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발레는 저자의 취미발레 에세이다. 나름 입소문이 난 아무튼 시리즈 중 하나인데 `아무튼 00`이라는 책 제목이 직관적이면서도 트렌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친구가 `"너 이번 달에는 뭐 읽고 있어?"라고 물어봤을 때 어쨌든 발레라고 당당하게 대답했었다. 어쨌든 나는 이 책을 읽어야 했으니 그 마음이 투영된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이 책을 두 번에 걸쳐 읽었다. 처음에는 학원 등록을 앞두고 저자에게 발레 영업을 당하고 싶어서였는데 책이 재미없거나 특별히 어렵지 않았음에도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두 번째는 발레핏 학원 3개월을 일시불로 결제한 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그리고 왜 읽다 말았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책 초반 저자의 발레 입문 고군분투가 그려지는데 프랑스어로 된 발레 용어를 최대한 쉽게 풀어줬음에도 문외한인 나에게는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흥미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고작 일주일 나간 시점에서 다시 읽어보니 저자님 감사합니다. 그 동작이 정확히 그렇게 발음하는 거군요. 저도 텍스트를 읽으면서 머리로 복기해볼게요. 라고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아무래도 본 수업에서는 거울을 보며 어설픈 동작으로 따라가는 데 급급해 정확한 용어나 순서가 생각나지 않았는데 동작 설명서를 읽어본 기분이랄까?
잠깐 다른 얘기를 하자면 나는 운동하는 책을 즐겨 읽지 않는다. 굳어있던 몸이 유연해지자 자신감이 붙었다는 체력증진의 목적이든 이렇게 습관을 들였더니 몸무게를 이만큼이나 감량할 수 있었다는 뉘앙스의 다이어트 책이든 어느 쪽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건 극도로 운동을 싫어하는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잘 쓰인 책을 읽고 잠깐 자극받아 운동을 시작해본들 3개월을 넘긴 적이 없고, 운동을 그만둔 뒤에 찾아올 현타를 더 이상 맛보기 싫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괜히 감흥을 받고 도전하고, 중단과 함께 친구처럼 따라붙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으로 자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게 된 경위는 목차 중 `고백하자면 나는 힘 빼기를 두려워했다`는 것에 이끌려서다. 매사에 노력하고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애쓰던 저자는 일정 수준의 긴장을 안고 살아가서 몸에서 힘 빼는 일이 무엇보다 어려웠다고 한다. 나 또한 그렇다. 모든 운동을 할 때 어깨에 힘 빼라는 소리를 매 수업 듣는다.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목매는 성격이라 A를 하면서도 B 스텝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핑핑 돌아간다.
잘 해내고자 마음을 쓰는 것이 나쁜 건 아니다. 오히려 노력하지 않는 모습보다는 좋은 자세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런데 매번 긴장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 항상 좋은 결과와 동일선상에 놓이는 건 아니더라.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주변을 둘러보기보다는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니깐 더 노력하면, 더 집중하면 이번에는 다를 거라며 더욱 공회전을 반복하다 소진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래서 뭔가 대단한 비결이 있나 싶어서 궁금해서 이 책을 끝까지 읽게되었다.
다 읽고 느낀 감상은 책 제목처럼 아무튼, 발레였다. 내 우려와 달리 저자는 발레를 하라고 추천하지는 않았다. 발레는 찬양했지만 자기 기준으로 재미있고 매력 있었다지 야 너도? 야나두!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미 별다른 영업 없이 나도 발레에 빠져버린 것 같다. 서른 넘어 시작한 발레에 뭐 얼마나 큰 결과가 있겠는가. 왜 세간에서 `취미` 발레라 강조했는지도 이 책을 통해서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다. 우아한 백조가 못될지라도 괜찮을 것 같고, 이러다가 3개월 뒤에 재등록을 안 해도 현타가 올 것 같지 않다. 뭐 어떠냐 아무튼 발레인데
빨래도 발레하듯이
<아무튼, 발레>를 읽고
"팁토(tiptoe)~ 팁토~" 아이가 네 살 무렵 유아 발레수업을 다녀온 뒤부터 한동안 입에 달고 살던 말이다. 발끝을 들었다 내렸다 하는 발레동작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아이에게 발레란 호기심 가득한 세계이나 어른에게는 호기롭게 다가갈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발레>는 한 직장생활자가 어린 시절의 꿈을 되찾기 위해 '감히 범접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며 좌충우돌 취미 발레인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우리는 발레 학원비 벌려고 직장 다니고, 퇴근해서 발레하려고 아침에 출근한다."(13쪽)
어릴 적 심한 사고로 못생겨진 왼팔 관절과 집안의 맏이라는 컴플렉스 때문에 배우고 싶었던 발레를 삶의 한구석에 방치해 두었던 저자는 마흔을 눈 앞에 두고 성인 발레 전문학원의 문을 두드린다. 기초반 한 달만 들어보고 계속할지를 결정하라는 학원측의 권유를 뒤로 한 채 석 달치 수강료를 호기롭게 일시불 선결제하며 결의를 다진다.
기초반 수업은 매트에서 스트레칭 20분, 바워크 50분, 센터에서 10분의 순서였다. (중략) "오늘은 개강 첫날이고 발레 처음 배우는 분들도 계시니까 팔과 다리의 포지션을 자세히 설명 드릴게요. 다리는 1번부터 6번까지의 자세가 있어요."(19~20쪽)
다리 자세는 무릎이 바깥으로 향하도록 턴아웃한 상태를 가르키는 1번부터 그냥 발을 평상시처럼 가지런히 모으는 6번까지, 팔 자세는 팔을 가슴 명치와 배꼽 사이에 모으는 앙아방부터 팔을 옆으로 길게 뻗는 알라스콩까지 네 가지가 있다는 선생님의 쏜살같은 설명이 첫날부터 저자의 머릿속에 콱 박힐리 만무하다. 첫 80분 수업은 저자의 몸과 정신을 좌절시키기에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발레에 대한 열정이 불타올랐던 날로 기념한다.
'운동(혹은 취미)은 장비발'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초심자에게는 장비 구입비용 또한 만만치 않은 게 사실이다. 취미 발레는 ‘초기’ 투자비용이 비교적 적게 드는 대신 몸으로 고생하면 된다고 저자의 말이 웃기면서도 슬프게 들렸다. 발레의 기본복장에는 타이즈, 스커트, 캔버스 재질의 연습용 슈즈, 팬티와 티셔츠를 하나로 결합한 형태의 레오타드(지금껏 내가 레오파드로 알고 있었음은 비밀로 해둔다)가 있다. 이 가운데 부상의 위험이 있어 왕초보에게는 금지되는 토슈즈도 프로페셔널에게는 돈 먹는 하마로 불리며, 평균 한 켤레 가격이 10만원 안팎이라 발레단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고 한다.
아,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180도 다리찢기가 가능한 고관절의 유연성을 영영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게다가 고관절과 스트레칭은 안중근 선생과 독서와의 관계와도 같아서 하루라도 거르면 예전의 뻑뻑한 상태로 돌아가 시치미를 뚝 뗀다.(44쪽)
모든 운동이 그러하듯 스트레칭은 기본인데, 유연성이 중요한 발레에서는 필수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관대하기에 스트레칭은 혼자보다는 '찢어줄'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하다. 비명을 지르고 오만상을 찌푸리던 저자는 문득 의심한다. 어쩌면 선생님들에게는 타인이 조금씩 찢어질, 아니 발전해가는 것을 보며 기뻐하는 이타심과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심리가 공존하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매순간이 고통의 연속이지만 발레 입문 반년만에 저자에게 첫 고비를 안겨준 것은 다름 아닌 플리에('구부린'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이다. 체육관에서 스쿼트를 한다면, 발레에서는 바워크에서 가장 먼저 하는 동작이 바로 플리에인데, 높이 날아오르고 부드럽게 내려앉는 모든 동작의 앞뒤에 빠지지 않는, 원장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점프의 시작점인 것이다. 안 쓰던 속근육이 자랄 때까지 6개월은 기다려야 함에도 조급함에 마음처럼 따라주는 않는 몸을 원망했던 저자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계속한 결과, 마침내 동작이 덜 힘들어지는 경험을 하고나서 그동안 마음은 최선을 다해 돌보면서도 정작 몸은 그렇지 못했던 것을 반성한다.
누구나 인생에 '플리에'의 순간이 있는 게 아닐까. 낮아지고, 떨어지고, 주저앉는 순간들 말이다. (중략) 그건 넘어지는 게 아니다. 그저 각자의 '플리에'를 하는 거다. (중략) 그래서 나는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날에는 '오늘은 꽤 깊은 그랑 플리에를 하고 있구나' 생각하곤 한다. 플리에 같은 그 시기를 잘 지난다면, 인생의 속근육도 자라는 것이겠지.(63쪽)
예전에 '강수진 발레리나의 발'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마치 축구선수의 그것처럼 보이는 발이 발레의 우아함에 감춰진 이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우아'라는 찬탄이 절로 나왔던 기억이 난다. 저자는 말한다. 발레에서 아름다움의 핵심은 어떤 동작이든 하나도 힘들지 않은 것처럼 해내는 것이라고. 그게 바로 우아함의 본질이기도 하다고. 지금까지 발레 하면 화려한 무대 위에서 연기하고 춤추는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우아한 겉모습에만 눈길을 고정시켰다. <아무튼, 발레>를 통해 눈길을 그 안으로 돌려 (취미) 발레가 무엇인지, (취미) 발레인은 어떻게 생활하는지에 대해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저자의 시선을 빌어 발레의 동작과 자세가 삶을 대하는 몸과 마음가짐을 교정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오늘도 어느 연습실에서 바워크를 하고 있을 저자가 실내로 들어오기를 주저하는 당신에게 환한 웃음을 보내며 말하는 것만 같다. 두 볼이 발그레해지는 건 한순간일 뿐, 발끝을 들어 살금살금 걷기부터 무대 센터를 누비며 '셰네로 돌다가 통베 파드부레 다음에 앙드오르로 두 바퀴 돌고···' 마무리 포즈까지, 발레의 희열을 만끽해보길 바란다고! 책을 덮으며 문득 노트북과 발레 용품들을 가득 넣은 무거운 가방을 메고 집으로 돌아가며 그날 배운 동작들을 연습한다는 저자의 얘기가 떠오른다. 어쩌면 빨래를 널다가도 발레 동작을 연습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궂은 날씨든 맑은 날씨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빨래는 해야하듯 자기가 좋아하는 발레를 계속하고야 말겠다는 취미 발레인의 도전과 일상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발레에는 입구는 있되 출구는 없다.(146쪽)
거의 매번 수업 때마다 힘 좀 빼라는 지적을 듣는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하는 소리인 줄 모르다가 어느 날 답답함에 못 이겨 선생님이 ‘바로 당신 이야기예요’ 하고 일러주었을 때에야 뒤늦게 문제를 인지했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이런 지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깊이 고민하면서 총체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다 자신이 모두 소진될 정도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불안과 죄책감에 시달리곤 했음을 깨달았다. 한국형 ‘맏이 표준 교육’을 받으며 부모님에게 인정받는 큰딸이 되기 위해 자신이 우울한 줄도 모르면서 죽 우울하게 커왔음을 인정하게 됐다. 목표를 이루면 기뻐하기보다 안도했고, 이루지 못하면 쉽게 자기혐오에 빠졌다. 상황이 극단적으로 나빠졌을 때는 사직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한 달이라는 긴 휴식을 거치면서 자신이 최선을 다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불안감을 지우기 위한 것이 컸음을 깨닫는다. 난생 처음으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러자 비로소 발레를 할 때의 몸의 움직임에도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다.
아무튼 시리즈를 좋아한다.
커피와 함께 훌훌 읽기 좋은 시리즈인데
관심 있는 분야를 찾아 읽으면 되겠다.
그러니 이 책을 집게 된 것은
순전히 최근 내 관심사에 "발레"가 자리 매김하였기 때문이다.
이전부터 공연 보는 것은 좋아했지만
실제로 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기에.
기자로 오래 필드에 있는 작가는
첫장부터 강렬하게 자신의 글로 끌어들이는데,
적절히 끼어있는 유머가 한몫한다.
아무튼,
발레 초심자의 마음부터 중급자의 고뇌까지 맛깔나게 쓴 책이었다.
유치원때 발레를 잠깐 배웠었는데 발레에 관한 책은 처음이라 그런지 뭔가 반갑고 좋았어요 ㅎㅎ
글쓴이의 발레 도전기?를 읽다보니까 저도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입구는 있어도 출구는 없는 발레의 세계로, 『아무튼, 발레』
어느 주말 무료하게 낮잠을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내가 잠이 많고 잠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정말 낮잠은 이제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이 점점 재미가 없어지고 있었고 하루하루가 단조로웠다. 나이가 들어서도 심리적 에너지 수준이 떨어지지 않으려면 어린 시절 꼭 하고 싶었던 일에 도전해보는 게 좋다는 조언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발레! 그러나 발레가 무엇인가, 팔다리 길고 하늘하늘한 사람들이 우아한 피아노곡에 맞춰 아름답고 근사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예술 아닌가. 발레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었지만 “맥주 뱃살이 양손 가득 잡히는 자신의 아랫배와 무대 위 그녀들의 공기처럼 가벼운 몸에 생각이 이르면 발레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해졌다.”그러던 어느 토요일, 어차피 죽으면 썩어서 사라질 몸인데 난 참 쓸데없이 주저하는 일이 많구나 생각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한 성인 발레 전문학원으로 쳐들어가 3개월 일시불 선결제로 발레수업을 등록하고 만다.
<아무튼> 시리즈를 좋아한다. 출간 즉시는 아니지만 생각날 때마다 찾아 읽고 있다. 아무튼 뭐뭐, 에서 뭐뭐에 해당하는 대상을 나도 아무튼 좋아하면 읽는다. 피트니스나 요가, 발레처럼 대상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삶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로 확대되겠구나, 하는 짐작이 들면 또 아무튼 읽는다.
그래서 읽은 <아무튼, 발레>. 기자인 글쓴이는 마흔 살을 코앞에 두고 일반인 취미 발레반에 등록했다. 1번발 2번발에 당황하고 발과 손이 따로 노는 경지를 거쳐 아라베스크 자세에서 절망한다. 선생님께서 지나치게 친절하게 다리를 찢어 주셔서 비명을 지른다. 토슈즈를 처음 신어보고 감격하고 드디어 발레 공연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자신의 몸을 다시 빚게'된다.
책에는 취미 발레인이라면 누구나 동감할 수 있는, 발레에 빠지는 과정이 즐겁게 묘사되어 있다. 준비물이라든가 각 과정 동작 팁 등도 적잖이 실려 있어서, 성인 발레 수업에 도전하고 싶은데 망설이고 있는 분이라면 이 책을 먼저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서교동의 발레 학원도 나오고, 마흔 다 되어 처음 발레를 시작하고,, 등등, 책을 읽어가면서 내 경험과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런 대목을 만났다. 저자는 2016년에 공연을 준비하면서 자신이 속한 <라 바야데르>반의 무대 의상이 민망해서 고민하는데,
배 부분이 뻥 뚫린 짧은 탱크탑 짧은 치마라니. <돈키호테>를 준비하는 옆 반은 종아리 길이의 빨간색 튀튀고, <라 실피드>를 하는 그 옆의 반도 종아리 길이의 흰색 튀튀고, 시골 처녀들의 춤을 추는 그 옆옆 반은 벨벳 치마 위에 앞치마까지 둘렀던데, 이 민망한 옷을 어이한단 말인가.
- 본문 128쪽에서 인용
하하, 작가님, 제가 바로 그 옆 <라 실피드>반에서 긴 로맨틱 튀튀 입고 있었어요. 저는 작가님네 <라 바야데르>반의 섹시한 의상이 부러웠답니다. ^^
발레라니... 아무튼 시리즈를 읽으며 이렇게 저렇게 그들이 지극히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에 슬며시 기댈 수 있는 기억 한 자락쯤 뽑아낼 수 있었으나 발레라니... 영화 <빌리 엘리어트>도 온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해본 적이 없는데... 발레를 취미 삼아 한다던 친구가 있었지만 그녀도 다른 취미들은 악착같이 유지를 하였지만 발레는 소리소문 없이 그만두어버린 것 같던데... 아무튼, 발레...
“오늘은 개강 첫날이고 발레 처음 배우는 분들도 계시니까 팔과 다리의 포지션을 자세히 설명 드릴게요. 다리는 1번부터 6번까지의 자세가 있어요... 그리고 팔 자세에도 규칙이 있어요. 발레에서 팔은 딱 정해진 곳으로만 움직여요. 아무 데나 팔이 막 돌아다니면 안 돼요.” (p.20)
그래도 책이 읽히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물론 발레의 각종 포지션을 설명할 때는 그저 글자만 눈으로 따라 읽을 뿐, 머릿속으로 선명해지는 영상 따위는 없다. 그럼에도 고군분투하는 글쓴이가 느끼는 여러 심경을 따라가다 보면 왠지 처연해진다. 배우려 작정하고, 그 작정을 행동으로 옮기고, 한번 행동으로 옮긴 것을 유지하려 애를 쓰고, 그러다 문득 재미를 느끼고, 그 재미를 부여잡고 다시 몸을 허공으로 날리는 일들이 그렇다.
『... 발레를 배우고 싶은 남자 분이라면, 괜히 눈치보고 망설이지 않아도 좋다. 영국에서는 존 로우라는 90세 할아버지가 데뷔한 기록도 있다 그는 반평생 미술 교사로 살다가 일흔아홉 살에서야 가슴속에 숨겨놨던 발레의 꿈을 펼치기로 결심했고, 부단한 연습 끝에 11년 만에 무대에 올랐다고 한다. 그는 2009년 당시 인터뷰에서 “음악에 맞춰 발을 세워 몸을 높이 올리는 건 황홀한 경험”이라며 발레를 예찬했다.』 (p.26)
읽다가 문득 나의 고양이 용이가 참 유연하였는데, 생각을 해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앉아 있는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다가 손을 뻗는 순간, 그 손에 닿을 듯 말 듯 하며, 그 아래로 스르륵 미끄러져 지나갈 때 참 유연하였는데... 그렇게 매정하게 지나치고 나서 몸은 반대편을 향한 채로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볼 때 그 눈빛도 참 유연하였는데... 그래도 미안한지 다시 돌아오면서 슬쩍 내 무릎에 얼굴을 딱 한 번만 부비며 스윽 지나갈 때 참 유연하였는데...
“... 미사여구나 조잡한 합리화로 눈가림을 할 수 있는 말이나 글과 달리 몸은 내가 연습한 딱 그만큼의 나를 거울처럼 그대로 보여주는데, 보기에 쉬워 보이는 것 중에 진짜로 쉬운 건 정말 많지 않은 법이다.” (p.100)
온전히 제 몸의 단련으로, 군무일 때조차 각각의 개성에 의지하여, 둘일 때조차 최소한으로만 접촉하며 날아오르는 모양을 떠올려 본다. (아, 다시 고양이 용이가 생각나려고 한다. 최소한의 접촉만으로 나의 사랑을 앗아갔던, 최소한의 접촉만으로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었던...) 아무튼, 어제 한 후배는 복싱을 시작했다며, 그간 복싱을 무시해서 미안했다는 말을 했는데, 몸을 이용하는 많은 것들이 이렇게 사람들을 머리 숙이게 만들곤 한다.
“... 남의 움직임은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자기 자신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맹점이 있다. 자신의 장점은 높이 여기는 반면 단점은 잘 보지 못한다. 정도만 다를 뿐 누구나 갖는 나르시시즘의 영향일 것이다. 그 단점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스스로 직면하기 전까지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몸에서 힘을 빼지 못하는 내 문제도 적잖이 심리적인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부서질 듯 노력하고 몰입하는 삶은 익숙한 반면 적당히 힘 빼는 삶은 심리적으로 낯설었다. 그러니 몸에서 힘을 빼는 방법을 알 턱이 없었다.” (p.107)
발레에 대한 책을 읽고 내가 무얼 쓸 수 있겠나 했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아 새삼스럽다. 힘 빼는 법을 모르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아내에게 들려줄 내용도 건질 수 있었다. ‘부서질 듯 노력하고 몰입하는 삶’이야말로 바로 아내의 삶인데, 어쩌면 거기에서 기인한 심리적인 낯섦이 아내에게서 힘 빼는 법을 빼앗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내가 그렇게 수월히 적당히 힘을 뺄 수 있었던 것은...
최민영 / 아무튼, 발레 / 위고 / 147쪽 / 2018 (2018)
솔직히 발레는 무용을 좋아해서 좋아하게 된 것보다 '강수진'이라는 발레리나라는 사람에 대한 호감 때문에 찾아보다가 좋아하게 되었다. 발레는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좋아한 거라 시도해볼 엄두는 내지도 못하고 보는 것만 즐기는 사람이었다. 운동신경은 전혀 없고 운동을 싫어할 뿐더러 유연하지도 않기 때문에... 아무튼,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발레를 처음 시작한 때부터 발레의 고난(?)과 발레를 좋아하는 사람의 로망인 토슈즈에 관한 것 등등 너무나도 재밌는 글들이 넘쳐난다. 아무튼 시리즈는 글을 잘 쓰는 분들만 맡으셔서인지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쓰는 거라 그런지 글이 모두 재미있다. 나라는 사람이 발레를 하려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ㅋㅋㅋ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 사실 지금까지 안 한건 그냥 핑계였던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올해가 끝나기 전까지는 꼭 발레학원을 가보려고 한다.
아무튼, 발레 - 최민영 3.5 / 5.0
발레 공연을 본 적이 살면서 딱 한 번 있습니다. 어쩜 그렇게 가볍게 날아다니는지, 저렇게 꼿꼿하게 서있으면 발은 아프지 않은지, 신기함과 경외함 사이에서 공연을 봤습니다. 이후에는 '빌리 엘리어트', '블랙 스완' 등 영화로만 발레를 접하다가 한쪽에서 취미 발레가 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제가 좋아하는 아무튼 시리즈에 '발레'가 떠서 따지지 않고 구매했습니다. 작가는 취미발레 4년차로 그동안 발레를 하며 겪었던 일과 깨달음을 재치있는 문체로 풀어냅니다. 특히 우리네 삶에서 잊고 살았던 것들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드는 문장이 많아 만족감이 높은 책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