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공부가 취미이다. 더 나아가, 외국어 공부를 특기로 만들고 싶다. 여러 개의 외국어를 습관적으로 열성 반 의무감 반으로 대하고 있다. 물론, 나는 언어 천재가 결코 아니므로 모두 온전하게 구사하는 것은 애초부터 바라지 않았다. 소박한 꿈이 있었다면 좋아하는 도시를 여행하고 좋아하는 책을 원문으로 읽기를 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원대한' 꿈인가를 깨닫고 있다. 그러나, 이 어설프고 거침없이 용감한 꿈은 한 언어가 또 다른 언어를 불러들이는 대참사로 이어진다. 나 자신도 못 말리는 열광에 휩쓸리는 사이, 모든 면에서 외국어 독학은 내 삶의 원동력이자 나의 삶을 사랑하는 법임에 틀림없다,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 무엇을 위하여 무엇 때문에 나는 외국어 공부라는 밑도 끝도 없는 '늪'에 빠져 있는 걸까? 눈앞에 벌어지는 까마득한 현실의 일에 달라붙어 돌파구를 찾는 데에 총력을 쏟아야 할 판에, 아무 실익도 없어 보이는 이 희한한 언어의 세계에 빠져드는 걸까? '외국어 공부만 하는 바보'가 된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을 정식으로 대하다 보면 솔직히 불안해진다. 더군다나, 내 주변에는 이 일을 나무며 기쁨도 고민도 함께 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 문득 외로워지기도 한다. 그러던 차에 『아무튼, 외국어』를 발견한 순간 두 눈에서 불이 번쩍, 혹시 나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사람일까 기대하며 한자리에서 다 읽어 버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 공감'을 유지한 채, 저자의 경험담 속에서 나의 외국어 독학의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서문에서 "외국어를 단기에 마스터하는 방법 같은 것을 궁금해하시는 분들이라면, 여기서 책을 덮으시는 편이 훨씬 현명할 것"이라 명시해 둔 것처럼, 이 책은 학습법을 설파하지 않는다. (혹시 이를 기대하는 분이라면 여기서 이 리뷰를 닫으시라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오히려, 『아무튼, 외국어』라는 제목에서 그 어떤 저항과 고집 같은 것이 풍겨온다. 어떤 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외국어 공부를 취미 삼아 나름의 방식대로 잘 살아가자는 권유도 느껴진다.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일본어, 중국어 등 여러 외국어를 공부하며 느낀 점들과 그 언어의 특성들(성가시게 유별난 점들), 그 언어를 사용하는 도시의 여행, 그 언어로 쓰인 문학작품 또는 노래와 영화 등에 대한 경험과 의견을 술술 풀어 놓는다. 나도 바로 이 말이 하고 싶었다, 나도 바로 이렇게 생각한다... 연거푸 강력한 '옳소!'를 외치며 재미있게 감동적으로 읽는다.
◆ 이 모르는 말들이 어째서 나를 매혹시켰는지, 혹은 그 매혹이 문득문득 어떻게 다시 일상에서 발현되곤 하는지 더듬게 될 것 같다.
우선, 외국어 공부의 최강적은 '동사'라고, 시제가 나올 무렵에 고생문이 열리게 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외국어의 평화를 잠식하는 것은 대체로 동사라는 막강한 빌런의 공이 크다" "외국어를 배울 때 고생분이 열리는 지점은 그러니까 바로 이런 순간, 시제를 배울 때다"). 프랑스어의 난해한 시제 스펙트럼에 얼마나 좌절했던지! 발음이 편리하여 근심을 덜어주는 스페인어조차 시제에서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초급자용 교재에서부터 '완료 과거, 불완료과거, 과거 완료, 이렇게 과거가 무려 세 개로 등장하니 말이다.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모두 동사가 1~3군 동사의 세 무리를 갖고 있고, 각각 불규칙동사가 차고 넘쳐서 말 그대로 절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기에다가 1인칭 단/복수, 2인칭 단/복수, 3인칭 단/복수 저마다의 어미변화가 있다. 갑자기 영어가 너무 고맙게 여겨지며, 그다지 '쓸모없이 복잡기만 한' 타 외국어들은 '포기'하고 싶어지는 위기에 봉착한다. 이 시기만 꾹 참고 무덤덤하게 넘어가면 -내가 선택한 방법은 대표적 동사들을 무조건 소리 내어 읽기이다. 마치 구구단을 처음 외울 때처럼- 큰 어려움을 겪은 사람답게 좀 더 무덤덤하고 대찬 태도로 진도를 꾹꾹 나가게 된다. '모든 언어는 무조건 문법부터'라고 믿는 덕에 어쨌든 험난한 동사와의 씨름을 견디어내는 것이다.
Bienvenue!
저자는 불어불문학 전공자답게 프랑스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요상하고 현란하게 매력적인 단어를 전공했다니 나로서는 굉장히 부럽다. 알베르 카뮈, 장 그르니에, 파트릭 모디아노,프랑수아 사강 등의 작품을 프랑스어 원문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단어의 마지막 자음은 거의 대부분 발음하지 않는다, 딱 부러지게 발음 표기가 안 되는 여러 종류의 비음을 갖는다(엉, 앙, 앵), 연음이 많다... 그래서 단어의 생긴 모습과 소리 내는 법이 상당히 불일치한다... 그럼에도 이런 '비현실적' 언어에 나는 왜 빠져든 것일까? 전공자인 저자의 말에 따르면 "과거 시제만 다섯 개가 돼 프랑스 사람들도 헷갈린다는" 이 이상한 언어를 나 역시 "짝사랑처럼 좋아"한다.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바가 다르고 귀를 쫑긋 세워 듣고 또 들어도 따라 할 수 없었던 입문의 순간들, 그야말로 참담한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조금씩 읽는 법이 터득되면서 느꼈던 그 황홀함이란! 도무지 설명이 안 되고 잊히지 않을 열광의 순간이었다. 파리를 여행하며 거리거리에 쓰여있는 글자들이 파악되고 가끔씩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이 내 귀에 꽂힐 때의 그 감동이란! 독학 2년 차에 제법 성실히 해오고 있음에도 큰 진척은 없다. 그래도 (한국어 번역본을 커닝하면서) 이런저런 글귀들을 해독할 수 있어, 프랑스어는 더욱 신비롭게 다가온다. 장 그르니에의 『섬』에 쓴 카뮈의 서문을 프랑스어로 해독해가던 그 어느 날 저녁, '기쁨의 눈물'이라는 표현이 이해되었다. 탁월한 불문학자이자 섬세한 언어의 마술사인 김화영 교수의 안내로 파트릭 모디아노의 세계에 빠져든 요즘, 프랑스어 소설을 매주 한 권씩 읽어야 하는 멋과 여유를 맛보고 있다. 그러니까. 지독하게 이상한 언어 프랑스어를 "너무 어렵고도 도도한 말, 이루어질 수 없는 첫사랑처럼" 쉽게 다가와 주지 않지만 결코 뒤돌아설 수 없이 한없이 좋아한다. 나도 저자처럼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좋아하는데 문득 (지금의 내 실력으로서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을) 이 미묘하게 아름다운 말들을 프랑스어 원문으로 읽어보면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해진다. 사랑에 대해 '너무나 인간적인' 프랑스인들의 사고를 조금이라도 가깝게 들여다보며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 바르트는 이십대의 내가 열병처럼 애달프게 읽어 내려갔던 『사랑의 단상』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의 유명한 단락이 바로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J'ai mal a l'autre"인데, 우리말로 번역했을 때 그냥 비문이 돼버리는 이 문장이, 프랑스어로는 너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 Bienvenido!
파리의 달콤한 아름다움에 반해 파리 여행을 위한 프랑스어를 시작했고, 파리에 이어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는 여정을 짰기 때문에 스페인어도 좀 익혀 보고 싶었다. 즉,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를 거의 동시에 시작한 셈이었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비슷한 점이 꽤 많아 서로 끌어주는 학습이 되어야 했는데, 되레 헷갈려서 이도 저도 아닌 교착상태에 빠져 버렸었다. 두 언어가 각기 제 궤도에 올라서는 그 어떤 선을 넘기 전까지는 '내가 이러려고, 내가 제정신이기는 한 건지'의 자괴감에 시달렸다. 그래도 끈기이든 오기이든 꾸역꾸역 밀어붙이다 보니까, 습관이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실력과는 전혀 상관없디) 오로지 재미있어하고 있다.
스페인어는 프랑스어와 달리, '숨김'이 없다. 혀를 도르르 굴리며 강력하게 'R'발음을 해주고 철자와 발음이 거의 99퍼센트 일치하는 '순수함'의 매력이 있다. 사전에는 아예 발음기호 부분이 없다. 또한, 서로 눈치껏 통하는 부분은 유쾌하게 넘어가는 성향을 가졌는지 주어를 대체로 생략한다(동사를 보면 주어를 알 수 있다). 프랑스어에 호되게 당해서인지 스페인어의 동사 변형도 '이 정도는 봐줄 만하다'라는 인상을 준다. 불규칙동사의 개수도 현저히 적은 것 같아 프랑스어에서 완전히 꺾여 버렸던 의기가 되살아난다. 발음하기 편한 언어여서인지 속도가 빨라 듣기와 말하기가 쉽지 않지만, 빠르게 말하는 mp3 파일을 듣다 보면 이 경쾌함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시각적으로는 귀여운 면도 있는데 의문문과 감탄문에서 각각 물음표와 느낌표를 뒤집어 놓고 시작한다는 점이다:¿ Le puedo ayudar en algo?(무엇을 좀 도와드릴까요?) ¡ Es justo lo que estoy buscando!(이게 바로 제가 찾는 거예요!). 이 비교적 솔직 담백하면서 유머스럽기까지 한 언어 속에서 드러나는 스페인은 소매치기가 극성인 요주의 국가가 아니라 소탈하고 활기찬 분위기의 나라이다.
◆ 스페인어 발음은 확실히 프랑스어보다 덜 어려운 것 같은데, 말의 속도는 더 빠른 것 같다. 심지어 스페인으로 여행을 가보니, 스페인 사람들은 말도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래도 프랑스어와 비슷한 단어가 가끔 있어서, 아주 대충 뜻을 짐작할 수 있을 때도 있었다. (---) 게다가 '나는', '너는' 같은 주어를 굳이 표기하지 않아도 되는 스페인어적 화끈함도 마음에 들었다. 74쪽
◆ 그래도, 스페인어는 재미있었다. 언어에서 전해지는 무작정 밝은 양지의 느낌, 그 특유의 명랑한 템포도 좋았다. 물음표도 느낌표도 괄호 열고 괄호 닫는 느낌으로, 심지어 거꾸로 세워둔 표시도 장난스러워서 재미있었다. 81쪽
◆ 스페인어를 들으면, 정말이지 독일어는 세상 무뚝뚝하고, 프랑스어는 살짝 간질거리는 것 같고, 영어는 새삼 밍밍하다. 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스페인어는 확실히 모음으로 끝나는 단어가 많아서인지 부드럽기도 한 느낌이다. 그래서 노래하기에도 좋은 언어인 것 같다. 때때로 몹시 빠르고 시끄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89쪽
내가 바르셀로나로 가게 된 것은 지중해의 바다색 때문이었다. 유심히 본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윤식당2>의 어느 장면에서 비쳤던 지중해만큼은 첫눈에 설렘을 느끼게 했다. 드론을 띄워 포착한 인위적인 장면이었겠지만 그 형용 불가능한 파란빛의 지중해는 소박한 섬동네의 분위기를 동화처럼 살려주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지중해도 아름다웠지만 이와 또다를 가라치코만의 지중해를 보러 가는 것, 언젠가 실현해야 할 꿈이다. 물론, 나의 스페인어 독학에 강력한 견인차가 되기도 하는 바람직한 꿈이다. 이 책에도 <윤식당 2>의 가라치코 Garachico 얘기가 나온다. 저자의 꿈도 당연히 실현될 것이다.
◆ 작은 동네에서 나고 자라, 그곳에서 직업을 얻고 일가를 이루고 생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도무지 믿기 어려운 판타지나 다름없다(---) 낯선 동네의 낯선 식당에 홀연히 찾아드는 낯선 경험, 음식이 좀 늦게 나와도 바쁠 일 없는 일상, 하루 이틀 머물까 했지만 동네가 마음에 들어서 일주일쯤 있겠다고 일정을 바꾸는 시간 부자의 여유, 박서준 씨처럼 훤칠하게 잘생긴 식당 직원에게 자신 있게 "Una cerveza, por favor!(맥주 한 잔이요!)"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찬스를, 나도 언젠가 갖고 싶어진다. 언젠가는. 97쪽
Willkommen!
독일어에 대한 얘기는 '단정함, 정갈함'으로 시작한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발음을 떠올리면 쉽게 수긍이 가는 표현이다.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단어 하나로 분명하게,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독일어의 고집 같은 것" 또는 "독일어는 다른 언어에 비해 유달리 긴 단어가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데, 아마도 이런 단어들, 복잡한 뜻을 가진 개념을 어떻게 해서든지 한 단어로 정의하는 말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라는 의견에도 적극 동의한다. 독일어의 어휘나 문법에서는 혹시 상대방이 오해할까 봐 미리 신경 쓰듯 하나하나 분명히 해두려는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지나치게 신중하게 굴어 조심스러운 친구 같다. 나도 그만큼 엄격하고 매사 확실히 해 두어야 하는 부담을 주는, 그러나 믿음이 가는 그런 친구 말이다. 그래서 독일어는 재미있다기보다는 절도 있는 짜임새를 배우며 나의 자세도 명료해지고 건전한 긴장감을 터득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하여, 나의 그 무언가가 엉클어지고 있다는 찌뿌둥한 기분이 드는 날, 독일어 문장들을 소리 내어 읽으며 노트에 또박또박 적어 본다. 틀도 없고 질서도 없어 오리무중으로 가고 있는 내 걸음에 다시 균형을 찾아주는 '신성한 의식'과도 같다.
◆ 야근과 야근 혹은 야근과 회식이 번갈아가며 이어지는 날, 불 꺼진 방으로 늦게 퇴근하게 되는 그런 날이면 이따금 의미 없이 독일어 숫자 1에서 10까지, "아인즈, 츠바이, 드라이…"를 한번 읊어보고 잠이 든다(---) 이런 뜬금없는 질척거림, 모르는 말에 대한 쓸데없는 동경이 때때로 한국어로 가득 찬 지루한 일상의 마라톤을 버티게 해주기도 한다. 73쪽
내가 독일어에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은 소싯적에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제2외국어로 만나 대학교 2학년까지 수업을 들었으니 그다지 겁이 나지 않는다(물론 아직도 초급 수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명사에 남성-여성-중성이 있다, 강변화 동사와 약변화 동사 및 분리, 비분리 동사로 나누어지며 어간의 변화가 있다, 영어의 the 하나로 끝내는 것을 무려 16가지 (der des dem den die der den did das des dem das die der den die)로 구분한다, 영어에서 딱 두 개 a/an으로 끝낼 일을 자그마치 12개(ein eines einem einen eine einer einer eine ein eines einem ein)로 구별한다 등등 깜짝 놀랄 만큼 복잡한 이 언어를 일찌감치 접했기에 한참 세월이 지나 역시 이상하기 짝이 없는 다른 외국어들을 만나도 잘 버틸 수 있는 것이다. 어릴 적에 만난 이래 묵직하게 나를 믿어주고 가끔 그리워해주는 친구처럼 고마운 언어이다. 일일이 분류하며 정확성에 목숨을 걸다 보니 무미건조해진 듯한 독일어, 별로 재미없는 나 자신과 닮아서인지 오랜 세월 정을 떼지 못한다. 이미 사서 모셔 둔 『생의 한가운데』와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대충이라도 원문으로 읽어볼 수 있도록 독일어 공부에 더 열심을 기하기로! 바라건대 니체, 칸트, 데카르트의 철학적 무게도 이 근엄하고 성실한 원어로 느낄 수 있게 되기를!
◆ 쓸모없는 진중함, 효용을 바라보지 않는 진실함 같은 것, 1+1=2처럼 딱 떨어지는 에누리 없는 말들의 매력을 느껴보고 싶었다(---) 프랑스어와 비교하니 발음은 투박하나 정직했다(---) 어찌어찌 관사는 외우겠는데, 막상 뒤에 오는 명사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중성인지 모르면 어떻게 붙이지? 말을 시작하기 전에 고민이 깊어야 하는 언어였다. 아, 빨리 말하고 싶은데. 51쪽
저자에게도 외국어와 여행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 보다. 독일어에서 빈에 대한 얘기를 하고 읽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책과 작가도 알려 준다. 내가 빈에서 받은 첫인상, 기대보다 덜 클래식하고 덜 우아했다. 한때 유럽을 휘어잡았던 합스부르크가의 역사가 도시 전체에 서려 있고, 클림트로 대표되는 분리파 운동의 본거지도 남아 있고... 에곤 쉴레, 프로이트, 베토벤, 모차르트, 브람스 등 유명한 인물들의 흔적도 산재하지만, 뭔가 서글픈 기운이 감돌았다. 겉은 화려하지만 쓸쓸한 그리움에 젖어있는 듯한 도시였다. 이에 대해서 저자가 소개해 주는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가 상당한 도움을 줄 것 같다. "잠이 안 오는 날 읽다 잠들자는 심산으로 읽기 시작한 그 책이, 빈행 티켓을 끊게 했다"라고 할 정도로 빈에 대해 많은 것을 담고 있을 이 책을 읽으면, 나도 빈의 비밀 같은 것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어쩌면 빈의 '몰락'의 역사를 너무 정확하게 알아버려 언젠가 다시 빈에 갈 때, 화려한 모습 이면에 들어앉아있는 과거의 스산함에 더욱 짓눌리게 될 수도 있겠다. (다른 걱정도 미리 해보건대) 이 책을 읽노라면 나도 당장 빈에 다시 가고 싶다거나 이 절묘한 말들을 원문으로 읽어 보겠다거나, 또 하나의 허황된 꿈을 꾸게 될 위험도 있다.
◆ 자아와 인격을 형성하게 만든, 절대로 자신과 분리하기 어려운 대상의 몰락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운명은 가혹하고 처연하다. 스스로 택한 그의 마지막 선택이 그 운명을 끊을 수 있는 권리였음을 어렴풋이 짐작한다. 츠바이크는, 그래서 감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새벽과 황혼, 전쟁과 평화, 상승과 몰락을 경험한 자만이, 그러한 인간만이 진정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빈은 그렇게, 끓어오르던 그 모순의 19세기 말, 촛불이 꺼지기 직전의 광휘처럼 타오르던 시기를 재현한다. 69쪽
ようこそ
나는 딱히 애국자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만, 반일감정이 거세지면서 일본어에 대한 흥미를 절대적으로 잃어버린 것은 맞다. 대학 졸업에 즈음하여 전국을 강타했던 일본어 열풍에 편승한 이래로 노상 초급에 머물러있는 일본어 학습자이다. 일본어 능력 시험을 목표로 열나게 공부했던 시기도 몇 차례 있었지만, 그놈의 한자에 막혀 늘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가타카나도 얼마나 잘 까먹는지 인풋에 비해 아웃풋의 지속기간이 참 짧아 웬만큼 해도 진척이 없다. 몇 년 전 (반일감정이 고조되기 전) 유후인과 하카타를 여행했는데 가타카나가 잔뜩 들어 있는 간판을 읽을 수 없어 답답했다.
알듯 말듯 하다가 결국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상황이 연속되다 보니 토가 나올 정도로 스트레스가 쌓였다. 이를 계기로 가타카나를 재정비하고 몇 달 동안 열공하며 수시로 감탄에 겨워했다. '아, 역시 일본어는 하는 만큼 보답을 받는구나'... 그러다가 반일감정이 고조되어 '일본이 싫어요'의 감정이 솟구치며 일본어에 대한 흥미가 시들해졌다. 일본어 교재를 아예 들춰보지도 않는 긴 공백이 이어지고 있다. 빠른 속도로 잊히고 있을 거라 안타깝기는 하지만. 걱정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상하게도 '자신 있기' 때문이다. "어쩐지 일본어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그냥 두고(?) 있는데"라는 저자의 이야기가 바로 나의 이야기이다. 혹은 아직도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교적 입문이 쉬웠기에 내가 마음만 먹으면 계속 쉽게 배워나갈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인데, 저자의 얘기를 들어보니 나만의 착각은 아닌가 보다(다행스럽게도).
◆ 일본어의 도입은 너무나 평화롭다. 나 역시 그래서, 내가 똑똑한 것인가 일본어가 쉬운 것인가, 살짝 고민하면서 즐거운 일본어 입문 과정을 거쳤다. 히라가나를 외우고 가타카나를 외우고 여러 형용사를 외우고 주요 동사의 기본형을 외울 때만 해도, 드디어 이렇게 외국어 하나는 쉽게 배우나 보다 착각했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110쪽
저자와 나를 포함한 수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어를 '만만하게' 여기는 이유는 한국어와 비슷한 구석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초보단계에서 맴돌고 있을 텐데 아마도 히라가나, 가타카나, 한자가 한 군데에서 동시에 쏟아지기 때문 아닐까. 게다가 하나의 한자를 두고 음독을 하다가 훈독을 하니 나로서는 도무지 체계를 잡을 수 없다. 하이... 스미마생...예의바르고 싹싹한 것 같은데 진짜 속은 알 수 없는 일본인 (나의 사적인 의견이다)처럼 이 언어도 심플하고 친절한 것 같은데 다가서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
◆ 그런데 이렇게나 (한국어와) 비슷한 점도 많은데, 왜 나는 아직도 십수 년째 초급 일본어에서 벗어나기 못하고 있는 걸까? 세간에는 일본어 공부에 세 가지 허들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첫 번째가 가타카나, 두 번째가 5단 동사, 세 번째가 한자.(---) 특히 하나의 문장에 태연하게 히라가나와 가타카나와 한자가 녹아들어 있는 일본어의 본질적인 특성이, 정서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제일 어려웠다. 111~112쪽

『아무튼, 외국어』 112쪽
한자에서 낭패를 당하고,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별로 정이 안 가고, 저자나 다른 일본어 학습자처럼 일본 만화나 드라마에 빠진 적도 없고... 그렇다면 나는 정녕코 일본어와 다시 조우할 가능성은 없는 걸까? 이에 대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껏 간헐적으로나마 해온 노력이 아깝기도 하고 일본 여행에 대한 계획은 유효하기 때문이다. 마크 로스코의 시그램 벽화를 볼 수 있는 가와무라 기념 미술관, '예술의 섬'이라는 별명을 가진 나오시마, 강상중의 『도쿄 산책자』처럼 다녀보고 싶은 도쿄, 지적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신선한 영감을 받았던 츠타야 서점이 있는 다이칸야마, 유후다케산을 바라보며 별빛 아래 온천을 즐겼던 유후인 등등 가고 싶은 목적지들이 적지 않다. 이 모든 곳에서 '무난하게' 읽고 말하며 다니고 싶기에, 언젠가 곧 일본어를 다시 꺼내들기는 할 테다. 여행을 40일 앞둔 그 어느 날부터 '바짝' 한다면 할 수 있으리라... 착각이더라도 이렇게 믿고 싶다.
◆ 처음에 마냥 쉬운 줄 알았던 말이 닿을 듯 닿을 듯 전혀 가까워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도, 일본어는 늦게라도 마음만 먹으면 중간 정도는 하지 않을까 막연하게 믿고 싶다. 114쪽
일본어를 또한 일본을 마냥 잊어버리고만 싶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일본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 있음이 분명한) '무라카미 하루키' 또는 '하루키의 책' 또는 더 정확하게는 '하루키의 에세이'이다. 저자도 하루키에 대해 두터운 애정을 가졌다. 특히, 하루키의 에세이에 대한 찬사에는 나도 공감한다. 그가 쓴 에세이는 얼추 다 읽었고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일상생활의 작고 미세한 장면들과 틈새들을 간결하고 담담하게 그리는 에세이스트 하루키는, 단정하고 깔끔하고 성실한 사람이다."라는 대목에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의 소설이라고는 단 하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밖에 읽지 않았지만, (그것도 에세이라고 샀다가 첫 장을 읽으면서 소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깜짝 놀랐다. 이유는 저자가 느낀 점 그대로이다.
◆ 그러나, 소설을 쓰는 하루키는 전혀 다르다. 특히나 최근 작들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심연의 끝을 응시하는, 미로 같은 내면으로의, 꿈속으로의, 역사로의 여행이다. 118쪽
그의 에세이와는 달리,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는 유쾌한 감동을 얻지 못하여 아마 앞으로도 그의 너무나 유명한 소설들을 읽지는 않을 것 같다. 에세이도 일본어 원문으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하루키의 에세이는 모두 찾아서 읽고 싶은데, 그 이유 역시 저자의 생각과 거의 일치한다. 그의 에세이 중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가장 깊게 맘속에 남아 있는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근실한 생활로 견고한 글을 지탱해나가는 하루키의 성실함을 심히 존경한다.
◆ 그의 작품을 모두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튼, 계속 쓰고, 계속 뛰며, 계속 싸워나가는 그 '계속해보겠습니다' 정신을 사랑한다. 체념하지 말고, 순응하지 말고, 투항하지 말고, 다른 그 어떤 존재에게라도 나를 방치하지 말라는, 어찌 보면 잔소리 같은 메시지가 아직은 질리지 않는다. 그렇게 '언제 적' 하루키는 '그래도' 하루키가 된다. 122~123쪽
그리고, 이제 마지막. 이 책에는 중국어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나 역시, 세련되고 우아했던 장만옥에게 반해 버렸던 <화양연화>를 좋아하고, 오천련을 보고 그 단아한 아름다움에 빠졌던 <야반가성>도 좋아하고, <중경삼림>이나 그 어디에 그 어떤 모습으로 나오더라도 무조건 좋아했던 임청하도 있지만, 단 한 번도 중국어를 배우고 싶어 한 적은 없다. 한자에 대한 선입견이 너무 강해서였을까, 우리를 영겁의 세월 동안 괴롭혔던 중국의 역사와 마오저뚱의 문화혁명에 대한 이야기들로 부정적 인상이 깊이 베여있기 때문일까, 중국의 그 어디에도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아직 들지 않기 때문일까, 네 가지 성조만 봐도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없겠다고 너무 미리 단념한 탓일까... 어쨌든 중국어에는 흥미가 일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의 중국어 부분도 스르륵 넘겨 버렸다. 다만, 저자의 중국어 학습이 계속 순항하기를 응원한다.
◆ 그리하여 큰맘 먹고 시작한 중국어 수업은, 아직까지는 들을 만하다. 초급이니까. 아직 많이는 어렵지 않고, 십수 년 전에 두 달 배우면서 기억했던 단어가 희미하게 다시 생각날 때도 있으니까.(---) 여하간 이런 식이라면 초급 중국어만 한 3년 할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나으니까. 느릿느릿 걸어도 황소걸음이라고 하니까. 그래도 이제는 아메리카노 주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131~132쪽
이 특이한(?) 책 『아무튼, 외국어』를 빌어 내가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속 시원하게 해 보았다. 동질적인 현상에 처한 누군가에게 아무와도 나눌 수 없었던 나의 고민과 푸념을 남김없이 털어놓은 기분이다. 결론은 '괜찮다'이다. 뚜렷한 소산이 없는 줄 알면서도 제아무리 열심히 해대도 성과를 장담하지 못하지만, 이제는 안 하고는 못 배기는 외국어 공부가 되어 버렸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애착과 노력은 없으리, 가끔 스스로를 북돋우는 구호를 연창해본다. 뒤돌아보면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독학으로 본격적으로 불붙은 나의 '외국어 방랑'은 나에게 가장 큰 힘이자 위로가 되었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를 왜 같이 시작했을까,라는 탄식도 이제는 '두 개를 같이 시작해서 다행이었어'라는 만족으로 바뀌었다. 내 머리가 이 두 언어의 각자의 세계에서 좀 더 수월하게 작동하며 그 어떤 언어라도 해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탈리아어를 '보너스' 느낌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두 외국어 덕택이다. 이탈리아어는 이 두 언어를 합쳐 놓은 것 같아 (스페인어와 비슷한 점이 너무 많아 깜짝깜짝 놀라고 있는 중이다) 초보자의 혼란과 당황스러움을 거의 당하지 않고 있다. 난생처음 대하는 외국어에 대한 긴장된 경외감보다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궁금함에 더 이끌려 알차게 진행 중이다. 이 난데없는 여유에 힘입어 오랫동안 질질 끌어온 독일어도 규칙성을 더해 새로이 공부하게 되었다. 각 외국어마다 이 언어를 사용할 수 있을 나라를 여행하겠다는 포부가 더해져 결코 슬럼프를 알지 못한다. 또한,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해당 언어로 쓰인 원서로 읽을 수 있으려나,라는 야심도 만만치 않다. 외국어- 여행- 독서가 서로 이끌어가는 성실과 열정의 네트워크, 나는 여기를 떠날 수 없다. 벗어나려고 하면 더욱 깊이 빠져들고야 하는 '늪'이다. 너무 깊게 빠져 버려 되돌이킬 수 없는 이 길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다음 타깃은 어떤 언어일까? 이미 벌여놓은 외국어도 제대로 수습이 안 되는데, '다음'이라니 말도 안 돼... 그러면서도 설렘에 흔들리며... 아마도 스웨덴어와 포르투갈어가 되지 않을까...라고 답한다. 일명 '얀테의 법칙'하에 개인과 개인, 심지어 국가와 개인 간의 상호 존중과 신뢰를 실천하고 있는 나라 스웨덴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세계적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그네들의 디자인과 인테리어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다. 물론, 5,6월에도 차가운 바람이 불고 밤새도록 해가 지지 않는 백야가 이어지며 고생하면 오로라의 향연도 지켜볼 수 있는 극한 날씨도 경험해보고 싶다. 과거의 영광이 바스러져간 자리에 새로운 대체 거리를 찾느라 동분서주하는 대신 오히려 과거에의 애잔한 그리움을 택한 것 같은 도시 리스본,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치밀한 아픔이 그대로 부유하고 있을 것 같은 도시 리스본, 여러 명으로 분화한 채 한 인생으로 여럿 인생을 살아낸 페르나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처럼 불길한 아름다움이 살아 있을 것 같은 도시 리스본... 여기에서 들려오는 포르투갈어의 음색은 과연 어떨까, 미리 궁금하여 포르투갈어를 기본 정도는 알아 두고 싶다. 가능한지도 모르면서 과연 어떨까 줄기차게 상상하며, 일생일대의 기회가 오면 멋진 스토리를 일구어 낼 것만 같은 '첫사랑'을 준비하는 자세와 같지 않은가?
◆ 그러므로 쓸 일도 없는 불어를 기억하려고 애쓰고, 뜬금없이 독일어 관사와 씨름을 해대고, 일드의 명대사를 반복하거나 스페인어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중국어 성조를 외우며 고개를 위아래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은 떠나지 않고, 떠난 척해 보고 싶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도 같다. 162쪽
◆ 그러하다면 이다음은? 다음이라니 마치 도장 깨기의 느낌이 들지만, 현실은 도장은커녕 …그래도 포르투갈에 다녀온 후로는 포어에도 관심이 생겼고, 언제고 한 번은 가봐야 할 것 같은 러시아를 생각하면 러시아어도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중간고사를 앞두고 이 책 저 책을 보다가 시험을 망쳤던 기억도 떠오르고 그렇지만, 그래도 기약 없는 외국어 배워보기가 그저 취미라서, 소일거리라서 다행이지 않은가 163쪽
무작정 좋아서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일, 아마 죽을 때까지 대가가 될 수 없어도 그만두는 법은 없을 일, 나를 정의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될만한 일, 막혀있는 나의 본업을 뚫어내는 데에 한몫해 줄 것 같은 일, 홀연히 꿈속에 나타나 나를 황홀하게 하는 일.... 끝없이 찬사를 보내고 가끔은 자랑도 해보고 싶은 일... 내 삶의 기준이 되고 내 여행의 다리가 되어 주는 일, '외국어 독학'에 대한 나의 사랑에는 끝이 없나 보나. 아무튼, 어쨌든, 외국어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