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안락사..라는 단어들이 먼저 들어온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내겐 죽음은 먼 이야기라고 여겼지만 그렇지 않으며, 누군가를 하나둘 떠나 보내며 담담해진 줄 알았던 마음은 글자만으로도 다시 요동치는 걸 보며 책에서 어떤 감정들로 담겨있을지 궁금하였기 때문이었다.
책에 시작 장면부터 장례식장에서 시작한다. 그렇게 죽음, 이별과 마주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느 날 할머니는 “난 못해도 앞으로 오 년 안에, 나머지 싹 정리하고 개운하게 갈 거야. 마음 딱 먹었으니까, 그렇게들 알고 있어.”라는 폭탄선언을 하신다. 책의 배경은 10년 정도 뒤에 근미래의 대한민국을 다룬다. 그리고 함께 대두되는 문제는 할머니의 폭탄선언과 관련된 ‘안락사’이다. 폭탄 발언 후 안락사는 합법화되고 할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계획하고 준비하신다.
안락사가 합법화된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현실적이다’ 느꼈다. 최근 드라마 ‘의사 요한’에서도 내 몸이 너무 고통스럽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좀 더 편하게 죽는 편은 어떨까 하며 안락사를 택하는 이들이 나오기도 했다. 아 그냥 지나갈 수만은 없는 문제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나의 소신은 안락사를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어떻게구나 짐작해본다.
p.136
“너희 애비처럼 내 새끼들하고 눈 한번 제대로 못 맞추고 허망하게 가지는 말자, 그러려면 내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준비를 잘해야 된다, 거기서 그런 다짐을 했다.”
그 누구도 죽음의 이별을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때론 오랜 마음에 준비로 떠나는 이도 있지만 갑작스럽게 떠나는 이도 있다. 그리고 이는 후회로 남기로 한다. 더 사랑할 걸, 더 표현할 걸, 더 마주할 걸, 덜 투정부릴 걸… 이별에 시간을 알고 있다면 이런 후회들이 줄어들까? 조금이라도 더 편안해질 수 있을까 생각한다.
p.148
“다들 애 많이 썼다. 고맙다.”
그 말을 끝으로 서서히 할머니의 눈이 감겼다.
할머니의 마지막 말,, 이 페이지에서 순간에 적막, 한참을 그 문장을 들여다본다. 다 알지만 그래도 마음에 남는 먹먹함은 어쩔 수 없나보다. 그래도 이 한 마디 정확히 남길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겠는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내 삶에 죽음은 어떠한 모습 일까.
p.130
다음 날 오전, 할머니 집으로 향하기 전에 나는 언니에게 할머니의 메시지를 전했다. 할머니는 우리가 평소 옷차림대로 편히, 가급적 생일잔치에 초대받은 기분으로 와주길 바랐다.
p.138
할머니의 임종 스케줄은 오후 네 시에 잡혀 있었으므로 이별까지 아홉 시간이 남았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셈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편안하게 보내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할수록 긴장이 됐고, 그러자 시간이 몇 배는 빠르게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2018년 환자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면서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연명치료 시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고통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보다 편안한 죽음을 위해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 노인요양원의 운영 실태들이 고발되면서 이제는 잘 사는 것(Well-Being) 못지 않게 잘 죽는 것(Well-Dying)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죽는 순간까지도 인간으로써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닫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사회적으로 활발히 논의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몇몇 요양원의 운영 실태는 충격적인 것으로 요양이라기 보다는 시설격리에 가깝다고 할까? 인간의 존엄보다는 관리의 편리함, 경제적 수지타산을 따지는 것이 앞서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일상생활을 유지할 기력조차 남지 않은 쇠약한 육체로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면,
그 삶을 스스로 종결짓는 것에
타인이 왈가왈부할 수 없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하지만 할머니가 곧 일정을 잡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렇군요.
지쳐 보이시네요. 그럼 안녕히, 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76쪽)
이러한 가운데 아르떼의 ‘작은책’ <안락>은 존엄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일정 연령이 지난 사람이 임종 일정을 정하는 존엄사를 인정하는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단지 허용해야 하는지 허용하지 말아야 하는지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로 전개되기 보다는 존엄사를 준비하는 노인과 그 가족들의 모습을 통해 나라면 이 존엄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나또한 존엄사를 준비할 것인지 고민하게 했으며, 내 가족이 존엄사를 선택한다면 나는 어떻게 하게 될지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할머니의 임종 스케줄은 오후 네 시에 잡혀 있었으므로
이별까지 아홉 시간이 남았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셈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편안하게 보내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할수록 긴장이 됐고,
그러자 시간이 몇 배는 빠르게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138~139쪽)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럽게 떠나는 것보다, 혹은 병원 중환자실에서 기계 장치에 의존해 연명하면서 임종의 순간 가족들과도 함께 할 수 없는 죽음보다는 가족들과 함께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이 존엄한 인간의 마지막길과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 사회에 존엄사가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문제들도 내포하고 있어 향후 10년 내에 법적 요건을 갖출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법적 허용 여부를 떠나서 죽음을 대하는 나의 자세는 달라질 것 같다. 이제까지 죽음이란 애써 외면하고 피해야하는 것이라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할 주제라는 생각이었다면 이제는 죽음이라는 것도 삶의 일부분으로써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한 추억을 반추하며 마무리하는 삶을 위해 당당히 마주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지금까지 인생의 화두였다면 이제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화두가 될 것 같다.
아르떼에서는 소설이 어떻게 삶을 자극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담아내고자 한국 소설전 ‘작은책’ 시리즈를 펴냈다고 하는데, 분명 ‘작은책’으로 분량은 적으나 여운은 길게 남는다. ‘작은책’ 안락은 ‘팟빵’, ‘밀리의서재’에서 배우 한예리가 낭독한 소리책(오디오 소설)으로도 감상할 수 있다.
<안락>을 통해 죽음을 대하는 의연함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싶다.
불편할수 밖에 없는 안락사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2018년을 기준으로 10년이 더해진 조금 먼 미래에, 좀 더 넓은 범위의 안락사법이 통과되어 수명계획을 세울수 있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뇨와 파키슨병을 앓고 있는 여든 다섯의 이금래씨는 안락사 법안의 통과를 코앞에 둔 어느날 딱 오년만 더 살고 개운하게 떠나겠다고 가족들에게 '수명 계획'을 밝힌다.
그녀의 자식들은 충격을 받지만 서서히 그 선택을 받아들이게 된다.
손녀딸 지혜는 특별히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자두로 만든 담금주의 비법까지 전수(?) 받는다.
할머니는 떠나도 담금주는 계속 남아 그녀를 추억할수 있게 만들겠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겠다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누구도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것처럼 죽는 것도 나의 선택이 될수는 없는 것인데.
작고 가벼운 책이 너무나 묵직한 주제를 안겨줘서 리뷰를 몇번이고 고쳐쓰게 만들었다.
은모든 작가님의 책을 주문하고 오는 길이다.
오랜만에 책을 읽으면서 운 것 같다.
스윙스처럼 30분 타이머 해놓고 독서한다고 한지 3일째
하지만 작심삼일도 안되어 어제는 피곤하다고 자버렸는데
오늘 30분 동안 읽으며 안락을 다 읽었는데
눈물이 막 났다.
안락사, 어쨌든 죽음을 소재로하면서 이렇게 어둡지 않게 그릴 수 있구나.
읽기도 쉬웠고 내용이해도 빨리되어
오랜만에 정말 좋은 현대소설 읽은 기분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인터내셔널의 밤은 어려웠는데
은모든 작가님의 안락은 내가 읽기 쉬워서 한 권을 금방 읽어낼 수 있었다.
현실에도 그런 안락사의 법이 제정이 된다면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다.
책을 읽으며 돌아가신 외할머니도 많이 생각 났고
우리 엄마가 그런 선택을 한다면?
나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 하고 싶은가?
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마지막에 할머니가 가족들에게 생일잔치에 오는 것처럼 옷을 입고 나를 찾아주라고 한 것과
모두 모여 즐거운 추억이 담긴 사진을 보고 서로 이야기하고
자신의 마지막을 알고 모두에게 한 마디 한 마디 해줄 수 있는 마지막이
정말 좋고 멋져 보였다.
책 크기는 작았지만 감동의 크기는 매우 컸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아르테 작은책 시리즈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모든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어 매우 기뻤고
그 전의 작품도 더불어 장바구니에 담았다.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아무런 정리도 하지 못하고 맞이 하는 인생의 끝보다
이렇게 시간을 예견해놓고 모든 정리를 마무리 한 이런 삶도 의미있어 보였다.
안락.
그 단어에 담긴 많은 뜻을 헤아려본다.
또한 나는 인터넷에 자두주를 검색해보려한다.
아르테의 작은책 시리즈를 응원하고 싶다.
삶과 죽음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태어난 이후로 언제, 어디서나 찾아올 수 있는 게 죽음이므로.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만은 죽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긴다. 나는 아직 젊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지금 바빠서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하면서. 우리는 왜 죽음을 의식적으로 멀리하게 되는 것일까. 죽음,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일까. 사실 불확실한 것만큼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 나름대로 사후세계를 상상하며 두려워하기도 하고 극락이나 천국을 제시하는 종교에 빠져들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책에는 죽음의 방문을 기다리지만은 않는 사람들이 나온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삶의 마지막 모습을 중히 여기는 이들은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직접 맞이한다. 이는 안락사의 제한 범위를 완화시킨 법이 통과되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으로, 지혜의 할머니도 이에 힘입어 평소 생각하던 대로 안락사를 선택한다. 자신의 병이 심해짐을 느끼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결심을 공개한 날, 가족들의 반응은 예상대로 제각각이다. 반대를 하기도 하고 지지하기도 하며 어느 쪽에도 서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할머니는 그 모든 반응을 덤덤히 받아들이며 주변을 정리한다. 마지막 순간에 결심을 뒤엎는 이가 많다는데 할머니는 어떨까. 정해 놓은 날이 다가올수록 인생의 끝자락에서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은 그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져 가슴이 먹먹해졌다. 용기를 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을 눈앞에 두고 가족들을 한 명씩 바라보는 그 마음이 어떨지, 눈물지으며 할머니를 보내드려야 하는 가족들의 마음은 또 어떨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일보다 살아 있는 동안을 생각하며 삶에 최선을 다하려는 그 마음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계속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에 한해,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결정해야 한다는 제약이 붙기는 하지만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죽음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을 듯하다. 무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 과정으로서 피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그 마지막 선택을 어떻게 하든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예전보다는 더 많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또한 죽음을 떠올릴 때 들던 불안도 다른 감정으로 서서히 변하게 되지 않을까. 다른 이들도 그랬을 테지만 책을 읽는 동안 가족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소설 속의 법이 현실에서도 적용되어 가족 중 한 명이 스스로 죽을 날짜를 정하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것에 기뻐해야 할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에 슬퍼해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내 마음이 어떻든지 그 결정을 헤아릴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소설에서 문학적 감성을 느껴보기 위해 인터내셔널의 밤 다음으로 읽은 은모든의 안락입니다. 인터내셔널의 밤보단 쉽게 읽을 수 있었던, 맥락적으로 이해하 쉬웠던 소설이예요.
■ 안락 내용
이 소설은 안락사 혹은 존엄사를 주제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가깝고 소중한 사람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상실감을 느끼고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괴로운지를 소설의 초반에 그리면서, 소설의 주인공 지혜 외할머니가 당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혜네 엄마를 비롯한 아빠, 언니와 이모들이 다양한 심경을 소설 속에서 보여줍니다. 죽음의 때를 정해놓고 살날이 아직 많이 남은 가족들은 할머니의 부재를 인정할 수 없어하지만 할머니의 결정은 완강합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아주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 느낀점
우리나라에서도 작년 2월 4일부터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었습니다. 연명의료결정법이란 회생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사망에 임박한 환자에게 연명 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법을 말하는데요. 환자 스스로가 연명의료 결정을 내릴 수 있어요. 이 소설에서 할머니가 유럽여행을 아주 신나게 즐기고 돌아와서, 자신은 5년 후에 죽음을 결정했으니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선언합니다. 가족들은 정정한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당혹감을 금치 못합니다. 정정한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선택한다고 했을 땐 가족들의 입장에선 당연히 그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가족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없는 노령자 혹은 환자들의 입장이라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안타까워요. 작년 11월에 돌아가셨던 우리 할머니는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손발이 묶인채 연명을 하셔야 했습니다. 치매가 걸린지 얼마되지 않았을 땐, 거동은 가능하시니 할머니의 죽음을 감히 예상하긴 힘들었지만, 거동도 안되고 당신의 의지마저 없을 땐 산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애매하게 존재하는 그차제가 안타까웠어요. 연명의료결정법안이 통과되어도 할머니께는 절대 적용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할머니께 죽음을 생각해볼 충분한 시간을 드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가족들인 우리가 함부러 판단하기 힘든 아주 애매한 상황이었죠. 그런데, 지혜의 할머니를 보니, 참 부러웠습니다. 자신의 존재의 가치가 딱 5년이라는 걸 스스로 판단하고, 남은 생은 재미있게 살아가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죽음에 대한 선택의 자유가 할머니에게 있다는 것 자체가 부러웠습니다. 소설 초반에 지혜의 친구 이삭은 동생과 아버지를 이별의 준비 시간도 없이 갑자기 떠나 보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존재를 갑자기 잃었을 때의 상실감과 고통은 어머어마 해요. 죽음이라는 것이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닌 줄 압니다만, 죽음이라는 걸 스스로 직시할 때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갈지,어떻게 죽음을 맞이할지, 가족들과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결정할 수 있는 여유와 자유가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을 것 같아요. 연명의료결정법이 통과되기 전 연명치료가 진행되었던 것은 삶에 대한 우리들의 집착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 이 책을 추천드리고 싶은 분들
자신을 비관해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닌, 죽음을 생각하되 남은 생을 어떻게하면 보람차고 의미있게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모든 분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 좋은글귀
p. 23-24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졸음에 취해 있던 나는 그제야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었다. 할머니가 개운하게 정리한다는 것은 상속 문제 따위를 미리 매듭짓겠다는 말이 아니었다.할머니는 가족들 앞에서 오 년 안에 자의로 당신의 생을 마감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p. 39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가족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기는커녕 바울과 아빠를 한꺼번에 앗아간 신의 의도였다. 이삭은 그 점을 조금이나마 이해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애를 쓰면 쓸수록 어떠한 의도를 가진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신을 믿어온 날들에 화가 치밀어오를 뿐이었다.
p. 121 할머니의 말은 나무라는 투가 아니라 따뜻했고, 나는 괜히 코끝이 시큰거려서 고개만 끄덕였을 분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잠시 뒤에 할머니는 이제 그만하면 됐다는 듯 내 손을 물리더니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내게 실망할 것 없다고 했다. 무슨 얘긴가 싶어 돌아보니 원래 담금주는 숙성시켜서 먹어야 진가가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다 제때가 있는 거지. 사람이고 술이고 간에.그런 이치야."
p. 148-149 또한 여든을 넘기고 가게 일에서 물러난 뒤에는 곳곳에 탈이 나는 자신의 몸을 돌보느라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 마지막 순간, 할머니의 표정은 편안했다. '개운하게 가겠다'라던 결심이 그대로 이루어진 듯 모든 짐을 내려놓고 떠나는 할머니의 입 끝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본 포스팅은 서평단 참여로 제공된 도서를 직접 읽고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
아르테 한국소설선 '작은책' 안락
쉽지 않은 주제이지만 가독성이 좋아 후루룩 읽혀졌고, 소화가 어려워 한참을 서성였다.
안락사가 법적으로 허용됨을 그려 낸 10년 뒤 미래의 이야기다.
현재는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에서만 선택하여 이루어지는 법이 존재하지만, 2028년 소설 속 미래에서는 의료진과 경찰의 입회하에, 개인의 선택에 의해 자유로운 안락사가 가능함을 그린다.
너무나도 담담하게... 여든여덟의 할머니, 딸들, 그리고 손녀, 손녀의 벗이자 남사친. 각각 다른 모습으로 그들만의 안락에 대해 갈등하는 과정을 손녀의 시선으로 쫓아간다.
사는것이 더 힘들지만, 스스로가 아닌 가족을 생각해서 꾸역꾸역 삶을 버텨가는 이도 분명 어딘가 있을것 같다.
내가 짐작조차 못 할 마음이 있을테다.
안락. 편안하고 즐거운.
그럴 수 있을까.
준비된 떠남과, 준비없는 떠남.
남겨진 이, 떠나는 이.
누가 더 힘겨울까. 더 슬픔에 사무칠까.
결국은 자책감과 회한이 남을텐데.
사람이라서 사는 내내 우리는 모빌처럼 얽혀있으니.
자! 이제 나는 안락하기 위해 떠나.
나를 이해해줘. 안녕...
이라 하면, 남겨진 이는 얼마나 처참한가.
그렇다고 남겨질 이를 위해 내 삶을 소비할 순 없으니,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
끝에는 우리들 모두에게 오게 될 죽음에 대한,
잘 살고 잘 죽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우리 외할머니 장례치르던 날, 엄마가 우는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토록 절절히 슬픔을 토해내듯 우는 엄마를 보며, 어린 나는 마냥 놀라고 무섭고 슬펐다.
그렇게 우시다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내 신발을 보더니 "겨울부츠 사러 가야겠다."
하시던 엄마가 너무 생소하고 이해가 안되어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그 마음을 십분의 일이라도 알게 되었다.
떠나보내야 하는 절망감에 빠져있기엔 지켜야 할 남은 이들이 있다.
그래서 담담한 척 삶을 이어간다.
엄마도 그랬겠지.
절망을 애써 삼키려 어린 자식의 부츠를 보며 마음을 다 잡으셨을까.
뒤늦게 알게 되는 마음에 눈물이 난다.
소설 속의 엄마는 감정을 쏟아내며 사는 사람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엄마가 더 많다는 것.
그 위치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무언의 고뇌가 있을테다.
슬픔도 기쁨도 할머니의 자두 담금주처럼 뒤섞여 숙성이 되는거겠지.
큰주제는 '안락사'였겠지만, 왜 제목을 '안락'이라고 하였을까 했지만,
나는 소설 속 모든이가 말하고 있는 각자의 안락을 보았다.
이삭은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른 뒤 엄마가 편안해 보인다고 했다. 이삭의 엄마도 결국 스스로 안락한 삶을 택했다. 남들에겐 이해되지 못 할 종교단체속 갇힌 삶이라 해도, 스스로에겐 안락이었을지도.
살다보면 뒤늦게 이해되는 것들이 많다.
우리 외할머니가 즐기셨던 호랑이약.
어우! 냄새...마냥 웃기다 생각했었는데
지금 우리집에 있다. 것도 내가 샀네?
푸하하하!
인생은 장담할 수 없는 것.
그냥 즐기며 살아야지.
쉽게 읽혔지만 깊은 여운이 남는 책.
아주 맛있는 한끼를 든든하게 꼭꼭 씹어 잘 먹은 느낌!!! 감사하다.
좋은 책은 그런 맛을 준다.
많은 이들이 읽고 한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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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불행이 이끈 자신의 안식처로 나를 안내한 이삭은 비빔국수를 만들어주었다.
그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편하다고 했다.
자신과 엇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인 세계안에 머무는 안락함 때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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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담금주는 숙성시켜서 먹어야 진가가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다 제때가 있는 거지. 사람이고 술이고 간에.그런 이치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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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맞이하는 죽음은 이렇게 고통도 기억도 일순간에 지워지는 과정인 것일까.
그럼 그 다음은 어떤 게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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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애 많이 썼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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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의 호랑이약 이 생각나는 밤
은모든 『안락』
제목처럼 ‘안락’한 죽음을 준비하는 이금래씨의 이야기를 그의 손녀를 통해
덤덤하면서도 명쾌하게 풀어낸 은모든 작가의 장편 소설 『안락』은
그 단어가 반어적인 것인지 아니면 존엄한 죽음의 길을 택한 누군가에게
최소한의 예의로 붙인 것인지 모를 단어지만 적어도 소설 『안락』에서 만난
‘죽음’이란 단어는 쓸 때 없이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았고
덤덤하게 현실적으로 그리면서도 그 나름의 깊이를 잃지 않은 채 존엄하고
따뜻한 이미지로 남아 ‘죽음’이란 단어에 결코 부족함 없는 작품으로 남았다.
『안락』을 읽는 내내 극적이지 않았던 작가 은모든의 모든 표현이 좋았고
현실적이면서도 덤덤한 말투로 투박하게 쓰여진 그의 작은 죽음 안에는
세상 모든 따스함이 가족이란 이름으로 깃들어 지금까지 읽어온 ‘죽음’이란 테마 안에서도
가장 호기심 넘치는 작품으로 남게 된 『안락』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까닭모를 낮은 미소를 지었던 기억이 난다.
고도화된 현 사회의 이면에는 지독한 실업률과 함께 저출산, 고령화, 인구포화 등의
이야기들이 항상 뒤따른다. 소설 속 배경은 현 사회 그대로지만 안락사(존엄사) 합법화 법안이
통과되는 가정 하에 지극히도 안락사를 바라고 스스로 준비해온 이금래 할머니와
그의 가족들을 손녀의 눈을 통해 ‘죽음’이란 기준에선 성장 소설로서, 이야기의 흐름에선
가족 소설로서 풀어가고 있다.
5년이라는 꽤나 긴 시간을 그저 자신이 원하는 안락한 죽음에 도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할머니 이금래씨는 누구나 그렇듯 시간이 흐르며
안락사를 포기할까 하는 고민도 했었다. 그러나 준비하는 그 긴(길 다면 긴) 시간
알츠하이머에 걸려 서서히 몸이 굳어 거동이 불편해지고 기억력이 감퇴하여
잠시 전의 일도 깜박하는 자신을 보며 어쩌면 보편적 죽음 보다 훨씬 더 안락하고
존엄할지 모를 안락사를 위해 신변을 정리한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금래 할머니의 가족들 중 누군가는 그런 할머니의 뜻을
너무도 잘 알기에 웃지 못 할 헤어짐에 작은 미소로 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로 결사반대 하는 엄마와 이모의 마음을 결코 모를 리 없었다.
안락사를 앞두고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할머니 방에 들어 작은 스툴에 앉아
할머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장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대체 은모든 작가는 어떤 경험에서 그런 상황을 연출하고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 마지막 대화가 너무 좋아 두 번, 세 번을 연달아 다시 읽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죽음’이란 단어는 내게 보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단어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고, 바로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광경도 보았다.
나는 그런 죽음을 마주했으나 그것은 ‘죽어가는 사람’ 또는 ‘죽은 사람’ 이었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 죽음을 본 적은 없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내게 죽음이란 관념적이며 추상적인 것이다.
은모든 작가의 『안락』이 내게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고
그 마지막에 이르러 엔딩을 무려 세 번이나 연달아 다시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까지 내게 허용된 ‘죽음’이 주는 이미지는 언제나 관념 그 자체였는데
은모든 작가의 『안락』을 통해 나는 보다 현실적이며 덤덤한,
살아있는 그대로의 ‘죽음’을 느낄 수 있었다. 표현이 참 어렵지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절실한 표현이 바로
‘살 . 아 . 있 . 는 . 그 . 대 . 로 . 의 . 죽 . 음’ 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간 기대하던 아르테의 작은책 시리즈 그 두 번째 작품 『안락』은
『인터내셔널의 밤』이 그랬듯 아담한 포켓북에 세련된 디자인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이나
깊이 있는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을 만큼 현실적이고
명쾌했던 이 작품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권할 수 있는 수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접했음 하는 마음이다.
죽음을 존엄하게 선택할 수 있다면...삶과 죽음에 대해 담담하면서도 묵직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작은 책 [안락].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삶의 여러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고. 언젠간 경험하게 될 나와 주변인들의 죽음이라는 것을 현실적으로 상상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와 함께 꽤나 가슴이 울컥거리는 시간이었다.
자신의 의지로 생을 마감하는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 살면서 가끔씩은 상상해보았던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에 관해서 소설에 의해 이렇게 깊이 심리적으로 깊이 파고들어 볼 기회가 있을 줄은 몰랐다.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이 책 속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을 만큼 상상보다 훨씬 더 몰입하게 된 소설. 은모든 작가의 담담하고 담백한 문체가 주는 영향력은 짙었다.
잘 죽는 것 또한 삶의 한 부분이기에 모든 사람들은 존중받으며 죽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삶은 어쩔 수 없이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기에. 죽음에 대한 영향력은 당사자가 상상하지 못할 또 다른 삶들과 연결되어 뻗어나갈 것이다.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하게 된 그 누구든 잘 살고 잘 죽게 되기를...
할머니는 자신의 몸을 여기저기가 해지고 찢긴 옷에 비유했다. 다 떨어진 옷을 억지로 기워 입듯이 매일 자신의 몸을 약으로 기워 나가고 있다는 거였다.
"이 몸으로 살날은 이제 다 살았어. 내가 질 짐도 이만하면 다 졌고. 내가 알아." -p.78
자발적 안락사에 대해 다룬 짧지만 묵직한 글이었습니다.
몇년 전 할머니가 위급한 상황이었을 때 산소 마스크를 쓸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했던 것이 떠오르네요. 할머니는 이미 의사표시를 명확하게 할 수 없는 정도였고 낫기 어려운 상태였는데도 강제로 삶을 유지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때가요.
그에 비해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은 축복받은 게 아닌가싶다가도
주변 환경에 따라선 자발적인 선택이 진정 자신의 온전한 선택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싶고 고통스러울 당사자의 의견이 중요하긴 한데..등등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답이란 것은 없겠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뭐 그렇습니다...
이 작품은 가까운 미래에 있을 법한 이야기인 존엄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지혜를 중심으로 지혜의 엄마, 언니, 이모들, 지혜의 외할머니 등이 등장합니다.
외할아버지를 급작스럽게 보내고 자신의 죽음을 계획하시는 외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그런 엄마를 지켜보는 자식들(지혜의 엄마와 이모들)의 이야기가 담담하게 나옵니다.
핸드폰 기준으로 300페이지가 채 안되는 짧은 단편이었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읽으면서 뭉클한 부분도 있었고, 공감가는 부분도 있었구요.
이 책의 내용이 곧 다가올 우리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읽으면서도 생각이 많아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카드뉴스형식의 광고로 접했는데, 광고만 보았을 때도 이미 '우리 가족 중에 자발적 안락사를 원하는 사람이 생긴다면?'이라는 전에는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항상 나 자신을 주인공으로 놓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쉽다. 결정이 어려워지는 것은 그 당사자가 나의 가족이라면? 아니, 나의 아이라면?하고 뒤트는 순간인데, 가상의 질문이라도 이렇게 되면 손톱을 깨물정도로 어려워진다.
고령의 할머니, 게다가 손 쓸 수 없어질게 뻔한 알츠하이머를 앓기 시작한 할머니라고해서 그를 보내는것이 쉬울것인가. 하지만 담담하게 성장해가며 차분한 이별을 해내는 가족의 모습을 보니 이것은 행복한 이야기가 아닌가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