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멋진 신세계
저자 : 올더스 헉슬리
출판사 : 소담출판사
난 원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즐겨 읽지 않는다. 중고등학교때부터 비문학 서적을 좋아했고, 문학 서적은 입시 관련해서 억지로 읽었을 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런 성향은 비슷해서 과학, 역사, 경제 등 서적만 읽고 추리소설만 조금씩 읽었다. 그러던 중 서평단에 당첨되어 오랜만에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게 되었다. 예전에 읽어보았고 줄거리도 알고 있었지만 정말 오랜만에 읽어본 '노인과 바다'는 내 기억에 남은 것보다 더 좋은 책이었다. 이를 계기로 고전 명작들은 다시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그러던 중 어느 방송에선가 언급하고 넘어간 '멋진 신세계'란 작품을 구매해서 읽게 됐다. 역시나 명작은 아쉬움을 주지 않았다.
포드 자동차가 만들어진 해를 기원으로 삼는 미래 세계에서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미래가 결정된다. 소위 지배층으로 살아갈 알파 계급부터 단순한 공장 노동을 위해 태아 시기부터 독소를 집어넣어 지능이 발달하지 못하고 단순 작업만 할 수 있게 태어나는 엡실론 계급까지. 이 미래에서 여성은 임신을 할 필요가 없다. 아니 혐오스럽게 생각된다. 시험관 속 난자를 배양하여 인공배양되어 나오는 사람은 계급이 낮아지면 키도 작고 왜소하게 태어나게 된다. 알고 있는 것도 적고 지능도 적은 듯 하다. 어느 한계까지는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으며 아이를 낳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결혼도 없어진 세계이다. 업무 시간 외엔 '소마'라는 약(일종의 마약과 비슷하다. 먹으면 근심과 걱정, 우울함 등이 사라진다)을 먹으며 장애인 골프 등 운동을 즐기거나 자유롭게 아무 이성과 성생활을 즐기며 살아가며 모두들 고독을 즐기지 않는다.
가족의 개념도 없고 아버지, 어머니 등의 단어는 혐오를 느끼게 하는 단어가 된다. 감정도 컨트롤 당하며, 생 후 수개월부터 시작된 최면 교육으로 인해 인식의 다름이 없이 어느 정도 생각이 획일화되어있다. 왜 다른 것이 안되는 것인지 왜 계급이 있는지 하는 문제들을 아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알파 플러스 계급으로 태어났지만 키가 작고 왜소하여 태아 시기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버나드가 중심이 되어 이야기는 시작된다. 버나드는 '소마'를 복용하는 것을 싫어하고 고독을 즐기고 싶어한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도 없다. 그러던 그가 아름다운 여인인 레니나와 미국의 야만인 보호 구역으로 휴가를 가게 된다. 그곳에서 기존의 문명 구역에 살다가 사고로 보호 구역에 거주하게 된 린다와 그녀에게 태어난 아들인 존을 만나 함께 돌아온다.
현대 사회에 환멸을 느끼던 버나드는 '야만인' 존을 데려와 큰 인기를 끌게 되고 점점 그 인기에 빠져들게 된다. 존도 처음엔 이 문명에 빠져드는 듯 했지만 점차 반감이 생기게 된다.
이 책에서 그린 미래는 생각보다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여가를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을 행복이라 느끼고 살아가지만 이것이 실제 행복일까?
본문 중 나오는 내용이 여기서 고찰하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선 행복과 고급 예술 가운데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는 예술, 그 중 글쓰기를 추구하는 등장인물에게 전하는 메세지일 뿐이다. 행복과 과학, 행복과 자기 선택 등 다른 것에 빗대보아도 비슷하다. 현대 사회는 범람하는 미디어 속에 오히려 본질을 잃어버렸고, 그런 미디어 속에선 중요한 메세지를 받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하면서 살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미래와 어느정도 일맥상통할 순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계급이 정해졌고 '소마'라는 약으로 개인의 감정을 컨트롤하지는 못하지만, 태아 시기 미래를 결정하는 것도 DNA 조작이 가능해진 현재를 보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위의 문장을 보면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선을 한다고 말하는 '야만인' 존에게 통제관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한다고 한다. 정말 아이러니하다. 나만의 개성, 다른 사람과의 다름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불행해질 권리인가? 최근 떠오르는 권리(?)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과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930년대는 산업 혁명 이후 일어난 부작용, 소련의 잘못 실현된 마르크스주의 등 전체주의가 팽배해 있던 시대이고 지금은 개인의 자유를 먼저 이야기하는 시대이다. 이렇게 사회적 배경이 다른데도 현대 대중들이 원하는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저자가 생각하는 바가 얼마나 깊었으며 통찰력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 하다.
이 책의 통제관은 행복과 개개인의 개성, 자유 등을 양자택일하라고 한다. 하지만 사회는, 개인의 행복이나 나아갈 방향은 이분법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은 직업과 비슷한 수입, 비슷한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으면 좋겠지만 모든 사람의 행복의 조건은 그렇게 한가지 틀로 맞출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전혀 다른 미래를 그린 조지 오웰의 '1984'가 생각난다. 이 책도 조만간 읽어봐야겠다.
1984, 우리들과 함께 3대 디스토피아 소설인 멋진신세계를 드디어 읽었다. 이 책은 작가 올더스헉슬리가 1932년 600년 후의 미래사회에 대해 예견하고 쓴 소설인데, 이런 배경지식이 없었다면 그냥 요즘 나온 소설이라 착각했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멋진신세계 속 인간세계는 장기간 대전쟁 끝에 거대한 세계정부의 지배를 받으며 인공수정을 통해 태어나는데, 출산이전부터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으로 계급이 나뉘어져 해당 계급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조작된다. 산소공급량으로 뇌 능력을 조절하고 수면암시를 통해 세뇌 시키며 인간을 인간이 아닌 부품의 하나로 여긴다.
가족간 유대가 사라지고 불멸까진 아니지만 노화도 병도 근심도 없는 이 세계는 계속 유토피아라고 주장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소설은 디스토피아 소설로 분류된다. 죽음은 절대 무겁지 않은 웃고 넘길 수 있는 가벼운 것이며 꽃과 책은 혐오해야하는 대상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무시되며 자유와 쾌락, 통제만 남아있다.
야만인 '존'이 포드 시대에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고립되어 자살을 선택했듯, 멋진신세계 속에서 같은 야만인으로 분류될 나 또한 이 세계에서 적응하지 못할 것 같다. (어머니가 없는 그들에겐 당연하지만) 어머니는 어머니라 불리지 못하고 '어아무개'가 되고, 사랑 받고 자라야할 어린이들은 세뇌를 통해 주입된 감정을 배운다. 사람이라기보다 로봇이 더 어울리는 세계를 보며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지켜야할 선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존엄성을 지키고 자연스럽게 감정을 배우고 책을 통해 자유롭게 사유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며, 그것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것도 말이다.
<읽은 기간: 2023.2.7~3.1>
1932년에 지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인 이 소설은 인간을 대량생산한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이 대량생산하는 세계에서 사람들은 본인 등급에 맞는 일을 하고 또 성적 억제 없이 원하는 타인과 모두 성관계를 하며 가족이 없는 삶을 산다. 언뜻 들으면 불행할 것 같지만 이 신세계는 소마라는 마약을 먹고 너무나 행복하고 걱정 없이 살아가는 사회이다. 그런데 별 탈 없이 돌아가는 세계에서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온 사람인 ‘존’이 나타나면서 사회에게 질문을 던지고 또 읽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를 끝을 맺는다.
앞 문단에서 충격적이라는 말을 했는데, 나는 이 소설의 설정을 보고 너무 놀랐다. 최근 디스토피아 소설이 많고 또 SF 소설이 많기 때문에 1932년에 지은 고전 소설이 상상한 세계관이 이렇게 촘촘하고 기괴할지 생각하지도 못했다. 계급사회는 생각할 수 있었지만 인간을 계급에 맞게 성장시키기 위해서 고전적 조건형성 교육, 수면 시에 듣는 교육 등등 앞에 100페이지 정도가 다 설정에 관한 내용인데 최근에 나온 소설보다 훨씬 더 소름끼친다. 아니 소설뿐 아니라 영화 등 각종 매체에서 나오는 설정보다 더 자세하고 잘 구현해놓았다. 그리고 또 캐릭터 또한 상당히 현실적인데 존이라는 인물이 나타나면서 하위 계급인 엡실론이 혁명을 요구했거나 인간적인 대우를 요구했다고 할지라도 소설이라는 형태를 빌려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엡실론들은 소마를 먹고 다시 잠잠해지고 또 깨어있는 인물인 다른 사람도 그 신세계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점을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존의 마지막 결말 또한 너무 현실적이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렇듯 작가가 소설 속 인물까지 현실적으로 그려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인간이 한 사회의 기계처럼 살아가고 인간성을 잃어가는 세계를 경고하고 싶어서이지 않았을까. 인간성 하니까 떠오르는 책이 하나 더 있다. 비록 같은 소설은 아니지만 프리모 레비 저인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자전 에세이인데, 여기서도 인간성은 무엇인가를 내가 결정하는 자유에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결정하는 자유가 나를 인간으로 결정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과연 지금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인간성을 잃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원하는 바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여기에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은 얼마나 들어있나. 매체와 언론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취향을 아는 것처럼 광고하고 유행에 뒤처지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방송한다. 이런 광고 홍수 속에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 소비하는 것이 인간성을 다시 회복하는 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며 이 소설의 리뷰를 마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느긋한 두 개의 나침반 바늘처럼 두 발은 전혀 서두르지 않고 오른쪽으로 돌면서 북쪽, 북동쪽, 동쪽, 남동쪽, 남쪽, 남남서쪽을 가리켰다. 그러더니 잠깐 멈추었고 몇 초가 지난 다음에 서두르지 않고 다시 왼쪽으로 돌았다. 남남서쪽, 남쪽, 남동쪽, 동쪽... P.389
『우리들』, 『1984』와 더불어 디스토피아의 대표적인 소설로 꼽히는 『멋진 신세계』의 끝은 작중 야만인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하며 마무리된다.
『멋진 신세계』는 미래의 문명 세계를 거침없이 그려내는데, 이 세계에서는 계급이 나누어져 있고, 계급마다 역할과 직업도 모두 정해지게 된다. 특히, 하위 계급인 아기들에게 세뇌 교육을 시키면서 책이나 꽃에 대한 거부감을 형성시키는 장면은 참으로 끔찍하면서 가슴이 아팠던 부분이었다. 인간미와 도덕성 따위를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사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격렬한 폭음이 울렸다. 더욱더 날카롭게 사이렌이 우렸다. 비상 종소리가 미친 듯 울려댔다. 아기들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고, 그들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졌다.’ P.54
특히, 어머니와 아버지, 결혼 등과 같은 현대의 전통 가치가 미래 사회에서는 불경스러운 금기어이며, 상대를 바꾸어가며 갖는 섹스는 현재의 일부일부처체의 가치와도 매우 상충된다. 이러한 전통 가치는 ‘야만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원시 보호구역에서만 희미하게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한편, ‘야만인’과 ‘섬 사람들’이 아직 존재한다는 점에서 완벽한 전체주의 세계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어떤 작은 희망의 씨앗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 하다.
또한, 소마라는 일종의 마약을 정부에서 주기적으로 지급함으로써 사람들은 노동하고 여가(소마를 통한 마약성 쾌락을 곁들인….)를 누리며 현 체제에 대한 불신감이나 어떠한 삶에 대한 목적 의식없이 그저 그렇게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왜냐하면 정부의 초엘리트 통치 계급이 고전 문학과 과학 이론, 철학 등 세계에 대한 사유와 자기 존재에 대한 반성의 기회를 제공했던 도서를 금서로 지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서로 굳이 지정하지 않아도 현 체제 내의 사람들은 대부분 현재의 삶에 만족하기 때문에 그럴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왜 그것이 금서가 되었나요?” “오래된 책이라는 사실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곳에서는 낡은 것들은 전혀 쓸모가 없으니까요.” P331.
“그건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오셀로』의 세계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P332.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도 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의 가치로 보면 ‘야만인’은 우리와 가깝고, ‘문명인’은 우리와 매우 다르다는 생각을 당연히 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미래에 태어난 ‘문명인’의 입장이 되었다면 과연 어떠할까? 결국에는 내가 누릴만한 충분한 의식주가 주어지고 적당한 노동과 보상이 주어진다면 현 체제에 순응하여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러한 미래 사회에도 모든 역사에서도 그랬듯이 진리를 찾고 체제의 모순을 발견하려는 어떤 선지자가 나타날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이 작품은 작중 ‘문명인들’의 삶으로 실제로 다가올 수 있는 암울한 미래의 모습을 묘사하였다는 점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직도 사랑받고 있는 것 같다. 1932년작임에도 불구하고 성 선택의 자유성으로 인해 해체되어 가는 가족 체제, 세계적으로 문제시되고 있는 마약 문제, 날이 갈수록 극대화되어가는 계층 불평등, 과학 기술과 윤리와의 상충 문제 등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미래 사회의 문제점 등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다. 한번쯤은 읽어봐야 할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적극 추천한다.
나는 SF 장르에 흥미를 못 느끼는 편인데, 또 가끔은 디스토피아적인 내용을 보면 사족을 못 쓰기도 한다. 상반기 인생 책으로 꼽았던 <만들어진 아이들>과 <멋진 신세계>가 그렇다. 전자의 책은 (완전히 SF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디스토피아적인 설정) 그런 스타일의 책에 흥미를 느끼게 해 주었다면, <멋진 신세계>는 SF/디스토피아 배경의 글을 쓰고 싶게 만들었다. 실제로 구상해서 짧게 써 보았고, 추후 장편으로 발전시켜 투고해 볼 요량이다.
각설하고, <멋진 신세계>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체계적인 세상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인간을 생산하고(정량에 맞게) 계급화하고 적절하게 세뇌시킨다. 인간 전부가 톱니바퀴가 되어 각자의 자리에서 하염없이 돌아가는 세상. 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소마'라는 약물이 사용되는데 소마는 가장 기본적인 영양제와도 같아 먹지 않으면 이상한 취급을 받을 정도다.
<멋진 신세계>를 읽으면서 국가에서 철저하게 통제하고 은폐하는 것보다도 '소마'를 활용해 사람들을 잠식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소름이 끼쳤다. 생각해보면 우리 현실에도 소마와 같은 무해한 음모가 구석구석 스며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그다지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망각하기 쉬울 뿐이지. 눈에 드러나지 않는 계획들이 사실은 사회 전반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아직 통찰력이 부족해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어쩔 수 없이 불편러가 되는 것 같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불편러가 되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유별난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 속 주인공이라면? 주인공은 언제나 모두 괜찮다고 하는 세상에서 티끌이라도 바꿀 점을 찾아낸다. 그로 인해 이야기의 흐름은 요동친다. 그러니, 우리도 일상 속에서 '소마'를 찾아내어 경계할 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소마란 비단 소설에서처럼 알약의 형태, 직관적인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닐 테니까.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이라는 멋진 신세계 읽으면서 스트레스 받는 부분도 존재했지만 쓰여진 시대 년도를 생각하면 그 상상력에 더 감탄하게 된다 정확히 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그 흐름대로 가고 있는 것을 느낀다 다만 이때보다 더 자란 현대인들은 어떤 미래를 만들어낼지가 궁금해졌다 순응하기보다는 저항하고 작은 사람들의 흐름과 힘을 믿는 사람들이 더 늘어났기에 공부하는 것을 멈추지 말고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 희망적인 미래를 그려 본다 그리고 많이 사색하고 사유하고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오웰의 <1984>와 함께 오늘날 가장 유명한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1984>가 군홧발로 짓밟는 전체주의를 그리고 있다면 <멋진 신세계>는 유전자 조작과 세뇌를 통해 인간 스스로 복종하는 세상을 보여준다.
<멋진 신세계>의 시대적 배경은 포드 기원 632년이다. 여기서 포드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회사 창립자인 바로 헨리 포드이다. 헨리 포드가 태어난 1863년을 인류의 새 기원으로 설정하고 있다.
과학기술과 대량생산은 <멋진 신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인간 역시 고도의 과학기술을 통해 공장의 자동차처럼 대량 생산된다. 하나의 난자에서 96개의 태아가 만들어진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간 능력이 정해지고 수면 학습과 세뇌로 지식과 정보가 주입된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계급과 직업이 정해진다.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품처럼 출하되는 것이다.
계급은 있지만 계급투쟁은 없다. 세뇌를 통해 모든 인간은 자신의 계급에 만족하며 산다. 델타와 엡실론이라 불리는 하위 계급은 유전자 조작으로 지적장애를 갖고 태어난다. 애초에 저항할 능력이 없다.
경쟁도 없고 욕망도 없다. 더 갖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덜 빼앗기기 위해 옆 사람을 짓밟지 않아도 된다. '만인은 만인의 소유'라는 기치 아래 사랑의 감정은 자유 섹스로 대체된다.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거나 사랑을 잃을까 봐 슬퍼하는 일도 없다. 아이들은 실험실에서 태어나고 가족이라는 개념도 없기에, 가족 간의 질척대는 지긋지긋한 감정 소모도 없다.
완벽한 질서 속에서 그저 눈앞의 안녕과 쾌락을 추구하면 그만이다. 촉감 영화를 통해, 자유연애를 통해, 그리고 '소마'를 통해! 삶은 언제나 주어진 것이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책임진다.
사람들은 이런 사회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당연한 것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 혹여 슬픔과 같은 나쁜 감정에 빠지면 국가가 지급하는 '소마'라는 마약을 먹는다. 그럼 극도의 평온과 행복이 찾아온다. 이 얼마나 멋진 신세계인가!
<멋진 신세계>는 우리가 상상하는 천국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인간은 안녕과 쾌락이라는 달콤함과 인간의 존엄성 사이에서 방황하고 흔들리는 존재이다. 소설은 인간 존엄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서슴지 않는다.
근데 재미없다. 설정은 있으나 이야기의 구조와 서사, 그리고 인물의 밀집도가 약하다. 유전자 조작과 유아-습성 훈련을 통해 자란 인물들만 등장해서인지는 몰라도 모든 캐릭터가 작가의 꼭두각시처럼 행동한다. 살아 있는 캐릭터는 단 하나도 없다. 심지어 야만인 존마저도 셰익스피어로부터 세뇌당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 같아 아쉽다(존은 셰익스피어 작품을 다수 읽은 인물로 등장한다). 이야기 말미에 '신세계'와 '야만인 보호구역'을 선택하면서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인 양, 두 가지 선택만이 그에게 주어진 것처럼 행동한 점은 작가 스스로도 허점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고전은 훌륭한 책이라는 공식 앞에서 늘 위축되곤 하는데(솔직히 고전은 대부분 지루하다), <멋진 신세계>는 김치찌개 냄비 받침으로 쓰고 싶다. '멋진 신세계'의 유일한 볼거리는 작가가 고안해 낸 미래 세계이다. 근데 그게 전부다. 작가는 스스로 창조해 낸 세계에 너무나 감탄했는지 혼자 흥분해서 이야기 자체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것 같다.
작가는 분명 자신이 고안해 낸 세계에 집착하고 있는 듯 보인다. 소설은 소설로 존재할 때 의미가 있으며, 소설에 대한 코멘트는 독자에게 맡겼을 때 더 가치가 있다. 헉슬리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가 곧 도래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1932년에 '멋진 신세계를 집필한 헉슬리는 '1984'가 1948년에 출판되자 오웰에게 편지를 썼다.
통치의 수단으로써는 몽둥이와 감옥보다 유아-습성 훈련과 마약성 최면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노예 생활을 좋아하도록 사람들에게 암시를 주어 유도함으로써 채찍질과 발길질로 복종을 강압하지 않으면서도 권력에 대한 자신들의 욕망을 철저하게 충족시키리라는 사실을 다음 세대가 끝나기 전에 세상의 지도자들이 깨닫게 되리라고 나는 믿어. 다시 말해서, '멋진 신세계'에서 내가 상상했던 바와 훨씬 닮은 세상의 악몽으로 '1984'의 악몽이 필연적으로 바뀌어가리라고 나는 느낀다네. 그런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능률성을 높여야 한다는 절실한 필요성의 결과겠지.
물론 현대 사회는 헉슬리가 상상한 대로 자유연애 중(생식이 아닌 그저 즐기기 위한 섹스)이며, 태아가 시험관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마음의 안정을 위해 약물에 의존하고 자본의 노예로 살고 있다. 헉슬리는 현대사회가 점점 자신의 예언대로 되어가는 과정을 주시한다. 그런데 대관절 그게 무슨 상관인가. 세상은 헉슬리가 말한 대로 흘러갈 수도 있지만, 그와 정반대로 흘러갈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예언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 투영되는 메시지가 여전히 통용되느냐 아니냐일 것이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해 소설이 재밌느냐, 재미없느냐이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멋진 신세계>가 어떻게 고전이 되었는가에 대해. 그래도 고전인 데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보다 보니 <멋진 신세계>가 고전으로 남은 이유가 '독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의 요소 중에는 독자도 포함되지 않던가. 헉슬리가 스스로 도취되어 창조한 세계는 어떤 면에서 우리 인간이 바라는 세계이기도 하다. 이 점이 논란을 만들고 새로운 해석과 수세대에 걸쳐 다양한 코멘트가 소설의 허점을 메우고 성장시켜 온 것 같다.
니체가 말했다. 삶은 괴로운 거라고. 괴로우면 '소마(소설에서 고통을 없애주는 알약)'와 같은 술이나 오락, 어떤 사람들은 마약에 기대고 싶어 한다. 사랑의 감정 대신 아무 이성과 마음껏 잠자리를 할 수 있는 세계. 지겨운 공부 따위 하지 않아도 최면 학습만으로 가능한 세계. 바로 고통이 없는 세계, 오직 쾌락과 행복, 그리고 평안과 안정만 존재하는 세계. 우리가 수천 년부터 바라던 천국이나 이데아의 바로 그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소설 <멋진 신세계>가 아니던가.
헉슬리는 이데아가 하늘에 있다고 하지 않았다. 정말 그럴싸하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 상에 천국이 곧 강림하리라 예언했다. <멋진 신세계>는 정말 성경의 천국과 흡사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개의 사람들은 어떤 모습인가. 독자들은 혼란스러웠다. 이데아가 어쩐지 불편해 보였다. 인간의 모든 욕망이 해결된 세계가 불쾌했다.
독자들은 질문한다. 인간 존엄이 사라진 초공리주의는 과연 참된 행복을 가져오는지에 대해.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선뜻 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멋진 신세계>는 분명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은 후에 나왔다. 극도의 혼란 속에서 사람들이 찾는 것은 안녕과 평온이다. 그게 설사 전체주의일지라도.
나이가 들수록 보수로 변한다는 말이 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차라리 전체주의를 그립게 만든다. 자유와 혁명이 거추장스럽고, 안정과 평안이 달콤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헉슬리는 분명 디스토피아를 경고하고 있지만, 나는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며 소설을 읽었다. 사실 세상은 모 아니면 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개도 있고 걸도 있다. 신은 없지만 존재하기도 한다. 세상은 잔인하지만 윤리라는 편견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고통은 목적도 없고 정당성도 없지만, 어떨 때는 인생의 달콤한 사과를 맛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늘은 천둥과 비바람을 내리기도 하지만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을 선물하기도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버나드 마르크스' 역시 양면성을 가진 인물이다. 저항 정신과 속물근성을 모두 갖고 있다. 버나드는 자유 의지에 대해 고민하지만, 결국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하자 그에 도취되어 <멋진 신세계>에 안착하고 싶어 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자유일까, 안정일까. 인간은 둘 다 갖기 위해 투쟁하는지도 모르겠다. 권력을 잡기 위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소설 <멋진 신세계>의 훌륭한 설정과 괜찮은 철학적 질문은 우리에게 충분한 즐거움을 준다. 인간의 욕망과 쾌락, 그리고 사회 질서가 고도로 안정된 사회에 대한 고찰을 통해 우리는 좀 더 나은 대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멋진 신세계>는 러시아 문학과 비교해 너무나 쉽게 잘 읽힌다. 이런 점들이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내 취향은 아니다. 두 번 읽고 싶지는 않다.
[멋진 신세계 - 올더스 헉슬리 - 한정효 역] 조지 오웰의 1984와 더불어 미래에 대한 소설로 유명한 작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1984와 비교하면 약간 지루한 느낌이 들게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모습이 오늘날과 비교하여 정확히 예측한 부분도 있고 다소 황당한 예측도 있기도 합니다. 전반부는 약간 지루하고 후반부가 좀 더 읽을 만 합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미래 문명사회의 위험성과 비판을 담고 있는 책으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책인 것 같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생활은 편리해져가고, 인류는 마치 신의 위치에 선 것 마냥 오만에 빠져 있지만, 이 책을 통해 인류의 오만함을 반성하고 인간성을 회복하며 주변 환경과 공존하면서 살아가는 인류로 변해가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입니다.
북클럽에 있지만 소장하고 싶어서 샀어요.
제가 좋아하는 고전으로는 죠지오웰1984 / 카프카 변신 / 까뮈 이방인 / 스키형의 죄와벌 / 르트형 구토 / 등등인데 특히나 디스토피아 적 느낌, 아포칼립스적 느낌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가상의 전체주의국가라든지 뭐 그런거요. 멋진 신세계도 그러한 저의 판타지를 만족시켜주는 부분이 있어서 좋았습니다요.
올더스 헉슬리 작가님의 [멋진 신세계]리뷰입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조지 오웰의 [1984]와 양대산맥으로 꼽히는 미래 문명 비판 소설이다.
[1984]의 경우 정부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공산당의 미래가 그려진다면, [멋진 신세계]의 경우 국민들이 너무 많은 정보에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미래를 그렸다고 생각한다.
두 책 다 정말 생각할 게 많아지고, 고전이 왜 고전인가. 수많은 책들 중 아직까지 살아남은 이유를 알게되는 책이었다.
책 읽어드립니다 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책을 소개해서 알게되었다. 줄거리 설명을 들은후 책을 사서 읽어 보고 싶어서 바로 구매를 했다. 이책이 1930년대에 쓰여졌다는것에 놀랬다. 놀랜이유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거,, 책속에서 인물들이 여러개의 계급으로 나뉘듯이 지금 현재도 계급이 존재한다. 다만 눈으로 보이지 않을뿐,, 책을 읽는동안 과거나 현재나 계급이 존재한다는것에 씁쓸하긴 했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있는가' 에 답을 주는 책 같다. 특히17장 부분은 스크랩 하고 싶을 정도로 와닿는 부분이 많았다.
알쓸범잡을 보다가 멋진신세계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예전에 읽었던 책인데 정확한 내용이 생각 안 나서 다시 읽었습니다.
국가가 주는 마약으로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사회, 여러가지 모습이 현재와는 다른 사회.
읽으면서 현실과 언뜻 겹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어서
'정말 그런 방향으로 가는 건가'하는 생각에 무서웠습니다.ㅋㅋ
서문에 나오는 말 중에
'미래를 다루는 책은 거기 담긴 예언이 실현되리라고 납득이 가는 경우에만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라는 말이 있어요.
헉슬리는 이런 걸 어떻게 상상해낸 걸까요ㅋㅋ 대단해요.
새로운 정부는 인간을 유전자 타입으로 나누어 철저한 계급사회를 형성한다. 인간 또한 기계처럼 양산되어 사회의 부품처럼 소비된다. 얼핏보기엔 '쿨'해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멋진' 신세계이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채 억압하는 사회의 이면을 알고 난 뒤에도 그저 현실에만 안주하며 '클'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현실의 부조리함을 인지할 수 있을 것인가는 자신의 선택이다.
tvn 요즘책방: 책 읽어드립니다를 통해 이 책을 알게되었습니다.
디스토피아적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인데 옛날에 쓰인 책 치곤 약간 소름돋을정도로 지금과 일치하는 몇몇의 모습들이 보였습니다. 나름 오래된 책이지만 현재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기에 충분히 읽어볼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가지 생각이 들던 책이었어요.
다만 번역때문인진 모르겠는데 중간중간 좀 안 읽히는 부분들이 있어서 완독하는데 좀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좋았습니다.
나는 모든 책을 독서모임 책이라 읽나보다...
SF소설을 사랑하지만 너무 발전한 과학기술을 사용하는 미래를 보는 건 무섭기 때문에(?ㅎㅎ)
그런게 나올 것 같으면 잘 못 본다. 그래서 멋진 신세계는 늘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지만
볼 생각은 못했는데 독서모임 책이라 억지로 읽었다ㅋㅋㅋ
생각보다 허접하게 발전한 과학이라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옛날에 쓴 책이라 그렇겠지!
많은 걸 생각해 볼 수 있는 멋진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