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시리즈’를 내놓으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후로 이제는 혼자 죽는 것에 대해서까지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죽음을 앞에 둔 나이에도 책을 내게 되었다고. 처음에는 "왠 궤변?"하면서 시큰둥했으나 책을 읽을수록 빠져 들고 만다.
일리 있다.
비록 자신의 연구 결과는 아니지만 혼자 사는 것이 부부로 사는 것, 3인 가족, 4인 가족이 함께 할 때 보다 만족도가 훨씬 높다는 통계와 나이가 들어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 있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지 않느냐는 주장에는 달리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병원은 사람을 살리는 곳인데 요즘 우리는 죽기 위해 병원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도 틀리지 않다. 간병보험이 발달한 것도 집에서 혼자 죽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고.
많은 법과 제도를 일본으로부터 받아 들여온 우리나라에도 적용이 가능한 주장이다.
짧지만 되새겨 볼 만한 책이다.
요즘 미혼을 선택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죽음을 혼자 맞이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는가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담담히 적어내고 있습니다. 자녀가 있는 삶은 행복하고, 그렇지 않은 삶은 불행하다는 보통 사람들의 인식에 의문을 재기하는 작가는 작가에게 감당하기 힘든 짐을 지우는 것도 매우 불행한 삶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한번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친구가 권한 책인데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부모님의 죽음에 대처하는 태도와 내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태도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이 차이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도 좋은 기회였다.
고독사라는 말 대신에 재택사라는 말을 쓰자고 하는 작가. 수긍이 된다. 병원이나 시설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대신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자는 작가의 권고도 받아들이고 싶다. 부모의 죽음을 처리하는 쪽은 내가 확실하겠지만 내 죽음만큼은 내가 처리할 수 없으므로 준비에도 한계가 있다. 내가 살아서 전하는 뜻이 죽음 이후에 이루어지게 될지 나로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든 책을 읽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병원으로 가든지 요양원으로 가든지 집에서 보호를 받든지 분명히 하나 이상은 선택해야 할 시기가 올 것이므로. 피하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외면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시대, 이제는 죽음까지도 내가 통제하는 범위 안에 들여 놓아야 할 시절이다.
잘 죽는다는 것이 잘 사는 일과 같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죽음 자체가 크게 두려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두렵다면 사는 일에 미련이 많다는 증거일 수도. 더 잘 살고 싶다거나 더 갖고 싶다거나 더 알려지고 싶다거나 더더더 하는 욕심이 있는 한 죽고 싶지 않을 테니까, 아니 죽을 수 없다 싶을 테니까.
정말 잘 살아야 한다. 사는 동안 잘 살아 있어야 한다. 스스로도 잘 살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잘 하고 가까운 사람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도 적절한 거리를 지켜가면서 잘 지내고. 나쁜 마음은 어쨌든 물리쳐 가면서.
사람은 결국 혼자 죽는다는 사실, 어디에 있든 죽는 순간에는 혼자일 경우가 절대적으로 많다는 사실만 인정해도 혼자 죽는 것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지는 않게 될 것 같다. 고독사가 문제가 아니라 고독하게 사는 동안이 문제라는 말, 오래 또 깊이 남을 것이다. 우리네 정치나 사회망에서도 제대로 대처해야 할 대목이고.
혼자 죽는 것 까지는 아직 모르겠고...집에서 죽기를 바란다.
내가 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나의 관이 들어갈 수 있을까
이런 고민? 상상을 해 본적이 있다.
요즘은 집에서 죽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관을 엘리베이터로 운반할 일은 없겠지만...
병원에서 죽는 것 보다는 집에서 조용히 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해본 생각이였다.
만약 지금 살고 있는 공동주택 아파트가 나의 죽음의 장소라면
여러 이웃에게 그건 민폐를 주는 행동이겠지
민폐없이 자유롭게 죽을 수 있는 전원주택으로 얼른 이사를 가야겠다.
만족스러운 노후의 모습을 따라가 보니 결론은 혼자 사는 거라고 작가는 이야기 한다.
노후의 생활 만족도는 익숙한 장소에서 진정으로 신뢰 할 수 있는 친구(친척)와 자유롭게 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가족이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건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가장 외로운 사람은 마음이 통하지 않는 가족과 함께 사는 고령자다. 따로 살아도 가족은 가족이고 서로 오가면서 파트타임 가족을 하면 된다.
나도 늙으면 혼자 살기를 원한다. 아니 지금도 혼자 살기를 원한다.
내가 가장 행복했을때는 2018년 집을 떠나 10개월동안 혼자 살았을때다. 필요할때는 서로 오가는 파트타임가족이 있으니 그리 외롭지도 않았다. 죽음도 그렇게 맞고 싶다. 연명치료를 하고 싶지도 않다. 치매가 걸리면 어떻하나..하는 생각도 있지만 가족의 동의만 있다면 치매여도 혼자 살수 있다고 한다. 간병보험을 통해.
뭐 나에게는 연금이라는 것이 있으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두 번째 암 수술을 앞두고 마음은 우울하다.
죽을병은 아니지만 또 다시 나에게 이런 병이 찾아오다니 내가 참 힘들게 살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아무래도 혼자살면 스트레스는 덜 받을 것 같다. 전화기 사진첩을 정리하면서 영정사진으로 쓰일 몇 컷을 추려 놓았다. 쓸데없는 짓이긴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기에.
내가 가장 예쁘고 환하게 웃었을 때. 그때를 추억하며 요즘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그런 날은 점점 많아진다.
선입견이 있었다. 페미니스트들에게 가끔 가지는 편견이다. 저자의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어 목록에 올려놓았었다. 마침 읽을만한 적당한 책도 없기에 빌린 책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볍게 선택한 데 대해 미안한 마음이다.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인상 깊다. 그다지 두껍지 않은 책이라서, 집으로 오는 길에 들른 까페에서 읽다보니 어느새 다 읽었다. 그리고 간간 소리 내어 웃었다.
표지에 여러 부제들이 쓰여 있다. ‘건강하게 살다 가장 편안하게 죽는 법’ ‘어떻게 죽는 것이 가장 편할까?’ ‘나이들수록 혼자 지내는 사람이 편안한 이유’ 모두 건성으로 지나쳤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다시 눈에 뜨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소리 내어 읽어 본다.
죽은 다음 혹은 죽는 순간은 잘 모르겠고 지금 읽는 순간이 편안한 건 맞다. 너무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 절대 공감을 가져오는 듯하다. 정말이지, 겉에만 번지르르한 이야기들의 홍수에 지쳤다. 그래서 솔직한 이야기를 하기가 겁이 나는 세상이다. 누군가 칼을 준비하고 있다가 내가 발언하면 칼끝을 날카롭게 겨누면서 그런 이야기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을 지을 것만 같다. 우리는 지금 너무 이상적인 윤리에 세뇌되어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자신도 그렇지 않다는 걸 무슨 일을 겪여봐야만 알 수 있고 때론 아니 대부분은 자신은 예외라고 생각한다. 내로남불의 시대니까.
‘가족과 함께 살면 아무래도 나를 억누르고
가족을 먼저 생각해야 하니까요.
당연히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낮아질 수밖에요.’
어느 60대 여성의 인터뷰에서 나온 말이다. 이건 평범한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성애나 현모양처라는 예쁜 포장으로 감춰버리고 ‘가족 만세’를 외치는 이 세상에서 혼자 사는 이들은 졸지에 불쌍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나 역시도 혼자 남은 나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지곤 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가장 외로운 사람은 마음이 통하지 않는 가족과 함께 사는 사람이다. 자녀가 없는 고령자라면 더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사회다. 그런데 자녀가 있다고 불안하지 않은 걸까? 그렇지 않다. 자녀가 다 크면 이미 내 가족이 아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갈등을 피할 수 없다. 자식을 대하는 저자의 말이 재미있다.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에너지, 돈이 드는 일이 육아다. 그렇다면 자녀에게 조금은 부담을 줘도 괜찮다고 말한다. 부담할 수 있는 만큼의 적당한 책임을 맡기자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병원, 혹은 시설에서 행복하기를 바라기는 어려운 일이다. 사실 거기 들어가는 비용으로 집에서 지내도 충분한 경우가 많다. 시설에 있다고 특별한 케어를 받는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집에서 지내는 노인이 많으면 그만큼의 시스템이 발달할 것이다. 지금까지도 많은 변화가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죽는 순간 의사나 의료진이 필요하다고 믿는 것도 환상이다. 사실 그 순간 의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어 있겠나. 긴급할 때 연결될 수 있는 비상망만 잘 되어있다면 병원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한다. 동감한다.
중요한 것은 살아있을 때 고립되지 않는 것이다. 꼭 가족이 함께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마지막 순간에 누가 꼭 옆에 있어야 하느냐고 묻는다. 갑자기 자는 듯이 죽는 것을 노인들은 축복이라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 자식들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으니 좋은 죽음이라 할 수 있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초고령 사회의 죽음은 속도가 느리다고 한다. 그러니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말은 미리미리 하자는 이야기다. 어쩐지 숙연해진다.
시설에서 가족 같은 대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가족이 감당하기 어려워서 보내놓고 많은 것을 바란다? 이것도 자본주의 논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치매 노인이 이상한 것을 먹어서 고민이라는 케어 상담에 저자의 답변이 흥미로웠다.
--‘뭘 먹었다는 얘긴가요?’ ‘한밤중에 배가 고팠는지 냉동식품을 건드린 것 같아요’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거지? 냉동식품 좀 갉아먹었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딱딱하고 차가우니 어차피 도중에 그만뒀을 것이다. 게다가 냉동실에는 음식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세제 같은 걸 마셨다고 해도 냄새나 맛 때문에 결국 토해낼 것이다. 치사량에 이를 때까지 마실 리는 없다.--
이 부분을 읽는데 폭소가 터졌다. 그래 맞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을 커다랗게 해석해서 문제를 만드는 것이 소위 ‘정상인’들이다 저자 말대로 ‘치매에 걸리거나 말거나 함께 울고 웃으면서 가능한 한 많이 웃으면서 살아가면 된다.’ 가슴이 따뜻해진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치매 환자가 살기 좋은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살기 좋은 사회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모두가 중도 장애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니까.
우리는 모두 언젠가 늙고 병든다. 그리고 대부분 혼자인 시기가 온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기이기도 하다.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비참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때론 지나치게 힘을 쓰며 살아가기도 한다. 이 책의 뒷부분, 저자의 인생관이 담긴 한 구절에 눈물이 핑 돈다.
‘사회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은 살면 안 되나요?’
삶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 그것을 자신들의 잣대로 이리저리 재고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안심하고 치매에 걸릴 수 있는 사회, 장애가 있어도 죽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저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혼자 즐겁게 살면서 혹시 내가 할 일도 있을까 찾아볼 생각이다.
저자는 오사카의 이비인후과 의사인 쓰지가와 씨가 쓴 세 권의 책―《노후는 혼자 사는 게 행복하다》(2013), 《둘의 노후도 이렇게 하면 행복하다》(2014), 《속편 : 노후는 혼자 사는 게 행복하다》(2016)―과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쓰지가와 씨는 자신의 병원을 이용하는 60세 이상의 고령자 약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서 ‘혼자 사는 고령자의 생활 만족도가 가족과 함께 사는 고령자보다 높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 ‘입회인 없이 죽을까 봐’ 걱정하는 것은 죽어가는 사람일까, 남겨지는 사람일까? 취재하면서 보니 임종을 지켜보고 싶어 하는 쪽은 죽는 사람이 아니라 남겨지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를 ‘임종 입회 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였다... 초고령 사회의 죽음은 속도가 느리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죽음이다.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말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리미리 하는 게 좋다.” (p.99)
쓰지가와 씨는 ‘2인 가구의 노후 행복의 비결’ 일곱 가지로 서로를 이해한다, 가사 분담을 확실히 한다, 가치관이 달라도 신경 쓰지 않는다, 눈앞의 불만은 사소한 거라 생각한다, 둘이 있을 때부터 미리 혼자가 되었을 때를 준비한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거리를 둔다, 자신의 세계에 파고든다,를 제시했고, 자신의 3부작의 결론으로 살던 집에서 계속 살기, 돈 부자보다 사람 부자 되기, 타인에게 신세지지 않고 자유롭게 살기를 들었다.
『간병이 필요한 고령자는 자기 일 하나만으로도 벅차다. 여유가 있어야 주변 사람도 배려할 수 있다. 자신에게 여유가 있을 때나 자녀에게 “너도 할 일이 많을 테니 어서 돌아가”라고 말할 수 있다. 치매에 걸리면 과거와 미래는 없고 오직 현재뿐이다. 아기와 마찬가지다. 생각해보면 아기 때는 완전히 자기중심적으로 살았다. 그런 생활을 점점 억제해가는 과정을 성장한다고 한다. 나이 먹어서는 다시 한번 그때로 돌아가 과거도 미래도 생각하지 않은 채 오로지 현재만 보고 살아도 되지 않을까?』 (pp.138~139)
저자인 우에노 지즈코가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라는 과감한 제목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쓰지가와 씨가 노후 3부작을 쓰면서 사용한 데이터(독거 노인과 동거 노인 혹은 1인 가구에서 4인 이상 가구 사이의 만족도 비교, 마찬가지의 그룹을 가지고 조사한 고민도, 외로움, 불안 비교와 같은) 덕분이었다. 그 데이터들은 분명히 혼자 사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과 비교해서 더 낫다, 라고 말하고 있다.
『... 최근에는 노인 보건 시설이나 특별 양호 노인 홈 모두 간호를 당연하게 여겨서인지 입소 시에 가족에게 임종에 대한 ‘동의서’를 받는 게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마지막에는 병원으로 보내겠습니까, 아니면 그대로 방에서 간호하겠습니까?”라고 묻는다고 한다. 각종 연명 장치의 사용 여부를 ‘예/아니오’로 선택하는 것은 사전 지시서와 같다. 본인이 아니라 가족의 동의를 받는 이유는 입소자의 태반이 치매이기 때문이다.
다카구치 씨의 시설에서도 가족 동의서를 받느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나요?“라고 다시 물으니 그녀의 대답은 감동적이었다.
”살고 죽는 데는 정답이 없어요. 가족과 직원이 함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망설이면 돼요.“』 (pp.166~167)
다만 거기에는 어쩔 수 없이 도래하는 허약의 시기,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간병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하였을 때 적당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는 전제가 깔려 있기는 하다. 쓰지가와 씨가 데이터를 만들면서 사용한 노인 그룹은 병원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중산층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이 일단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이야기하자 아내는,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이상의 수준에 있어야 한다는 전제는 너무 중요한 것이라며,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라며 나를 추궁했다.)
“... 간병 보험이 불러일으킨 큰 변화 중 하나는 돌봄 노동이 무료가 아니라는 상식을 널리 정착시킨 것이다. 지금까지 간병은 여자의 무임금 노동이었다. 나는 이를 ’감사 없는, 평가 없는, 대가 없는 노동‘이라고 불렀다. 특히 며느리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강제 노동‘이었다. 어느 해외 문헌에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간병은 강제 노동‘이라는 글을 보고 무릎을 쳤다... ’간병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노동‘이라는 사실을 하나의 ’상식‘으로 일본인들 사이에 널리 퍼트린 효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단 돈을 내면 갑자기 지금까지 공짜였던 것의 가치를 알게 된다...” (pp.191~192)
아버지는 두어 달 전 요양 등급을 받았고 하루에 세 시간, 일주일에 다섯 번의 방문 요양 서비스를 받고 있다. 얼마 전 아버지가 입원을 하게 되어 급히 간병인을 구하였다. 60세의 남자분이었는데 9일간의 서비스에 가족 모두가 만족하였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번갈아 가며 병실을 지켜야 했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현재를 교사로 삼아 나는 노후와 죽음을 끊임없이 공부하는 중이다. 우등생도 열등생도 피할 수 없는...
우에노 지즈코 / 이주희 역 /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한다 (在宅ひとり死のススメ) / 동양북스 / 213쪽 / 2022 (2021)
여전히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사는 사람은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시선의 대부분은 동정이다. 동정의 이유는 여러가지다. 그 중 그렇게 혼자 살다 나중에 아프면 어떻게 할라고, 라는 질문이 많다.
이 동정은 그런 시선을 보내는 사람만의 문제도 아니다. 동정을 받는 본인도 사실 걱정이다. 왜? 한국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혼자 사는 사람들의 고민은 이런 시선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니다. 사실 고민이다. 외로움 고독. 고독사. 정말 결혼하면 외롭지 않은가? 정말 결혼하고 애 낳으면 즐거운 지 물어 볼 여유는 없다. 다들 끊임없이 그런 말들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책은 데이터에 기반해서 말한다. 혼자산다고 더 외롭거나 더 불행하지 않다고. 가장 불행한 사람은 내 마음을 몰라주는 가족과 사는 2인 가족 3인 가족이라고 한다. 그래서, 죽을 때 혼자 죽을까봐 걱정하지 말고 살아있을 때 혼자일까봐 걱정하라고 말한다. 혼자 살지 말고 결혼하라는 말이 아니다. 인적 네트워크를 유지하라는 말이다. 느슨한 네트워크.
그래 다 좋아. 외로움도 일시적 감정이니 왔다 가는 것이니 견딜 수 있어. 하지만, 치매에 걸리면? 내 정신을 내가 챙기지 못 하면 어떻게 하지? 라는 고민에 대해서도,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설마 자신이 치매에 걸리더라도 주변의 조금의 도움만 받으면 내 집에서 살다 내 집에서 죽을 수 있다는 말을 한다.
다만, 위에서 말한 1인 가족으로 살다 자기 집에서 죽는 행운의 기저에는 일본의 '간병보험'이라는 경제적 하부구조가 깔려 있다. 의료보험처럼 일본에서는 보험 가입을 통해 노후의 간병이나 죽음과 관련된 지원을 해 준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어떤 지 모르겠다.
뭐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아직 오지 않은 노년의 고독과 고독한 죽음을 걱정해 원하지도 않는 결혼을 한다는 상상은 어디서 왔을까? 저자는 실제 데이터를 통해 혼자 사는 노년이 고독하지 않고 내 집에서 평생 살다 내 집에서 죽는 죽음도 그리 외롭지 않다고 분명히 말한다. 좋은 책이다.
다가올 우리들의 이야기죠
시대가 바뀌니 이제는 누구에 의지 않고 노년 노후 죽음을 맞이해애할 때
요양원 하면 벌써 겁부터 나는데 스스로 준비할 때에 공감..........
노인들 많은 일본 우리도 뒤쫒아가고 있죠 700만이나 된다는 기사
혼자 고독사 하는 것이 흔한 세상이 될듯해요
나라 복지와 요양제도의 개선을 기대해봅니다.
내용 공감 많이 하지만 일본의 잘된 요양 복지등과 우리나라의 큰 차이점이 느껴집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리되어 더 공감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