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다. 한창 친구가 내 삶의 중심일 때 배웠던 이 격언은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에게 불변의 진리처럼 느껴졌다. 내가 힘들 때 격려하고 위로해주는 친구라니, 생각만으로도 삶의 한 부분이 가득차오는 충만함이 느껴지지 않겠는가. 그렇게 한참을 지냈을까. 그렇게 죽고 못 살던 친구와 대학에 진학했다. 불행한 것은 그가 나보다 공부를 못했는데도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는 사실이었다. 내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나만큼이나 소중한 친구인데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말로는 축하한다고 했지만, '그냥 운이 좋았지'라고 말하는 친구의 말이 가식처럼 느껴졌다. 분명 우리는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고, 형제보다 가까운 사이였는데 도대체 무슨 감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시간이 꽤 많이 흘러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한 감정을 느껴서는 안되는 것이 문화적 압력이라면, 그런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고.
이 책은 제목이 그대로 한 권의 책이다. 남이 잘못 되었을 때 느끼는 은밀한 쾌감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는 독일어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피해'라는 단어와 '기쁨'이라는 단어가 합쳐져 그런 뜻을 갖는다. 신기한 사실은 영어 단어에 없다는 사실인데, 어찌 보면 그것은 하나의 위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심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느끼는 감정에 대한 것인데 그에 상응하는 단어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되지 않나. 우리는 '쌤통'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었는데 대부분의 경우에 잘 들어 맞기는 하지만 미묘한 감정이라 조금씩 핀트가 안 맞는 부분도 있다. 어쨌든 우리나라든 다른 나라에서든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문화를 형성하며 사는 한 이러한 감정은 계속 존재 했었다.
그렇다면 그런 감정은 수 세기의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도 왜 사라지지 않았던 것일까. 그 말은 바꿔 하면 쌤통의 심리가 인간에게 주는 이익이 존재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우리는 아무리 친밀한 관계의 인물이라고 해도,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경쟁관계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친구인 경우 뿐만 아니라, 직장 내 동료, 때로는 처음 보는 타인일 수도 있다. 이때 상대가 우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로 인해 평판이 좋아지고 소득이 늘어난다면 상대적으로 나의 지분은 작아질 수밖에 없다. 이것을 저자는 '문화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가치에서 우월성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라고 표현한다.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평가되는 수준보다 스스로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착각은 우리가 자존감을 지켜내는 무기가 되곤 하는데, 현실에서는 나보다 못 났다고 생각하는 타인이 나를 앞지르는 문제가 발생한다. 때문에 상대가 잘 되는 것에 대해서는 '질투'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상대의 불행을 고소해 하기 위해서는 논리가 필요하다. 종종 우리의 감성은 이성에 앞서기 마련이다. 누군가의 실패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모든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사업에 실패했다면 그럴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고, 어떤 사고를 냈다면 거기까지의 열악한 여건이 있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감정은 이미 타인의 실패에 작은 쾌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배제한다. 대신 그의 '자만함'이나 '무계획함', '무절제' 같은 철저히 개인에게 국한되는 문제로 사태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것은 꽤 효과적이어서 그럴만 해서 그렇게 되는 것에 대해 쌤통의 감정을 갖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스스로 자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는 티브이 쇼에서 우리보다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연예인이나 일반인을 보면서 다른 방식으로 위안을 안겨주기도 한다. 늘씬한 모델이 많이 먹고도 살 안찌는 방송보다, 뚱뚱한 연예인 4명이 나와 한계없이 먹어대는 먹방 프로그램이 더 보기 편한것도 비슷한 이유다. 예능 프로그램은 이러한 감정이 편하게 발현되기 위한 고도의 장치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심리를 분석하는 책이 많지 않았던 것은,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은 심리가 우선하기 때문이 아닐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보이지 않는 문화 규범들은 우리에게 해야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가이드 라인을 정해준다. 그것은 보이는 부분에서 시작해서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은밀하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때문에 누군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쾌감을 느낀다거나, 경쟁자가 실패했을 때 즐거움을 표현한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처럼 느껴진다. 이 책이 불편하다면 표현이 제한되어 있는 감정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그것을 분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우마이스터와 부시먼은 인간 본성에 대해 '자연은 계속 가라고 말하고, 문화는 멈추라고 말한다'며 훌륭한 정의를 내렸다. 저자의 결론은 책의 전체 분량에 비해 놀라울 만큼 짧은데, 그도 그럴것이 이 책은 그러한 감정을 정확히 지적하고 인정하는 것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상대의 좌절감을 상상하며 통쾌할 수 있다는 사실은 바꿔 말하면 상대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아마 우리는 거기서부터 답을 찾아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책에 의하면 쌤통이라는 말이 영어에는 없다고 한다(그래서 어떤 단어를 쌤통이라고 번역한 것인지 궁금하다). 독일어에서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고 하는데(책에서 쌤통이라고 번역하는 게 이 단어인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사정이 영어권에서는 쌤통이라는 감정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심리는 오히려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만큼 보편적인 것이다. 비록 공개적으로, 노골적으로 표현은 하지 못하지만 누구나, 그리고 해당되는 상황에서 가지게 되는 감정이다.
리처드 H. 스미스의 『쌤통의 심리학』은 바로 그 얘기를 하고 있다. 많은 예를 소개하고 있다.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을 당연하고, 각종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도 소개하고 있다. 그런 심리를 TV 드라마나 리얼리티쇼에서 볼 수 있는 당연한 일이며, 나아가 정치적 상황, 스포츠, 나아가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서도 그런 심리를 볼 수 있다고 하고 있다. 본성이라고 하였으니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심리는 타인과의 비교에서 나온다. 주로는 나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감정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인데, 많은 측면에서 나보다 나은 자질을 가지고 있거나, 더 좋은 상황에 놓여 있거나, 더 좋은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곤란에 빠지거나, 잘못을 저지르거나 했을 때 우리는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그것을 기뻐하며 즐긴다는 것이다(왜 아니겠는가?). 그러한 심리는 집단적으로도 발휘되어 스포츠에서 라이벌인 팀에 대한 감정으로, 정치에서 지지하는 후보의 상대 후보에 대한 태도로 이어진다. 저자는 그런 심리는 진화적으로 설명 가능하다고 한다. 남의 불행은 곧 나의 생존 확률의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이라는 얘기다(그런데 이런 진화적 기제에 대한 분석은 매우 빈약하고 또 근거도 그리 튼튼하지 못하다. 인간 심리의 모든 것을 진화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쩌면 유행과 같은 것이고, 또 진실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별로 분명한 연구 결과 없이 그냥 생각만으로 그러려니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통속적 진화심리학인데, 그 경우를 여기서도 본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나의 마음 저 쪽에 숨어 있는 못되고 개구장이 같은, 나아가 악마 같은 본성을 폭로하는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은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반복된다. 물론 조금씩 다른 얘를 통해 변주되고 있지만 결국은 별로 다른 얘기들이 아니다. 중간이 오기도 전에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 나는 남의 불행에 대해 고소해 해. 그래서 어쩌란 말야?” 이런 기분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다 잠깐 눈이 번쩍 뜨인다. 쌤통의 심리가 질투와 관련이 있다는 얘기(당연한 얘기다) 뒤에 나오는 나치 얘기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홀로코스트)이 질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유태인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는데, 나치가 유태인을 질투하여(물론 왜곡된 판단이었지만) 그렇게 잔학무도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쌤통의 심리가 이렇게 큰 일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근데, 좀 많이 오버한 느낌이다. 그런 일을 질투 때문에 일어났다고 해버리는 것은, 조선 시대의 중요한 일들이 모두 궁중 여인네들의 암투에서 비롯되었다는 통속적 사극과 다를 바가 없어져 버린다. 저자는 책의 격(格)을 높이려고 이런 예를 든 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격을 낮춰 버린 것이다.
우리는 본성을 인정해야 한다. 경쟁자(예를 들면 골프 선수들에게 타이거 우즈, 혹은 내 옆에 앉아 있는 같은 부서원)의 불행에 대해 드는 감정에 대해 어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감정에 대해 복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감정을 조절하는 사람이 있다. 저자는 그런 심리가 본성이라는 걸 아는 것이 그런 감정을 조절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 믿고 이런 책을 썼을 것이다. 내가 그럴 수 있는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은밀한 본성에 관하여>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왜일까. 경쟁관계에 있던 내 친구가 배가 아파서 간밤에 공부를 못해서 시험을 망쳤단다. 휴, 안심이다. 우리나라는 4강에 못들어 갔는데 일본은 4강 확정이란다. 그런데 준결승 문턱에서 10대 0으로 졌다면 우리는 통쾌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왜, 왜, 왜. 이 못되고 질투심 어린 마음을 심리학적으로 풀어 쓴 작품이 나왔다. 바로 <쌤통의 심리학>이다.
'샤덴프로이데 (schadenfreude)' '피해'를 뜻하는 'schaden'과 '기쁨'을 뜻하는 'freude'가 합쳐진 이 단어는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의 불행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일컫는다. 왠지 떳떳하진 않지만 우리 대부분이 느끼는 감정인 샤덴프로이데 즉 쌤통의 심리학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p. 7)
쌤통의 심리학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위에 말한 대로 다른 사람이 피해보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이 왜 생겨난 것일까.
'우리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이득을 얻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어떤 불행이든 일어나면 우리의 자존감이 올라간다.' (p. 193)
'남들과의 비교,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에 대해 내리는 결론,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 생기는 감정은 우리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열등감은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우월감은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 간단히 말해 남의 불행은 우리에게 우월감의 기쁨을 느끼게 해주며 그래서 쌤통 심리를 불러일으킨다.' (p.24)
아들러의 심리학에서도 나왔지만 우리는, 즉 인간은 기본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태어난다. 모든 동물 중에 유아기가 가장 긴 동물로 전지전능한 부모에게 자신의 모든 걸 의탁하므로 열등함을 인식한다. 또한 뇌의 속도와는 현저히 늦은 신체 구조로 자존심이 땅을 치고 시작한다. 기본적으로 이것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가 사람 속에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가지고 생활하는데, 같은 출발선상에서 시작한 듯 보이지만 다른 사람보다 나의 자질이 떨어짐을 느낄 때, 그 열등이란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와 반대의 경우 우월감이나 자존감이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골프 매너가 꽝인 타이거 우즈의 몰락이나, 나에게 심적 타격을 준 사람이 불행해 졌을 때, 미니스커트를 입고 몸매가 많이 드러나는 여성이 강간을 당했는데도 배심원들이 강간범에게 무죄를 선고했던 사례며, 가인과 아벨, 모차르트를 불행의 늪에 빠트린 살리에르, 유대인을 박해한 히틀러 등을 예로 들면서 대중 매체 속에서 타인과의 비교, 스포츠 팬들의 쌤통 심리, 위선자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몰락할 때 느끼는 쾌감, 복수, 질투 등의 개인적으로 느끼는 비교적 가벼운 쌤통 심리가 나오기도 하지만 쌤통 심리의 어두운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홀로코스트 역시 쌤통 심리의 한 축으로 그려내고 있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에 대한 질투 어린 편견을 그토록 집요하게 고수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엡스타인 같은 학자와 마찬가지로 글릭 역시 유대인들이 직업적, 문화적 영역의 많은 중요한 측면에서 지나치게 두각을 드러냈고, 그런 성공이 증명해주는 그들의 재능과 투지를 무시하기 힘들었을 거라는 점을 강조한다.' (p. 251)
쌤통 심리학에 대한 사례들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되는 측면도 있으며 웃으며 넘길 수 있는 가벼운 것들에서부터 죽음으로 몰고 가는 어두운 면까지 다양하게 볼 수 있었다. 다른 것들은 다 차치하고라도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히틀러의 만행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홀로코스트'를 읽으며, 쌤통 심리학이 단순히 그럴 수 있다고 넘기기에는 위험하며 경계해야 하는 심리라고 생각되었다.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적은 인구수에 비해서 유대인들의 세계 경제시장에서 점유율이나 지식시장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도 언급 되었듯이 이것은 인류(아리아인)와 현저히 다른 모습이었고 모든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기에 불결하고 탐욕스럽고 역겨운 것이 된 것이다. 그의 '고정관념에 따르면 유대인은 막강한 권력을 지녔고 우월한 민족이다.' (p. 250) 이것은 히틀러가 인종청소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유대인을 없애기 위한 정당한 명분으로 작용하지만, 결국 히틀러의 열등함의 발로이고, 질투의 표현이며 최악의 쌤통심리학의 일면이라는 것으로 이해되는 수밖에 없다. 지극히 위험하고 무소불위의 힘을 악용한 반인류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쌤통 심리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며, 우리의 경험에 널리 스며들어 있다. 그 감정이 이토록 만연해 있는 이유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링컨의 말대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들'에게로 눈길을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p. 17)
우리는 지극히 열등한 존재로 태어났다. 그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람 사이에서, 사회라는 소속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열등함을 느끼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리라.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긍정적인 형태로 변모되어야지 질투라는 형태로, 복수라는 형태로 사회와 민족 앞에, 개인의 수치를 만회하기 위한 방법으로 변모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쌤통의 심리학>은 오히려, 저자가 서문에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의 나약하지만 선함을 추구하기를 바라는 학문일지도 모르겠다. 링컨이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고소해하기 보다는 공감했듯이.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고,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p. 288) 말이다.
이 책을 소개 받고 얼른 읽어 보고 싶다.. 는 생각을 했다. 왜 그랬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샘통이라는 심리를 은근히. 은밀하게 즐기고 있는 내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내가 미워했던 사람, 잘난 척 했던 사람. 내가 틀리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내 생각대로 나름대로의 응징을 받을때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외치곤 한다. "고것 참 쌤통이다" 물론 겉으로 "에고,, 어쩌면 좋아..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심지어는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 ( 때로는 남편이나 아들에게도) 이런 심정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다.
"거 봐 , 내 말 안 듣더니 쌤통이다"
독일어 단어인 '샤덴프로이데 (schadenfreude)' '피해'를 뜻하는 'schaden'과 '기쁨'을 뜻하는 'freude'가 합쳐진 단어. 이 단어는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의 불행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일컫는다. 웬지 떳떳하진 않지만 우리 대부분이 느끼는 감정인 샤덴프로이데 즉 쌤통의 심리학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p7 들어가는 글중)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사람이라면 알게 모르게 이러한 감정을 느끼게 마련이다. 다만 그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느냐 그렇지 않고 숨기고 사느냐의 차이 또는 그러한 것을 알기에 되도록이면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고 서로를 격려하고 칭찬해주고 좋은 말을 나누며 살아가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하느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주위의 지인들이 잘 되는 모습을 보면 같이 축하해주고 즐거워하지만 맘 한 켠에서 부는 약간의 서늘한 바람은 어쩔 수는 없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과연 그러한 심리는 어떤 것들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구체적인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저자가 어떻게 이야기해는지 들어보고 싶은 맘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느끼게 된 것은 이러한 감정들 모두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내가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이 들때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상대방의 열등감은 나를 키우는 활력이 되기도 하고 내가 싫어하는 웬수 같은 사람들의 불행은 나에게는 달콤한 행복으로 돌아온다.
누군가와의 비교 , 그 비교의 저울에서 수평을 유지하지 못하고 어딘가로 기울어질때 느끼게 되는 상대적인 심리인 듯 하다.
쌤통이라는 심리를 생각하면서 같이 떠 오르는 단어들은 질투, 분노, 미움등이었다. 결국 상대방을 디스하는 듯한 심리들을 떠 올리게 되었다.
소단원들로 대표되는 사례들이이 모두 공감이 간다.
차례를 보며 가장 절실한 부분부터 하나씩 읽어갔다.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이기심과 이타심, 당해도 싸다고 생각하게 되는 상황, 하지만 당해도 싼 그러한 객관적인 것의 기준은 없는 것이라는 것.
잘 되면 내 탓이지만 잘 못되면 남 탓이 되는 심리, 나 보다 더 낳은 것이라는 규정을 지어 놓고 질투를 하며 나를 들볶는 심리등등...
질투가 일반적으로 적의를 띠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탐나는 것을 남이 누리고 있는 모습을 목격할 때. 또 그것을 내 손에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을 때 우리는 질투를 느낀다. 다른 사람의 이점을 알아채고 그것을 갖고 싶다면, 그리고 결국에는 그것을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는 걸 안다면 어떨까? 잠깐 동안은 불만스럽겠지만 그것을 손에 넣을 길이 명확하다면 안 좋은 감정은 금세 사라질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질투라고 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온건하다. (P199)
몰론 그러한 감정들은 되도록이면 갖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좋겠지만 복잡 미묘한 감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인 이상 그러한 것들을 배제하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감정들이 들어날 때 마다 괴롭고 마치 죄인이 된 것인양 죄스러워 지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못된 것까? 내가 나쁜 사람인건가? 하면서 자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든것은 모든 감정들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자연스러움으로 간주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들어내면 안 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자꾸 떼어내려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기 보다는 어느 정도의 공존을 인정하면서 다독여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오죽하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을까.
인간이기에 느낄 수 있는 여러 감정중의 하나라고 생각을 한다. 다만 그것을 배가 아프다며 떼굴떼굴 구르고 남의 불행이 통쾌하다고 그 앞에서 쾌재를 부르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즉 그러한 심정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다는 것, 즉 그렇게 다스리며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한 칼럼리스트가 작성했다는 이 구절에 공감을 한다.
인간이란 기쁨도 느끼고 불쾌감도 느끼는 존재다... 분노,반감,피로감,쌤통 심리. 내겐 이 모두가 인간 경험의 일부이다. 그 감정이 사람을 지배한다는 뜻이 아니라, 가끔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P305)
그래 축하해. 정말 잘 됐네. 좋겠어.. 진심 어린 축하와 함께 . 그래 넌 참 좋겠다.. 이렇게 한 번 정도 속으로 꼭 찔러주고 나면 그거마저도 재미로 웃어 넘기고 잊을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하며 혼자 씩 웃어보게 된다.
감상을 시작하기 전에 두 가지만 이야기해두고자 한다.
하나는 책의 제목인 '쌤통 심리'가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의 해석이라는 사실이 적절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거다.
다른 하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 안에 숨겨져 있는 샤덴프로이데, 즉 쌤통의 심리를 확실하게 깨달았다는 거다.
그래서 이 감상은 불편함과 깨달음에 대한 것이 되겠다.
이 책의 번역 제목은 <쌤통의 심리학>이다. 어쩐지 소소하고, 가벼울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원제를 알게 되면 그 생각이 정말 맞는지 의심하게 될 것이다.
"THE JOY OF PAIN: SCHADENFREUDE AND THE DARK SIDE OF HUMAN NATURE, FIRST EDITION"
이 책의 원제다.
직역하면 <고통이 주는 기쁨: 샤덴프로이데,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 정도가 될까?
어쩐지 내게는 샤덴프로이데에 대한 거북함이 있다. 이와 비슷한 거북함을 주는 표현이 있는데 '홀로코스트'가 그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책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유대인이 생각하는 샤덴프로이데나 홀로코스트는 다른 민족들, 다른 언어에서의 의미와는 무척 다르다고 생각한다. 샤덴프로이데는 가볍게 '쌤통'으로 해석되지만 실제로는 목표가 되는 대상의 불행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기쁨까지를 희생하는 가학적인 면이 담긴 표현이라고 알고 있다. 가십에 관한 한 기사에서 진중권 씨는 샤덴프로이데를 언급하며, '남이 못되는 꼴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가리키는 말이다'(2013년 4월 6일 중앙일보)라고 했다. 대표적인 지식인인 그가 한 말이니 틀리지는 않았겠지만 깊이 파고 들어간다면 가볍게 웃어 넘길 수도 없는 표현이라고 덧붙이지 않았을까 싶다.
샤덴프로이데는 악마적인 즐거움이다. 자신의 영혼을 팔아 타인의 영혼의 파멸을 사는 행위가 바로 샤덴프로이데라고 생각한다. 결국에는 자신 또한 파멸에 이를 것을 알면서도 타인의 불행을 보고자 하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라는 표현 역시 유대인들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동서양의 비유대인들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두고 자꾸만 '홀로코스트'라고 한다. 이 책 <쌤통의 심리학>에서도 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성물을 바치는 행위를 의미한다고 한다.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올리는 것이 홀로코스트인 셈이다. 히틀러를 포함한 나치는 유대인을 제물로 삼는다는 의미에서 홀로코스트라고 했던 거다. 몰살 지경에 몰렸던 민족에게 "너희들은 신에게 바쳐지는 성스러운 제물이었어."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말이다.
강제로 납치되어 위안부의 삶을 살아야했던 분들께 "당신들은 신성한 봉사를 한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이런 배경들로 인해 이 책을 무척 까칠한 자세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는데, 샤덴프로이데와 비슷한 상태다.
이 책은 타인의 불행, 고통, 실패, 패배,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것들을 접했을 때 느끼는 즐거움, 통쾌함, 기쁨들에 숨겨진 인간의 심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기와 질투에서부터 유대인 대학살에 이르는 그 성질도, 결과도 다른 많은 일들의 뒤에 숨겨진 심리가 바로 샤덴프로이데, 쌤통 심리라고 말한다. 몇 번인가 부정해보려고 했지만 책을 읽어나가면서 내 안에도 그런 감정들, 심리들이 얼마간은 담겨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틈만 보이면 시비를 걸어보겠다는 까칠한 마음으로 읽어나갔기에 평소에는 보고 지나쳤을 이야기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모순되게도 가장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된 것은 '쌤통 심리'라고 적은 제목이었다. 쌤통이라고 하면 너무 가벼운 느낌이라 이 책 속의 내용들이 사람들에게 지극히 자연스럽고 사소한 것으로 비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이렇게 가벼운 것처럼 들리는 표현 속에 얼마나 심각하고 지독한 악감정이 숨겨져있는지 일깨우는 역설적인 깨달음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됐다.
'사뿐히 즈려밟고'라는 표현처럼 어울리지 않는 표현과 의미를 함께 담아냄으로써 경계심을 높이고, 더욱 조심하게 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아니다, 사실 그렇게까지 생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그 정도까지 생각할 수 있다면 샤덴프로이데의 기쁨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남아 있을 리가 없었을 거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표면적인 행간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안의 괴로움과 고통을 들여다보고 마음을 쓰게 되는 변화가 일어났으면 하고 말이다.
이 책에는 가벼운 쌤통 심리에 관한 이야기에서부터 악의적인 심리까지의 다양한 심리가 '샤덴프로이데'라는 단어로 묶여 있다. 권선징악의 개념에서 악인이 망하거나, 처벌받거나, 다치거나 하는 것은 통쾌할 수 있다. 하지만 선의의 경쟁자의 불행까지 기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그것은 어쩐지 슬픈 일이다.
어수선한 글을 정리하면 이렇다.
쌤통 심리라는 표현은 어쩐지 자업자득을 의미하는 것 같고, 가볍게 느껴진다. 누구나 그럴 수 있을 것 같고, 그렇다고 해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이해해야 할 것만 같은 거다. 하지만 쌤통 심리 혹은 질투는 때로 치명적인 상처 혹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의 원인이 될 수도 있음을 저자는 경고한다. 그처럼 가볍고 사소하게 느껴졌던 쌤통의 심리가 어떤 상황에서는 최악이자 절망의 심리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질투할 수 있다. 경쟁 관계에 있는 혹은 어쩐지 미운 상대의 불행을 바랄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마음을 먹었던 것을 후회하고, 상대의 불행을 두고 기뻐했던 마음을 부끄럽게 느끼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 실패, 아픔을 보며 즐거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설사 인간의 본성이라고 해도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로 잡고, 돌이키려 애쓰는 것이 인간이라는 거다.
인간에게는 샤덴프로이데의 심리도 있지만 동시에 황금률 혹은 은률 또한 존재한다.
자신이 당하고 싶지 않은 것을 타인에게 행하지 않고, 자신이 받고자 하는 것을 타인에게 줄 수도 있다는 거다.
저자의 의도는 모르겠다. 왜 이런 연구를 했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단지 타인의 고통을 즐겨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쓴 것은 아니라는 거다. 인간의 악함을 드러내어 선함을 일깨우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이번에는 까칠하게 읽느라 마음 놓고 읽지 못했지만 다음에는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저자의 이야기를 다시 만나보고 싶다.
어쩌면 그 까칠했던 마음 역시 쌤통의 심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까 말이다.
요즘 드라마들을 보면 정말 너무하다 못해 미친 놈에서 돌아이..거기에서 썅욕이 나올 정도로 못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일명 막장 드라마라는 별명까지 얻는 그런 드라마들 말이다.
그런 드라마에서 나쁜 놈들이 드라마의 막판으로 접어들어 응징을 받으면 우린 기분 좋음을 넘어 통쾌함까지 느끼게 된다.
사실 이런 통쾌함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책을 만나면서 다시한번 이럴때 느껴지는 통쾌함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바로 이것도 심리적인 어떤 것의 반영이라는 것...
와우~
쌤통의 심리학이란다. 이름도 참 재미있다.
물론 쌤통이라는 말이 그다지 좋은 이미지로 다가오지 않아서 잘 쓰진 않았는데..왠지 책을 읽고 나니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에는 총 11개의 장을 통해 샘통의 심리에 대해 분석하여 설명하고 있다.
우월감부터 시작하여 열등감, 남들의 실패, 인간의 본성으로 시작하여 당해도 싸다는 감정, 원수의 고통과 남들의 망신, 질투와 함께 오는 쌤통 심리, 질투의 추악한 얼굴에서 오는 샘통 심리의 어두운 그림자...까지 그것이 가진 어두운 면과 조금은 밝은 면을 함께 담고 있다.
물론 결론은 역시 조금 더 뒤에서 살펴보는 것이었다. 시간을 가지고...조금 더 여유롭게...그래서 그 샘통 심리가 가진 두가지 면에서 취해야할 것을 어떻게 취해야하는지 언급해준다.
아마데우스에 등장하는 살리에르가 질투심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 이야기이고 극적인 스토리를 위해 조금 과장이 된 이야기라고 하지만 역시 그가 질투의 대명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듯~(다만 실제 살리에르가 그런 인물은 아니라고 한다. 오해마시길~)
"고것 참 쌤통이다..."
가끔 어머니와 함께 드라마를 보면서 하는 말이다.
언제였더라...아마도 왔다 장보리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심하게 좋아했던 것 같다.
뭐 그 드라마로 악역연기를 잘해 대상까지 받은 이유리씨에겐 나중에 박수를 쳤지만~
물론 기본적으로 이책은 샘통 심리의 어두운 면에 포커스가 잡혀 있다. 다만 어두운 면을 피하고 나은 면을 찾으라는 말이겠고...더불어 조금 더 생각의 생각을 거듭하여 나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찾으라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느끼는 저 샘통이라는 것이 가끔은 자신의 성장에 채찍이 되어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질투나 샘통 심리의 어두운 면을 피해 나를 더 발전시키고 향상시킬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하라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너무 심하게 샘통에 심취하면 오히려 망가질 수도 있으니..조심하시길~^^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 나만 아니면 돼.
인간은 사회적동물이라한다. 아무리 뛰어난 존재라고 해도 결코 혼자살아간다는것은 불가능하다. 자고로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존재인것이다. 하지만 둘이상이 존재하게되면 서로를 비교하게 되고 비교를 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질투를 갖게 된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나 가족이라고 해도 모락모락 피어나는 질투심 앞에는 장사가 없다. 겉으로는 들어내지 않으려 하지만 암암리에 잠재된 질투심은 어쩔수 없는것 같다. 그런 질투심이 밑바탕에 깔린 표현이 바로 쌤통의 미학이 아닌가 생각된다. 바로 이책이 <쌤통의 심리학>이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다가와 쌤통에 대해 아주 일반적인 사소한 이야기부터 학문으로의 접근까지 시도된다. 그렇다고 너무 어려운것은 아니다. 누구나 주변에서 공감될수있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라 말하고 싶지 않던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듯한 느낌이 들것이다.
책속에서도 말한다. 운전할때 나보다 늦게 가는 사람은 멍청한 놈이고 빨리 가는 사람은 미친놈이라고. 이는 인간자체가 이타심 보다는 이기심으로 가득차 거기서 비롯된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전에 학생들을 가르칠때도 보면 특히 여학생들은 단짝으로 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둘도 없이 친하게 지내다가 어떤 계기로 절교를 하게 되면 더 무서운 적이 되어버리는것이다. 보통 친구들 보다 더 험악한 욕고 험담을 하고 다니고 더 미워한다. 그 동안 쌓아 두었던 질투가 보따리처럼 쏟아지는것인지... 아무리 가까운 친구나 연인들도 근본적으로 질투심을 느끼며 견제를 하는 듯하다. 겉으로 얼마나 드러내는지만 각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속에 내재되어있는 타인에 대한 비교와 나아가 질투와 쌤통감정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연예인들의 각종 좋은 소식에는 나도 모르게 시기심을 갖게 되고 나쁜 소식에 대해서는 거봐하는 마음을 갖지는 않았는지 ... 내가 아끼는 지인들에게 조차 질투심을 느끼지는 않았는지... 심지어는 함께 자라 온 형제자매들에게 조차 그런것은 느끼지는 않았는지...
책은 생각보다 재미있게 술술 읽어진다. 맞아 맞아 공감을 하면서... 그렇다고 쌤통이라는 자체가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수는 없을겁니다. 좋은 의미에서 약간의 질투는 경쟁을 유발하는 라이벌 의식을 갖게 되고 서로에게 발전적 에너지로 발전 시킬수 있다. 연인들에게도 자신을 더 가꾸어 나갈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타인의 불행을 즐길것이 아니라 자신의 밑거름으로 만든다면 쌤통이라는 단어는 그저 부러움의 귀여운 표현에 불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