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작가의 단편집이다. 단편 소설의 왕인 체호프와 비견된다고 한다. 읽어 보니, 누가 더 잘 썼는 지는 모르겠지만, 결이 많이 다르다. 다른 의미에서 좋다는 말이다.
모든 단편이 그렇지만, 짧게 지나가지만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운(삶의 진실이 너무나 많이 담겨 있는) 인생의 어느 한 컷을 너무 섬세하게 포착했다. 그리고, 체호프와는 다르게 그 컷을 분명하게 전달하지 않고 아주 은유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래서, 읽는 내내 나의 시선이 어느 한 문장을 반복해서 오르내렸다.
삶은 쓸쓸하다. 살람들은 잘 알지도 못 하면서 내 삶에 대한 평가를 하고 측은한 시선을 보낸다. 그럼, 나는 그런 세상에 대해 냉소에 경멸로 대한다. 더 슬픈 것은 나도 타인의 삶에 대해 그런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알면서도, 그 모순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한다. 그게 삶이라면 우리 삶은 너무 쓸쓸하다. 그래서, 우리는 돈에 집착하고 인간관계에 집착하는 지는 몰라도. 아마 그렇겠지.
작가의 인물들은 대체로 "작고 깡말랐"다. 늙고 머리가 버껴지고. 우리 삶처럼. 지금이 아니면 언젠가는 우리는 그렇게 된다. 그래도 사는 게 삶이라지만, 우리는 나는 예외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타인에게 측은한 시선을 보낸다.
한국 작가들도 단편을 워낙 잘 써, 외국 작가의 단편소설은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체호프가 좋다고 해서 꽤 오래전에 읽어 보긴 했지만, 글쎄 아주 좋지는 않았다. 아마 정서적으로 한국 사람과는 잘 맞지 않았나 보다. 하지만,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소설은 정서적으로 나에게 잘 맞았다. 혹시, 체호프의 작품을 30대에 읽었고 이 작가의 작품을 40대에 읽어서 그런가? 어쨌든 오랜만에 읽는 외국 작가의 작품이자만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물론 꽤 많이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있기도 했다. 그만큼 매우 은유적이다.
어떤 책은 제목만 보고 덥석 읽게 되고 어떤 책은 제목만 보고 고개를 돌리게 되는데, 이 책은 후자였다. 몇 년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모 드라마의 제목과 똑같은 책의 제목이, 나로서는 크게 관심도 없고 동경하지도 않는 사랑의 형태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게 된 건, 얼마 전 팟캐스트 <책읽아웃>에서 황정은 작가님이 이 책을 추천하셨기 때문이다. 황정은 작가님이 좋아하는 작가와 책이라면 덮어놓고 읽는 나로서는, 작가님이 윌리엄 트레버를 좋아하신다니 반가웠고 이 책을 추천하신다니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는 총 12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밀회>라는 제목은 마지막 단편의 제목에서 따왔나 했는데, 책을 다 읽고나서 생각해보니 모든 단편에 '밀회(남몰래 모이거나 만남)'가 나왔다. 좁게는 밀회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불륜도 있고, 드라마 <밀회>에서처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녀 간의 사랑도 있다. 넓게는 방금 남편을 여의고 혼자가 된 여자의 곁에 나타난 사람들이라든가, 어린 시절 한 저택에서 가정부로 일할 때 잠깐 보았을 뿐인 무용 선생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여자의 이야기도 있다.
책에 실린 단편의 대부분이 좋았지만, 여러 번 반복해 읽게된 건 <그라일리스의 유산>이었다. 책으로 만나 책으로 이어지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고 늘 같은 정도로 마음을 설레게 한다. 결혼을 약속하고 돈을 벌기 위해 외국으로 떠난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여자의 이야기도 나오는데(<큰돈>), 이 이야기는 작년에 읽은 윌리엄 트레버의 장편 소설 <펠리시아의 여정>(1994년작)에도 나온다. 이런 식으로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과 장편이 연결되는 경우가 또 있는지 궁금하다. (더 읽어봐야지...!)
단편은 사탕을 한알 한알 녹여 먹거나 포도알을 하나 하나 뜯어서 입 안에 넣고 오물거리거나, 견과류를 오도독 하고 씹고 씹어서 꿀꺽하고 삼키는 맛의 느낌을 준다.
" 윌리엄 트레버" 라는 작가를 나는 알지 못했다.
무려 1928년도의 태어난 작가, 그렇게 오래전의 작가.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 시절에 태어난 작가, 2016년 88세의 나이로 작고 할때까지 수백편의 단편과 18권의 책을 낸 아일랜드의 작가. 분명 저런 그의 이력만 읽어도 그가 나이든 남자라는 느낌을 가지고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이가 있는 옛날 남자라는 이미지.
그 이미지 가지고 책을 들여다 보고 그의 글을 곱씹어 본 건 나의 크나큰 실수 였다.
책을 읽으면서 그런 그의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졌고,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앞 페이지로 넘어오는 버릇 때문에 다시 그의 이력을 보다가 와~
섬세한데 또 집요하진 않고 , 두루뭉실 한거 같은데 예리 하고 , 딱 잡아서 이해가 되진 않지만 알 것같은 그의 단편들.
다음편으로 넘어 가고 넘어 갈때 마다 나이든 여자이거나 소년이거나 아이거나 중년남자이거나, 등장 인물들이 계속 바귈때 마다 또 다른 작가가 이야기를 이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 한 작가의 작품인데, 다른 사람이 쓰는 것 같은 느낌.
한 선생님에게서 배운 다른 마음을 가진 사진이 쓰는 단편집 같은 기분을 느끼고는 감탄을 하고 말았다.
하나 하나에 나는 집중했고, 몸을 웅크리고 보다가 늦게야 기지개를 켰는데, 단편을 곱씹을새도 없이 읽어 제껴서 놀랐다. 말랑 말랑한 글도 아니고 농담도 없는데 농담 같이 들리는 마법, 특히 전통등에서 간간히 나오는 라틴어 기도문이나 말들 때문에 나도 모르게 아 이건 해리포터 아이들이 쓰는 마법 같은 말이구나 라고 혼자 생각 버리고 말았다.
원래라면 나는 단편집을 한번에 읽어제끼지? 않는다. 한 에피소드가 끝나면 조금 쉬거나 아니면 다른 책을 읽거나 해서 머리를 좀 다른 것에 물들이고 다시 돌아와서 다른 단편을 읽는 편인데, 그래야 짧은 이야기라도 한 이야기처럼 느껴져서 그랬는데...이 책은 그러질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은거지..
그랬던건 처음 이야기 부터 몰입감이 있어서 일거다. 유독 어? 끝난건가 싶게 끝나는데 그래서 더 읽어버린건지도 모르겠다.
+ 한겨레출판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다른 사람들의 사랑은 모두 아름답고 행복해 보인다.
그들의 사랑에는 위태로움이란 결코 없고
유한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나의 사랑은 어렵기만 하여 그저 슬퍼하기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쉽게 단념할 수도 없다.
누구나 '나'가 되었을 때 공통적으로 느끼는 이러한
사랑의 특징을 세심하게 그린 책이 있다.
윌리엄 트레버의 『밀회』는 누구라도 사랑하면서
느낄 수 있는 외로움과 처절함을 12편의 단편에
담아낸 단편집이다.
작가는 사랑은 이처럼 외롭고 처절하고 비참한 것이야,
라고 적나라하게 말하지 않는다.
사랑을 하면 유약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내면을
비밀스럽고도 조심스럽게 다룬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솔직한 내면을 드러낸 '사랑을 하고 있는 인간'은
사랑으로 연약해진 마음을 위로받고
다시 사랑으로 회복할 거라는 희망을 얻는다.
작가가 이 책을 통해 그리고 싶은 사랑은 풋풋한
첫사랑이나 절정이 이른 뜨거운 사랑은 아닌듯하다.
더 이상 오르지도, 떨어지지도 않는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사랑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적정함은 안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정상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간신히 애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오히려 불안정해 보였다.
12편의 작품에서 선보인 사랑은 모두 미적지근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어, 잠시 방심하는 틈에
걷잡을 수 없이 온도가 올라 끓어 버리거나
차갑게 식어 얼어버릴 수 있는 위태로움을 간직했다.
소설의 인물들은 사랑의 온도가 변하지 않도록,
적정 온도가 유지되도록 부단히 애쓴다.
모두 짧지만 빨리 읽어낼 수 없는 작품들이었다.
내면과 상황 묘사가 면밀하게 쪼개져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읽어야만 했다.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넘길
감정이 없었고 그렇기에 더욱 공을 들여 읽어야 했다.
제대로 이해하며 읽었는지도 아리송하다.
분명한 것은 겉보기에는 다채로워 보이는 사랑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다 같은 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의 사랑만 유별나게 예쁜 색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랑은 모두 똑같은 색을 가졌지만 어떻게 빚어내고
드러내느냐에 따라 고유의 색이 다르게 비친다.
「고인 곁에 앉다」
남편이 살아생전 자신에게 한 번도 애정을 내비친 적이
없었지만 남편이 죽은 뒤 에밀리는 남편의 명복을 빈다.
남편이 죽은 뒤 자선 단체에서 찾아온 낯선 자매에게
남편에게 상처받았던 과거를 우회적으로 고백한다.
이어지는 자매의 당황에 에밀리는 태도를 바꾸어
남편을 두둔한다. 도리어 결혼을 하지 않은 자매에게
괜한 소리를 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기도 한다.
에밀리에게는 남편에 대한 사랑의 잔재가 남았던
것일까, 혹은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 자신의 비참함을
숨기려 했던 것일까.
"제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자매는 당황했다.(···) 결혼하지 않은 이 여자들이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에밀리는 생각했다. 슬픔도 애석함도
없다 할지라도 세상을 뜬 저 남자에게 얼마간의 사랑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저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처음부터 자신의 잘못, 자신의 어리석음이었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전통」
소녀였을 시절에 명명된 '그 소녀'라는 호칭을 나이가
한참 들어서도 듣는 가정부 벨라가 있다.
물론 벨라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른다.
벨라를 흠모하는 올리비에만 간직하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랑은 일 방향이 아닌 쌍방향의
것이며 굉장히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진행된다.
서로를 향한 관심, 관심에 대한 눈치와 짐작,
끝내 확인되는 확신. 서로가 내비치는 상상을 통해
이뤄진다.
걸어가는 동안 그의 얼굴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채웠다. 그의 목소리는 오래전 다정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던 그 소년들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짐작했듯이,
그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도 비슷한 부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언제나 비슷한 부류를 알아보았다.
「그라일리스의 유산」
한때 '책'이라는 매개체로 사랑을 나눴던 여인의
죽음으로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게 된 그라일리스는
그 여인과의 과거를 회상한다.
단순히 유산을 상속받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아내를 속인 죄책감과 미안함, 여인과의 한때
풋풋했던 사랑을 그대로 남겨두어야 하는 책임감 등의
복잡한 감정의 굴레에서 벗어날 책무가 있다.
그는 여인과의 추억을 마지막으로 복기하고
유산 상속을 포기하는 것을 끝으로 그 굴레에서 벗어난다.
위스키의 힘을 빌린 말은 이제 사사로운 일, 더 이상
패닉을 일으키지 않는 질서 정연한 기억 속의
속삭임이었다. 변호사를 찾아가면서, 그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는 기억 밖에서는 건드리지 말아야 했던
것을 건드렸다. 기억 속에서는 모든 것이 영원히 그곳에
있었고 아무것도 변할 수 없었다.
「큰돈」
어머니가 돌아가시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존 마이클은 어머니의 죽음 직후 돈을 벌기 위해
미국으로 떠날 계획을 세운다.
결혼을 약속한 피나와 집과 땅을 물려준다는 외삼촌을
뒤로 한 채 그저 돈을 벌겠다는 목적으로 먼 길을 떠난다.
피나는 존 마이클이 돌아온다는 희망만을 품고
살아가지만 그는 번번이 약속을 어기며 피나의 희망을
짓밟는다. 피나는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불안감과 의심은 슬며시
얼굴을 드러내고 결국 피나는 관계에 회의감을 갖는다.
그들에게 돈과 사랑 중 어느 것이 목적이고 수단이었을까.
그들은 피나가 깨달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만약 존
마이클과 함께였다면 지금보다 더 외로웠을 것이다.
오래 이어진 사귐과 함께 계획한 미래, 서로에 대한
열정과 포옹은 가슴 저미는 기억으로 남았으나 괴로움은
사라지고 없었다. 두 사람이 사랑한 것은, 너무나도
사랑한 것은 미국이었다.
처음 만나는 작가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소설집인 밀회는 단편소설집들이 그렇듯, 작품 중 하나의 제목이 전체 제목이 되었다. 밀회는 12편의 단편 중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소설의 제목이다. 삶이란 어떤 점에서는 공감이 되기도 하는 반면, 각자의 모습에 따라 다양하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감정 또한 삶 속에 담겨 있어서 그런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 속에는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의 감정과 상황이 펼쳐진다. 이해가 되는 삶도 있지만,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삶도 등장한다. 삶의 모습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제목부터 묵직했던 "고인 곁에 앉다"라는 작품을 읽으며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주인공인 에밀리의 감정도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오랜 세월 함께 한 남편의 죽음 앞에서 아내는 어떤 감정을 갖게 될까? 부부는 고운 정도 있지만 미운 정도 있을 터. 여러 감정이 오고 갈 것 같다. 미울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다시는 못 올 길을 떠난 배우자를 보며 못해줬던 기억에 가슴 아파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책 속에서는 아쉽지만 접어도 될 것 같다. 가부장적이고 늘 군림하기만 했던 남편의 죽음 앞이라면 다를 수도 있겠다. 남편의 죽음 앞에서 자유를 느꼈다면 과연 그녀는 비판받아야 할까? 남편의 죽음이 홀가분하고, 시원하다면, 눈물이 나지 않고 애가 타지 않는다면 그 모든 감정의 결과들은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 이제 막 남편은 숨이 끊겼다. 그를 모르고 위로하기 위해 온 제라티 자매와의 대화 속에서 조금 다른 분위기들을 마주했다. 남편에 대한 좋은 기억들보다는 후회(그와의 결혼을) 하는 기억들이 떠올리지만 제라티 자매는 그녀가 충격 때문에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그와 안 지 28년, 함께 산 지 23년.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뀐 긴 세월을 살면서 어쩌면 에밀리는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작품인 밀회 역시 묵직한 무언가가 담겨있다. 이혼한 지 얼마 안 된 그녀와 그는 조심스럽게 감정을 나눈 사이다. 그녀가 이혼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 궁금할 법 하지만 그녀도, 그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그저 둘은 일상의 시간들을 함께 나눈다. 하지만 조심스럽다. 그녀는 이혼녀임에도 그들의 관계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신경 쓰인다. 에밀리가 그랬듯이 밀회의 남주인공 또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가 손가락질 받는 상황이 더 힘든 그는 결국 그녀를 위한 선택을 한다. 과연 그의 선택에 대해 손뼉을 쳐 줄 수 있을까?
삶은 혼자가 아니다. 타인의 삶이 내 삶에 들어와 있고, 영향을 미친다. 각자 다른 삶의 군상들이 담겨있지만, 그래서 다양한 감정들이 혼재되지만 그 안에는 같으면서도 다른 감정들이, 삶들이 존재한다. 그런 삶의 모습을 짧은 작품으로 모아서 만들어진 밀회 속을 여행하다 보면 어렵고도 쉬운 게 사랑이라는 생각에 역시나 가닿게 되는 것 같다.
길에 지갑이 떨어져 있다.
이 지갑을 보고 가져가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가?
이 질문은 꽤 오랫동안 나를 에워싸고 있다.
초등학생 때 길을 가고 있었다.
내 앞으로 이 천원이 날아가고 있었고
어라 하는 사이, 누가 봐도 돈의 주인이 아닌 아줌마가 나타났다.
발로 잽싸게 돈을 눌러 잡으며
의식하는 듯
내 돈이 날아갔네 같은 어울리지 않는 멘트를 날렸다.
이때 이후로 절대로 땅에 떨어지거나 남의 것은
함부로 가져가지 말자고 다짐했다.
아줌마의 행동에 경미한 경멸을 느낀 것도 있었겠지만
돈을 보고 난 후 찰나의 순간
주울까 하는 생각을 했던 죄책감도 한몫했지 않을까.
소설을 쓰는 입장에서 책을 읽기 시작하니,
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책들이 다가온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중요하고
그 판단을 기준으로 행동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소설의 순기능이란 어쩌면
있는 그대로 보여주므로 인해
독자가 직접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
아닐까 싶다.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은 불편한 주제들을 다루지만
불편한 느낌이 덜 들었다.
오히려 공감이 가고 상황들이 있는 그대로 다가와
이해가 되었다.
이해가 된다고 해서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온전히 이해를 했다는 깊이 있는 정도도 아니다.
단순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순수하고 얕은 이해로서의 이해.
짧은 단편들이지만 내용은 짧지 않다.
각각 인물들의 서사가 군데군데 녹아 있어,
작가는 참 다채로운 삶을 살아왔지 않을까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전반적으로 다 좋았지만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전통, 저녁 외출, 로즈 울다 부분이 인상 깊다.
<전통>
패기 있고 은밀한 올리비에의 행동과 생각들이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나를 일깨웠다.
굳이 무엇인가를 잘하지 않아도
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 수 있고
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니다.
성과가 날 수도 있고 안 날 수도 있다.
<저녁 외출>
자칫 민망할 수도 있는 상황들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서로의 존엄을 지켰고
그 과정이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우리끼리의 비밀이 생긴 듯해
이상한 성취감도 들었다.
<로즈 울다>
눈물이 나올 뻔했다.
로즈의 죄책감과 부버리씨에 대한 미안함 등이
너무나 따뜻했다,
차가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읽다가 한 구절을 여러 번 읽기도 하고
다시 처음부터 읽기도 했다.
시간의 넘나듬도 자유로웠고
시점이 3인칭으로 진행되어서
주된 화자를 찾고 찾았다.
작가의 글 스타일이 띄엄띄엄 쓰는 경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쁜 뜻이 아니다.
예를 들어 불편한 장면은 애초에 소설에 등장하지 않지만
읽어가는 우리는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윌리엄 트레버의 다른 소설이
밀회를 읽는 내내 궁금해졌다.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나는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백수린 소설가의 추천평
백수린 소설가의 추천평에 끌리기도 했는데
다 읽고 나니 이런 뜻이구나 싶기도 하고
백수린 소설가도 궁금해졌다.
많은 궁금증들이 쌓여있지만
하나씩 여전히 풀어가고 있는 지금,
조만간 풀리게 될 또 다른 이야기들이
기대된다.
에밀리의 남편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홀로 남은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에밀리의 집을 찾은 제라티 자매에게, 에밀리는 슬픔보다 더 짙게 남은 회한을 털어놓는다. 죽은 남편의 장점보다 단점을 더 많이 기억하고 술회하는 에밀리. 자매는 '누구나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다'는 말로 애써 당혹감을 감추려 하지만, 에밀리에게 남은 것은 슬픔이나 죽은 자를 향한 마지막 사랑이 아니라 빈 껍데기 같은 무엇이었다.
[밀회] 에 실린 단편들은 모두 12편. 작가인 윌리엄 트레버의 명성을 익히 들었기에 무척 기대하고 읽기 시작한 작품집이었는데, 첫 작품부터 익숙치 않은 분위기와 메시지에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삶에 대한 무언가. 오랜 결혼 생활을, 애정없이 그저 함께 살아왔을 뿐인 부부생활을 끝내게 되면 에밀리처럼 반응하게 되는 것일까. 이런 당황스러움은 첫 번째 이야기인 <고인 곁에 앉다> 를 시작으로 마지막 작품인 <밀회>로 주욱 이어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첫 이야기에서는 알쏭달쏭했던 그 무언가가 손에 잡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그의 작품 속에서 줄거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윌리엄 트레버의 작품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한 번 스쳐가는 손길, 눈빛, 분위기 안에서 느껴지는 무언의 깨달음 같은 것이다.
<밀회>에서 적절치 못한 관계를 이어오던 커플 중 여성이 이별을 감지하는 것은 상대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이별의 예감은 단순히 '그들의 연애가 어제와는 다르다는 것을 잠시나마 느꼈다'라는 문장으로 대변될 뿐이고, 독자는 이 문장을 읽는 순간부터 그녀와 함께 이별의 징조를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글로 쓰여있으되 글로 표현되어 있지 않은 그 무언가를, 독자는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별의 말조차 나누지 않는다. 백화점 유리창에 반사되어 새겨지는 두 사람의 마지막 포옹. 그 장면과 분위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일었다.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찬사와 존경을 받는 윌리엄 트레버. 하지만 나는 아직은 그의 작품이 많이 낯설다. 나의 삶의 깊이가 아직 그런 수준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모양이다. 오기가 나서 에잇!하며 계속 읽어가기는 했지만 표제작인 <밀회> 외에 이렇다 할 느낌은 받지 못했다. 어떤 작가와 작품에 도전한다는 표현은 옳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도전해보고 싶은 작가가 한 명 더 생긴 것은 확실하다. 그 끝을 살짝 붙잡은 것 같은 윌리엄 트레버의 세계. 그가 보여주는 여백의 미를 조금은 더 음미해보고 싶다.
** 출판사 <한겨레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