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는 젊고도 참신한 인력을 필요로 한다. 나이가 들 때마다 경쟁에서 뒤처지는 듯한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나이는 물리적 숫자에 불과하다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속삭였지만 효과는 없었다. 다시 젊어질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간절함이 내 안에서 피어났다. 그런데 늙고 젊음은 상대적인 개념이었다. 주관 없이 사회가 시키는 것만을 따르고 오로지 물질적 성공만을 추진하는 이는 나이가 젊을지라도 결코 젊은 사고를 하지 못했다. 고리타분함이 하늘을 찌르는 그에게서는 이른바 노티(!)가 느껴졌다. 반면 끊임없이 자신을 깨트리고자 안간힘을 쓰고 배움에 대하여 열린 태도를 견지하는 이의 경우엔 흰 머리카락이 중후해보이고 깊게 팬 주름살이 섹시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사느냐는 본인의 선택이다. 나이가 들수록 제 얼굴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은 어쩌면 그래서 등장했는지도 모른다.
1934년 1월 15일생. 문학박사, 초대 문화부 장관,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 이 외에도 이어령의 이름 앞에는 덧붙는 수식어가 참으로 많다. 여든 평생 일군 것들로 모든 게 과거형일 것만 같지만 실상 그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다. 지금도 한 해에 꽤 여러 권의 책이 출판되고 있다. 고령의 나이에 무언가를 연구하고 책까지 쓸 정도의 집중력을 지닌다는 게 쉽진 않을 것이다. 오래 전 공부는 체력적이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이가 들면 오랜 시간 동안 하나에 매달리는 것 또한 체력에 의해 좌지우지될 확률이 높다. 그는 복 받은 사람이다. 아직까지 사회에서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 모 언론사에서는 그를 ‘문명 선동가’라 일컫기도 했다. 지(知)를 지(智)로 만드는 최전방에서 지금도 그는 고군분투 중이다.
<짧은 이야기, 긴 생각>은 페이지마다 차지하고 있는 글씨의 수만을 놓고 보았을 때 쉬운 책에 속한다. 술술 넘어가는 페이지가 독서와 담을 쌓고 지내온 이에게도 친근함을 선사한다. 효율성을 중시하다 못해 모든 말을 줄여가면서까지 분초를 다투는 현대인에게 적합한 형식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글은 오로지 글자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다. 사람들은 책을 읽을 때 “행간을 읽을 것”을 주문한다. 문자 그대로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다소 밋밋할 수도 있는 이야기도 글자와 글자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은 속뜻을 깨닫고 나면 입체적으로 돌변한다. 거기에 조금 더 경지가 더해진다면 그때부터는 작가의 의도를 간파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선도 첨부해가며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지가 중심이 된 다른 매체에 비해 책은 온갖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넘친다. 발설 않고 내 안에서만 생각을 키울 경우 누구도 그 생각에 잣대를 들이대가며 비난하지 않는다. 여기에까지 도달한 이에게 독서는 즐거울 수밖에 없다. 시작은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였을 수도 있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남들은 모르는, 제 상상력의 힘으로 생명을 불어넣은 생생한 이야기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고인 모든 것은 썩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익숙하고도 편한 것만을 갈망하지만 실상은 자신을 망치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저자는 우리에게 움직일 것을 권한다. 근데 몸이건 마음이건 억지로 애쓴다 하여 움직여지질 않는다. 움직일 필요성을 느껴야만 움직일 수 있는 게 몸이고 마음이다. 무언가를 감지하고 느끼기 위해서는 열린 태도가 필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게 너무도 당연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굳이 움직이려 들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리고 으레 존재하는 것을 뭐 하러 느낀단 말인가! 감동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감수성이 깨어 있어야만 한다.
‘혁신’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사람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순간부터 늙기 시작한다. 이 사실을 잘 아는 저자는 우리더러 길을 물을 것을 주문한다. 자기 안의 모든 것이 확고한 이는 결코 물으려 들지 않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자신이 지닌 것 또한 옳은 것에서 그른 것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치 않는다. 자기 확신은 그렇게 아집과 맹신이 되어 간다. 질문을 던지는 이는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전제를 지녔다. 그(녀)는 질문을 던질 뿐만 아니라 돌아오는 답변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따르고자 한다. 저자는 ‘묻다’ 앞에 ‘길을’이라는 목적어를 추가했다. ‘길’은 방향성을 지닌 존재다. 사람은 가고자 하는 바가 결정된 상태에서 길을 묻는다. 즉, 타인의 의견을 듣되 비판적으로 수용할 것을 저자는 권한 셈이다. 기준 없이 상대의 말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을 우리는 “줏대 없다”며 손가락질 한다. 이는 열린 마음을 품었을 때 보일 수 있는 모든 장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질문을 스스로에게도 던지는 자세이다. 이는 어쩌면 두 번째 길을 묻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도 있겠다. 물음은 반드시 타인에게만 던져야 하는 게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자아와의 대화이다. 세상의 언어로 이를 표현하자면 “자아성찰” 즈음에 해당하지 싶다.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는 이는 자기 안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아무것도 모르면 질문도 성립할 수 없고, 개혁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신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린 스스로를 보다 잘 이해할 기회를 부여 받는다. 그런 후에는 시야를 세계로 돌리면 된다. 작가가 권한 ‘작은 생각 큰 마음’은 제 안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럴 때 질문은 보다 진실될 수 있으며, 세상을 바라보며 얻은 결론 또한 마음 깊이 새길 수 있다.
단지 세 가지의 원칙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우린 이 세 가지마저도 제대로 지킨 적이 없다. 시간이 흐르니까, 시간에 떠밀려가며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나이가 드는 순간에도 제 늙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난 나의 생각이 멎지 않기를 기대한다. 나이가 들면서 두려움이 드러나는 게 아니라, 삶을 대하는 보다 진지한 자세로 내 자신이 빛났으면 한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지는 게 사람의 일이라고 들었다. 짧은 이야기 그리고 긴 생각, 모든 것은 내 영(靈)이 영원히 젊길 바라는 마음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