떤 길을 밟아서 여기에 왔는지, 즉 우리의 과거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그래야 내가 누군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내가 속한 세상이 미래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186).
인간의 감정도 약물로 조절 가능한 시대이다.인간의 존엄과 선택권이 유전학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뒷전으로 밀려나는 상황이기도 하다. 스마트폰과 연결되지 않고는 세상과 차단된 듯해 영 불안하다.인간은 자연스레 사이보그화되면서 복제인간에 대한 거부반응은 드세고 이해과정도 부족하다. 영미문학을 전공하며 회의주의가 깊어지고 모든 걸 결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어느덧 강했다. 그런데 요즘 읽는 책들에선 저당잡히지 않는 희망과 기쁨만이 온전한 자유라고 말한다. 저자도 우리 운명은 유전자로 결정되지 않기에 유전적 차별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설파한다. “결국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실천을 하고,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라진다(218).” 과학철학자인 그는 인간의 이성과 상상력을 온전히 믿는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반란을 일으키며 인간사회를 교란하는 로봇이다. ‘인간친화적’이지 못한 기계에 대한 공포가 지배적이다. 인간사회는 짝짓기와 자식 번창을 중심으로 이어져왔다. 서로 협력하고 공감하며, 사랑, 명예, 우정, 행복 같은 인간적 ‘가치’를 중시한다.이 때도 인간과 동물, 인간과 로봇이라는 상하질서가 밑바탕에 깔려있다. 하지만 인간은 코스모스 우주를 놓고 봤을 때 ‘푸른 구슬’ 지구에 사는 작은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과 인문학이 상호보완적으로 공존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삶이 사실(과학)이나 가치(인문학)로 분명하게 쪼개지지도 않거니와 한쪽에만 의존해선 똑바로 세상을 읽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인간 세상에는 완전히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없고, 차이를 이해해야 하거나, 혹은 조금 더 옳고 덜 옳은 정도만 가릴 수 있는 문제투성이기 때문이다(318).”
저자의 말대로 과학은 예술을 머금고 교유한다. 언젠가 나올 법칙과 이론을 먼저 발견한 게 아니라 머릿속으로 ‘공간’을 만들어 ‘조건’을 찾아낸 것이다. 과학은 이전에 없던 것을 발명하는 창의적인 활동인 것이다.그의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이 일으킨 사실과 가치 변혁에 대한 설명 때문인지 최근에 읽은 단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낭만적 허영이 아닌 신비로운 현상(풍경)으로 달리 보인다. 다른 무엇과의 접촉으로 인해 서로를 당기며 형성하는 빛을 음미하면서 물질에 드리운 빛의 형체를 가늠할뿐더러 항상성을 유지하고자 멀어졌던 그것이 있어 실상은 삶의 균형이 가능했음을 빛의 소멸로 비로소 알게 되는, 한 여인의 암흑물질인 우주가 시야를 덮친다.
서울대 명강의를 책으로 읽을 수 있다.
서가명강 시리즈 중 2번째로 출간된 크로스 사이언스
팟캐스트로도 들을 수 있다는데 들어보지는 않았음.
국제도서전에서 보고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예스24에서 책 사면서 한권 함께 구입했다.
소통하는 과학기술학자!
서울대 생명과학부 홍성욱 교수님이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엮어 냈다고 한다.
중간 중간 사진도 들어가있고
과학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더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
몰랐던 내용들을 많이 알게되어 유익했음!
요새 과학, IT하면서도 인문학도 좀 알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풍조가 서려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인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면 잘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살아가는데 교양이란 것을 쌓기 위해 필요하다면서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과학과 인문학 두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책이란 생각이 들어 선택하였고, 읽게 되었다.
책소개를 잠깐 해보자면, 총 4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문학적인 서적과 영화 들에서의 과학적이야기를 찾아 철학적으로 풀어낸 책이다. 그래서 처음엔 프랑켄슈타인, 걸리버여행기, 유토피아, 새로운 아틀란티스, ....., 코스모스에 영화로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옥자, 가타카, ....., 아비뇽의 처녀들, 블루마블 등의 영화를 입혀 다양한 과학적인 이야기를 해주고있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기존에 읽었거나 보았던 책이나 영화가 나오면 매우 집중이 되어 열심히 읽다가 본적없는 책이나 영화가 나오면 마치 추천받는 기분으로 읽게되는 듯하였다. 그리고 각 챕터의 소주제별로 나오는 책과 영화를 기존에 미리 다 아는 작품이었다면 더 즐거웁게 사이언스를 이해하면서 읽을 수 있을 것같다.
그런데 읽다가 읽다가보니 느껴지는 것이 있었으니! 이 책 왜 이리도 강의를 듣는 것만 같은 서술방식인가....? 싶었다. 4부 <모던보이의 눈에 비친 기이한 과학>을 읽을 때즈음 최고조의 "뭐지? 아무래도 강연듣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이라는 생각이 들어, 책 전체를 두리번 거리며 훑어보았다. 그랬더니 『서가명강』이라는 문구가 보였다. 서가명강은 '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의 줄임말이다. '정말, 강의를 적은 책이 맞았다니!' 이 시리즈는 국내 최고라 불리는 서울대의 교수진들의 다채로운 인문학 특강을 글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겉표지도 제대로 읽지 않고, 그저 '사이언스'란 문구와 '과학과 대중문화의 만남'이란 단어만 읽고 신나 독서를 한 사람의 헤프닝이었다. 네이버와 팟빵, 팟케스트에서 진행하고 있으니 출간된 책보다 먼저 책을 귀로 읽고싶다면 찾아 들어보는 것도 좋은 생각인듯하다. 그리고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은 본 책을 읽고, 1권인 "법의학 교실 《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간다 》"를 찾아 읽어보시고 기다리면 계속 출간이 된다고 하니 기다리면 될 것같다.
오랜만에 즐겁고 지식이 쌓이는 듯한 뿌듯한 느낌이 드는 책이다.
공학도들에게는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고 문학도들에게는 교양과학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크로스 사이언스"에서 홍성욱 교수(서울대 생명과학부)는 이 두가지 모두에 대해서 답하고 있다.
과학은 우리를 둘러싼 문화 속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과학과 인문학은 우리 일상에서 끊임없이 교차하고 있다. 바야흐로 융복합 시대인 것이다. 이 책에서는 영화와 소설 등의 대중문화를 통해 과학과 인문학, 사실과 가치의 얽힘을 읽어내며 과학을 우리 삶의 더 가까운 곳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크로스(cross, 교차)'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학과 현대철학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 저자는 노력한다.
과학의 정점에서 인간의 책임감을 묻는 '프랑켄슈타인'의 메시지가 그러하고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를 통해서 인류의 파멸을 가져오는 미친 과학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전쟁억제력이란 적에게 공포심을 안겨주는 예술이다'라고 인용하며 핵전쟁 전략이 매우 복잡하고 전문적인 것 같지만 결국 그 본질은 치킨게임의 전략이었다고 결론짓는다.
불과 몇 만 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은 문자도 없이, 특별한 재능 없이 자기 몸 하나를 걱정하던 존재였는데 이제는 자그마한 플루토늄 폭탄 하나로 도시 하나를 날려버리는 기술을 소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문명 발달과 달리 인간이 가진 야만성은 조금도 순화되거나 성숙해지지 못해서 지금도 인간은 여전히 사람을 고문하면서도 재미를 느끼는 존재도 타락해 있다. 인간의 지혜는 기술 발전에 걸맞게 발전하지 못했으니, 몸은 성인이고 머리는 아직 어린아이 같은 것이다.
고문을 즐기면서도 카메라를 잘 만드는 사람들, 덩치는 산만큼 커졌지만 마음은 아직도 유치한 사람들 등.
불과 17세기에는 데카르트의 후예들이 '첨단과학'이라고 포장하면서 "무감각하게 개를 때렸으며, 개가 고통을 느낀다고 하면서 개를 불쌍하게 바라본 사람들을 비웃었다"고 한다. 또한 데카르트의 철학을 수용한 프랑스 철학자 니콜라 말브랑슈는 "동물들은 기쁨이 없이 먹고, 슬픔을 느끼지 못하고 울며, 아무것도 욕망하지 못하고, 겁도 없고, 아무 것도 모른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일부러 개를 걷어차곤 했는데, 개가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고 측은해하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개들이 고통을 전혀 못 느낀다는 것을 몰라?"라고 대꾸했다고 하니 때로는 과학이 인간적인 육감 만도 못했던 시기도 있었다.
영화 <카타카>를 소개하면서 '유전자는 결코 운명을 결정짓지 않는다'라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언젠가 '캐나다의 이력서에 없는 것'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며 우선 캐나다에서는 이력서에 사진을 안 붙이고 그러다보니 지원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흑인인지 백인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또 나이를 쓰지 않는다. 많은 경우에 나이는 취직한 이후에도 비밀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차별당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카타카>에서 빈센트가 청소를 그만두고 우주인이 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계기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 계기는 동생과의 수영 경주에서 동생을 이긴 사건이었다. 왜 이길 수 있었을까? 빈센트는 돌아올 힘을 남겨두지 않고 전력을 다했고, 결국 이 경기에서 동생을 이겼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빈센트는 유전적으로 100퍼센트 결정되는 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화는 이렇게 유전적으로 약하게 태어났어도 노력에 의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유전자가 우리 미래를 결정하는 게 아니듯, 우리 사회의 미래 역시 유전자 결정론이 지배하는 미래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결국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저자는 시민들이 어떻게 하면 다양한 과학 활동, 과학 정책, 과학 문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이런 문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끔 만든다.
과학은 현대사회의 종교다. 과학만큼 현 시대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없다. 과학적 방법론은 본래의 범위를 벗어나 사회과학, 인문학까지 영향을 미쳤다. 행정, 문화, 교육 등 전반적인 문명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과학이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는 데는 자기 수정 기능이 큰 힘을 발휘했다. 우리가 잊고 살지만, 과학 이론은 진리가 아니다. 이론은 가설에 불과하고 반증을 통해 언제든지 뒤집어 질 수 있다. 흔히 말하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생긴다. 이러한 가변성이야 말로 과학의 큰 장점이다. 이것이 가능 한 이유는 과학의 대상이 객관적인 자연 현상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특정 조건을 반복해서 실험할 수 있다. 반면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인간사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특정 조건을 만들 수 없고, 반복해서 실험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자기 수정 기능에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방법론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도입되었다. 경제학의 경우에는 합리적인 인간을, 역사학에서는 역사 진보의 법칙과 같은 것들을 가정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은 반복되고 자기수정을 할 수 없기에 왜곡을 낳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과학의 대상과 달리 객관적인 현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이론들은 현실과 자주 괴리된다. 과학적 방법론의 무리한 적용이 다양한 폐해를 야기한다. 경제학의 경우에는 대공황과 같은 경제 불황 등이 대표적이다.
<크로스 사이언스>는 다르다. 과학적 방법론을 무리하게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사고방법, 관점을 적용한다.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통해 기존의 학문들을 색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과학자가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통해 대중문화를 바라본 이야기’ 정도면 책의 소개로 아주 적합할 듯하다. <프랑켄슈타인>, <유토피아>, <1984>. <로보캅>, <블레이드러너> 등 우리에게 익숙한 문학과 영화로 과학적 이야기를 풀어 간다. 어렵지 않고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과학에 대해 가진 오해와 주의할 점을 알려준다.
과학이 아무리 객관적 현실을 분석하고, 합리적이라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과학자 역시 인간으로서 다른 일반사람과 같은 한계를 지닌다. “너무나 당연하게, 그래서 과학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결과물이다.(p.90)” 그렇기에 과학자가 누구냐에 따라 파괴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차별을 낳(p.93)”고 “차별을 정당화(p.105)”한다. 그 결과 우생학은 대량 학살의 근거가 되었고,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 해주기도 했다. 이러한 흔적은 아직도 세계 곳곳에 남아 있다. 그리고 “지금도 과학의 이름으로 우등과 열등을 나누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p.129)”
종교는 우리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말한다. 과학이 새로운 종교가 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종교와 달리 과학은 끝없는 검증과의 싸움이다. 지속적인 자기 수정의 과정이다. 불확실성의 시대 과학은 새로운 종교가 된 이유는, 불확실한 만큼 스스로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수정해가기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검증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한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이론, 세계관을 계속해서 검증하고 잘못되었다면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과학자가 인문학을 통해 우리에게 얘기하고 싶은 마음은 그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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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는 이 전기의 원형을 만든 작가는 누구인가? 왜 그 작가는 위인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와 내러티브를 만들어냈는가? 왜 이런 내러티브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는가? 이런 이야기에서 왜곡되거나 과장된 부분은 없는가? 여기에서 사실과 달리 작가에 의해 삽입된 부분, 아니면 빠진 부분은 없는가? 등등.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면서 전기를 읽는 작업은 인문학적인 해석의 힘을 이용해서 중층적으로 전기를 읽는 독법이다. p.89
이것 한 가지만은 기억하자. 과학자는 남성이건 여성이건, 머리(영혼, 이성)만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몸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과학자 또한 주변의 여러 사람과 다양한 관계를 맺는데, 이 중에는 자신의 연구를 돕고 촉진하는 것도, 연구를 방해하는 것도 있다. 과학자는 이를 이용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를 헤쳐 나가면서 연구를 수행한다. / 보통 여성들이 결혼, 출산, 육아에 시간을 뺏긴다면,(p.89) 이는 여성 과학자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면서 부딪치는 다양한 욕망들과 잘 협상하고 타협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가는데, 이는 (남성이건 여성이건) 과학자도 마찬가지다. 다만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은 과학자에게는 좋은 연구를 하고 싶은 욕망이 매우 크고, 가끔은 그것이 다른 욕망을 압도할 수 있다는 점 정도이다. p.90
과학자는 이성과 감정, 그리고 욕망을 가진 인간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그래서 과학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결과물이다. p.90
과학은 인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과학은 인간을 분류해서 이해하지만, 동시에 이런 분류는 차별을 낳기도 한다. p.93
그렇지만 근대 이후 우리의 역사는 차이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차이가 차별을 낳지 못하게(p.104) 잘 감시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과학의 이름으로 차이를 위계적으로 고정시키려는 시도들에 대해 경계의 시선을 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차이에 대한 소위 ‘과학적인’ 근거를 이용해서 자신의 차별을 정당화해왔기 때문이다. p.105
드 라 샹베르는 ‘자연적’인 것을 찾는 과정에서 동물을 도덕적 서열 중 높은 곳에 있는 존재로 격상시키고 이들을 동물의 놀라운 덕목을 가진 남성의 반열에 놓았지만, 반면 여성은 동물보다도 못한 존재로 격하시켰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가 벌어지면서 남녀 차이가 줄어들었듯이, 동물과 남성의 차이가 줄어들면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벌어졌던 것이다. p.121
지금도 과학의 이름으로 우등과 열등을 나누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p.129
사이비과학은 이런 마음을 비집고 자란난다. 누군가 과학의 이름으로 내가, 한민족이, 한국 사람이 과학적으로 못났다고 한다면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학이 나를, 한민족을, 한국 사람을 잘났다고 하면 이런 얘기는 우리의 허영심을 살살 간지럽힌다. (p.129)
... 새로운 차별은 항상 더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고, 더 은밀하게 우리의 허영심을 비집고 들어오기에 그렇다. p.130
디스토피아에서 허용되지 않는 것들을 가만히 보면, 우리가 디스토피아적 상황을 극복한다든지 혹은 이런 상황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하고, 지금껏 어떤 길을 밟아서 여기에 왔는지, 즉 우리의 과거 역사를 정확(p.207)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누군지, 내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내가 속한 세상이 미래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p.208
우리에겐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나와 내가 속한 사회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그중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실천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p.208
전기의 도입 초기에 문학작품들은 전차, 전등, 활동사진 같은 전기 문물을 새롭고 신기하고 계몽적인 것으로 그렸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들은 식민지적 일상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적으로 바뀌어갔다. 예컨대 초기에 전등은 다 밝은 것으로 그려졌지만, 1920~30년대가 되면 희미한 전등, 쓸쓸한 느낌을 주는 전등, 신경증을 유발하는 전등이 등장하게 되며, 일부 작품에서는 전등이 일제 통치의 결과물이거나 빈부격차를 상징하는 전형이 되었다. p.345
인간은 사실만의 세상에서 살아가지 않듯이, 가치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지도 않다. p.367
과학은 예술처럼 새로운 개념, 존재를 만드는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p.381
과학도 예술도 인간이 하는 창의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창의적인 업적은 많은 지식을 습득(p.382)하고 이를 토대로 다른 사람이 하지 못했던 새롭고 혁신적인 것을 만들어냄으로써 얻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이성과 상상력이 합해져야 한다. p.283
우리는 원자핵 속에 들어 있는 엄청난 힘을 이용하고 있지만, 그 힘을 까딱 사용하면 절멸될 수도 있다. 다른 행성에서 비슷한 생물체가 우리와 같은 과정을 겪었고 과학을 발전시켜서 원자 에너지를 사용하다가 핵전쟁이 발발해서 절멸되었다면, 우주에 왜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고등 생명체가 없는지 이해할 수 있다. 왜 인간이 수십 년 동안 메시지를 보내도 왜 답이 없는지 말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주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성찰하는가에 달려 있다. p.394
문화는 우리가 사고하고 소통하며, 그 결과들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매트릭스와 비슷한 것이다. p.396
서가명강 시리즈는 두번째로 읽는데 이번에도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서울대에서 하는 교양강좌를 일반인들도 누릴 수 있도록 책으로 펴낸 시리즈라고 알고 있는데 서울대 학생들이 부러워지는군요 ㅎㅎ 읽다보니 어? 이거 시험에 나올법한데..? 싶은 것도 있고, 아무래도 수업내용이다보니 학생들의 이해를 돕도록 여러 예시를 드는 게 참 좋았습니다. 특히 인간과 과학의 크로스 챕터가 흥미로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