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의 틀을 깨어주는 시각, 즉 보는 방식의 변화.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일상생활속에서나 사회생활에서나 꼭 필요한 체화시켜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작중 선생의 표현 중에, 무지개에 대한 단상이 있다. “학교에서는 무지개가 빨주노초파남보 일곱색깔이라고 한잖아? 어느 날 무지개가 떠서 세봤지. 그런데 내 눈에는 일곱 가지로 보이지 않아. 색과 색 사이의 어렴풋한 곳에 수천수만 개의 색들이 보였지. 무지개 색은 셀 수 없는 불가산 명사야”라면서 생사람을 잡는 고정관념으로 강화시키게 만드는 학교식 획일주의를 비판하기도 한다."
바로 이렇듯 주입식의 강요된 시각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아닌 내 스스로 나의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바닷가에 버려진 낡은 그물 있잖아. 그 그물을 가져다가 은빛으로 칠하고 거기에 천 마리 물고기 모형을 만들어 널어좋고 싶었어요. 제각각 다른 색으로 칠해진 물고기 말이야.상상의 바다에서 건져낸 그 천가지 색깔의 물고기들이 그물에 걸려 번쩍인다고 생각해봐요.그건 아름다운 반란이야. 인류의 편견, 고정관념, 획일적 문명을 고발하는 천가지 색의 반란.,다양성으 가치를 생물의 '종의 다양성'에 담아 설치예술로 전하는 것이 내 꿈이었어. 그게 안 돼서 티셔츠로 대신한 거지." (-14-)
당나귀는 더욱더 울부짖었다. 그러나 조금 더 지나자 웬일인지 당나귀가 잠잠해졌다. 동네 사람들이 궁금해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나귀는 위에서 떨어지는 흙더미를 털고 털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래서 발밑에 흙이 쌓이게 되고, 당나귀는 그 흙더미를 타고 점점 높이 놀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당나귀는 자기를 묻으려는 흙을 이용해 무사히 그 우물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정말 그렇다. 사람들이 자신을 매장하기 위해 던진 비방과 모함과 굴욕의 흙이 오히려 자신을 살린다. 남이 진흙을 덩질 때 그것을 털어버려 자신이 더 성장하고 높아질 수 있는 영혼의 발판으로 만든다.그래서 어느 날 그 곤경의 우물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을 맞게 된다. (-56-)
그것은 "이미 철학적 대립 체계 가운데 포함시킬 수 없는 것이면서도 그 대립 속에 살면서 그것에 저항하고 그 질서를 혼잡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어떤 제3의 것을 구성하지도 않는 것이다." (-138-)
화식이 성급한 불의 맛이라고 한다면 발효식은 시간의 맛이다. 날 것과 마찬가지로 화식은 요리에서 시간이라는 가장 중요한 절차를 생략하려 한다. 이에 비해 발효식은 어떤 형태의 것이든 기다리고 용해하고 변화하는 시간 속에 이루어진다. 김치는 샐러드와 단순하 겉절이처럼 즉석에서 먹을 수 없는 음식이다. 김치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는 배추도 고춧가루도 아닌,바로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물은 시들고 사그라지고 썩는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부패의 시간성을 역이용해서 새로운 맛을 창조해낸 것이 발효식의 지혜다. (-179-)
이어령 명예교수의 지적인 힘은 관찰과 해석, 아이디어에 있었다.그가 보여준 한국에 대한 해석, 한국 문화와 경제에 대한 해석은 대한민국의 것이 최고라는 자긍심,신토불이을 한국인에게 설득시키고 있었다. 그건 오로지 한국 문화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만들어낸 가치이며,의미였다. 우리는 내 앞에 놓여진 것에 대해,새롭게 보는 힘이 상실되어 있었다. 그래서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가치를 하락시키려는 심리가 존재한다.하지만 이어령 교수의 글을 읽으면, 사랑에 의해 만들어낸 해석이 누군가를 설득시킬 수 있을 때, 삶이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에너지,지헤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글로서 표현하고 있다. 그가 사람을 설득시킴으로서, 설득과 해석이 이치로 전환되고 있었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사랑을 담아야 한다. 그것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힘이다. 나와 가족, 타인에 대한 사랑, 그것이 만인을 위한 사랑이며, 세상을 따스한 온기로 남겨질 수 있는 살아있는 존재가 갖춰야 한 기본이었다 .세상에 대한 이치를 깨칠 대, 세상에 대한 원망은 사라진다.
그래서 이어렬 교수는 생의 마지막 손간까지 펜을 꺽지 않았다. 죽음이 임박하여도, 마지막 책을 쓰기로 하였고,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대한 사랑이자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바로 학자 이어령 이 말하고 싶었던 미래를 향한 유언이다. 그리고 다음 세대가 이어나갈 무형의 가치가 숨어 있다. 이 시대의 문제를 발견하는 힘, 문제를 발견하고,그 문제에 대해서 답을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그가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 그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힘이며, 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르게 볼 수 있는 남다른 지혜로움,그 지혜가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 때, 세상은 변화의 씨앗이 되고, 그 씨앗이 세상의 문제를 햐결할 수 있는 열매가 된다.
『하나, 책과 마주하다』
2022년 2월 26일,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이셨던 이어령 선생님께서 별세하셨다.
【하나의책장】을 열어 이어령 선생님의 책이 책장에 몇 권이나 있는지 검색해 보았다.
적지 않은 권수를 보니, 그의 작품을 꽤 읽었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때, YES24이었는지 알라딘이었는지 기억은 나질 않지만 한 해의 키워드 중 하나가 '이어령'이었으니깐.
2월 말, 이어령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듣고선 그와 그의 작품들을 기억하기 위해 3월에 새로운 책을 집어들었는데, 바로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이다.
저자, 이어령은 1933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 재학 시절 《문리대학보》의 창간을 주도 ‘이상론’으로 문단의 주목을 끌었으며, 《한국일보》에 당시 문단의 거장들을 비판하는 「우상의 파괴」를 발표, 새로운 ‘개성의 탄생’을 알렸다.
20대부터 《서울신문》, 《한국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의 논설위원을 두루 맡으면서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논객으로 활약했다.
《새벽》 주간으로 최인훈의 『광장』 전작을 게재했고,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을 맡아 ‘문학의 상상력’과 ‘문화의 신바람’을 역설했다.
1966년 이화여자대학교 강단에 선 후 30여 년간 교수로 재직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 총괄 기획자로 ‘벽을 넘어서’라는 슬로건과 ‘굴렁쇠 소년’ ‘천지인’ 등의 행사로 전 세계에 한국인의 문화적 역량을 각인시켰다.
1990년 초대 문화부장관으로 취임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과 국립국어원 발족의 굳건한 터를 닦았다.
2021년 금관문화 훈장을 받았다.
마르지 않는 지적 호기심과 창조적 상상력, 쉼 없는 말과 글의 노동으로 분열과 이분법의 낡은 벽을 넘어 통합의 문화와 소통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끝없이 열어 보인 ‘시대의 지성’ 이어령은 2022년 2월 향년 89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Ⅰ 흙과 디지털이 하나되는 세상
서구의 두 모험가가 에티오피아를 구석구석 다니며 지도를 만들었었다. 금과 은을 구하기 위해 돌까지 조사했을 정도로 세밀하게 살펴보았으니 황제는 그런 그들에게 선물까지 내렸었다.
그렇게 그들이 에피오피아를 떠나기 위해 배에 타려고 하자 근위병들이 조심스레 그들의 구두를 벗기고 깨끗하게 닦아 황제의 말을 전했다.
그대들을 멀리 떨어진 강한 나라에서 왔다. 그대들은 에티오피아가 모든 나라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그대들의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이 땅의 흙은 우리에게 소중하다. 우리는 그 흙에 씨앗을 심고 우리의 죽은 자들을 묻는다. …… 에티오피아의 흙은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어머니, 우리의 형제다. 우리는 그대들을 환대했으며 귀한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값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흙을 단 한 알갱이도 줄 수 없다.
모험가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한 알갱이의 흙에서 나오는 힘이 에티오피아인들을 지켜준 것이었는데, 흙의 감동과 아름다움때문에 3000년의 긴 역사를 읽고 서구인의 지배를 받았으니 말이다.
서양인들은 에티오피아를 침략해 먹지도 않는 땅콩을 대지에 잔뜩 심었었지만 이는 토양에 맞지 않았고 결국 심었던 땅콩이 아프리카 땅을 황폐화시키고 말았다.
결국 흙의 시대, 그 지혜와 생명의 시대는 끝이 난 것이었다.
단순히 보이는 흙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었다.
모험가의 구두에는 나라를 구석구석 다니며 얻었던 보이는 흙이 아닌, 보이지 않는 흙의 정보가 잔뜩 묻어 있었다.
이는 결국 흙과 디지털이 하나되는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디지털 정보는 흙의 지혜를 압도한다.
지금은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지식을 검색해 습득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스마트폰이 활성화되기 이전에는 모두가 사전을 이용했었다.
모든 면에서 방대하니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으며 심지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기까지 한다.
일론머스크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발발하자 우크라이나를 위해 스타링크를 전격 지원하지 않았는가.
과거 아프간 전쟁도 모두가 10년은 걸릴 것이라 했지만 불과 석 달 만에 끝났으니 디지털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 수 있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비행사들에게 수직 폭격의 기술을 가르쳐 수평 폭격의 적중률을 높였었던 반면에 스마트탄은 날렵하고 지능을 가진 폭탄이라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교량 하나를 파괴하려면 200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어야 했는데 레이저 유도 폭탄이 생겨나면서 12.5톤으로 줄었고 이후 이라크전에서는 4톤이면 충분히 폭발시킬 수 있었다.
GPS 유도탄처럼 위성으로 받은 위치 정보로 목표물을 향해 정확히 가격하여 적중률을 높일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스마트탄이 마냥 스마트하지는 않다.
걸프전 때,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해 대통령궁을 폭격한 일이 있었다.
물론 스마트탄은 완벽하게 투하되었지만 후세인은 죽지 않았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때, 밖에서 천막을 치고 자는 풍습이 있었는데 미군이 이를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즉, 목표물을 파괴하는 정보기술은 뛰어났으나 문화에 대한 정보는 백지나 다름없었던 것이었다.
정보기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유도탄같이 기계를 다루는 하드웨어의 정보기술이며 또 하나는 상대방의 문화나 인간의 마음을 읽는 소프트 콘텐츠에 관한 것이다.
전자를 기계 기술, 후자를 지식 기술이라고 구별하기도 한다.
정보기술은 부국과 강병의 수단이자 도구이다.
지식이나 문화를 목적으로 정보기술이 사용되는 경우는 미미한 편이었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하드 파워에서 소프트 파워로 옮겨지는 추세로 바뀌었다.
교육, 학문, 예술, 과학, 기술 등 인간의 이성과 감성적 능력이 빚어내는 창조적 산물과 연관되어 있으며 외교와 국방에서도 커맨드 파워 command power 가 아닌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 cooperative power 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는 더 나아가 하드파워와 소프트 파워를 어떠한 방식으로 활용할지 결정하는 기술인 스마트 파워를 강조하는 추세이다.
Ⅱ 벽을 넘는 두 가지 방법
허허벌판에서 살 수 없기에 인간은 벽을 만들었다.
그림은 벽에 뚫어놓은 마음의 창인 듯하다.
창을 벽의 상처라고 말하듯, 그림 또한 피가 흐르는 벽의 상처인 것이다.
벽은 태양보다, 구름보다, 바람보다 강하며 오직 날카로운 설치류 쥐만이 구멍을 뚫을 수 있다.
벽은 바람을 막고 풍경을 도살한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구멍을 뚫어야 하는데 이 때 날카롭고 빨리 자라는 송곳니가 필요하다.
한밤의 어둠 속에서 갉고 갉은 색채와 선 그리고 회화의 구도가 탄생한다.
이것이 바로 그림의 탄생이다.
희랍의 전설에는 회화와 조각이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한 청년을 마음에 품은 소녀가 그와의 이별을 앞두고 상심하여 앓게 되자 소녀의 아버지가 그 마음을 알고 그 청년의 옆얼굴이 벽에 비치는 그림자를 따라 윤곽의 선을 그리고 색을 칠했다.
곧 청년과 꼭 닮은 릴리프, 즉 그림과 조각의 중간인 부조가 생겨났는데 딸의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그림자를 그림으로, 조각으로 옮긴 이야기는 상징적이라기보다 사실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벽을 긁는 것, 벽에 어리는 그림자, 그리고 벽 너머로 사라질 연인에 대한 그리움.
긁는 것, 그림자, 그림, 그리움은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다.
따로 떨어져 불리던 그 말들이 하나의 초점으로 합쳐지면서 떼어낸 달력의 벽면 윙는 글과 그림과 그리움 같은 것들이 하나의 관자놀이처럼 뛴다.
세계에서 가장 가벼운 벽은 무엇일까?
저자는 올림픽 개폐회식을 기획할 때 그 주제를 '벽을 넘어서'라고 했다.
그 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도 철의 장막이 무너졌으니 서구 문화는 즉 벽의 문화라고도 할 수 있다.
도시든 개인의 삶이든 무엇이든 간에 두꺼운 벽을 기본으로 이루어지니깐.
성벽 안에 세워졌던 도시들로 이루어진 서양만 봐도 그렇다.
유럽은 섬이 아닌 대륙인데도 성벽이라는 제한된 도시 안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일찍이 고층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도시가 커져도 옆으로 퍼지지 못하고 위로 치솟아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양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 두께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옛말에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가 있는데, 그만큼 벽이 얇고 허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서양 집은 대개 적조식으로, 돌이나 벽돌로 벾을 쌓아 만든 것이다.
거기에 비해 한국 집은 가구식이라고 하여 기둥을 세워놓고 집을 지은 비내력벽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전통적인 한옥은 벽을 터도 무너지지 않지만 양옥은 집 전체가 무너지고 만다.
Ⅲ 전통 물건에 담긴 한국인 생각
전통적인 물건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다 뜻이 담겨져 있다.
문풍지와 한복도 마찬가지다.
한국과 일본은 정밀함에서 문화의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적당히 문을 짜서 단 후에 틈이 생기면 문풍지로 막는 융통성을 발휘하는 반면에, 일본은 융통성보다는 정확성에 중점을 두어 문을 닫으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꼭 들어맞도록 만들기에 문풍지라는 것이 없다.
바지, 버선 그리고 되질, 말질 등도 치수를 무시하곤 한다.
즉, 한국의 멋은 약간의 비규격이 있는 멋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양의 양복 바지는 기능주의, 합리주의를 지향해서 허리춤에 꼭 맞도록 만들었었다.
반면, 한복 바지는 인체의 허리 부분은 밥 먹을 때와 굶었을 때가 다르고 건강할 때와 병을 앓고 있을 때가 다르기 때문에 정확하게 치수를 재서 만들었기 보다는 풀어 입을 수도 있고 조여 입을 수도 있게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저자는 전통 물건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바로'융통성'이다.
치수가 잘못되면 사람이 옷에 몸을 맞추어야 하는 주객전도의 양복 문화, 그것이 인간 소외 현상을 낳는 것이라면, 넉넉한 한국의 허리춤은 끝없이 인간을 감싸주는 융통성 있는 문화의 상징이다.
서양은 자아를 중심으로 개인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어 그들의 문화는 벽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즉, 자아의 문화란 너와 나를 구별하는 방벽과 도시와 도시를 분리하는 성벽의 문화라 할 수 있다.
한국은 물론 동양권 시인들은 두꺼운 벽이 아닌 병풍을 둘러치고 작업을 하였다.
병풍은 가볍고 신축성 있는 벽으로, 펴면 벽이 되고 접으면 한 공간이 된다.
병풍은 인류가 발견한 가장 아름답고 밝고 가동적인 벽이라고 할 수 있다.
병풍의 가동성과 신축성은 한국을 비롯한 동양적 기술의 원형이며 서구 문화와 동양 문화를 나누는 가장 상징적인 경계다.
즉, 병풍의 공간은 하나이면서 전체인 것이다.
(지금은 없지만) 어릴 적에 외가집에 가면 큰 병풍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그저 보기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일종의 나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는 벽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병풍에 그려져 있는 그림 또한 누군가의 작품이었다고 하니 그때 봤던 병풍 기억을 되살려보고 싶다.
병풍이 다락방 옆에 있었기에 더 쭉 피면 조그마한 공간이 새로 만들어져 그 안에서 동생과 함께 놀기도 했다.
8살과 6살이 뭘 알겠냐마는 이미 그때 느꼈던 것이었다.
병풍의 공간은 하나이면서 전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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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6일.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이셨던 이어령 선생님께서 별세하셨다.
이어령 선생님께서 쓰셨던 작품 중 마지막으로 읽었던 책이 무엇이었는지 책결산을 살펴보니 『너 어디에서 왔니』였다.
생각해보면 선생님의 작품들을 적지 않게 읽었었고 책장에 있는 그의 책들을 살펴보니 80년대에 출간된 책도 가지고 있었다.
오래 전에 출간된 책은 다름아닌 엄마의 책이었다. 20살이 되고서부턴 책을 더 읽었다는 엄마도 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했었다고 한다.
외가집에 가면 오래된 LP부터 핑글핑글 돌려서 거는 전화기 그리고 책이 다락방에 가득해 병풍을 친 뒤 다락방으로 올라가 동생과 함께 탐험 놀이를 했었다.
그러다 다락방에서 엄마 이름을 새겨놓은 책 한 권을 보게 되었고 오래된 책이 신기해 그 책을 들고 다락방에 내려왔었다.
아, 그러고보니 내가 이어령 작가님의 책을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에 집으로 데리고 왔으니, 그 책을 중학교 1학년 되는 시기에 읽었었다.
참 신기하다. 책 한 권으로도 나의 과거의 흔적들이 생각난다는 사실이.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소재로 생각될 수 있는데 소재 하나로도 이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그 생각이 이어진다.
국문학과도 가고 싶었던 학과 중 하나였는데, 그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자 비슷한 과목이 교양으로 나와 한 번 들은 적이 있었었다.
그 수업에서 교수님이 이어령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었는데, 그 때 다시금 느꼈었다.
'역시 지성인이 맞구나. 지성인이구나!'
2월 말, 이어령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듣고선 그와 그의 작품들을 기억하기 위해 3월에 새로운 책을 집어들었는데 그 책이 바로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이다.
14년 전, 「날게 하소서」란 제목의 시에 구술 해설을 입혀 서문을 완성한 책으로 열 세가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메시지를 꼭 얻기를 바라는 마음에 소개해 보았다.
앞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고 표현하였었다.
틀에 박힌 생각은 결국 제자리 걸음하는 것과 다름없어 우물 안 개구리 신세가 될 수 있다.
틀에서 걷히는 순간, 그 때 창의적 사고가 발휘되는 것이다.
에세이지만 사고에 대한 메시지가 분명해 인문서와 다름없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책은 3월에 읽었는데 3개월만에 올리게 되었다.
쓰다 말다를 반복하다가 이제야 재독하고 제대로 올리게 되었다.
책을 읽고선 글쓰기 노트에 정리를 마친 후에야 글을 쓰는 것인데, 지금까지 쭉 해왔던 방법이지만 바꿔야 하나 생각중이다.
아날로그적인 방식은 느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요새는 노트북 앞에 앉다가도 아프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니 속도가 좀처럼 나지 않아 더 느려지고 더 느려진다.
그럼에도 쭉 고수해 왔기에 쉽게 바뀌어지진 않는다.
이 책은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 이어령 선생님이 막혀있던 벽을 부수고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는 바로 ‘다시 한 번 날게 하소서’ 라는 비상의 염원을 담은 우리들에게 희망과 삶의 지혜를 주는 마지막 메시지를 기록한 책이다.
천 가지 색깔의 물고기, 빨간 토기 등 세상에는 없지만 그림 속에 우리 상상 속에 존재하는 것 그것이 선생님이 발견한 문학 예술의 창족적 세계이다.
고정관련을 버리고 창조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때 새로운 미래가 펼쳐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기러기들처럼 날고 싶습니다. 온 국민이 그렇게 날았으면 싶습니다. 소리 내어 서로 격려하고 대열을 이끌어가는 저 신비하고 오묘한 기러기처럼 날고 싶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소리 내어 서로 격려하고 서로의 자리를 바꿔가는 저 신비하고 오묘한 기러기처럼 날고 싶습니다.“
이 책은 선생님의 간절한 희망을 담은 ‘날게 하소서’ 라는 시 의 메시지와 함께 선생님이 그동안 많은 생각을 하고 연구했던 열세 가지의 주제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에게 삶의 지혜와 선생님의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며 인간의 이성과 감성적 능력에 창조의 힘인 사람을 중시하는 소프트 파워가 중요시 되고 있다.
뽀빠이의 시금치 이야기처럼 소수점 한 자리의 잘못이 우리가 예상 못했던 창조적 변화가 이루어 지듯 사고의 자유가 현재를 바꾸고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인 것이다.
재미있는 세 마리 쥐의 변신 이야기는 꿈과 창조적 사고가 위대한 미래를 만들어 나간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충분했고 새로운 생각이나 창의적 사고가 미래의 권력이고 힘이 될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순신 장군의 전술 전략가로서 관계론적 사고와 소프트웨어적 발견이 위대한 승리를 가져오듯이 우리는 개인주의가 아닌 집단주의가 아닌 한국의 독특한 정서인 관계론적 사상과 관계형성이 한민족의 위대한 힘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 같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다른 사람보다 한 발 앞서 세상을 바라보고 틀에 갇힌 사고의 벽을 넘어 끊임없는 창조적 생각을 통해 미래시대에 대한 다양한 생각의 변화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를 하라고 끊임없이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고 자유로운 사고와 창의적인 생각을 통해 갇혀있던 틀 속을 캐고 자유로운 생각과 사고의 자유를 위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아마도 선생님은 마지막 삶 순간에 자신의 삶의 지혜와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남겨주기 위한 마지막 선물을 이 책을 통해 우리들에게 남기고 간지도 모르겠다.
제목: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
글쓴이: 이어령
펴낸 곳: 성안당
지난 2월 큰 별이 떨어졌다. 초대 문화부 장관, 대한민국 문학 평론가, 저술가, 언론인, 교수직을 겸한 국어 국문학자. 삶의 매 순간 깨인 생각과 미래를 내다보는 눈으로 우리나라의 고급 문화 창조에 엄청난 기여를 하신 이어령 선생님.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잠시 멍하니 시간이 멈춰버린 듯했다. 왜 진작 그분의 말씀에 더 귀 기울이지 못했는지, 무지했던 자신을 원망하며 이어령 선생님이 남기신 책을 차근차근 읽어보려고 다짐. 이번에 만난 성안당 출판사의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는 고 이어령 선생님의 마지막 서원을 기록한 책으로 <생각의 생각>이란 제목을 달고 오래도록 묵혀 두었던 원고와 함께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귀한 작품이다. 2022년 새해를 맞아 온 국민이 하늘로 훨훨 날아오르길 바란 이어령 선생님의 간절한 염원과 함께 끝없이 솟아나는 생각의 샘에서 퍼 올린 특별한 이념이 이 책에 켜켜이 담겨 있다.
고정관념은 상상력의 적, 사고의 자유를 꾀하라!
국민학교 3학년 시절,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는 이어령 선생님은 최종 학력이 대학원이지만, 실질적으로 학교에서 공부한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고정관념과 틀에 박힌 생각을 찍어내는 학교는 생사람을 잡는 곳'. 학교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할 시간에 하늘을 보고 바람을 맞고 꽃을 즐기고 날아가는 새를 보며 계속 책을 읽은 소년은 훗날 대한민국 문화의 큰 기둥이 되었다. 계속 자라는 아이들 물건일수록 버릴 것이 많다. 우리도 아이처럼 매일 자란다. 하여 쓸모없어진 상식과 지식은 버려야 한다. 우리를 괴롭히던 고정관념, 집념 그리고 원한까지도. 어른의 신발을 몰래 신은 것처럼 크고 헐렁한 미키 마우스의 신발. 그 공백엔 미래를 만드는 꿈과 창조적인 사고가 담겨 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딱 들어맞는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에서 미키마우스의 신발로 바꾸는 게 21세기 우리의 생각 바꾸기다. 한국의 전통 물건과 음식 등을 주제로 펼친 이어령 선생님의 특별한 생각은 독특한 가락을 지닌 민요처럼, 신명 나게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병풍의 공간은 하나이면서 전체. 우리의 육신과 영혼을 허공으로 자유롭게 날게 하는 멍석. 한국의 음식 맛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하는 것'.
뒤집어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삶에는 거꾸로 된 거울 뒤 같은 세상이 있다.
불행이 행이 되고, 행이 불행이 되는 새옹지마의 변화가 있다.
우물 속같이 절망의 극한 속에서 불행을 이용하여 행운으로 바꾸는
놀라운 역전의 기회가 있다.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 p56
시대의 지성이 남긴 마지막 서원과 열세 가지 통찰의 지혜!
통찰력과 지혜라는 단어가 더없이 잘 어울리는 글이었다. 마치 이 글에 관한 감상을 표현하기 위해 두 단어가 탄생했다고 느껴질 만큼 이 책과 함께한 매 순간이 놀라웠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란 표현이 있지만, 그저 근심 걱정과 잡생각에 한한 표현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어령 선생님의 생각은 통통 튀는 앵두알처럼 어디든 자유롭게 노니며 그 꼭지를 놓지 않는다. 사회적 위치와 학식을 고려하면, 자칫 잔소리처럼 느껴지는 고리타분한 훈계로 이어질 수도 있건만, 이어령 선생님의 글에는 어떤 강압도, 짜증 섞인 훈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창의력이란 무기로 훨훨 날아 펼치는 자유로운 사고. 일상의 다양한 소재를 전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접근하며 풀어낸 글을 읽으며, '이렇게도 접근할 수 있구나' 경탄의 연속이었다. 역시 언어의 연금술사! 대한민국 문화사에 큰 획을 남긴 이어령 선생님의 특별한 시선과 값진 지혜를 음미한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었다.
출판사 지원 도서입니다.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지금 외치는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소서.'
이 책은 이어령 교수를 그린 책이다.
이어령 교수는 수많은 제자들과 함께 한국의 인문학을 열어갔던 분이다. 대한민국의 인문학 세계는 이어령 교수님의 숨이 담겨있다. 그는 한 줄기의 희망이요, 한 줄기의 단비이다. 대한민국의 피폐해져 있는 인문학의 세계의 맥을 뚫었던 분이 이어령 교수님이시다.
그는 지금 하늘나라에서 환하게 웃고 계신다.
이어령 교수는 독자들의 가슴에 웃음과 과제를 남기고 떠났다.
그의 과제는 이 땅에 있는 제자와 독자들에게 남겨져 있다.
그의 남긴 과제가 무엇인지를 이 책 "다시한번 날게 하소서"에 남겼다.
이어령 교수는 다시한번 날아 어디로 가고자 했을까.
인문학의 거장이 인문학의 최정점으로 날으고자 했을까.
아니면 이 시대에서 만나지 못한 문학의 세계를 향해 날아가고자 했을까.
그는 대한민국의 과거, 현재, 미래가 문학의 날개로 날아오르기를 원했던 것일까.
그는 날고자 한다.
사람들의 상상의 날개로 접지 않도록 권한다.
어린 아이들이 종이학, 종이비행기를 통해 동심의 세계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독자들에게 신기루의 세계를 향해 날아오르기를 권한다.
세상은 넓다. 그리고 날아올라가야 할 곳은 무한대이다. 무한한 세계를 향해 날아오르는 상상은 모두에게 행복을 준다. 사람들은 비행기에서 밖을 내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모든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지만 비행기 안에서는 밑을 향해 내려다 본다.
우리가 사는 곳에는 희망을 버릴 수 없는 곳이다. 올라다 보는 세계와 내려다 보는 세계가 함께 하는 곳이다. 이 곳을 마음껏 날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가슴이 벅차겠는가
이 책을 통해 상상의 세계, 인문학의 세계를 날을 수 있는 꿈을 꾸게 한다. 지금은 상상이지만 미래를 현실일 수 있다. 지금은 상상이지만 미래에는 작품이 될 수 있다. 지금은 스케치이지만 미래에서 한편의 그림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이어령 교수의 세계는 넓고 넓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구도 날을 수 없었던 세계를 이어령 교수님은 마음껏 날아오르고 있었다.
이 책을 독자들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이어령 교수님의 세계에서 함께 날개를 펼칠 것이다.
이어령 저의 『다시 한 번 날게 하소서』 를 읽고
나 자신 칠십이 다 되어 가지만 솔직히 아직도 생각이 많이 굳어 있고, 거의 대부분이 단순하기 짝이 없다.
깊은 사고는커녕 열린 마인드와 복합적인 사고에는 많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동안 축적되어 온 습관이 가장 중요한 적이 아닌가 생각한다.
무엇이든 쉽게만 얻고 해결하려는 아니 궁금한 게 있으면 끝까지 찾고, 어떻게든지 질문하고 하여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끈기를 가졌더라면 훨씬 좋은 습관을 지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또 하나 공부해 왔던 학교나 학창시절에도 그저 선생님 말에 그저 순종하는 착한 학생으로만 머물렀지, 왕성하게 질문하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학생으로 기억이 전혀 남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런 후회스러움이 이어령 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절실하게 다가왔다.
우리 시대의 지성이면서 진정한 스승이신 저자가 아쉽게도 지병으로 더 좋은 세상으로 가셔 정말 아쉽다.
그 멋진 필력을 통해 우리 국민들에게 문화적 교양과 함께 뿌리를 깊숙하게 든든히 다지게 한 후에 훨훨 날게 하시게 해야 할 순간을 앞두셨는데 말이다.
저자는 누구나 마음속에 지닌 생각의 보석을 지니고 있다면서 사고의 틀 속에 갇혀있지 말고 생각의 보석을 캐내기를 권한다.
자신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뒤집어 생각하는 사고의 틀 깨기가 중요함을 여러 면에 걸쳐 강조한다.
세계적 석학들과 어깨들을 나란히 하는 비결을 묻자
“나는 내 머리로 생각한 것을 이야기하거든 그러니 전문가들이 못 하는 영역을 커버할 수 있는 거지”라며 나만의 아이디어를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발상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옳든 그르든 ‘온리 원only one’의 사고를 하라”고 강조했다.
고정관념에 대해서도 상상력의 적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예를 들어 무지개는 일곱 색깔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무지개가 빨주노초파남보 일곱색깔이라고 한잖아? 어느 날 무지개가 떠서 세봤지. 그런데 내 눈에는 일곱 가지로 보이지 않아. 색과 색 사이의 어렴풋한 곳에 수천수만 개의 색들이 보였지. 무지개 색은 셀 수 없는 불가산 명사야”라면서 생사람을 잡는 고정관념으로 강화시키게 만드는 학교식 획일주의를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저자의 뽀빠이와 낙타의 신화, 낙타는 성경 속에서 운다, 세 마리 쥐의 변신, 달마의 신발 등 가벼운 에피소드를 시선으로 바라본 에피소드들은 정체성과 창조적 사고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사고의 틀을 깨고 한 단계 성장하는 발판으로 삼는 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에서 시작된다고 담담하게 전하는 저자의 글을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다.
자신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뒤집어 생각하는 사고의 틀 깨기가 중요함을 여러 면에 걸쳐 강조한다.
『다시 한 번 날게 하소서』를 통해 고(故) 이어령 선생이 시를 쓴 지 14년 만에 새 책의 머리말로 만나는 시, 「날게 하소서」와 그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해설. 그리고 한국 문화의 원형들(아키타이프)이 담겨 있는 열세 가지 생각을 통한 마지막 메시지들은 귀한 의미를 깨우치게 하는 시간이 되리라 믿는다.
14년 전 저자의 <날게 하소서> 서두 시에서
“덕담이 아니라 날개를 주십시오.
비상非常에는 비상飛翔을 해야 합니다.
독기 서린 정치인들에게는 비둘기의 날개를 주시고
살기 지친 서민들에게는 독수리의 날개를 주시고
주눅 든 기업인들에게는 갈매기의 비행을 가르쳐 주시고
진흙 바닥에 처박힌 지식인들에게는 구름보다 높이 나는
종달새의 날개를 보여주소서.
날게 하고서,
뒤처지는 자에게는 제비의 날개를.
설빔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공작의 날개를.
홀로 사는 노인에게는 천년학의 날개를 주소서.
그리고 남남처럼 되어가는 가족에게는 원앙새의 깃털을 내려주소서.”라고 하였다.
이 시에다가 저자는 온 국민이 똑같이 가졌으면 싶은 날개의 꿈으로 기러기들의 날개를 새롭게 추가한다.
기러기들은 자기 둥지를 지키기 위해서 우는 둥지 속의 새들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대열을 지어 소리를 내는 그 경이로움을 갖는 새다.
“기러기들처럼 날고 싶습니다.
온 국민이 그렇게 날았으면 싶습니다.
소리 내어 서로 격려하고 대열을 이끌어가는 저 신비하고 오묘한 기러기처럼 날고 싶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소리 내어 서로 격려하고 서로의 거리를 바꿔가는 저 신비하고 오묘한 기러기처럼 날고 싶습니다”하며,
‘이 절망의 벼랑 끝에서 모든 사람이 함께 살아갈 날개 하나씩을 달아주소서!’ 하며 14년 전의 시에다 저자의 귀한 서원을 추가한다.
얼마나 저자만의 멋진 비상인가!
모든 국민들이 자기만의 날개를 달고서 푸른 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르리라!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라는 기도는 우리 앞에 놓인 문제, 문제 속에 빠진 우리를 위한 이어령 선생의 구원을 바라는 간청과도 같다. 그 대상은 세상을 창조하고 만물을 유지하는 근원인 기독교의 신처럼 보인다. 그 구원의 간청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생각과 개성을 풀어내고 하나의 그림 안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꿈 같은 세상을 방해하는 획일화된 사회와 문화, 특히 한국사회가 보여주는 그 경직성에 대한 파괴되어야 하는 당위성이 현실에서 더 구체적으로 공론화되고 사람들이 문제의식을 느끼도록 움직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획일성의 대표적 예는 고정관념이다. 고정관념들 중에서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 하나의 예를 든다면 그것은 무지개에 대한 인식이다. 무지개가 일곱 색깔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세 가지 색? 열 가지 색? 답은 없다. 문화권마다 고유의 인식이 반영되어 무지개는 한 가지의 색일 수도 있고 무한에 가까운 색의 향연을 품은 꿈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것을 하나의 고정된 형태로 받아들이고 안주하려는 우리의 정신세계다.
이 책에서 말하는 날개는 소망을 의미한다. 그 소망은 갈등과 폭력과 이기심과 가난과 비참함과 슬픔 등 모든 비탄한 것들로부터의 해방을 담고 있다. 다양한 형편에 맞는 다양한 새들의 날개가 소환되지만, 이어령 선생님은 그 모든 것보다 우리가 꼭 지녀야 할 날개로 기러기의 날개를 꼽는다. 기러기의 이동 대열에서 엿볼 수 있는 삶의 경이를 인간에게 그대로 이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소망이 기러기들의 날개짓에 투영된다.
편견과 고정관념, 흑백논리의 지옥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어령 선생의 간절함과 외침이 책 곳곳에서 스며나온다. 이어령 선생은 이런 지옥을 생명력과 감동이 넘치는 지평으로 전환하기 위한 방법으로 상상력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런 상상하는 능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처럼 신적인 어떤 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살짝 관점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대상에 대한 생각을 뒤집을 줄 아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이 생명을 얻는다.
마치 모든 동전에 양면이 있고, 그림자가 있으면 빛이 있고, 밤이 있으면 해뜨는 새벽 아침이 있고,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지나 새싹이 트는 봄이 오듯이,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 우리가 부정적으로 느끼는 모든 순간에 역전의 기회가 마련되어 있다. 현실을 뒤집어 생각할 줄 아는, 관점의 전환이 곧 위대한 상상력의 첫 시발점이 될 수 있음을 이 책은 가르쳐주고 있다.
‘그림은 벽에 뚫어놓은 마음의 창’,처럼 기존 개념을 새로운 관점으로 정의한 부분이나, 성경의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에서 낙타가 사실 밧줄의 오역이라는 부분까지, 그러나 그 오역이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으로 전환될 수 있었던 이유까지, 이 책은 사고의 전환뿐만 아니라 기존에 잘못 알고 있었던 여러 가지 지식을 알게 되는 즐거움과 더불어 여러모로 유익한 부분들을 두루 갖추고 있는 보물 같은 이어령 선생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 네이버 「문화충전200%」 카페 이벤트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다시한번날게하소서, #이어령, #성안당, #문화충전200
올해 우리 '시대의 지성'으로 존경 받던 이어령 선생이 별세했다. 그는 우리 현대사 한가운데서 문학 예술 철학 사상 등 많은 분야에서 뛰어난 지성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해냈다. 이 책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는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서원을 기록한 책이에요. 서원(誓願)이란 '가톨릭에서 그리스도적인 완전한 덕을 쌓기 위하여 스스로가 숙고하여 자유의사로 하느님과 약속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 국어사전은 ① 신불(神佛)이나 자기 마음속에 맹세하여 소원을 세움. 또는 그 소원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에 더해 ② 보다 선하고 훌륭하게 살겠다고 하느님에게 약속하는 행위라는 뜻도 갖고 있다. 이어령 선생은 과거 무신론자였으나 나중에 칠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 세례를 받고 종교에 깊이 빠졌고 많은 글도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종교에 귀의한 후 더 깊은 깨달음과 성찰을 했기 때문에 출간에 맞춰 종교적 신념이나 생각을 담은 책은 아니지만 '서원시'란 부제를 붙인 듯하다.
3월 중순 출간된 이 책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는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서원을 기록한 책이다. 2022년 새해를 맞아 온 국민이 눈부신 하늘로 다시 한번 날아올랐으면 좋겠다는 선생의 간절한 염원을 담았다. 책자는 14년 전 선생이 지은 〈날게 하소서〉란 제목의 시에 선생의 구술 해설을 입혀 서문을 완성했다.
거기에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출판사의 사정으로 묵혀두었던 열세 가지 ‘생각’에 대한 원고를 더해 한 권의 책으로 묶은 선생은 새해 소원 그대로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란 제목의 새 옷을 입히고 김병종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붉은 기운의 낙관을 직접 청해 책을 완성했다.
“개인이나 국가나 도저히 걷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하나의 소원이 있을 겁니다. 나에게 날개를 달라는 기도지요. 그래서 나는 실제로 해마다 그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게 바로 이 시를 낳게 한 동기요, 기도였던 겁니다.”
이어령 선생은 책 속 시에서 “해마다 해가 바뀌어도 양 진영으로 갈라져 싸움박질을 하는 정치인들에게는 평화의 상징 비둘기의 날개를 주시고, 살기에 지쳐 주눅 든 가난한 자들에게는 용맹한 독수리의 날개를 주시고, 풀이 죽은 기업인들에게는 『갈매기의 꿈』 속 조나단 같이 비행할 수 있는 날개를 주소서. 진흙탕 싸움에 말려들어 이념 싸움을 하는 지식인에게는 구름보다 높이 나는 종달새의 공허한 날개를 보여주소서"라고 썼다. 그의 하나님께 드리는 날개의 소원을 담은 기도는 그칠 줄을 몰랐다. "뒤처지는 자에게는 제비의 날개를, 설빔을 마련하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공작의 날개를, 홀로 사는 노인에게는 천년학의 날개를 주소서. 핵가족으로 흩어지고 이혼하는 불행한 사람들에게는 원앙새의 사랑의 깃털을 주소서”라고 기원했다. 선생이 우리 국민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날개는 '기러기의 날개'다. 기러기의 날개? 소리 내어 서로 격려하고 대열을 이끌어가는 기러기의 날개다.
“기러기들처럼 날고 싶습니다. 온 국민이 그렇게 날았으면 싶습니다. 소리 내어 서로 격려하고 대열을 이끌어가는 저 신비하고 오묘한 기러기처럼 날고 싶습니다.”(p.28)
혼돈의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선생의 지성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떠맡았고, 발자취의 흔적은 대한민국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업적을 남겼다. 선생은 자신의 학력은 높지만 시대의 이유로 제대로 된 학교를 다닌 적이 거의 없었기에 ‘창의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책에서 말한다. 현행의 획일화된 교육이 창조적으로 생각할 기회를 앗아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책을 넘기다 보면 놀라움의 연속이다. 나이가 들면 머리가 굳는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하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건 노력하지 않는 자의 핑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꼭 독자를 두고 하는 말인 것처럼 폐부에 깊숙이 박힌다. 보이지 않는 것이 가치를 잃은 시대, 선생은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내는 데 큰 가치를 둔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가치가 없는 건 아니란 말이다. 특히 미키 마우스와 일본의 디즈니랜드를 예로 들면서 정작 누가 돈을 버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선생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무형의 가치를 생산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자성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한다.
새로운 정의의 3D도 매우 흥미로웠다.(p.89, 「새로운 3D」) 미래 시대가 요구하는 자질이 무엇인지도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뭐니뭐니해도 오역으로 인해 사람들이 열광하는 구절들이었다. 그것이 잘못됨을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건 왜 일까. 왜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할까 싶으면서도 오역이, 다시 말해 틀린 것이 옳은 것을 압도하다니. 하나의 작은 예이지만 실상 우리가 정답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진짜 사람들이 원하는 정답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그의 작업실을 TV로 방영된 적이 있었다. 고령의 나이에도 여러 대의 IT 기기를 활용하며 집필하는 그는 끊임없이 배우고 기록하는 트렌드세터이자 언어 수집광이었다. 그러나 배우고 기록을 중시하는 선생은 지식도 영양분처럼 넘쳐날 때가 더 위험한 법이라 경고한다. 고여 있는 지식도 퍼내야 새로운 생각이 새 살처럼 돋는다며 우리를 괴롭히던 고정관념들, 집념이나 원한도 모두 버려야 한다는 말이 기억난다. 즉, 자신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뒤집어 생각하는 사고의 틀 깨기가 중요함을 이 책에서도 여러 면에 걸쳐 강조한다.
뽀빠이와 낙타의 신화, 낙타는 성경 속에서 운다, 세 마리 쥐의 변신, 달마의 신발 등 가벼운 에피소드를 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에피소드들은 정체성과 창조적 사고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사고의 틀을 깨고 한 단계 성장하는 발판으로 삼는 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시작된다고 담담하게 전하는 저자의 글을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내 책상 한구석에는 작은 종이 한 쌍 놓여 있다. 우연히 눈에 띄어 무심코 흔들어보았더니 뜻밖에도 투명한 소리가 난다. 크리스마스트리에 장식으로 매다는 종인 줄로만 알았는데, 무슨 금속 같은 것에 도금한 진짜 종이었던 것이다. 높은 소리를 내는 것이 은종이고, 조금 낮은 소리로 울리는 것이 금종이다. 별로 눈여겨본 적도 없던 것이 소리를 내는 순간, 무엇을 발견했을 때와 똑같은 충격을 받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 소리는 먼지 속에 감춰져 있었던 것일까. 내 손이 닿기 전까지 그것은 하나의 돌멩이와 같은 존재였거나, 아니면 한 번도 존재해본 적 없는 그냥 텅 빈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지금 목숨을 지닌 새처럼 날개를 퍼덕이며 환한 대낮 속을 날고 있다.(p.44, 「종소리처럼 생각이 울려왔으면」)
옛날에는 하잘것없는 사람의 죽음이라 해도 죽음은 장엄하고 엄숙한 사건이어서 가장 큰 뉴스거리였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조종을 울렸으며, 사람들은 그것이 누구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인가를 궁금해했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죽은 자를 위해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고개를 숙여 슬픔을 표시했다. 그러나 존 던은 말한다. 그것이 누구를 위해 울리는 종소리인가를 묻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한 종소리, 내 죽음의 조종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완전한 섬일 수는 없다. 나는 홀로 있는 섬이 아니다. 아무리 홀로 떨어져 있으려고 해도 인간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섬이 아니다. 나는 대륙의 일부다. 아무리 작은 모래나 흙덩이라고 해도 그것은 광활한 대륙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존 던은 말했다.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에 모래 한 알과 작은 흙덩어리가 바다에 휩쓸려 가면 그만큼 대지는 가벼워지고 작아진다”고···.(p.48,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저자 : 이어령
1934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를 발표,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등장한 그는, 문학이 저항적 기능을 수행해야 함을 역설함으로써 '저항의 문학'을 기치로 한 전후 세대의 이론적 기수가 되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된 이래, 1972년부터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을 맡을 때까지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을 역임하며 우리 시대의 논객으로 활약했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중앙일보 상임 고문 및 (재)한중일 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으로 재직 하였다. 1967년 이화여자대학교 강단에 선 후 30여 년간 교수로 재직하였고, 석좌교수를 지냈다. 그는 시대를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명 칼럼리스트로만 활약한 게 아니라 88서울올림픽 때는 개ㆍ폐회식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문화 기획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1980년 객원연구원으로 초빙되어 일본 동경대학에서 연구했으며, 1989년에는 일본 국제일본문화연구소의 객원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1990~1991년에는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저서로는 『디지로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지성의 오솔길』, 『오늘을 사는 세대』, 『차 한 잔의 사상』 등과 평론집 『저항의 문학』, 『전후문학의 새물결』, 『통금시대의 문학』,『젊음의 탄생』,『이어령의 80초 생각 나누기』등이 있고, 어린이 도서로는 「이어령의 춤추는 생각학교」시리즈 등이 있다.
디지로그(Digilog)는 아날로그 사회에서 디지털로 이행하는 과도기, 혹은 디지털 기반과 아날로그 정서가 융합하는 시대의 흐름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그는 그의 저서 『디지로그』에서 현재 우리가 한때 '혁명'으로까지 불리며 떠들썩하게 등장했던 디지털 기술은 그 부작용과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시 아날로그 감성을 불러들이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지적해준다. 시대를 읽는 특별한 눈을 가진 그는 우리에게 선사하는 새로운 사명으로 디지로그 시대의 개척자이자 전도사가 되었다. 한국이 산업사회에선 뒤졌지만 정보화사회에선 선두주자로 나설 수 있음을 일찍부터 설파한 그가 이제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디지로그 시대의 개막'을 선언한다. 물리적 나이로 보자면 분명 노학자이지만, 그는 디지털 미디어를 매개로 한 문명전환의 시기에 누구보다도 앞서 디지털 패러다임의 한계와 가능성을 몸소 체험한 얼리어댑터이다.
그의 서재에는 7대의 컴퓨터와 2대의 스캐너, 무선 공유기, 프린터 등 각종 디지털 장비가 자리한다. 7대의 컴퓨터를 직접 네트워킹했다. 그는 컴퓨터들을 이용해 직접 자료를 모으고, 검색하고, 정리하고, 자신의 지적 회로망에 연결한다. 그에게 컴퓨터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뇌의 확장된 영역이 되고, 그가 선창하는 디지로그 세상을 몸소 살고 있는 인간임을 증명한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