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암울하고 슬픈 이들에게 세상의 멸망의 고지는 청천벽력 소식이 아니라 마지막 용기라는 메세지가 흥미로웠다. 현대인들은 습관적으로 죽고 싶다는 말을 한다. 정작 진짜 죽음이 다가왔을 때의 반응은 제각각 일 것이다. 현실이 행복했던 이들은 행복을 잃고 싶지 않아 슬퍼할 것이고, 암울했던 이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현실도 공평하게 사라진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4명의 등장인물들이 마지막 용기를 얻어 과거를 잊고 남은 한 달을 어떻게 살아야될 지에 대한 고민과 행동들은 나에게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의 인지와 함께 나의 삶을 어떻게 가꾸어 나갈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만들었다.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
회사 다니기 싫은 사람, 공부하기 싫은 사람,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 삶에 재미가 없는 사람, 억울한게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아무도 지구를 구원하지 않는 ‘진짜’ 종말소설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를 소개합니다.
저자는 학교폭력의 이야기, 가정폭력의 이야기, 연예인들의 치열한 경쟁 이야기 등 무거운 시사적인 주제를 위트있고 사실적으로 표현하였고 사람들의 내면심리까지 섬세하게 묘사하였습니다.
먼저 이 녀석들 모두에게 저주를 건다. 음식점에 들어가면 반드시 주문을 잊어버리는 저주, 결혼식 날에 다래끼가 생기는 저주, 카레 반찬인 날 깜빡 잊고 밭솥 스위치를 누르지 않는 저주, 꿀렁꿀렁 몸을 흔들며 열심히 저주하는 사이에 곡은 후반부로 넘어갔다. p16
나는 양의 탈을 쓴 짐승.
언젠가 복슬복슬한 양털을 벗고 황야를 달리는 짐승이 되리라. 하하하. p48
건전지와 배터리, 손전등을 찾는데 어둠 속에서 사람이 튀어나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마찬가지로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이라 서로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무서운 사람들이나 유령이 아니라 다행이다. p88
좋아하는 아이 앞에서 어머니와 통화하는 건 부끄럽다.
어머니, 미안해요. 나는 지금 아들이 아니라 기사거든요. p89~90
지구가 한달 뒤에 멸명한다면 여러분은 지금 당장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저는 우선 집을 판 후 가족과 함께 몰디브로 갈거에요. 가는 길에 면세점에 들려서 명품을 어마무시하게 사고 몰디브로 가서 먹고 싶은 것 살찔 걱정 없이 신나게 먹고 마시고 하고 싶은 것 모두 할거에요. 단 정말 멸망한다는 가정하에~ 아니면 완전 망하는거죠.
한 달 뒤, 소혹성이 지구에 충돌합니다. p49
이렇게 멸망이 예고 되었을 때 부모는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하게 될까요
“하지만 네가 결정한 일이니 어쩔 수 없지. 반한 여자는 목숨을 걸고 지켜. 그리고 반드시 엄마 곁으로 돌아와. 17년이나 키워줬으니 그 정도 효도는 받아야지.” p67
어머니만 마음에 걸린다. 고생과 걱정만 끼쳤으니 다음에 다시 태어난다면 조금 더 용기를 내고 싶다. ...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조금만 더 유예가 생긴다면, 그것이 한 달이든 며칠이든 상관없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열심히 살 것이다. p113
어린시절에는 부모님의 말씀이 곧 법이고 부모는 충분히 아이에게 사랑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만약 아이가 엄마 코를 닮아 코가 낮다고 불평하면 “네 코는 복코이기 때문에 나중에 복을 많이 받을거다”라고 좋은 말도 많이 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는 코에 집중하지 않고 맑고 밝게 자랄 수 있지요.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있지요.
중학생이 되자 당연한 일인 듯 나쁜 선배들의 그룹에 들어갔다. 부모가 주지 않는 애정을 알아서 채우려는 듯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 지냈다. 곤란에 처한 동료가 있으면 모두 힘이 되어 준다. 동료라면 서로 돕는 게 당연했고 선약 판단은 다음 문제였다. 124
부모의 죽음도 순수하게 슬퍼할 수 없는 나는 쓰레기지만 아이를 그렇게 키운 이 사람들도 쓰레기다. p150
나는 맥주를 마시고, 시즈카가 많든 중화냉면을 먹고, 시즈카와 잘 것이다. 평범한 날과 세상이 끝나는 날, 둘 다 다르지 않다. 특별히 좋은 생활은 아니었지만 부족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행복했으리라. p163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앞으로 한 달이면 죽는 이 마당에, 세상에 태어난 기쁨을 곱씹고 있다.
이런 막바지에,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p202
여기서 깜짝 퀴즈! 이 주인공은 왜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까요? 힌트 : 감동의 도가니 + 밝혀지는 과거 + 도망간 여자친구
아이는 앞으로 지을 신축 저택이나 다름없다. 나와 신지는 집을 지탱하는 기둥 하나하나에 폭력이라는 이름의 상처가 수도 없이 박혀 있다. 집이 완성됐을 때는 이미 그 부분만 도려내기랑 불가능해서,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상처 입은 기둥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p 209
모든 것을 다 가진 스타가 외로움을 느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왜 그들은 외로움을 느끼며 어떤 경쟁의 구도에 있기에 1kg 살 찌는 것도 두려워 하는가
나는 스타다. 유명인이다. 모든 것을 손에 넣은 이 시대의 가희다, 나를 동경해서 흉내 내는 여자들이 전국에 넘쳐난다. 모두 나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 나는 어째서 이렇게 외로운 거지? 이를 악물었다. 내부어서 밀려 나온 눈물이 무릎을 촉촉하게 적셨다. 자존심만이 나를 지탱해주고 있다. p320
나는 구지라가 싫다. 그렇다, 구지라뿐만이 아니다. Loco를 위협하는 모든 신인 아티스트가 싫다. 나는 바보가 아니라서 이 부귀영화가 영원히 이어지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왕관을 다음 가희에게 넘겨줄 날이 오리라. 그때까지 아직 몇 년은 더 남아 있을 줄 알았다. p323
인스타그램을 업데이트하기가 두려웠다. 무엇을 올려도 진창 같은 댓글이 달렸다. 주위에서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바보들, 당연히 신경 쓰이지. 하지만 반응하면 지는 거라고 타이르는 말에 애써 마음을 마비시켰다. 무엇을 봐도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그것이 실수였음을 이제는 안다.
어째서 돌을 맞는 쪽이 고통을 참아야만 하지? 돌을 던지는 쪽이 당연히 나쁜데, 그래도 지금은 날아오는 애정과 증오가 기절할 만큼 기쁘다. p359
인생에서 루저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멸망을 계기로 혐오했던 자기 삶을 마주보는 과정을 현실적이고도 희망적으로 그려낸 이 작품을 통해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아가면 더 따뜻한 삶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비록 그 소신 때문에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하더라도 인생의 종착역에서는 그 소신 덕분에 새로운 희망이 싹틀 것이기 때문이다.
한 달 후, 소혹성이 지구와 충돌한다.
학교 폭력을 당하며 자신이 양의 탈을 쓴 짐승이 아닐까 생각하는 에나는 소혹성 충돌 소식에 다같이 멸망한다고 생각하니 기쁘다.
자신이 흠모하는 유키에가 도쿄에 콘서트를 보러가겠다고 하자 몰래 따라 나선다.
한편, 깡패 신지는 하루하루 그냥 되는대로 산다.
자신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자신에게 살인 청부를 시킨다. 그래서 막상 살인을 하고 나니 지구가 멸망하기 때문에 필요없단다. 젊은 날 그나마 사랑했던 시즈카를 찾아 떠난다. 멸망을 한 달 앞둔 세계는 좀비처럼 약탈을 하고 종말론을 펼치며 거리에는 시체가 굴러다닌다.
깡패와 그에게서 아들을 지키기 위해 그를 떠난 여자와 그녀의 아들과 도쿄에 콘서트를 보러 가겠다는 아들의 여자친구, 그리고 콘서트의 주인공 Loco. 이 별 볼일없이 살아온 사람들, 어쩌면 모든 걸 포기하고 그냥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사람들이 뒤늦게 깨달은 행복을 위해 희망을 찾아 용기를 내고 위로를 한다. 멸망 직전에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자신이 선택한 삶을 찾아낸 것이다. 그래서 멸망 직전에 울려퍼지는 노래의 여운이 길다.
#멸망이전의샹그릴라 #나기라유 #한스미디어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
(나기라 유)
"누구보다 '나'를 미워하지만,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고 싶었어"
*
*
*
세상은 서열로 분류되지만
각각의 계층 안에 소용돌이치는 애증은 다 똑같다.
나는 의욕 없이 해초처럼 몸을 흔들며 그런 모습을 그저 바라보고 있다.
정면돌파를 포기하면 하루하루는 조금 편하게 지나간다.
p_17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째서 인간은 어리석은 희망을 품는 걸까?
버리면 편해지는 일도 많을 텐데.
p_59
한 달 남았다는 선언을 듣고 지구보다 먼저
인간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든 법도, 상식도, 도덕심도,
싸구려 도금처럼 후드득 벗겨져간다.
ㅡ우리는 사실 이런 존재였나?
p_112
"내일 세상이 끝난다면 난 좋아하는 남자하고 함께 있을 거야."
"신지는?"
"술을 마시고, 맛있는 걸 먹고, 너 하고 잘 거야."
p_162
"지금은 죽고 싶지 않아.
하지만 앞으로 열흘밖에 없어.
슬프고, 무섭고, 최악이지만, 그래도 나는 조금 괜찮게 변한 것 같아.
세상이 그대로였다면 오래 살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런 마음은 모른 채로 죽었겠지."
p_276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나갈 때 유키가 그렇게 말했다.
안녕보다 좋은 말이다.
p_279
모든 것이 과했고 모든 것이 부족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멈춰 서서 생각하기란 불가능했다.
많은 문제들을 거의 처리하지 못라고 그저 급류에 흽쓸려 간다.
p_314
울고 나니 메말라 있던 몸속이 따뜻하게 온기를 되찾았다.
흙 속에 묻혀 겨우 살아 있던 뿌리에서 천천히 무언가가 솟아난다.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을 향해 뻗어가는 강인한 생명과도 닮았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봄은 돌아오지 않는다.
p_354
"그런 식으로 버티는 게 아닐까?"
"버티다니?"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잖아."
모두 침묵했다. 멍하니 그저 죽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건 견딜 수 없다.
그럴 바에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나,
무너지는 세상을 지탱하는 나, 그런 자부심으로 닥쳐오는공포를 포장하는 편이 낫다.
p_380
* * * * *
지구 멸망이라는 주제로 주인공들은 황폐해진 도시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면서도 작은 희망들을 이야기 곳곳 보여주고 있다!
지구종말론은 어릴적부터 나도 들어 왔던 이야기여서
주제가 참으로 흥미로웠다!
그리고, 정말 지구가 멸망 할 위기에 처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달이라면,,, 이라는 생각으로 나를 돌아보게 되었고,
또 내 주위에 가깝다는 이유로 소중하지만 소홀하게 대하고 있었던
가족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 자신도,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훗날 후회가 되지 않도록 아끼고 사랑하며 표현을 많이 해야겠다 느꼈다^^
영화라면 몰라도 소설에 관한 한 인류 종말을 그린 이야기엔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지만,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에 눈길이 끌린 건 2년 전 인상 깊게 읽은 ‘유랑의 달’의 작가 나기라 유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소아성애 납치범과 피해아동’이란 딱지가 붙은 채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고 구원을 주고받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 ‘유랑의 달’은 장르물을 과하게 편식하면서도 사쿠라기 시노를 최애작가로 꼽는 제 취향에 너무나도 잘 맞는 작품이었고, 그래서 나기라 유의 후속작 소식을 내내 고대해왔습니다.
샹그릴라는 잘 알려진 대로 ‘지상에 있는 이상향’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구의 생명체를 전멸시킬 소혹성과의 충돌 전 한 달의 시간을 그린 작품의 제목이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라는 점은 그 자체가 역설입니다. 이런 제목이 붙은 이유는 “평화로운 세상에서는 얻지 못했던 평안과 행복을 (지구의 멸망을 앞두고) 찾은 사람들”(옮긴이의 말 中), 즉 죽음을 목전에 두고야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를 깨닫는 사람들, 또 사랑했던 사람, 사랑하는 사람, 미처 사랑을 줄 수 없었던 사람과 마지막을 함께 보내며 켜켜이 쌓아두었던 속내를 내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열흘밖에 없어. 슬프고, 무섭고, 최악이지만, 그래도 나는 조금 괜찮게 변한 것 같아. 세상이 그대로였다면 오래 살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런 마음은 모른 채로 죽었겠지.”(p276)
“내일 죽을 수 있다면 편해질 거라 꿈꾸었다. 그렇게 바랐던 내일이 마침내 찾아왔다. 그런데 이제야 조금 더 살아봐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p393)
네 편의 연작단편의 주인공들은 행복이나 기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인물들입니다. 아버지 없이 성장한 17세 소년 유키는 끔찍한 집단 괴롭힘에 시달리고 있고,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무관심 속에 야쿠자의 똘마니를 전전하며 40세에 이른 메지카라 신지는 거절할 수 없는 살인청부 때문에 남은 인생을 포기해야 할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불량소녀 출신인 중년의 시즈카는 지구 멸망을 코앞에 두고 18년 만에 만난 연인 때문에 혼란에 빠집니다. 한편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29세의 가희(歌姬) Loco는 경쟁자의 등장과 함께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 채 극단적인 선택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지구의 멸망은 남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습니다.
종말을 다룬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에도 무자비한 파괴와 약탈의 참상이 그려집니다. 자살과 살인이 일상화되고, 평범한 사람들이 패닉에 빠진 채 강도와 강간을 일삼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와 달리 영웅이 등장할 가능성도, 세계의 경찰 미국이 알아서 소혹성을 파괴해줄 가능성도 전무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비관과 공포만 남은 한 달의 카운트다운 와중에 뒤늦게 소중한 ‘무엇’ 혹은 ‘누군가’를 찾아내는, 그래서 “누구나 죽을 때는 혼자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누구와 함께 있을지는 중요한 문제다.”(p222)를 깨닫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차분하고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희망 없는 미래에 절망하며 차라리 지구가 멸망하기를 바랐던 인물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소혹성 충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재난 덕분에 삶의 마지막 순간에 짧지만 소중한 행복과 웃음, 즉 샹그릴라를 되찾는 이야기인 셈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종말에 대처하는 계몽서 혹은 힐링 에세이’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멸망 직전의 공포와 절망은 소름 돋을 정도로 생생하고, 주인공들이 행복과 웃음을 되찾는 과정은 말 그대로 악전고투이며, 겨우 손에 넣은 그 순간은 고작 찰나의 순간에 불과해서 독자 입장에선 허황된 종말 액션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리얼리티와 긴장감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몇 페이지를 앞두곤 뜬금없는 영웅이 나타나도 좋으니 지구를 구하고 이들 모두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지기도 했습니다.
전작인 ‘유랑의 달’에서도 느낀 바지만 나기라 유의 문장은 제가 좋아하는 사쿠라기 시노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애틋함과 처연함, 따뜻함과 담담함을 머금은 문장들이 지구 멸망이라는 특별한 소재와 잘 어우러져서 훨씬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데, 덕분에 벌써부터 다음엔 어떤 이야기로 그녀를 만나게 될지 기대감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아직은 다소 낯선 작가인 나기라 유의 진가가 한국 독자에게도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책 제목만으로도 시선이 간다.
샹그릴라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산골짜기 또는 그런 장소를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멸망 이전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장소.
간단하게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한 달 뒤 죽는다. 한 달 뒤 모든 사람이 죽는다.
그리고 그 한 달을 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어쩌면 흔한 소재고
누구나 생각해봤을 법한 궁금증이다.
한 달 뒤, 내가 죽는다면 난?
4명의 주인공이 나오는 이 소설은
어이없게 따뜻하고
죽음속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일본 소설을 살짝 꺼리는 이유는
너무나 당연하게 나오는 여성 혐오와 폭력적인 장면때문에 꺼리게 되는데
이 소설에도 물론 그런 장면들은 나온다.
그게 조금 거부감이 들기는 했지만
재미있다.
무명에서 스타가 된 가수.
죽더라도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듣고싶은 여학생.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서 죽는 와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주는 남학생. 그리고 그의 어머니.
그의 어머니가 사랑했던 양아치 남자.
가볍게 읽히고 빠르게 지나가는 와중에도
나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소설이다.
시체를 지나가며, 사람을 죽이며,
그들은 희망을 찾고있다.
그들만의 믿음으로 지구 종말의 날까지 버틴다.
불이 나고 범죄가 일어나는 와중에
따뜻한 국수와 예쁜 고명을 올려 배를 채운다.
노래를 하고싶어 연습실에 모여 연습을 한다.
주민들에게 식품을 나눠준다.
당황스럽고 예쁜 책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즐거움이 거북하지 않고 재밌게 다가온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진실이 보여진다. 그들의 속마음이 가감없이 드러난다.
'이제 한 달 뒤면 죽으니까'
'한 달 뒤면 못 할 테니까'
죽음이 예고된 현실에서 따뜻함을 느끼는 아이러니한 소설이다.
즐겁게 읽었고 즐겁게 덮었다.
"오후 간식으로 내줄게. 비축용 크래커에 바르면 맛있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자 유키가 환하게 웃었다.
"왠지 요즘 어머니는 정말 '어머니' 같아."
"응?"
"오후 간식이라니."
유키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뒤뜰로 나갔다. 열일곱살 유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갓난아기였을 때, 어린아이였을 때, 초등학생이었을 때, 중학생이었을 때의 유키를 떠올렸다.
─ '어머니' 같아.
그러게, 이제 와서 말이지. 서글픈 웃음이 나왔다. 나는 언제나 일 때문에 바빠서 유키의 곁에 거의 있어주지 못했다. 유키는 언제나 아무도 없는 아파트에 돌아와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오후 간식은 한 번도 만들어준적이 없었다.
─ 늦었지만 기회를 얻어서 다행이야.
얼핏 보면 전혀 접점이 없어보이는 조합의 네 사람이 모였다. 네 사람이 '만났다' 라는 표현도 생각났지만 그들은 우연히 '만났다'라기 보다는 어떤 공통 속성을 지니고 '모였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작품은 유키의 현실도피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노우에 무리에게 괴롭힘 당하고, 심부름 담당인 학교폭력 피해자 유키는 머릿속으로 가해자 무리를 저주한다. 정말 고통스러운 저주는 아니고 주문할 음식을 잊어버린다던지 같은 가볍고 유머스러운 저주이다. 고통스럽고 잔인한 저주는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유키는 태생적으로 선한 인물같았다. 어느 날 뉴스에서 흘러 나오는 지구멸망설, 한 달 뒤면 지구가 멸망한단다. 그런데, 유키가 도쿄에 꼭 가야하는 이유가 생겼다.
급격히 시야가 흐려져서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앞으로 한 달이면 죽는 이 마당에, 세상에 태어난 기쁨을 곱씹고 있다. 이런 막바지에,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어째서? 어째서?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나는 여기에 있는 누구보다도 머리가 나쁘다.
202쪽
신지는 야쿠자다. 정확히 말하면 야쿠자 아래 잡일을 도맡아하는 하수꾼이다. 몸을 쓰는 일밖에 할 줄 몰라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만 한다. 그리고 마음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들짐승같은 사나이다. 그런 그가 우연히 만난 학교폭력 피해자 유키. 미혼모 시즈카의 부탁으로 도착한 이 곳에서 유키를 구한다. 그렇게 뭉친 네 사람. 유키, 유키에, 신지, 시즈카. 쌩뚱맞은 조합의 네 사람의 여정이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전개가 펼쳐진다. 남긴 피붙이 하나 없어 스스로를 고독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신지,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그가 기쁨의 눈물을 흘릴 만큼 가슴 벅찬 일은 무엇이었을까?
죄송해요, 하고 유키에가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고마워"
"네?"
"자기가 누군가를 상처 입혔다는 사실은 잊고 싶은 법인데, 계속 기억했다가 사과해줬잖니."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너무 용서해도, 너무 용서하지 않아도 안 된다. 이 아이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있다. 당찬 겉모습과 달리 섬세하다.
241쪽
가수 Loco를 보겠다며 무작정 도쿄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전차에 탑승한 유키에는 유키가 없었다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좋은 집안의 미소녀였으며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상위 영역의 여학생이였다. 초등학생 시절 남몰래 도쿄에 가겠다며 혼자 앉아있던 그녀에게 유키는 따뜻한 위로를 건네준 적이 있었다. 유키에는 유키의 위로에 마음의 위안을 얻었지만 재회했을 때에는 어린 마음에 노골적으로 그를 무시했었다. 그럼에도 유키는 끝까지 유키에에게 진심이었고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타인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유키에에게는 누구에게도 말 못한 사정이 있었는데….
우리가 맞은 만큼 누군가를 떄려도 우리가 맛본 고통은 상쇄되지 않는다. 그것을 젊었을 때 이해했다면 조금 더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 인생 경험이 필요해서, 이해했을 때에는 지나간 실수를 되돌아보는 처지일 때가 흔하다. 그러니 하다못해 더는 나빠지지 않도록 뒤늦게나마 막아보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부조리해도 우리에게는 그것이 성장이다.
254쪽
아들을 혼자 키우는 단단한 엄마 시즈카.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냐는 물음에 늘 점잖고, 건강한 훌륭한 사람이었다고만 답한다. 그러나 점잖고 훌륭한 남자와 아이를 가졌을 것이라고는 상상이 안되는 거친 그녀의 모습이 어딘가 아이러니하다. 홀로 아이를 키우며 힘든 내색 없이 살아왔던 그녀에게 한 달 이라는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헌데 하나뿐인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와 함께 도쿄에 가야한다고 통보한다. 그에게 쥐어주는 칼 한자루와 돈.
결국 그녀는 아들의 위험을 감지하고 아들을 찾아가 함께 여정을 떠난다. 야쿠자였던 전 애인, 사랑하는 아들, 아들이 좋아하는 여학생이라는 희한한 조합과 함께하는 마지막 한 달간의 시간. 아이러니하게도 무리 안에서 그녀는 삶의 소중함을 느낀다. 함께 밥을 지어먹고, 시간을 보내고 농담을 주고받는 평범한 가족의 일상. 시즈카가 그것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던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좋아요'를 누른다. 혹은 누르지 않는다. 상대방도 좋아요를 누른다. 혹은 누르지 않는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번식하듯 연결되어 간다.
385쪽
가수 Loco가 오사카에서 마지막 공연을 준비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마지막 공연일 뿐만 아니라 청중에게도 마지막 공연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번식하듯 연결되어 간다' 라는 말이 와닿았다. 지금도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와 연결되어간다. 인터넷에 접속해 누군가에게 게시물을 전달하고, 의도하지 않아도 같은 네트워크에 접속한 익명의 이들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우리가 진정으로 소중하게 생각해야할 것을 분간하는건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너무 많은 선택지가 주어지면 오히려 혼란스러워한다고 한다. 차고 넘치는 관계와 정보 속에서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들을 잊고 산다. 그것이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말이다.
그래서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는 극단적인 환경을 제시한다. 한 달 뒤에 지구에 혹성이 떨어져 모두가 죽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것을 추구할 수 있을까?
정답은 없다. 그러나 한 번 쯤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보며 최선을 솎아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극단적인 상황이 오지 않았음에, 최선의 것들이 내 곁에 있음에 "다행이야,よかった。" 라고 말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