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시리즈는 제일 좋아하는 책이다. 작가 개개인의 일상뿐만 아니라 보다 인간적인 이야기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아 작가님을 좋아하고 동경하기 때문에 그의 일상이 궁금했던 것은 당연하다. 작품에서 본인의 이야기를 많이 풀어내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무튼> 시리즈에서만 담을 수 있는 글이 있다. 나는 그 솔직하면서도 담담하고 유쾌한 그 글이 좋다. 게다가 주제가 '노래'라니. 이 시리즈와 이슬아의 만남은 말해 뭐해. 읽기도 전에 좋았다.
그래도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건, 하고 싶은 것을 더 잘해내고 싶어 하는 그 순수한 열정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직진하는 열렬한 애정이다. 나도 취미라는 게 있었던 때가 있다. 글을 쓰거나 기타를 치고,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그런 일들을 즐겼던 때가 있다. 이제는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목적 없이 즐기는 행위를 관둔 지 오래다. 무언가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가도 시간이 없다는 변명만 늘어 놓게 된다. 그런데 이슬아 작가는 나보다 더 바쁘게 살면서도(<아무튼 출근>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그의 하루를 본 적이 있어서 안다) 규칙적인 생활 속에서 일과 취미를 놓치지 않는다. 그 점이 정말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그 취미에 대해서 <아무튼 노래>를 통해 더 자세히 알게 되어 기뻤다. 나 혼자 그와 더 가까워진 느낌이랄까.
이 시리즈를 읽으며 항상 생각한다. 나에게 <아무튼> 시리즈를 쓸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주제를 내세울 수 있을지. 아무튼 탕수육, 아무튼 차, 아무튼 두부, 아무튼 제주, 아무튼 가족 등 생각나는 것은 많다.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적당히 모르는 것들에 대해 끄적이는 일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는 체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알려는 노력이다. <아무튼 노래>에는 이런 나에게 일침을 가하는 문장이 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는 동시에 약간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약간 알 것 같다는 느낌이 언제나 무언가를 시작하게 한다."
약간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무언가를 시작하게 한다니. 이 문장을 읽으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쓰고 싶어졌다. 나는 쓴다는 것에 약간 알기 때문에. 약간만 알기 때문에 겁 없이 시작하고 부딪힐 수 있는 것이다. '동기'에 대해서 이렇게나 명료하게 정의한 문장이 있을까? 볼 때마다 감탄스러운 문장력이다. 나보다 어리지만 생각과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능력은 한참 선배인 이슬아 작가의 글을 보며 언제나 다음 장을 기대하게 된다. 그런 기대를 품고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어느새 끝나 버리는, 그런 책이었다.
일간 이슬아. 몇 년 전 쯤인가, 얼마 안된거 같은데 '일간 이슬아'라는 말을 SNS에서 많이 접했다. 당시에는 굳이 찾아 읽지 않은 그녀의 글이었는데, 어느날 문득 친구가 공유해준, [접속사 없이 말하는 사랑] 제목의 그녀가 쓴 칼럼을 읽고 그녀의 글이 궁금했다.
'아무튼, 노래'는 순전히 '이슬아'라는 작가의 글이 궁금해서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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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만약 '히트곡 제조법'을 제때 선물했다면 그의 운명이 송두리째 바뀌었을 수도 있다. 세 권의 아름다운 책 대신 세 개의 아름다운 히트곡이 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조의 노래를 떼창할 관객들 몇만 명이 콘서트에 몰려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그즈음 코로나 시대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무엇이 최선의 인생인지는 결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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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곧은 자세로 병실과 복도를 씩씩하게 걸어 다녔다. 두 평도 안 될 침대 주변을 말끔히 치우고 깨끗이 세수하고 머리를 단정히 묶은 채로 지냈다. 누추하고 어려운 곳에 있을수록 그래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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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구석구석 살고 싶어.
이렇게도 덧붙였다.
대충 살지 않고 창틀까지 닦듯이 살고 싶어.
허전하고 쓸쓸한 날에 그렇게 다짐하는 하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음 곁에서 다져지는 생의 의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와 함께 구석구석 사는 벗이 되고 싶었다."""
다시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어보니 현희진은 튜브 위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 벌써 이 순간이 그리워.
우리는 그런 순간을 알아볼 수 있다. 겪으면서도 아쉽다. 흔치 않아서. 영영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서. 시간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다. 좋은 곳에서만 멈춰 있을 수는 없다. 현희진은 여기에 쭉 머물고 싶은지 자신이 이대로 더 깊이 떠내려가도 붙잡지 말라고 했다.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은 안돼. 힘차게 그의 튜브를 끌고 해변을 향해 헤엄쳤다. 친구가 표류하거나 죽게 놔두기엔 나는 수영을 너무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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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사 없이 말하는 사랑 만큼이나 담백하게 그녀의 생각을 써내려간 글이, 굳이 감정을 쥐어짜내거나, 수능 영어 마냥 불필요한 수식어를 여기저기 덧붙이지 않아서 좋았다. 이 표현이 옳은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표현에 옳고 그른 것은 없으니, 그녀의 글은 내가 느끼기에 깨끗하다. 뭐랄까 투명하다고 해야할까. 투명한 바닷물에 까만 돌이 바로 보이듯이, 그녀의 글에 그녀가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이 너무도 잘 보여서 군더더기를 불필요하게 걷어낼 필요없이 읽는 내내 편안했다.
재미있게 읽었다. 이슬아 작가가 가수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돈 받고 노래하면 전문 가수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수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인생에 노래가 결합되고, 한 두곡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고 좋아하는 노래가 있을 것이다.
최근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흥을 거리는 노래가 있다. 갑자기 리듬이 생각나고 저절로 흥얼거리게 된다. 그리고 한참 후에 이 노래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본다. 왜 이 노래를 흥얼거렸는지는 아마 기분이 좋아, 혹은 그 분위기에 맞는 노래가 생각났기 때문일 것이다. 21세기 노래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가웃뚱거리면서 이 작가의 연배가 어떻게 되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공감하는 노래 이야기가 많았다. 내가 알기로는 젊은 분으로 알고 있는데, 뭔가 연배가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 분의 이력을 찾아 보았다. 역시 젊은 분이었다. 아무래도 에피소드가 선배 작가와의 모임 혹은 어머니와의 추억등을 이야기하다 보니 올드하게 흐른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아무튼, 노래 리뷰
이슬아 작가님이 아무튼 시리즈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고 구매를 서둘렀던 책이다.
전체적인 글의 내용에 웃음을 짓게 되었다
다만 이전에 출간 되었던 몇몇 글들과 이 책에 삽입된 글들에 중복이 많아 새로운 글을 접할 수
없어 아쉬웠던 부분도 있었다
내가 워낙에 이슬아 작가님 글에 관심을 가져 왔기 때문일수도
또는 너무 중복적인 글을 여러 출판사를 거쳐 출판한 작가님의 욕심 때문일수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노래방에 관련된 추억 없는 사람 없겠지.
예약 버튼인 줄 알고 취소를 눌러서 노래 부르던 친구에게 욕먹은 기억.
애절한 발라드를 디스코 버전으로 바꿔 다 같이 흥겹게 춤추던 기억.
'그대 안의 블루'에 화음 넣어 부르던 기억.
10분 더, 10분 더 계속되는 서비스 시간에 결국 져버리고 시간 남기고 뛰쳐 나온 기억.
트렌드에 맞지 않게 2절까지 부르던 친구를 어이없어하던 기억.
곧잘 노래를 부르셨으나 이제는 박치가 되어버린 아빠의 노래를 듣고 슬펐던 기억.
도저히 올라가지 않아 두 키 낮춰 부르던 기억.
내가 탬버린인지, 탬버린이 나인지 헷갈리게 물아일체되던 기억.
나도 모르게 흐르던 눈물을 몰래 손바닥으로 훔치던 기억. 그래놓고 더 크게 하하 웃던 기억.
중고등학교 시절, 은광여고 앞 즉석 떡볶이 혹은 압구정 뱃고동에서 낚지 불고기 백반을 먹고 늘 노래방에 가서 그렇게 노래를 불러젖혔다.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엔 어김이 없었다. 다들 '노래방 자아'는 별도로 구비하고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가서 뻔했던 적은 없다. 늘 의외였고, 신선했고, 놀라웠다.
'노래방이 아니라면 그 정도의 격정과 진심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데 어떻게 노래방을 싫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땐 뭐가 그리 모든 게 슬프고, 기뻤는지 돌이켜보니 귀엽기 그지없네.
애정 하는 이슬아 작가가 쓴 <아무튼, 노래>. 그녀의 글은 여전히 거침이 없어 반짝인다.
심보선이 말하길 시란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것이랬다. 그렇다면 나에게 글이란 한 네다섯 번째로 탁월한 내가 첫 번째로 탁월한 친구들을 생각하며 쓰는 것이다. 애매하게 탁월한 사람은 더 탁월한 사람을 구경하고 감탄하며 생의 대부분을 보낸다.
그 기계의 이름이 바로 ‘가라오케’다. ‘비어 있음.’, ‘가짜’라는 뜻의 가라와 오케스트라를 이어 붙인 합성어다. 즉 가라오케란 가짜 오케스트라 기계를 뜻한다. 직접 연주하기 귀찮았던 이노우에가 세계 최초로 만든 발명품이다.
1999년 시사주간지 <타임>은 이노우에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마오쩌둥과 간디가 아시아의 낮을 변화시켰다면 이노우에는 아시아의 밤을 바꿔 놓았다. 이노우에는 타임이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아시아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나는 어둡고 습한 방에서 성인가요를 잠자코 흡수했다. 아이는 어쩜 그리도 어른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가장 많이 자라는지.
노래방. 그곳은 내게 사랑의 예습장이었다. 그 예습이 훗날 어떻게 실전을 방해할지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우리는 미러볼 조명이 스쳐 가는 서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초등학생들이었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건 어떤 기분이냐는 질문에 프레디 머큐리는 대답했다. “관객들이 듣고 있고 모든 관심이 내게 쏠리면 틀리려고 해도 틀려지질 않아. 늘 내가 꿈꾸던 사람이 되어 있거든. 아무것도 두려운 게 없어.” 그 대답은 나를 너무 놀라게 한다. 나라면 정확히 반대로 대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듣고 있고 모든 관심이 내게 쏠리면 안 틀리려고 해도 꼭 틀려버려. 나는 내가 꿈꾸던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돼. 그게 너무 두려워.”
노래를 잘하는 게 제일 멋진 일인데 말이다. 내 노래는 정직하지만 재미없고 뻔했으며 어떠한 장악력도 없었다. … 그러므로 노래방은 내가 나라는 사실에 가장 자주 절망했던 장소다.
노래방이 아니라면 그 정도의 격정과 진심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데 어떻게 노래방을 싫어할 수 있단 말인가. 룡이처럼 과묵하고 쑥스러운 자의 진심을 대신 전해주는 세상의 명곡들에게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노래 만드는 일을 좋아하는 것 같다. 가장 잘하고 싶은 일이 아니어서다. 그런 일은 자유를 준다. 즐거울 수 있는 만큼만 매달릴 자유 말이다. 글을 쓸 때는 그런 자유가 따르지 않는다.
복희는 말하곤 했다. 너는 이미 다 자란 채로 태어난 것 같았다고. 모든 걸 알아서 해서 키울 때 품이 별로 들지 않았다고. 그래서인지 복희와 나는 오래전부터 친구였다. 초등학교 때 수업이 끝나면 두발자전거를 각자 몰고 바지락칼국수를 먹으러 갔었다.
시간과 시간을 이어주는 힘에 있어서 음악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장기하는 말했다. 이 노래들 중 하나가 흐르기만 하면 길을 걷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언제고 몇 번이고 과거로 가서 머문다. 머물 수는 있지만 바꿀 수는 없다. 시간의 흐름이 허용하지 않는 일이다. 이제는 그 노래로부터 꽤나 멀리 왔단 걸 알아차릴 때도 있다.
나는 벌써 이 순간이 그리워. 우리는 그런 순간을 알아볼 수 있다. 겪으면서도 아쉽다. 흔치 않아서. 영영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서. 시간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다. 좋은 곳에서만 계속 멈춰 있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