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신작, <역사의 역사>의 주제는 역사 자체가 아니라 역사연구의 변모와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초점을 맞추는 대상은 유명한 역사서 고전과 그 역사서를 남긴 저자들이다. 일단 역사라는 주제를 택하고 있지만,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직접 다루는 대목은 거의 없는 수준이다. 언급되기는 하는데, 주요 역사서의 몇몇 대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사전정보를 제공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라는 학문의 본질을 명쾌하게 꿰뚫으면서, 동시에 독자들에게 물 흐르는 듯 쉽고 재미있게 관련 내용을 풀어내고 있다.
<역사의 역사>는 일단 사마천의 사기, 헤로도토스와 투키티데스의 저서 등 대표적인 역사서와 그 저자들을 옴니버스 식처럼 분류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챕터마가 특정 역사서나 역사 연구 사조, 그리고 대표적인 역사가들을 소개하는 방식이다. 이런 구성에서는 대개 주요 내용을 요약하고 설명하는 선에서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여러 역사서의 역사적 의미와 특징을 소개하는 것을 떠나서, 현대 시점의 사회인으로서 바라본 옛 역사 이야기의 관점과 평가 등에 대해서 흥미진진하면서 맛깔난 이야기를 도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여러 역사서와 역사가들을 평가한다. 하지만 일차원적인 평가는 극단적으로 지양한다. 동시에 선악이분법 수준의 일차원적인 평가에서 벗어나, 보다 종합적이고 총체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고전으로 손꼽히는 옛날 글을 현대인의 관점에서 기술적으로 빈약한 부분이 있다고 지적하기는 손쉽다. 과학기술을 비롯해 많은 부분에서 발전했다면, 자연스럽게 옛 방식과 옛 물건은 낡아 보이고 , 허점이 많이 보이게 되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아무런 흠이 없는 절대적인 존재처럼 숭상하기는 더욱 쉽다. 그저 칭송에 칭송을 거듭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유시민은 둘 중 어느 쪽에서 기울어지지 않았다. 대신 중도일 뿐만 아니라 더욱 발전적인 세 번째 길을 택했다. 옛 저작의 시대적 한계를 지적하는 것과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은 노력을 호평하는 일을 동시에 하면서, 더욱 발전적인 역사 연구와 고찰에 대한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첫번째 챕터, 헤로도토스와 투키티데스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부터 이런 특징이 여과없이 드러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현대 관점에서는 역사책이라기보다 설화 채록집에 더욱 가깝다는 평을 받을 것이다. 여러 나라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막상 저자가 직접 답사한 지역이 별로 없을 뿐더러, 외국인이나 외국을 다녀온 사람들 등에게서 여기저기서 들었다는 이야기를 교차검증 없이 수록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흥미롭고 신기한 이야기가 많아서 재미는 있지만, 현대 학계 기준에서 엄밀한 의미의 역사서라고 하기에는 힘들다.
그리고 투키티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현대 학계 관점에서는 역사서라기보다, 고증이 뛰어난 역사소설쯤으로 분류될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인물의 연설 등을 다른 자료에서 직접 옮기는 대신 저자가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조합하고 재구성한 부분이 많다. 막상 그런 부분에는 따로 출처를 붙이지도 않아서, 실제로 전문 기록이 존재하는 연설인지 저자가 적절하게 재조립한 연설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다.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이런 식으로 쓰여진 글을 엄밀한 역사서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유시민은 이런 부분을 가차없이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두 명의 저작은 허점이 많고 빈약하며, 오늘날 일부러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일까?
유시민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헤로도토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고대 그리스의 범위를 벗어난 외국 이야기를 다양하게 채집하기 위해 노력했고,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설화적 이야기도 일일이 출전을 달아서 소개했다. 투키티데스는 여러 자료들을 무비판적으로 복제하고 전달하는 대신, 현실적으로 검증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쳐서 정련된 이야기를 뽑아냈다. 이 두 가지 주제는 이후 역사학계가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와 맞닿아 있으며, 꾸준히 발전하고 단련된 테마이기도 하다.
<역사의 역사>는 이처럼, 기술적으로 발전한 현대의 기준으로 옛 저술을 평가하지만, 거기에 매몰되지는 않는다. 사마천의 <사기>는 동시대 유럽의 역사서에 비해서 훨씬 방대한 내용을 훨씬 체계적으로 정리한 역작이지만, 이 대목을 말하면서 동양이 서양보다 앞섰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은 뜬금없이 이슬람교를 칭송하는 내용이 수시로 출몰하는 것을 비롯해서, 왕조에는 100여년의 흥망주기가 태생적으로 존재한다는 식의 무리수가 여럿 있다. 이런 부분을 깎아내리면서 평가절하하거나, 정교일치를 원칙으로 하는 이슬람교를 폄하하는 내용을 덧붙이거나, 혹은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는 말을 되뇌면서 그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더없이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유시민은 이븐 할둔이 살았던 14세기 이슬람 세계의 사회와 당대 역사를 말하면서, 당대의 정교일치 이슬람 사회에서 수시로 왕조가 바뀌던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니, 오히려 그런 점을 내세워서 히븐 할둔과 그 저작을 깎아내리지는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대목은 마르크스의 역사학에 대해 이야기할 때 최고조에 달한다. 마르크스가 내세운 역사학 이론이나 예측은 21세기 현대에서는 들어맞는 대목을 찾기가 힘들 지경이다.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만들어진 여러 이론들도 현재는 상당수 사멸되었다. 탄압받아서 퇴치된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과 학문적 성과에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지만 유시민은 굳이 한 챕터를 할애해서 마르크스에 대해 말한다. 이 챕터의 상당 부분은 마르크스의 주장과 저술을 논박하는 데 할애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마르크스의 이론이 의미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대신 마르크스의 문제의식과 비관적 미래관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여러 부문에서 변화를 이끌어냈으며,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역사학은 과거만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사회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랑케와 카를 다룬 챕터는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을 배운 사람에게 독특한 재미를 안겨준다. 역사학 이론의 첫머리는 거의 예외없이 랑케와 카를 대조하면서 시작한다. 랑케는 주관을 극도로 배제한, 철저하게 객관적인 역사기록을 추구했다. 반면에 카는 역사를 연구하고 기록하는 그 순간부터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으며, 그 자체가 바로 역사라는 논조였다. 랑케와 카를 대조하는 것에 워낙 익숙해서, <역사의 역사>에서는 두 명을 각각의 챕터에서 따로 다루는 것이 좀 이상하게 여겨질 지경이었지만, 책을 읽자 곧바로 이해가 되었다. 랑케도, 카도 자신만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각자의 특징이 뚜렷하기 때문이었다.
랑케의 역사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마르크스의 역사학보다 더 심하게 잊혀졌다. 역사학 이론의 첫머리에서 언급되는 것 외에, 랑케의 저작 중에 오늘날에도 회자되는 책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준이다. 하지만 그것은 랑케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랑케는 자신이 만든 방법론 내에서는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 최선의 결과를 뽑아냈다. 하지만 역사 연구의 근본 원천이 되는 옛 사료에서부터 필연적으로 작성자의 주관이 개입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옛 기록을 쓴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그대로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이나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기록했기에, 그 단계에서부터 주관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관이 개입된 자료를 그대로 인용한다면 주관이 반영된 자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유럽 역사학계가 이 명제를 깨달으면서, 역사학은 새로운 방향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역사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카는 여러 모로 랑케와 대조된다. 카는 역사는 필연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전제는 역사학은 객관적일 수 없다는 체념이 아니라, 주관적인 면모를 파악하고 그 점까지 반영하는 것이 역사학이라는 새로운 명제로 이어진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시선으로 써낸 갖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주관적인 면모를 최대한 덜어내고 교차검증으로 확인되는 사실을 추출해서 재구성하여 역사적 사건에 다가가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연구자 개인의 주관이 개입된다는 것을 타인이 명심하는 것이 바로 카의 역사 이야기다. 여러 사람들이 자신만의 역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역사학 연구에서는 순수한 의미의 학문 이외의 요소가 개입할 때가 종종 있다. 구한말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역사학을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도구처럼 여겼다. 이런 면모는 장단점을 동시에 지녔는데,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벗어나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시키는 설화나 잊혀진 사료들을 발굴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대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을 강조하는 측면으로 역사서 서술을 끼워맞추는 경향이 나타났던 것이다. 기존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신 새로운 한계를 만들어버린 격이다. 그리고 그 민족주의 역사학의 한계와 맹점을 지적하고 보완하고 새롭게 대체하면서, 한국 역사학 연구는 더한층 발전했다.
이 책의 후반부는 일종의 학문 통섭을 다룬다. 문명과 역사를 직접 결부시키는 새로운 융합 시도가 나타나는가 하면, 아예 과학 발전과 역사 연구를 통합하듯이 동시에 다루기도 한다. <역사의 역사>는 이런 시도가 역사학의 테두리 안에 갇혔던 시절의 역사학에서 설명하지 못했던 수많은 것들을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과, 두 가지 영역을 동시에 다루면서 한 가지 영역만 다룰 때보다 오히려 시야가 좁아지고 경직된 부분도 있다는 것을 짚어낸다.
완벽하게 완성된 역사학이란 있을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완벽해 보이는 역사서는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때까지 수많은 역사학 고전들이 그랬듯이,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새로운 사료가 발견되고, 예전에는 연구하지 못했던 영역을 새로운 방법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되면, 새롭게 발견되는 것이 나올 것이다. 옛 것이 반박되고 새로운 것이 출현하며 기존 서술이 물갈이될 것이다.
하지만 완벽한 역사학을 추구하면서, 기존 역사서에서 보다 결점이 적은 새로운 역사서를 만들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때까지 수많은 역사가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면서 명저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고, 그 저술들이 기술적으로 불완전한 평가를 받게 된 후대에도 고전으로 남아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역사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옛 역사서의 고전들에서 핵심적인 메시지를 짚어내고, 본받을 점은 본받고 비판할 점은 비판하며,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한 부분을 호평하고 폄하하지 않으면서, 멈추지도 말고 앞으로 나아가고, 무엇보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일 것이다.
인류의 행적이 문자로 기록된 이래로 현재까지 수많은 역사 서적이 출간되고 있다. 역사로 다뤄지는 부분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 증가할 수 밖에 없지만, 그것들이 실험과 분석을 통하여 발견되는 새로운 영역의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의 사실이라는 점에서 그토록 다양한 책들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하여 왜 동일한 사건과 시대, 인물이 다양한 관점과 방법으로 기술되고 있는지를 이해함으로써 역사서의 내용을 일차원적으로 읽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에 담긴 다양한 함의(含意)를 짚어낼 수 있는 안목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유시민 작가의 [역사의 역사]는 바로 그러한 부분들을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부터 최근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로 유명세를 얻고 있는 유발 하라리의 저서를 통하여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역사를 공부하는 하나의 방법을 마주하게 된다.
[역사의 역사]라는 제목을 접하면서 다소 광대한 범위를 다루고 있는 책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의 정확한 제목이 [역사 서술의 역사]임을 알게 된다면 저자의 의도를 어느 정도는 눈치챌 수 있게 된다. 이미 인문학의 고전에 반열에 올라 있는 역사서는 물론이고 현재에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서적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역사 서술의 시간적 흐름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유시민 작가는 역사에 대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역사서와 그를 기록한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읽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역사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에 대한 몇 가지의 방법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헤로도토스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투키디데스에 대한 내용은 역사 서사에 대한 방법론을 설명하고 있다. 이야기꾼으로 유명한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마치 당시의 상황을 실제 옆에서 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느낄 정도로 생생히 묘사되고 있다는 점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즉, 사실과 허구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은 그의 묘사는 분명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에 반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집필한 투키디데스의 기술 방법은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원인 분석에 치중하였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연대에 따른 꼼꼼한 기록과 더불어 그리스 내전의 원인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보여주고 있다. 언뜻 이 둘의 기술에 대한 차이는 사실과 상상이 역사에서 어느 정도 허용이 되는지에 대한 논쟁으로 보여질 수 있지만, 결국 둘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오히려 각각 페르시아와 그리스라는 세계 전쟁과 그리스 내전이라는 민족 전쟁에 대한 둘의 기록이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게 쓰여져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이들의 역사 기술을 통하여 역사 서술의 고충을 다루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다. 직접 경험한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헤로도토스는 다양한 사료를 통하여 기술을 하였으며, 투키디데스 역시 자신의 경험에 더하여 다양한 사료와 글들의 비교를 통하여 기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비록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대중에게 역사의 극적인 부분들을 선사하고,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신화와 전설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간결하게 정리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그러한 차이는 현재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큰 것이라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부분들은 제한된 자료로 인하여 당시 역사가들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고충으로 바라봐야 하기 때문에 상상력과 사실의 잣대를 그 당시의 역사에 평가 기준으로 삼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한 점에서 사마천의 [사기]는 축복을 받았다라는 저자의 주장에 이내 공감하게 된다. 비운의 역사가라고 알려져 있지만, 역사를 기록하는 관직에 있었다는 점과 고대 그리스와는 달리 풍부한 사료와 기록이 있었기에 그를 바탕으로 [사기]를 기술할 수 있었다는 점은 왜 [사기]가 역사서로서 의미가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사기]가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는 점은 단순한 기록이 아닌 사마천이라는 인물의 관점과 생각이 반영된 서사라는 부분이다.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사실에 기반한 기록에 그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에 대한 해석을 추가한 부분이라든지 [화식열전]과 같이 자신의 관점과 기준에 따른 인물들의 이야기의 분류는 역사 서적이 그저 사실에 대한 기록에 한정되는 것이 아닌 서사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관점과 방향성에 따라 달리 기술되는 역사 서적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인물과 책은 바로 이븐 할둔의 [역사 서설]이다. 이슬람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게 이븐 할둔과 그의 저서에 대한 설명은 새로운 지식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그가 1300년대에 활동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술 방법이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인류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이전의 기술 방법과는 달리 빅 히스토리의 개념으로서 인류사를 다루면서 그 안에서 보편적인 원칙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였던 것이다. 물론 종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보편적인 원칙을 찾기 위한 일차적인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였지만, 그러한 보편적인 원칙을 찾아내기 위하여 다방면에 대한 그의 기술은 거꾸로 당시 이슬람 세계에 대한 다양한 면면을 확인할 수 있는 성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게 된다.
이 시점에서 [역사의 역사]는 첫 장에서도 잠깐 언급한 사실과 상상력의 경계에 대한 부분을 랑케와 에드워드 H. 카의 저서와 행적을 통하여 집중적으로 언급한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라는 표현으로 유명한 랑케의 필법은 말 그대로 사실에만 의미를 부여하는 기술 방법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역사가 객관적인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통하는 부분이지만, 그의 역사 기술이 철저히 문헌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역사 서적이 단순히 사실의 나열 및 정리에 그친다는 부정적인 부분을 담고 있다. 또한 그가 각국을 방문하여 얻은 문헌 역시 승자의 기록과 같이 편향된 조건에 의하여 보존된 자료이기에 문헌이 반드시 객관적이라고도 볼 수 없다는 점은 랑케 필법의 한계일 수 있다. 이러한 부분은 바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하여 비판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마 에드워드 H. 카에 대한 내용을 읽다보면 유시민 작가가 이 책을 기획한 의도가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중략) 역사가와 사실은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다. 역사가는 끊임없이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어 내며 사실에 맞추어 해석을 만들어 낸다. 어느 쪽도 우위를 가질 수 없다. 이 상호작용은 현재와 과거의 상호 관계도 포함된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기 때문이다. 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다. (중략)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 p. 235 中에서 : [역사란 무엇인가]의 내용 -
저자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이 부분의 인용을 통하여 다음의 사실을 도출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역사 서술에 대한 설명을 압축하여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은 과거의 것이고 역사가는 현재에 산다. 과거의 사실 가운데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을 선택하는 기준과 그 사실들을 일정한 관계로 맺어 주는 해석의 관점은 역사가를 둘러싼 현재의 환경, 역사가의 경험, 역사가의 이념과 개인적 기질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다. (중략) 역사란 오늘을 사는 역사가들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과거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 p. 235 中에서 -
저자는 역사가 과거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다. 그동안 역사를 객관적인 사실, 분석된 사실로 알고 있던 우리에게 '이야기'라는 표현은 역사를 서술하는 이의 개입에 초점을 맞춰야 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가온다. 사마천 또는 투키디데스가 독립운동 시기의 우리의 역사에 대하여 기술한다면이라는 가정이 실제 박은식과 신채호의 역사 서술로 이어진다라는 부분은 역사 서술 당시의 상황이 서술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동시대에 그들과 달리 식민사관이 등장하였다는 점은 상황과 관점에 따라 달리 역사가 서술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헌팅턴이나 토인비와 같이 특정 국가나 시대가 아닌 문명이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기술하는 부분이라든지 과거의 역사를 기반으로 앞으로의 미래에 대하여 논하는 유발 하라리의 이야기도 기술의 관점에 따라 역사에 대한 다양한 서술이 얼마든지 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역사의 역사]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와는 다르다. 보통 역사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발전과 개선되는 상황을 발견하게 되지만, 여기에서는 역사 서술이 시간에 따른 발전이 아니라 그 상황에 따른 다양한 형태로 기술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풍부한 자료가 존재하는 현대에 쓰여진 역사 서적이 [사기], [역사]와 같은 고대의 역사 서적보다 우수하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도 그에 대한 반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의 역사]는 역사를 서술한 인물이나 관점, 방법에 대한 우위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특징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적 흐름이나 상황을 거꾸로 유추할 수 있다는 점과 더불어 그 책의 내용들이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달리 표현되는 원인을 이해함으로써 그 안에 담긴 함의를 파악할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역사란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기록하는 순간 쓰는 사람의 입장이 배제되고 정확히 사실만을 반영하는 것이 가능할까? 사실을 기록하되 지어내서 쓰지 않는다라는 '술이부작 [述而不作]'이 그 의미 그대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겸양의 표현이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인간이 기계적으로 모든 것을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역사]를 읽음으로써 역사 관련 서적을 달리 바라보게 된다. 책의 내용을 그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담긴 의미와 또 다른 역사적 사실을 찾는 과정으로 말이다.
나는 대학에서 사회과학이 아닌 자연과학을 전공했다. 내가 왜 자연과학을 택했는지는 지금도 아리송하지만 그렇다고 후회하는 건 아니다. 단지 고등학교에 다닐 때만해도 문과 과목에 더 흥미가 있었고 좋아했는데 왜 다른 선택을 했는지 가끔 생각이 나서 기억을 더듬어 볼 뿐이다. 대학 때는 당시 학교를 다닌 대부분의 학생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사회과학 책을 많이 읽었다. 그렇게 형성된 나의 독서습관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사회에 나와서는 업무와 관련된 책들을 읽기 시작했지만 딱히 독서습관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90년대 초반 중국관련 업무를 하면서 중국에 관한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동양고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 역사에 대해서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관심은 지금도 여전하다.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나의 독서습관은 바뀌었다. 소위 인문학에 대한 책들, 그 중에서도 역사에 관한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여전히 한국사와 동양사 그리고 문명사에 머물러있다. 서구의 역사도 알고 싶다는 생각에 읽어보기도 하지만 그때그때 흥미에 따라 읽을 뿐이다. 요즘은 그들의 역사도 체계적으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들 사고의 근원이라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된 책들을 먼저 읽고 있다. 그러던 중 이 책 [역사의 역사]를 읽게 되었다. 저자인 유시민의 책은 대부분 읽었기에 그의 생각이나 글쓰기 방법 등은 이미 익숙했고, 그의 생각을 빌어 역사서에 대한 입문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주저없이 읽지 않았나 싶다.
저자는 이 책에서 동서양의 역사가 16명이 쓴 역사서 18권을 다루고 있는데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동양의 역사서이다. 박은식의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는 우리의 역사를 다루었고, 사마천의 [사기]는 중국역사, 그리고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은 이슬람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 소개하는 우리의 역사서는 모두 식민지시대에 쓰여졌다. 박은식은 조선의 망국과 민족해방투쟁의 아프고 고단했던 과정을 생생하게 기술했다. 그는 망국의 역사가 아니라 광복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당대사를 기록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 반해 신채호는 조선의 정신을 살려내기 위해 집요하게 고대사를 파고 들었다.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다’라는 말로 널리 알려진 [조선상고사]는 단군왕검 건국에서 시작하여 백제의 패망에서 끝이 나는 미완의 역사서이다. 정통유물사관을 견지한 식민지 조선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에서 원시시대부터 삼국통일 이전까지의 경제사를 다룬다. 그 시기를 노예제로 규정한 그는 아마 민족해방투쟁의 수단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 들였는지도 모르겠다.
두번째는 서구의 역사서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폰 랑케의 [근세사의 여러시기들에 관하여]와 [강대 세력들 정치,대담,자서전],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그리고 에드워드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바로 그것들이다. 이들 중에는 저자와 제목을 알고 있는 책도 있고, 여기서 처음 알게 된 책도 있으며, 이해 여부를 불문하고 읽어 본 책도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록 저자의 시각을 빌려서 이지만, 이들 역사서가 어떤 책인지를 알게 되었다.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책도 있지만 그냥 건너뛰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단만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서가 아니라 역사이론서이다. 예전에 읽은 책이지만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
이 책에서 다루는 역사서들의 마지막 분류로는 문명사이다. 슈팽글러의 [서구의 몰락],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 그리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이에 해당되는 책들이다. 나에게는 서구의 역사서들보다는 이 책들이 더 친근하게 다가오고, 따라서 대부분 읽어본 책들이다. 20세기 들어서 개별민족이나 왕조, 국가가 아닌 문명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등장했고, 토인비는 그 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으로 문명사를 연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역사와 과학이 융합되어 우리에게 알려진 문명사가 아닌 인류, 그 자체의 역사를 다룬 문명사가 쓰여진다. [총,균,쇠]와 [사피엔스]에서 다이아몬드와 하라리는 문명 발전 속도의 차이를 만들어낸 근본원인은 환경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함으로써 기존의 서구학자들이 주장하는 문명의 해석을 반박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가 왜 역사서를 읽어야 하고, 또 역사서를 읽을 때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저자의 말에 깊은 공감을 느꼈다. 저자는 역사서를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을 이렇게 말한다.
‘사실은 그 자체로 존재하고 살아남는 게 아니다. 기록하는 사람이 선택한 사실만 살아남아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231쪽) ‘역사란 오늘을 사는 역사가들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과거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235쪽)
또한 저자는 ‘역사의 매력은 사실의 기록과 전승 그 자체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데 있음’ (17쪽)을 절감했다며, 역사의 역사란 ‘인간과 사회의 과거에 대해 문자 텍스트로 서술하는 내용과 방법이 변화해온 과정에 대한 이야기’ (15쪽)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 [역사의 역사]에서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역사가를, 역사이론서가 아니라 역사서를 다루었다고 한다. 나 역시 역사이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이해하고 싶었기에 이 책을 읽었다.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를 이해하고 싶어서가 아닐지 모르겠다.
‘우리가 옛 역사서를 읽는 것은 새로운 정보나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남긴 이야기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51쪽)
그러나 우리가 남의 역사서를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역사는 사실을 쓴 이야기이고 언어로 재현한 과거인데, 남의 언어로 재현한 남의 과거 이야기에 감정을 이입하고 흥미를 느끼려면 그 책이 담고 있는 기초정보를 알아야 한다.’ (51쪽)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역사나 동양고전은 쉽게 이해하면서 읽을 수 있었지만 서구의 역사는 이해하기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지금 틈나는 대로 읽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그들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 중의 기초가 아닐까 싶다. 내가 이 책에 나오는 서구의 역사서들을 읽을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역사서에 대한 나의 생각을 되돌아 보는 기회를 준 것은 분명하다.
두 권 모두 한국인이 읽기에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독해력 부족을 자책하거나 어렵게 썼다고 저자를 원망할 필요는 없다. 독해가 어려운 것은 낯선 정보가 너무 많아서다. 모르는 정보가 많으면 스토리를 이래하기 힘들고, 스토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텍스트에 몰입하기 어려원진다.
'1장 서구 역사의 창시자,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편 (51쪽)
역사란 무엇인가도 그와 같다. 열 번을 올라도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는 큰 산이다. 한 번 읽으면 조금 알게 되고 두 번 읽으면 더 알게 되며, 거기 들어 있는 사건과 사람과 책에 대한 정보를 일일이 찾아보면서 읽으면 그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즐길 수 있다.
'7장 에드워드 H. 카의 역사가 된 역사 이론서'편 (228쪽)
들어본 역사가나 역사서가 반이 안된다.
1장의 헤로도토스와 트키디데스, 2장의 사마천은 청소년 대상의 만화책을 읽어 기초 지식은 좀 있다. 3장의 이븐 할둔은 처음 듣는 이름이고, 4장의 랑케와 5장의 마르크스은 이름만 간신히 아는 정도이다.
6장의 민족주의 역사학에서 나오는 박은식과 신채호는 역사학자나 역사가로는 생각도 못했다. 백남운은 월북하셨다니 생소한 것은 당연하다.
7장부터 9장까지에 나오는 인물이나 책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역사의 역사'는 앞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뒤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준다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작가는 책에 나오는 역사서가 어려운 것은 당연하며 점점 재밌을 것이니 여러 번 읽을 것을 권한다.
제대로 즐기려면 '역사의 역사'도 여러 번 읽어야 할 것 같다.
이제 한 번 읽었다. 갈 길이 멀다.
제목 : 역사의 역사
저자 : 유시민
출판사 : 돌베개
로마 제국의 첫번째 황제는 누구인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연도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이런 단순한 사실, 인과관계만이 역사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아직 이런 것들도 많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에 있었던 일을 익히는데만 급급한 것이 내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한국사, 중국사, 일본사, 유럽사, 미국사 등등 여러 책을 봤고 공부를 하고 있지만 아직도 너무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던 중 에드워드.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란 책이 내 서재에 꽂혀있는 것을 보고 꺼내들었다. 유명한 책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몰랐고 생각보다 얇아서 꺼내 읽었다.
앞부분을 조금 읽었는데 생각보다 쉽진 않았고 역사 서술에 대한 관점이 이 책의 주를 이뤘다. 생각보다 잘 읽히지 않아서 계속 읽을까 접을까 망설이던 중 유시민 작가의 '역사의 역사'라는 책도 있어 이 책을 대신 꺼내들었다. 목차를 보니 역사의 기술 방법에 대한 설명이 있을 것 같고 좀 더 읽기 쉬운 필체로 쉬운 내용을 설명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이 책에서도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며 이 부분을 덧붙인걸 보니 책이 어렵긴 한가보다.
서양 역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두 인물이 있다. '역사'라는 책을 쓴 헤로도토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쓴 투키디데스이다. 헤로도토스는 다들 알겠지만 투키디데스는 잘 모를 수도 있다. 사실 나도 책 제목만 알고 있었고 이름은 맨날 잊어버렸었는데 '그리스인 이야기'를 읽으며 제대로 알게 되었다. 난 이 두 인물이 단순하게 처음으로 역사를 기술했기 때문에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고 생각을 했지만 2500여년 전에 역사서를 저술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사실 검증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이 신기했다. 사실 당시엔 (다른 과거의 역사서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역사를 기록한다는 개념이 뚜렷하지도 않았을텐데 전해오는 이야기를 단순히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검증하고 현상을 해석해서 쓴다는 것이 대단하다.
서양에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가 있다면 동양에는 훨씬 방대하고 정확한 역사를 기록한 '사기'를 기록한 사마천이 있다.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던 중 궁형을 당했으나 그 후에도 계속 저술하여 끝을 낸 것은 유명한 이야기라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본기 12권, 표 10권, 서 8권, 세가 30권, 열전 70권으로 총 130권에 달하는 거대한 분량의 역사서를 썼고 동양 문화권의 역사서의 기틀을 마련한 셈이니 참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역사를 저술한 이븐 할둔이란 사람은 사실 처음 들어봤다. 당연히 아랍 문화권에도 역사서가 있겠지만, 워낙 아랍 역사는 알지 못해서 역사가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이슬람 문화권은 모하메드가 했던 몇몇 일들과 수니파, 시아파로 나뉜 이유 정도밖에 모른다는걸 다시 깨닳았고 아랍 역사도 공부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꼭 양질의 책을 찾아 공부해봐야겠다.
여기까지는 책의 초반이었다.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역사가가 가져야할 자세를 설명해주는, 역사학자들에 대한 설명이 많이 나왔다. 19세기 독일에 살았던 레오폴트 랑케는 평생을 역사 저술에만 매달렸으며 역사가의 역할을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라고 했다. 카를 마르크스는 역사를 분석하며 과거의 사실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일어날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것에 중점을 뒀다. 사실 나는 카를 마르크스가 역사를 논하는 곳에 들어가야 하는지도 의문이지만 내 지식이 너무 짧아 모를 수 있고 '공산당 선언'도 읽어보진 않아 얘기할 수 없다. 그 다음은 민족주의 역사학에 대해 설명을 했고, 내가 읽어보려던 '역사란 무엇인가'의 에드워드 카의 경우 랑케와 전혀 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역사 서술은 단순히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지닌 에드워드 카는 결국 역사는 있는 그대로 알 수 없으며 그것을 기록하는 역사가의 생각과 관점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고 하였는데 매우 공감이 간다. 그와 비슷한 주장을 한 인물로 크로체란 인물이 있는데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 하였으며 역사의 본질은 현재의 눈으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역사를 있는 사실이라고만 생각했고 역사의 승자에 따라 역사의 기록은 바뀐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카의 말처럼 역사는 역사가와 떼어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같은 사료를 보고 기록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쓴다면 관점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 없는 대화이다
에드워드.H.카
위의 말처럼 역사는 다순히 과거의 사실을 시험 보듯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발견되는 사실에 따라 상대적으로 계속 바뀔 수 있으며 과거와 대화하듯 끊임없이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에 따라 배우는 것은 무엇이 있는지 따져가며 봐야 할 것 같다.
작가는 민족주의 역사학을 설명하며 우리나라의 일제 시대에 있던 세명의 역사가를 설명하고 있다. '한국 통사'를 쓴 박은식, '조선 상고사'를 쓴 신채호, '조선사회경제사',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쓴 백남운 이렇게 세 사람이다. 이 중 '조선 상고사'만 읽어보았다. 읽고 나서 다시 찾아보며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 내용도 있다고 하여 마냥 믿음이 없이 넘어갔었는데 이 책의 시작에 작가가 쓴 글을 보고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다.
우리가 옛 역사서를 읽는 것은 새로운 정보나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남긴 이야기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 51페이지
역사적 사실만 얻으려면 최근 연구자료까지 포함된 한국사 시험 자료가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내가 약 100년 전에 쓰여진 책을 읽으며 사실 여부만 따진 것은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었단 생각이 든다. 신채호 선생님의 굳은 의지와 민족정신을 생각하며 읽었어야했다. 다음에 위에 언급한 책이나 다른 민족주의적 색채를 가진 역사서를 읽게 된다면 단순히 기록된 사실을아는데 그치지 않고 위의 말을 기억해보고 저자의 의도를 고려해보며 읽어야겠다.
뒤쪽은 좀 더 넓은 범위의 역사를 적는 좀 더 최근의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개별 민족이나 왕조, 국가가 아닌 '문명'을 대상으로 역사를 연구한 토인비나 슈펭글러의 설명을 듣고 책을 읽어보고 싶었으나 너무 양이 많다고 하여 읽는 것은 포기해야겠다. 그 후 요즘도 많이 읽고 유명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도 언급하고 있다. '총, 균, 쇠'는 이런 빅히스토리를 처음 읽어봐 너무 흥미를 가지고 읽었고 '사피엔스'는 요즘 읽고 있는 책이다. 20세기 후반 들어서는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며 역사를 각각의 국가나 왕조로 따지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인 발전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하는 인류사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이것도 역사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보니 새삼 신기했다. '사피엔스'를 읽으며 그런 관점도 생각을 해보아야겠다.
난 '총, 균, 쇠'를 읽고도 단순하게 지식적인 측면만 생각했는데 저자의 통찰력이 새삼 다시 느껴졌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역사 기술에 대해 썼지만 역사가가 취해야 할 자세, 태도를 쓴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표지에 쓰여있듯 '국가란 무엇인가'의 역사 버전이다. 필체도 좋고 너무 어렵거나 힘든 내용도 요약을 잘 해주어 나처럼 너무 모르는 사람도 잘 읽을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저자가 에필로그에 '이름난 왕궁과 유적과 절경 사이를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잠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인증 사진을 찍는 패키지여행과 비슷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패키지 여행이 어디있나? 이정도로 알차게 설명을 듣고 지나간다면 패키지 여행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역사 서술의 역사를 기록한 이 책은 역사를 왜 배워야 하고 어떤 자세로 바라보는 것이 좋은지 고민하게 만든 좋은 책이다.
맨 처음 읽었던 유시민의 책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 였는데 그 책은 전형적인 세계사를 나열한 책이 아니라 드레뷔스 사건으로 첫 내용을 잡은 책이었다. 그래서 유시민이라는 작가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되었고 그거 때문에 이 책을 구입해서 읽게 되었다. 헤로도토스부터 마지막으로는 제레드 다이아몬드까지 수많은 역사학자들의 역사서를 쓰는 관점과 역사서의 내용들을 알 수 있었고, 역사학자들의 철학에 대한 작가의 설명도 나쁘지 않았다.
가장 기억남는건 사기에 대한건데 사마천은 수많은 사건들을 분석해서 패턴을 알아내고,드러낼려고 노력을 했고, 사건이 아니라 인간에 초점을 맞추려는 걸 보고 평범한 역사학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책은 한계는 (저자도 이것을 인지하고 있으며 에필로그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동서양의 역사가 16인과 그들이 쓴 역사서 18권을 전부 다 읽었다고 자만을 갖고 있으면 안된다. 내가 이 18권의 책 중 책을 사서 직접 읽은 것은 ‘역사란 무엇인가.’와 ‘사피엔스’ 뿐이다. 그 2권의 내용을 서평한 저자의 책과 직접 읽는 것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이다. 예를 들어 2시간의 헤리포터를 보는 것과 유튜브에 그 내용과 결말까지 설명 되어 있는 15분의 영상이 있다고 하면 둘 중 어느 것을 봐도 결말을 알 수 있지만 그 몰입도와 같은 것은 조금 결이 다르지 않은가. 이 또한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이 책 말고 책 18권을 읽으세요!가 아니다. 이 책은 18권의 책에 대한 내용을 얻기 위함이 아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게 해 주고 내가 잘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저자가 예를 들어 설명 해 주기 때문에 ‘패키지 여행’ 같은 느낌이 물씬 난다. 이 책은 서사의 힘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만 정확하게 안다면 이 책을 조금 알았다라고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사실, 이북을 접한 뒤로 종이책을 잘 읽지 않습니다. 어디에서나 읽을 수 있고, 보관이 필요 없다는 점에서 이북이 좋아서 이북만 구매하고 있었는데... 왠지 이 책은 제대로 소장하고 싶어서, 종이책으로 구매 했습니다. 코로나때문에 주말에 집에만 있어서 주말동안 읽었는데, 코로나 덕분에 좋은 책을 읽을 시간을 얻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 말주변이 좋지 않아서 책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제대로 된 평은 좀 어색합니다. 단지, 유시민 작가님답게 쓰여진 글입니다. 평소 작가님을 좋아했던 분이라면 좋게 읽으시리라 봅니다. 추천합니다!
역사의 역사 리뷰) 코로나19 때문에 방구석에 쳐박혀 있는 동안, 예스24에서 이북을 15일간 무료로 대여해줬을 때 역사의 역사를 읽었다. 그때 다 읽지 못했는데, 뒷 내용이 궁금해서 구매했다. 유시민 작가님의 책은 어떻게 살 것인가? 를 시작으로 하나씩 읽고 있는 중이다. 어려워 보이는 제목이지만, 이야기하는 것처럼 쉽게 설명해주는 글이라서 좋았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의 역사는, 역사에 대해 역사가 혹은 역사학자가 서술한 역사서에 대한 해설의 책이다. 지식소매상이 되고 싶다고 밝힌 유시민 작가의 바람에 맞게, 보통 사람들은 평생동안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면 손대기 어려운 전문 역사서들에 대해서 간략하고 쉽게 설명해 주는 책이다. 유시민 작가님 특유의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주는 설명 덕분에, 역사에 관심이 있어서 역사서들을 한 두권이라도 읽어본 사람 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기서 소개된 책들 중에서 과학서인 '창백한 푸른 점'에 제일 꽂혔지만 말이다. ㅎㅎ
이 책을 읽고 나니 '역사는 승리자들의 기록이다' 라는 명제가 사실 70% 정도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어찌되었던 현재를 사는 우리가 과거를 알기 위해선 남아 있는 자료들로만 유추할 수 밖에 없는데, 당시에 권력을 장악했던 사람들이 본인들에게 유리하도록 기록을 남겼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서이다. 우리는 남은 기록들을 이리저리 배치하며 과거를 유추하고, 시대적 사건들에 대해 해석을 한다. 어떤 관점을 가지고 가치관을 가진 역사가인가에 따라서 같은 사건을 다르게 해석하는 일도 발생한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일을 실시간으로 접하지만 극단적인 양극단 사람들은 다르게 해석하며 두 부류로 나뉘어 싸우는데, 과거의 일들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있었던 그대로 되살리는 것은 더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우리의 거울이자 또 우리의 미래라는 것. 그렇기 위해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은 다시 한 번 더 깨달을 수 있었다.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
공부하는 마음으로 선택한 책이다. 방대한 인간의 역사, 인류의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마스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이 책을 통해 역사에 대한 지식인의 시선은 어떠한지 알고 싶었다. 작가 유시민이 평생을 걸쳐 탐구해온 과제인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깊은 답을 찾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한다. 내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 또한 인류의 역사를 통해, 한 사람의 인간인 나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지 궁금하고 그 해답을 찾고 싶기 때문일터이다.
역사가 항상 우리에게 '너 자신을 알라'라는 의미를 전달해주는 것이라면 우리는 항상 나 자신에 대해 모른 채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일까?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떻게 가야할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 추상적인 발자취를 찾기 보다 바로 나 자신의 발자취를 만들어가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예전에 작가님께서 쓰신 거꾸로 읽는 세계사와 비슷한 역사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막상 열어보니 제목 그대로 역사의 역사네요.
사실로서의 역사보단 기록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책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겨 시절까지 배워왔던 역사들이 생각났습니다.
이 역사들 모두 역사가들의 어떤 역사관들이 반영되어 있었을텐데 그 생각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게했습니다.
가장 좋았던 파트는 민족주의 역사학자들 파트었습니다.
역사의 역사를 찾아 먼 발자취를 짚어보고 그 너머에 숨어있는 역사가들의 삶도 살펴볼수 있어 좋았다...
그 옛날에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실들을 누구 쓰냐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이런 기록이 남아 있어 우리가 읽어볼수 있고 미래를 생각해 볼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역사...
역사는 어떻게 씌여졌는지.. 사실을 쓰지만 그 시대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역사는 읽으면 읽을수록 신비롭고 어느 시대나 반복되는 인간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빛과 그림자같은 욕망이 있어 삶이 지속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것 같다...
문자가 없었다면 우리가 이런 역사를 알고 무언가 깨달음과 배움을 알수 있었을까...
평소에 잘 들어보지 못한 역사가들의 삶과 역사의 역사를 읽을 수 있어 한뼘 커진 느낌이다...
잘 읽었어요...
유시민 작가님의 역사의 역사입니다.
그냥 역사책인 줄 알았는데 책 소개에서 역사서술의 역사라고 밝히고 있습니다.누가 처음으로 역사를 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말 당연하면서도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말이다. 어떠한 반박을 할 수도 없고, 군더더기도 없는 그러한 말이다. 역사는 역사가의 성향이나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에 따라서 아주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키케로는 '이야기'를 중시했고, 랑케는 '사실의 기록'을 중시했고, 다른 역사가들도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기술했다. 어쨌든 이러한 다양한 역사가들의 이야기를 종합적으로 비교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데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E.H.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대학교 1학년 수업시간에 처음 접했다. 막상 역사를 전공하겠다고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 접한 지적경험은 '회의'였다. 어린 마음에 교과서에 나온 역사적 사실들은 모두 '참'이라고 믿고 살았던 시절에 CARR선생이 던진 이야기들은 좀 이해하기 벅찼더랬고, 그때로부터 곱하기2의 나이를 훌쩍 지난 지금도, 적어도 '현재'는 '사실'을 알지 않을까 하는 착각, 적어도 뭔가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을 종종 하고 있다. 이만큼 나이를 먹고서야 뭔가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게 얼마나 주제넘은 일인지를 삶을 통해 알아가고 있으니, 철이 늦게 드는 타입인 거 같다. 그나마 저자도 책속에서 그건 불가능하다고 해주었으니, 위로가 될 뿐이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인지하는 수준에서, 경험하는 범위내에서 이해할 뿐이고, 시대를 뛰어넘는 사람은 없다. 언제나 '현재'가 고대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기술이 발달할 수록 고대의 기록에서 발견되는 범위가 더 많아질수록 고대사가 새로 쓰이는 것처럼. 저자는 교양인(?)이라면 한번쯤 접해봄직한 역사서와 그것을 기록한 역사가 또는 역사학자들을 정리하여 소개했다. '화자'가 각자의 시대적 소명에 맞추던 거부하던 간에, 무엇을 남기고 싶어했는가에 따라 후대는 그시절을 소환할 뿐인 거다. 또 역사서술의 단위도 작게는 선택받은 부족에서 문명과 사피엔스 전체 인류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어갔다. 어느 민족의 역사시대에서 인류역사시대로 접어듦이 아닐런지...새삼스럽다. 뭔가를 완벽하게 알고 이해하는 게 없다는 것.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지 않을까. 어떻게 그랬을까, 라기보다 그럴만한, 내가 알지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 일들이 태반인 거다. 그때는 '회의감'이 들었다면, 지금은 '연민'이 든다. 진정한 '참'이란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게 신의 영역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 지금의 '인식'이라는 것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좀 인용하면, 국제전이든 내전이든, 폭력을 동원한 집단적 충둘은 모두 인간의 능력과 사회 조직사이의 부조화때문에 일어난다.(52P) 이슬람문명에는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으며, 역사는 그 어둠의 진원지를 이슬람의 교리 그 자체가 아니라 종교와 세속권력의 결합에서 찾으라고 말한다. 중략 이슬람과 폭력의 연결고리는 교리 자체가 아니라 종교와 권력의 결합에 있다(106~108P) 14세기 이슬람문명과 중국문명은 만나지 않았다. 중략 그런데도 두 문명의 지식인들은 국가권력의 존재의미, 군주와 백성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서 거의 동일한 윤리적 규범을 만들어 냈다. 무엇이 모든 문명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최소한의 윤리를 만들어 내는가? 바로 사피엔스의 본성이다. 중략 헌팅턴은 미래에 지구제국이 탄생한다면 그 정신적 기초는 이러한 최소한의 윤리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114P) 우리는 몸담고 사는 현재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70억이 넘는 인간의 복잡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지구촌의 현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주민이 몇 만명 정도인 도시 하나도 거기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다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현재를 '있는 그대로'인지할 수 없다면,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인지하기는 더 어렵다(136P) 서사의 힘을 지니지 못한 책은 어느 장르든 오래가지 못한다(219P) 엄청난 능력을 보유한 사피엔스가 계속해서 부족본능에 따라 행동할 경우 맞게 될 결과는 지구환경의 극적인 변화와 인류의 절멸이라는 것을 과학자들은 확실한 데이터와 이론으로 논증한다. 인류사는 이처럼 사피엔스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이 인류생존의 필수조건이 된 시점에서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