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무서운 이야기를 참 좋아했다. 할머니는 여름이면 저녁을 드시고 옥상에 돗자리를 깔았다. 창문이 적어 바람이 잘 통하지 않았던 집안과 달리 계단 몇 개만 올라갔을 뿐인데 옥상은 바람이 시원하게 솔솔 잘도 불었다. 마루에 접어놓았던 돗자리를 깔고 모기향을 피우고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이 검어지면서 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시간이 다가오면 나는 할머니 옆에 누워 무서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평소 무뚝뚝하던 할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이야기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우리가 다른 귀신을 불러오나니」를 읽으면서 어린 시절 할머니가 들려주셨던 무서운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산을 넘어가야 하는데 해가 져서 어디서라도 하룻밤 묵어가야 하는 여인들, 전쟁통에 떠난 벗을 기다리다가 죽었지만 죽은 줄도 모른 채 어린 모습 그대로 어른이 된 친구를 쫓아다니는 여자아이 등.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무서운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 여자였다. 그러고보면 어릴 때 봤던 책이나 텔레비전에 나왔던 귀신들도 다 여자였다. 그때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말하지 못했고 살지 못했던 여자들의 꾹꾹 눌러담은 한이 귀신이야기를 탄생시켰고, 그런 이야기는 오래도록..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다만 이 책에서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한 채 억울하게 죽은 여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여자들이 생존을 위해 힘껏 싸우고 투쟁하고, 때로 짓밟는다.
<창귀>는 특히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생존에 대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소설이다. <그를 사랑하는 단 하나의 마법>도 최근 수많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불법 동영상을 촬영한 뒤 웹에 영원히 박제시킨 뒤 협박하여 영혼을 파괴시킨 다크웹도 관한 내용이다. 주인공이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으로 위기를 모면하지만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옛날 민담을 연상시키는 <큰언니>의 설정도 흥미로웠다. 탈출구와 모성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너의 자리>는 계약직이자 여성이라는 허약한 기반에서 비롯된 불안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정말 호러 장르라고 할까.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섬뜩함이 느껴졌다.
<무진도 탈출기 게임 환불 요구서>는 다른 여성 서사가 결이 다르다. 여성의 이야기로 한정짓기보다는 미디어에 통제되어 50년 동안 거짓 세계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인데 재미있다. 자본의 양극화와 착취당하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여성 호러 단편선'이라는 부제가 붙은 『우리가 다른 귀신을 불러오나니』는 가벼운 호러 같지만 현실과 밀접하게 얽혀있다는 점에서 가볍지만은 않은 소설 모음집이다. 모두 10편의 소설이 들어있으니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독서를 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
이 소설을 읽으면 우린 익히 들어오던 괴담에도 여성의 공포는 굉장히 특수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여성의 공포는 단순히 살인마가 쫒아오고 악몽을 꾸는 형태가 아니다 개별적이고 특수하다 이 소설집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여성의 공포를 마주하게 한다 모성의 비틀린 결심과 그걸 이해하는 딸의 마음 여성이 아니면 그 마음에 쉽게 공감할 수 없다 이 소설집은 겁을 주고 비명지르게 하는 공포가 아니다 여성들의 공포에 대해 한명한명 최선을 다해 써내려간 결과다
소설 한 편 한 편을 읽다보면 여성들의 숨막히는 상황이 나온다 우리는 그 상황에서 그 여성에게 이입하여 공포를 읽어낸다 그리고 이 여자들만의 특수한 공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의도적으로 화상을 입게 해 '집세'를 치르게 하는 시어머니보다 무서운 건 가난이라는 상황이었다 여성은 일반적인 공포에 이중으로 공포를 겪는다 그 이중의 공포를 보며 읽는 나는 현실의 서늘함을 느꼈다 여자가 살기 너무 어려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하는 모든 순간이 공포 아닐까? 여자였으면 겪지 않았을 공포들이 너무나 많다 소설들은 계속해서 이런 상황을 마주하게 한다 소설 내용보다 더 많은 것들을 생각나게 하는 소설집이다
사람은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귀신은 사람을 죽일 수 없거든요. 전 귀신은 무섭지 않아요. 사람이 무섭죠. (267)
올 초에 남유하 작가님의 <양꼬치의 기쁨>을 재미나게 읽고, 공포소설도 재미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공포영화는 못 봄ㅜ) 그래서 라인업 중 남유하 작가님 이름이 눈에 들어왔고, 기대감을 안고 읽기 시작했다.
이런 앤솔로지는 무엇보다 처음과 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감은 맞았다!
남유하 작가의 <시어머니와의 티타임>으로 공포의 분위기를 달구며 시작하며 마지막 <그를 사로잡는 단 하나의 마법> 까지 현실 속 이야기가 더욱 맞닿아 오싹하기까지 했다. 무서운 설화 느낌부터 현실 속 소재(고부갈등, 남아선호사상,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직장내 성희롱, 가스라이팅, 디지털성범죄 등)들이 어우러져 환상적이면서도 잔혹한 공포의 분위기를 흩뿌린다.
역시 귀신이 무서운 게 아니고, 사람이 무섭다는 거.. 읽으면서도 잔인한 장면보다는 일상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내는 말과 행동하는 모습에 공포감이 더 조여온다.
일러스트도 뭔가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소설을 읽기에 앞서 일러스트를 보며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상상하고, 읽고 다시 보면 찰떡같은 분위기가 흐른다.
어떤 에피소드는 짧아서 아쉬웠지만, 또 길면 무서울 것 같기도 하고, 참 아이러니하다.
제일 인상적이었던 건 <창귀> <너의 자리> <그를 사로잡는 단 하나의 마법>
손님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 그가 어떤 감언이설로 너희를 구슬린다 해도 절대 넘어가면 안 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니? (102)
으... 으악!
모르는, 어렴풋한, 아리송한... 단어들이 많아...
어릴 적 전래 동화를 싫어한 대가를 이제 받는 건가...
충이, 멱목, 습신, 걸음나비, 도깨비바늘, 도꼬마리, 쇠무릎 (두 문단에 이만큼...)
오싹 서늘하려고 읽었는데
열이... 오른다...
뒷목 뻣뻣...
나쁜 X들...
가스라이팅은 무섭다. 악질이다, 변명 불가 범죄다.
늘 참 기가 막히는 고부갈등...
이러지들 맙시다... 좀
데이트폭력, 스토킹, 묻지마 범죄는 한 구덩이에 넣고 소멸시킬 수 없나...
권력, 금력, 체력 기타 등등 무엇이건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공포에 비하면
작품의 기괴함이 애틋할 지경이다.
그래도 복수의 한길로 글을 써주신 작가님들께 감사드린다.
현실에선 아주 입에서 X싸는 소리만 많아서...
밤이고 타인의 시선이 없어서인가 욕이...
품위 있게 살고 싶은데...
생존만 하면 다행인건가,
평생 어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지도 모르고 그런 말해도 되나
이런 XXX XXX 사회를 만들어 놨어...
오늘도 품위는 뭐...
“귀신보다 무서운 건 사람이고 사람보다 무서운 건 돈이었다.”
“사람은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귀신은 사람을 죽일 수 없거든요. 전 귀신은 무섭지 않아요. 사람이 무섭죠.”
내 말이! 귀신이 사람 해코지 하는 거 살면서 한 번도 못 봤다, 사람이 사람 괴롭히고 죽이는 건 찾아보면 매일 다량으로 알아볼 수 있다. 알량한 법정 최저 임금 어쩌고 하면 ‘돈’을 이유로 사람 괴롭히고 죽이는 사람 같지 않은 X들의 X같은 X소리도 지겹도록 들었다.
으음... 이러려고 읽은 건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