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이야기를 한다는 건 내가 특정 언어와 언제 처음 사랑에 빠졌는지, 문학이나 과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나는 인생에서 무엇을 포기하지 못하고 어디에서 기쁨을 길어내는 사람인지를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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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불을 끄고 집으로 가던 길, 안 풀리던 문장이 조금씩 나아지던 순간에 했던 혼잣말들이 또 다시 눈처럼 소복이 쌓여갈 즈음 두 명의 여성 번역가가 편지로 대화를 나눠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주말에 고민하던 중 만약 내가 이 프로젝트를 한다면 반드시 이 친구와 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메일을 보내려는 찰나, 편집자로부터 이 친구의 이름이 적힌 메일이 왔다.
그리하여 언제나 응원하고 애정을 보내던 번역가 친구와 작정하고 원 없이 번역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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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오랜 세월 동안 아침에 책을 펴고 이국과 모국의 언어를 만지작거려온 여자들의 이야기랍니다. 혹시 받고 싶은 분이 계신가요?" _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 인사말 '알고 보면 할 말이 많답니다'
서문이 너무 좋아 뒷 이야기로 넘어가는 책장을 멈출 이유가 없었다.
노지양 번역가가 쓴 인사말은 이 책의 전부를 축약해 놓은 글이다. 번역을 하게 된 이유, 그리고 번역을 지속하고 있는 이유 그 과정에서 느끼는 희노애락. 그리고 오랜 시간 번역이란 길을 함께 해온 동료 번역가에게 느끼는 큰 애정과 안쓰러움.
우리가 익히 아는 좋은 책들을 번역해온 노지양 번역가와 홍한별 번역가가 나누는 이 편지글에는 번역의 숨은 행복과 고통이, 그리고 일하는 사람으로서 진솔한 고백이 담겨 있다.
제목부터 마음에 쏙 들었던 책.
동녘 출판사에서 진행했던 해님 서포터즈 활동을 하면서 청소년 도서만 제공받았었는데 내부 사정상 마지막 책은 '자유 도서'로 내가 직접 읽고 싶은 책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내가 고른 책이 이 책이었다..!!!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라니.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제목이지? 게다가 저자가 저자가.. 번역가님들 잘 모르지만 나도 들어볼 정도로 유명하신 분들. '언어생활자들이 사랑한 말들의 세계'라는 부제까지 엉엉 나 울어요 ㅜㅜ
번역가의 삶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다.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언어를 다루는, 책을 만드는, 글을 쓰는 사람들. 정확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또한 알고 있다. 그들의 처우나 대우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그치만 돈이 꼭 최대치의 행복은 아닌 법.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성공과 행복이 있고 사람들마나 원하는 행복의 모양은 다르니까.
현지에서 살면서 숨겨진 작가의 훌륭한 작품을 운명처럼 발견한 후
한국 독자에게 소개하는 건 번역가의 궁극적인 로망이 맞지. 117쪽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한 번 느꼈다. 난 여전히 번역가의 삶을 동경하는구나.
내가 진정 원하는 궁극적인 로망이 위에 언급한 구절에 나와 있다. 이 책에서는 번역가의 멋진 삶에 대해 나와 있지 않다. 번역가의 현실, 프리랜서의 고민, 일하는 엄마의 어려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정당한 대우를 받기 어려운 세계에 대한 기록 등등.. 어떻게 보면 번역가의 어두운 뒷모습에 대해 사실적으로 묘사한 글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난 이 글을 읽고도 여전히 그리고 더 열렬히 그들의 삶이 좋아 보이고, 그들의 삶에 들어가보고 싶다는 욕심까지 살짝 생긴다.
아래 구절들은 번역가의 삶에 대한 나의 로망을 활활 타오르게 만들어준 내용들.
저장 꾹꾹꾹.
사회적 경제적 보상이 많지 않은데도 우리가 이 일을 하는 건 어쨌든 글을 쓸 때의 기쁨 때문이 아니겠어? 이 자리에는 무슨 단어가 들어가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딱 들어맞는 단어가 떠올랐을 때의 짜릿함, 도무지 한국어로 옮겨지지 않을 듯한 문장을 두고 끙끙대다가 키를 발견하고 스르륵 암호를 풀 때와 같은 상쾌함, 운 좋게 비슷한 소리가 나는 단어가 포개졌을 때 뜻하지 않게 생기는 리듬, 다른 색과 무늬의 천을 서로 대보며 잘 어울리는 천을 찾을 때처럼 단어들 사이의 어울림과 간섭을 탐구하는 과정. 원문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 스산함, 슬픔, 따뜻함, 고요함, 충격, 통렬함을 조심스럽게 내 언어로 어루만져 이루어내는 일. 거기에 속절없이 낚여버린 거야. 23쪽
이런 대담한 공감각적 이미지는 누구의 소행일까? 저자일까 번역가일까 궁금했어. 원문이 짐작도 가지 않는 것을 보면 번역가가 범인일 것 같지만, 만약 저자가 의외의 이미지를 썼다고 하더라도 그걸 아름답게 어긋난 상태로 남기려면 번역가가 용기를 발휘해야 했겠지. 100쪽
그런데 나는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보다도 편집자가 ("잘 팔릴 것 같은 책이다" 혹은 "좋은 평을 받은 책이다"가 아니라) "이 책은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책이다"라고 소개하는 책에 이상하게 마음이 끌리더라고. 우리가 책으로 책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가장 큰 기쁨과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지점은,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번역한다는 게 아니겠어? 그런 마음으로 편집자와 같이 책을 만드는 경험은 분명 즐거울 거고, 이 편집자는 내 원고를 소중히 다뤄주고 정성스럽게 좋은 결과물을 내줄 거라고 기대하게 되니, 어쩐지 마음이 설레면서 "그럼 한번 해볼까?"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 128쪽
단어와 단어 사이를 만지고 이(異)문화와 언어를 다루고 책을 만지는 이 직업에 대한 나의 로망은 이렇게 끝날 줄을 모른다.
"너랑 나랑 번역 이야기하면 우리는 재미있겠지. 하지만 누가 그런 걸 읽고 싶어 해?"
선생님, 저요.??
어떤 책은 번역가의 이름 자체가 든든한 추천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려준 번역가 노지양×홍한별 님. 두 분의 대화가 동녘의 편지 시리즈 맞불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로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뛸듯이 반가웠다. 무려 두 번역가님의 '옮긴이의 말'이 아닌 '번역가 자신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몹시 귀한 경험이었기에 읽는 이의 입장에서도 선물처럼 느껴지는 책이었다.
"번역은 기본적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분투하는 글쓰기고, 창작의 충동과는 전혀 다른 충동을 따르긴 하지만, 그래도 분명히 쓰는 과정이긴 하지."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고 올바른 해석을 위해 문화를 공부하고 언어를 업데이트하고 최선을 다해 모국어로 전달한다. 번역은 마치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고군분투하는 히어로의 일같다."독자들에게 정확하면서도 가독성 있고, 장르에 따라 감동까지 주는 텍스트를 제공하는 거니까. 오늘도 나는 언어의 매개자, 조용한 그림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자 싶어."이러한 번역가의 서글픈 숙명과 "어떤 번역서를 집어도 간유리 안경을 끼고 읽는 것처럼 애매하고 아리송하게 읽히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사명감이 히어로의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번역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글을 옮긴다는 의미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게 한다. 단순히 단어와 단어를 바꾸는 것이 아닌 다른 언어로 씌여진 글을 우리의 이야기로 다시 만드는 일.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분해하고 바꾸고 재조합을 거쳐 머나먼 타국에서 글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일. 그 심장 뛰게 하는 간절함이 다른 누군가에게도 가서 닿기를 바라는 바램.
알면 알수록 여러모로 쉽지 않은 직업으로서의 번역가, 하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번역하는 일에서 결국 행복을 찾는다는 노지양, 홍한별 번역가님의 한결같음에 나까지도 조금 단단해지는 기분이 들어 응원하게 되었다.그리고 두 분의 다음 책이 기대된다."내가 찾던 바로 그 책이고, 내가 쓰고 싶던 책이고, 내가 우리말로 다시 쓰고 싶은 책이다."운명같은 책을 만나, 그렇게 먼저 새로운 세상을 접하고, 그 세상이 나같은 독자들에게도 와서 닿을 수 있도록 번역가님의 글로 다시 써주시기를 기다려본다.
"시간이 흐르고 책이 나오고,...그 책을 좋아하는 독자가 있다. 책이 사랑받는다."
생각해보면 번역을 할 때 그런 게 정말 어려운 것 같아. 최대한 한국어처럼 읽히게 자연스럽게 옮기려하다 보면 담대한 시도는커녕 지나치게 길들여 동글동글 순한 자갈돌들만 남겨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 출발어와 도착어가 만날 때 서로 다른 언어 체계와 문화가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충격, 단층, 균열이 그 특별한 만남의 흔적으로 글에 남아 있어야 하지 않냐는 거지. 모난 돌들이 글을 읽는 우리의 살갗에 거슬리고 낯설게 느껴지긴 하겠지만, 가슴에 상처를 내고 언어 감각에 사라지지 않는 압흔을 남길 수 있는 것도 그 모난 돌들일 테니까. - 홍한별, '다시 쓸 용기' 중에서, p.101
<나쁜 페미니스트>, <헝거>, <트릭 미러> 등의 작품들을 번역한 노지양 번역가와 <클라라와 태양>, <도시를 걷는 여자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등의 작품들을 번역한 홍한별 번역가가 만났다. 이 책은 동녘에서 펴내는 편지 시리즈 ‘맞불’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마주보며 타오르는 불처럼, 두 작가가 주고받는 대화가 피워내는 빛나는 이야기들을 담겠다는 취지만큼이나, 정말 멋진 작품이 나온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두 번역가의 서간 에세이라는 점에서 특히나 기대를 했었다. 노지양 번역가의 첫 번째 에세이 <먹고 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도 재미있게 읽었고, 최근 번역작인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고착>도 너무 아껴가며 읽었기에 이제는 믿고 보는 번역가이자 작가이다. 홍한별 번역가는 아직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책을 출간한 적은 없지만, <피시본의 노래>, <밀크맨>, <해방자 신데렐라> 등 꾸준히 번역본으로 만나왔기에 이번 책이 더 궁금했다.
우리 번역가의 하루는 대체로 아무 교류도, 사건도 없고 마치 정지 화면처럼 고정되어 있지만 마음속에선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비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지. 주인공이나 저자와 사랑에 빠졌다가 미워지기도 하고, 일 때문에 기분이 하늘을 날았다가 급격히 바닥을 치기도 하고, 난제를 만나고 고뇌를 하지. 아무리 홀로 고요히 일을 한다 해도 평정심은 쉽게 찾아오거나 유지되지 않더라. 그래서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면서 나의 감정을 관리하는 것도 번역을 잘하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 어떤 아픔이나 좌절도 시간이 상당 부분 치유해준다는 사실을 아는 나이가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 노지양, '심장으로 옮긴 문장' 중에서, p. 248
번역이라는 것이 얼핏 지적 노동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키보드를 두르리고 창 사이를 오가는 단순 노동이 상당 분량 차지한다고 한다. 원문 파일, 번역문 파일, 사전 검색을 할 수 있는 웹 브라우저 이렇게 최소 세 개 창을 동시에 띄워놓은 상태에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 앉아 있어야 하는 작업인 것이다. 게다가 외국어를 모국어로 옮기는 과정이라는 것이 번역가의 개입이 많을 수록 매끄럽게 읽히기 마련인데, 따로 기준이 없기 때문에 번역가의 판단으로 낯선 외국어만의 매력을 사라지게 하는 건 아닌지 매 순간 고민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는 데에서 느끼는 기쁨은 그 무엇과도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번역'이라는 작업 자체에 대해 더 제대로 알게 된 것 같다.
그동안 다양한 번역가들의 에세이가 있어 왔지만, 대부분 번역 외적인 부분을 다루었었는데 이 책은 번역 작업 자체에 대한 사유가 주를 이루고 있어 너무 좋았다. 글쓰기로서 번역의 위치, 번역가의 개입 영역, 번역가들의 근원설화, 번역료와 번역가의 수입, 번역과 시간의 관계 등 읽고,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이들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좋아하는 책을 옮긴다는 행복과, 의미와 감정이 제대로 옮겨지는 건지에 대한 의심과 함께 찾아오는 고통 사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번역가들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우리가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로 쓰인 훌륭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분들 덕이기도 하니 말이다. 앞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책을 만나면, 꼭 옮긴이의 이름도 함께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을 새삼 해 보았다.
동녘의 ‘맞불’ 시리즈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청년의 시각으로 질병과 장애를 섬세하게 분해하는 안희제X이다울, 에코페미니즘과 동물권을 종횡무진 사유하는 이라영X전범선, 수면 아래 잠긴 여성의 우울과 자살을 건져 올리는 서울대 의료인류학과 이현정X《미쳐 있고 괴상하며 우울하고 똑똑한 여자들》을 쓴 하미나의 편지가 예정되어 있다고 하니 매우 기대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가 아름답게 어긋나지>는 동녘의 맞불 시리즈로 '번역가'의 길을 가고 있는 두 작가가 주고받는 편지 형식을 통해서 번역가란 무엇이며, 번역가라는 직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사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좋아하는 일보다 잘하는 일을 하면 직업 만족도가 크다.'라는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보다는 어쩔 수 없는 조건들에 의해 직업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렇게 선택한 직업들에 대해 누군가는 만족을 하며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만족하며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 아닐까? 그렇지만, 그런 현실들 속에서도 그들이 나누는 편지들을 통해 '결국에는 내 일을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들 속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떤 책에 대해 '번역이 맘에 안 들어'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독서력이 부족한 내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라 그냥 넘어가곤 했지만, <우리가 아름답게 어긋나지>를 통해서 번역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며, 책의 작가와 함께 쓰여 있는 옮긴이의 이름도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클라라와 태양>을 쓴 가즈오 이시구로 만이 아닌 옮긴이 '홍한별' 과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를 옮긴 '노지양' 그리고 내가 읽는 책의 번역가들의 이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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