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가장 뛰어난 SF소설에 쥐어지는 네뷸러상을 수상한 엘리자베스 문의 대표작 <어둠의 속도>는 SF소설가 정소연 작가가 다시 한번 번역을 맡아 국내에서 절판된 지 12년 만에 복간되었다.
임신 중 진단한 자폐를 모두 치료할 수 있게 된 근미래, 루 애런데일은 치료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태어난 마지막 남은 자폐인 세대다. 루는 전원 자폐인으로 구성된 한 거대기업의 특수분과 ‘A 부서’에서 근무 중이다. 루와 A 부서 직원들은 사회 능력이 결여되어 정상인들과 같은 소통은 불가하지만, 패턴을 발견해내는 천재적인 수학 능력을 통해 회사에 크나큰 이익을 안기고 있다. 덕분에 그들은 심신 안정에 필요한 전용 주차장, 전용 체육관, 전용 음악시설 등 특별 복지혜택을 제공받고 있다.
하지만 이 안정적 기반은 새로운 상사 진 크렌쇼가 부임하며 크게 흔들린다. 크렌쇼는 자폐인들만을 위한 혜택 일체를 부정하고, 급기야 그들을 사내 연구소에서 새로 개발 중인 ‘정상화 수술’의 모르모트로 사용하려 든다. 정상이 된다면 특별 복지혜택을 제공할 필요가 없다는 것. 어쩌면 유일할지도 모를 일자리를 볼모로 잡힌 A 부서 직원 전원은 정상화 수술 강요 앞에서 혼란에 빠진다. 자폐가 사라지더라도 과연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루는 자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다.
""그거 들었어?" 조 리가 묻더니, 답을 기다리지 않고 조급히 말을 잇는다. "자폐증을 역진(逆進)시키는 방법에 대해 누가 연구하고 있대. 쥐인지 뭔지에 실험했을 땐 성공했어. 이제 영장류에 실험한다더라. 틀림없이, 곧 너희들도 나처럼 정상이 될 거야."
조 리는 늘 그가 우리 중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한 번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음이 이 말로 분명해졌다. 우리는 ‘너희’이고 정상은 ‘나처럼’이다. 그가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자신도 우리와 같지만 더 운이 좋았다는 뜻으로 그도 우리 같다고 말했던 건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즐겁게 하려고 했던 건지 궁금하다."
자폐인 루는 "신, 하나님 아버지는 좋은 부모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신이 일을 현재보다 더 어렵게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신이 우리 부모님이나 나에게 시험이 필요하다고 여겨 자폐증을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아기라면. 내게 바위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간에, 원인은 우연한 사고였다. 신은 사고를 막지 않았지만, 사고를 일으키지도 않았다."라고 이야기한다. 루의 자폐증은 사고였지만, 자폐인인 자신이 무엇을 하느냐는 자신에게 달린 일이라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말을 떠올린다.
이 책에서 자폐인 루를 통해 자폐인이 자폐가 없는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문학적 시선이 눈길을 끈다. 또한 사람들이 자폐인들에 대해 아무 생각없이 던지는 말들이 자폐인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름대로 무척 매혹적이다. 무질서계 안에서, 거의 패턴에 가까운 것을 지켜보는 것 같다. 용액의 균형이 이리저리 움직임에 따라, 분자들이 분리되고 재결합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같다. 거의 이해한다고 느끼는 순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다. 사람들이 어떻게 대화에 참여하는 동시에 대화를 따라갈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슬프다.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안 된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는다. 같은 때 같은 말을 한다. 안녕하세요, 안녕, 잘 지내요, 괜찮아요, 잘 자요, 부탁합니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아뇨, 사양할게요, 당장은 아니에요. 교통 법규를 지킨다. 규칙을 따른다. 아파트에 평범한 가구를 놓고, 내 별난 음악은 아주 조용히 틀거나 헤드폰으로 듣는다. 그래도 부족하다. 이렇게 안간힘을 쓰는데도, 진짜 사람들은 내가 변화하기를, 그들과 같아지기를 바란다.
그들은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변화하기를 바란다. 내 머릿속에 이것저것 집어넣고, 내 뇌를 바꾸고 싶어 한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지만, 사실은 그렇다."
""뭘요. 도움이 되셨다니 기뻐요. 타이어를 이렇게 금세 돌려줘서 고마워요."
"천만에요." 내가 답한다. 그가 나를 돕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했는데 내가 "천만에요"라고 말하니 옳지 않은 느낌이 들지만, 다른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가 나를 응시하며 서 있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윽고 "그럼, 얼굴 보며 지내요"라고 말하고 돌아선다. 물론 우리는 얼굴을 보며 지낼 것이다. 같은 건물에 산다. 나는 이 말이, 그가 나와 함께 걸어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런 의미라면, 왜 그냥 그렇게 말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나는 내 차로 몸을 돌리고 아파트 현관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날 때까지 기다린다.
만약 치료를 받는다면, 이 일을 이해하게 될까? 집에 있는 여자 때문일까? 만약 마저리가 우리 집에 와 있다면, 나는 대니와 함께 아파트에 걸어 들어가고 싶지 않을까? 나는 모른다. 정상인들이 하는 행동의 이유는 가끔은 명백하고, 가끔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책에서 자폐인들이 '어둠의 속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뿐만 아니라 친구라고 생각했던 돈의 습격을 받고 총구에서 급히 나와 자신을 그 속으로 끌어들이는, 빛의 속도를 넘어선 영원한 어둠을 보는 루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어둠에는 속도가 없어. 어둠이란 빛이 없는 공간일 뿐이야." 에릭이 말한다.
"만약 누가 중력이 1 이상인 세상에서 피자를 먹으면 어떻게 될까?" 린다가 묻는다.
"몰라." 데일이 걱정스런 말투로 대답한다.
"무지(無知)의 속도야." 린다가 말한다.
나는 잠깐 어리둥절했다가 이해한다. "무지는 지(知)보다 빨리 확산하지." 린다가 씩 웃고 고개를 꾸벅인다. "그러니 어둠의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빠를지 몰라. 빛이 있는 곳에 늘 어둠이 있어야 한다면, 어둠이 빛보다 먼저 나아가야지.""
"나는 살아 있다. 빛 속에 있다. 어둠은, 이 순간에는 빛보다 빠르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마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점점 더 가까워지는 어둠에 쫓기든이 동요한다."
이 책에서 자폐인 루가 패턴을 읽어내며 회사를 다니고, 펜싱을 배우며 톰과 루시아 부부를 만나고 마저리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변화하는 과정과 더 나은 모습으로 바뀌고 싶은 강렬한 의지를 보여주어 인상적이다. 루는 나 자신이 누구인가가 중요하다는 말과 함께 "나는 나 자신이기를 좋아합니다. 자폐증은 나 자신의 한 부분입니다. 전부가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루는 세상에 대해 이해할수록 두려움이 커지지만, 타인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스스로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를 발견한다. 루는 삶은 변화구를 던지지만, 그래도 그 공을 잡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라는 돌아가인 어머니의 말을 잊지 않는다.
"우리 자폐인들은 인간 행동과 선호 지표의 한쪽 끝에 있지만,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마저리에 대한 나의 감정은 정상적인 감정이지, 이상한 감정이 아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그녀의 머리카락이나 눈의 다른 색들을 더 잘 알아볼지도 모르지만, 그녀 가까이에 있고 싶다는 갈망은 정상적인 갈망이다."
"나는 마저리가 무엇을 듣고 있는지 궁금하다. 내가 듣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만약 우리 두 사람이 같은 음악을 생각하고 있다면, 같은 식으로 들을까? 일치할까, 일치하지 않을까? 나는 소리를 어둠에 입혀진 색깔로 듣는다. 마저리는 소리를 빛 위에 악보처럼 그려진 어두운 선들로 듣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 둘을 합친다면, 빛에 입혀진 어둠과 어둠에 입혀진 빛은 서로 상쇄되어 보이지 않게 될까?"
"나는 이미 변하고 있다. 몇 달 전에, 나는 내가 마저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내가 토너먼트에 나가서 낯선 사람들과 겨룰 수 있음을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한 만큼, 생물학과 화학을 익힐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많이 변할 수 있음을 알지 못했다."
"나는 공항에 있을 때나 가끔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 말문이 막혀서 문제를 일으키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기를 바라지 않아. 나는 여기저기에 가 보고, 내가 배울 수 있는 줄 몰랐던 것들을 배우고 싶어."
책 <어둠의 속도>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선택으로 '정상화 수술'을 받은 루가 7년의 세월이 흐른 후 전하는 이야기는 작가 엘리자베스 문이 독자에게 건내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어둠은 빛보다 빠르지만, 빛이라는 희망을 쫓아가는 동안 우리는 생생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저 밖에는 어둠이, 우리가 아직 모르는 어둠이 있다. 어둠은 언제나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둠은 언제나 빛보다 앞선다. 예전의 루는 어둠의 속도가 빛보다 빠르다는 것을 불편해했다. 지금의 나는 그 사실을 기쁘게 여긴다. 왜냐하면 그것은 빛을 쫓는 한, 나는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란 뜻이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질문을 던질 차례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가끔 SF소설을 읽는다. 좋은 소설만 읽어서 그런 지 실망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은 40년 가까이 자폐아로 살았다. 그 삶에 나름 만족하며 살았다. 일상에서의 불편함은 있다. 특히 사람들의 편견. 하지만, 그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더 많다. 어느날 회사에서 불법적으로 자폐증을 치료하라고 한다. 자폐 자체가 생산성이 낮다고. 회사 사장도 모르게 진행되던 이 일은 나중에 회사 사장이 알고 폐기하지만, 주인공과 친구들은 그 회사의 불법적 치료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작품의 후반부에 주인공이 치료에 참여한다는 결정을 읽었을 때 깜짝 놀랐다. 나는 당연히 주인공이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라고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치료 받기를 원한다. 그 이유는 자폐라는 지금의 상태가 싫어서가 아니다. 이런 표현이 적당한 지 모르겠다. 자유롭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스스로의 이유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이 작품은 단순히 '장애'를 바라보는 편견을 없애고 새로운 시각을 전달해 주는 소설을 넘어선다. 인간이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 지 얘기하는 소설이다. 그리고 주인공의 자폐와 그로 인한 고뇌들을 배경을 이룰 뿐이다. 누구에 의한 선택이든 선택은 어렵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 선택의 고뇌가 자신의 삶을 지탱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기꺼이 그 선택에 뛰어든다.
차분하게 정점을 향해 나아가는 서사가 마지막 장까지 읽는 재미를 유지시킨다. 좋은 소설이다. 재미있기도 하다.
어둠의 속도 / 엘리자베스 문 지음 / 정소연 옮김 / 푸른숲
저자 엘리자베스 문은 카리스마적인 주인공을 내세운 속도감 있는 판타지와 SF 활극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이다. 이전의 저서와 달리 ‘어둠의 속도’는 자폐인을 주인공으로 과학소설이지만 한 인간의 여정에 관한 이야기로 새로운 평가를 받게 한 책이다.
자폐아를 입양해 스무 해를 키워온 어머니의 경험은 ‘어둠의 속도’의 주인공 루의 심리를 깊이 있게 다루어 준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주인공 루를 동정보다는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고 공감할 수 있게 이끌어 준다.
주인공 루는 자폐인으로 일반적인 정상인과 다르다는 시선을 받으며 40년 가까이 생활해왔다.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루 나이 또래의 자폐인을 끝으로 생후 2년 안에 유전자 치료를 통해 완치될 수 있어 더 이상 어린 자폐인이 없게 되었다. 루가 유전자 치료 이전에 태어났기에 자폐를 치료하지 못했지만 어릴 적부터 초기 개입, 교육 방법, 컴퓨터를 이용한 통합 훈련 분야의 발전으로 세상에서 살아갈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도 자폐인으로 정상인과는 다른 사회적 인지의 부족이나 정상인과 다른 패턴화된 행동이나 자폐인들의 강박적인 행동은 다른 정상인들에게 여전히 낯설게 여겨지고 있다. 그런 시선에 불편하지만, 그 정상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펜싱도 배우고, 사랑도 느끼며 자기 삶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루와 함께 일하는 동료 자폐인들에게 상사 크렌쇼씨는 자폐인의 뇌를 정상화하는 수술을 강요한다.
뇌 치료를 결정하지 않으면 지금의 자리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협박을 받는다. 이에 자신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루는 뇌에 대한 전문지식을 순식간에 공부하고 뇌수술에 대한 문제점을 찾아내려고 한다. 여기에서 그의 보이지 않았던 천재성이 발휘된다. 크렌쇼씨의 뇌수술의 강요는 고위 관리자에게 발각되어 자리를 물러나게 되고 루와 자폐인 동료들은 자유 의지로 뇌 치료를 거부하거나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자폐인에 대해 이해하고 루의 순수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면서 공감할 수 있게 했다.
“나 자신 누구인가는 저에게 중요합니다…. 나는 나 자신이기를 좋아합니다. 자폐증은 나 자신의 한 부분입니다. 전부가 아닙니다.”
394쪽
뇌수술에 대한 루의 처음의 생각이었다.
자폐를 병으로, 장애로 생각하는 일반적인 사고에 자폐인 그 모습 자체가 자신의 부분임을 말하는 것에서 부족한 부분도 나이므로 있는 그대로 나를 좋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자기 모습을 그대로 사랑할 줄 아는 그 모습은 루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펜싱을 함께하는 모임에서 돈은 정상인이다.
하지만 돈은 루를 자폐인이라는 것에 대해 폄하하고, 다른 사람들이 루를 챙겨주는 것에 질투와 불만을 느낀다. 결국 루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행동을 한다.
정상인이라 부르는 돈이지만 절대 정상적이지 못한 행동을 한다.
또, 함께 펜싱을 하는 다른 사람들은 돈의 버릇없는 행동에 심술궂은 말로 대하고 ‘밥맛’이라며 돈을 대척하는 행동을 하는데 루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루는 정상적인 행동을 교육받을 때 다른 사람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것이 절대 올바른 행동이 아니라 배웠다. 하지만 정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자신이 교육받은 것도 다른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한다.
정말 정상적인 것이 무엇일까? 루에게는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정상처럼 보이게끔 모범적으로 교육한 행동들이 정작 정상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예외가 되는 경우는 무엇일까?
정상이란 단순히 사회가 만들어낸 기준은 아닐까 싶다. 많은 수가 차지한다는 것으로 평균, 기준으로 불릴 수는 있어도 올바른 것, 정상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앞서 말한 자폐인 자기 모습을 좋아하고 사랑할 줄 아는 모습이 더 인간적이고 더 정상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비인간적인 모습의 정상인들이 그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에 가서 루가 뇌 치료를 선택한 장면은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루의 노력하는 모습과 자폐인이지만 자신에 대해 만족하는 태도를 보았을 때 루의 뇌수술 선택을 상상하지 못했다. 결국 자신의 사랑했던 자폐인의 모습에 스스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나는 내가 치료를 받고 싶어 하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변한다면, 그리고 그 변화가 그들이 아니라 나의 생각이라면, 어쩌면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444쪽
루가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이 자폐인이기에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수 없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었다는 고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전히 자폐와 같은 장애는 정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받는 것이 현실이 느껴져 안타깝다. 장애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현실이 정상이라는 것이 참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500페이지가 넘은 분량의 책이지만 한 번씩은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 책은 정말 많은 질문과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특히 우리의 삶에서 ‘정상’과 ‘비정상’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깊은 사고를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어둠의 속도 책을 읽고
어둠의 속도 책을 구입해서 읽었을때
느끼는 점도 많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루의 이야기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폐와 지적장애 인식을 봐 주지 못 한게
맘이 짠했다.
회사에서 강제로 수술시키려고 한 루의 이야기를 하나씩 알게 된다.
자폐와 지적장애가 수술하게 되면 정말로 정상인으로 돌아올까 하는 경험과
그리고 만일 기억을 못 찾는다해도 장애로 다시 올 수도 있지 않을까 개념을 갖게 된다.
이 책 보면서 자폐와 지적장애를 지켜 본 사람들이 왠지 모르게 이상하게 바라볼수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은 맘 다칠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게 된다.
각각 장애인들의 편견을 의식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살다보면 장애 입을수도 있는데
왜 그런 점을 무시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냥 서로 이해하고 배려해 주면 안 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 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 책의 장르를 뭐라고 해야 할까? <어둠의 속도>라는 제목은 너무 판타지스럽지 않은가?
어슐러 k. 르 귄의 <바람의 열두 방향>이 떠올랐다.
표지와 첫장을 넘기면서도 선입견은 달라지지 않았다. 5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읽고서야 이 책의 장르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루. 그는 자폐증을 앓고 있다. 언론에 등장하거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 접했던 증상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일상생활이 가능하고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하고 본인의 특정한 방식(패턴이나 수학적 방식)을 통해 지각한다. 정상인이 특정한 사건이나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반응할지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기준을 갖고 있다.
책의 제목에 대한 힌트는 책의 여러 곳에 등장하는데, 장르에 대한 의심을 끝내 버리지 못한 이유가 되었다.
"어둠의 속도에 궁리하고 있었어." 22쪽
"어둠에는 속도가 없어." "그저 빛이 없는 곳일 뿐이지 - 부재에 붙인 명칭일 뿐이야." 130쪽
"어둠은 빛이 없는 곳이죠. 빛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곳이요. 어둠이 더 빠를 수도 있어요 - 항상 먼저 있으니까요." 131쪽
내게는 너무 많은 일들이 너무 빨리 일어나서 보이지 않는 것같이 느껴진다. 사건들이 인식에 앞서, 먼저 도달하기 때문에 빛보다 빠른 어둠 속에서 일어난다. 230쪽
그는 직장에서 컴퓨터를 활용한 업무를 하고, 펜싱을 배우고 대회에 나가기도 한다.
그가 마저리라는 여성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고민하기도 하고,
책을 통해 정상인이 사고하는 방식이나 답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다음은 그가 책을 읽으면서 내린 결론이다.
책은 사람들이 생각해 낸 질문에 답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답하지 않았던 질문을 생각했다. 나는, 늘 아무도 한 적이 없으니 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라고 생각했엇다. 그러나 어쩌면 다른 누구도 생각해 낸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둠이 먼저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무지의 심해에 처음으로 닿은 빛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질문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른다. 332쪽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나 자신이기를 좋아합니다. 자폐증은 나 자신의 한 부분입니다. 전부가 아닙니다." 나는 내 말이 사실이기를, 내가 내 진단명 이상이기를 바란다. 394쪽
"저는 하나님이 부여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은 이건 사고였다고, 어떤 사람들은 그저 이렇게 태어나기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부여하셨다면, 바꾸는 것은 잘못이 아닐까요?"409쪽
"나는 내가 더 오래 살고 싶은지 살고 싶지 않은지 알지 못해."
"만약 내가 원치 않는 사람이 되어서, 그 상태로 더 오래 살아야 한다면 어떻겠어? 나는 내가 더 오래 살고 싶은지 결정하기 전에,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를 먼저 알고 싶어." 432쪽
그가 정상인의 범주에 속하는(의학적 관점인지 세속적인 관점인지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에 대한 판단기준인지는 모호하지만) '돈'의 계속되는 악의와 위협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그는 '정상인'이라는 개념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기준이 세워진 듯 하다.
편견을 깨준다는 점에서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해 준 책이다. 표지에 속았다.
이것은 내용이 주는 반전에 자신이 있는 출판사의 승부수였을까? 부디 의도를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결국 순전히 본인의 판단 하에 치료를 택한 '루'. 그 전과 이후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여전히 주체적인 삶을 살아간다. '자폐증'이라는 판에 박힌 클리셰를 벗어던지게 해 준 책. 그들은 틀리지 않았다. 다를 뿐이다.
책의 본문 전에 쓰여있는 서문이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을 얼마남지 않은 올해의 책으로 혼자 정해본다.
읽길 잘 했어!!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인 의견이나 느낌을 적었습니다.
* '정상인'이 되는 수술을 회사의 효율성을 이유로 강요 받는 '자폐인' 루의 이야기.
우리는 비단 장애 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특성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느끼 곤 한다. 대표적으로 예전에는 인종, 요즘엔 성소수자에게 그 잣대가 들이대어진다. 물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장애인에 대해서도.
[참여하지 않은 사람을 전혀 다른 존재로 정의하면 집단의 결속이 강해지죠. 다른 인종, 종교,. 국적, 그리고 심지어 경제적인 게층까지도 '정말로 사람이 아닌' 존재로 규정지어졌죠. 장애도 마찬가지였어요. 장애인들은 때로는 어린애로, 때로는 갇히거나 심지어는 죽임을 당해야 하는 괴물로 취급받았습니다 517p 인터뷰 /엘리자베스 문과의 대화 중 ]
우리 정상인들은 장애인을 "unable unstable unpredictable" 로 바라보고 그들이 세상에 적응하며 살수 있게 도우며 그들의 삶에 전반적으로 통제를 가한다.
그들을 때론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안전과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 그 통제를 정당화한다. (장애 센터에서 청소년 장애인이 아이를 건물밖으로 떨어트려 아이가 사망한 사례를 예로들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처럼 이 세상의 규칙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다면 어떨까.
자페적 특성 때문에 다른 '정상인'들 보다 감각에 예민하고, 규칙을 준수하는것에 강박적이며(회사에서 그 때문에 그들을 안정시킬 수 있는 부대 시설을 설치해 줘야 하며 이는 소설속에서 그들이 정상화 되야 하는 이유중 하나로 작용하고, 그에게 위해를 가하는 '돈'이라는 인물에게 혐오감을 심어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타인의 감정을 본능이 아닌 머리로서 이해하고 '정상인'과의 대화에서 그 뜻을 헤아리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는 점을 빼면 정상인과 다름 없이 출근을 하고 일상생활을 누리고 본능을 '부적절' 하다며 억누를 줄 아는 사람이라면. ?
이 소설은 자폐인을 기능이 떨어지는 사람이 아닌, 그저 '정상인'으로 분류되는 사람들과는 다른 특성이 가진 사람으로 묘사하면서 비단 장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름을 인식하는 것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요즘 사회적으로 보면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로 가는 것 같아서 숨이 막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본인이 믿는 가치와 반대되면 '의견이 다른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의견을 나누는 것이 아닌, 정신병자 취급을 하고 참 쉽게 혐오를 표현한다. 그래서 서로를 짓누르기 위해 집단화하여 자신의 가치에 맞지 않는 신념을 뭉그러트리려 한다. 요즘 그 대상은 페미니즘, 성소수자, 또는 나와 반대되는 정치이념을 가진 사람, 코로나 19로 인한 갈등 등 그 양상이 다양한 곳에서 나타난다.
이 책의 제목은 '어둠의 속도' [빛의 속도가 1초에 30만 킬로미터라면 어둠의 속도는 얼마에요?제가 "어둠에는 속도가 없단다"하고 일상적인 답을 했더니 아들이 말하더군요 "더 빠를 수도 있잖아요. 먼저 존재했으니까요" 520p 인터뷰 /엘리자베스 문과의 대화 중]
한번도 어둠에 속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 해 본적이 없다. 본투비 문과라 더더욱이 그렇긴 하지만 [무지가 지보다 빠른 것 같다 147p]는 부분을 읽으며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 하는 이유는 산사람 중에 죽음 이후에 대해 안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 이라는 게 생각났다.
한동안 인터넷 상에서 어떤 드레스와 신발의 색깔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누구는 분홍색, 누구는 민트색, 또는 누구는 야니로 들리는 음성이 누군가에게는 로럴로 들리는.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감각정보를 받아들이고 216p]
[주관적 참은 개인이 대상을 어떻게 느끼는가에 달렸다 230p]
예전에 뇌과학 책에서 읽기를 사람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게 이 세상을 인식하는 것을 읽었다.,
그렇기에 우리 가족 안에서 이게 어떻게 들리냐, 이게 무슨 색이냐라고 논란이 일었을 때 나는 사람마다 인식하는게 다를 수 있데 라고 했지만 우리 중 누군가는 대뜸 니 눈이 이상하다, 니 귀가 이상하다 라고 했다,
그래서 다름을 인정 하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함.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내용이 와닿았던 것 같다.
이 소설에서는 다름의 특성을 가진 루가 아닌,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혐호하며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려는 돈의 뇌에 칩(폭력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칩./ 마치 시계태엽오렌지(스탠리큐브릭 1971) 에서 알렉스가 참여했던 실험처럼) 을 박고, 루에게는 강제성이 아닌 스스로 변화를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사실 돈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다름이 주는 공포에 대해서도 체감하는 바이기에, 응 그래 너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구나 라고 할 수 없는것도 사실이다. 남에게 위해를 가하는 돈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그를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읽으면서 워낙 문장이나 상황들에 빠져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빠르게 읽지 못했고,놓쳤던 부분이 있진 않았나 싶어서 조만간 다시 읽어 볼 것 같다.
최근 출간된 책이 아닌 2003년에 출간된 책인데 요즘 시대에 화두를 던져볼 만한 책 같아서 이 주제에 대해 같이 이야기 해보고 싶어 주변 사람들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였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쓸 기회를 주신 푸른숲 출판사에 감사하고 기한보다 늦게 서평을 쓰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다.
_내가 다루는 기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의미하고 혼란스럽다. 내 일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회사가 내게 차와 아파트를 유지할 만큼 월급을 주고, 체육관과 포넘 박사와의 상담을 마련해 주는 것을 보면, 중요한 일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패턴을 찾는다. 어떤 패턴들은 특이한 명칭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내 눈에는 늘 쉽게 보였다. 내가 생각한 것을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묘사하는 방법만 배우면 되었다._
_만약 내가 어렸을 때 이 새로운 치료법이 있었다면 부모님은 뭐라고 했을까? 그들은 내가 더 강해지기를 바랐을까. 정상이기를 바랐을까? 치료를 받아들인다면 나는 강하지 않은 걸까? 혹은 내게 다른 노력이 필요해질까?_
자폐인의 관점이 흥미로웠던 <어둠의 속도>. 나의 경우에는,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을 넘어, 주인공의 시점과 감정이 참 흥미로웠던 소설이다. 정상인들의 복잡한 감정들이 배제된 담백한 주인공의 감정선은 한편 편안함을 주었다.
‘나’의 표현과 관점으로 보면, 몇몇 사회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익히는 것 말고는, 사는데 딱히 불편함이 없어 보인다. 생활을 할 만큼에 경제적인 활동도 하고 있는데 어렵지도 않다. ‘내’가 잘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운 상사가 부임하고, 자폐인들에게 제공되고 있던 혜택들을 줄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개발 중인 정상화 수술을 받으라고 강요한다. 수술을 받고 난 뒤에도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주인공은 그렇게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고, 읽는 우리는 ‘정상’과 ‘비정상’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역사를 통해서 보면, 보편적인 사회기준은 계속 변화되어 왔다. 즉, ‘정상’에 대한 관점은 가변성이 있다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비정상’ 분류되는 많은 경우들을 정하는 것은 누구이며, 그럼으로써 우리가 잃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소설은 뜻밖의 전개로 나를 놀래켰지만, 시종일관 주인공을 응원하게 된다.
많은 비정상에 걸쳐져있는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 대부분의 경우들이 바로, 밖에서 요구하는 ‘정상성’ 때문일 것이다. 당당하게 자신을 찾아가는 주인공에게서 한 수 배워가는 시간이였다. 속도감도 있고 주인공의 시점도 독특해서 소설의 즐거움을 찾는 이들에게도 적극 추천하고 싶다.
_사고는 일어난다. 어머니의 친구 실리아는 사고들 대부분은 실제로 사고가 아니라고, 누군가 멍청한 짓을 해서 일어나지만, 언제나 멍청한 짓을 한 사람이 다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내 자폐증은 사고였지만, 자폐인인 내가 무엇을 하느냐는 내게 달린 일이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대체로 이렇게 생각한다. 가끔은, 확신이 들지 않는다._
*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는 후기입니다. 스포일러가 싫으신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 주세요.
와.. 정말 너무 멋진 작품이에요!! 읽는 내내 어떻게 이렇게 자폐인의 시선으로 그의 세상을 그려낼 수 있는지 감탄에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습니다. 초반의 도입부부터 전개, 결말까지 독자에게 정말 끊임없이 '정상과 비정상'에 대해 생각을 하게 해요. 막 엄청난 과학 기술이 있는 미래 배경이 아니라서 SF라는 걸 잊어버리기도 하는데, 아직은 없는 특정한 기술을 통해 어떤 존재의 영속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정말 훌륭한 SF 소설입니다.
'글'이라는 형식이 아니라면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은 요소가 곳곳에 있습니다. 만약 이게 영상 매체였다면, 자폐인들끼리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언어를 통하지 않고 교류하는 부분을 표현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각자의 규칙과 리듬을 존중하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자연스럽게 이해합니다. 우리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방식으로요. 머릿 속에서 잘못된 음악이 떠올라 운전을 하기 어렵다든가, 지금 현재 필요한 음악이 몸에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 체육관에서 뜀뛰기가 필요하다든가, 언어가 아니라 패턴과 규칙으로 대화한다든가, 쿠션어나 인사 치레 같은 것으로 서로에게 '해석'이 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요소들은 영상 매체로 가면 나레이션이 아닌 이상 처리하기가 굉장히 힘들 것 같아요. 글이기 때문에, 글이라서, 온전히 이해되는 지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작가가 자폐증이 있는 아들을 키웠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정말 자폐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 존중을 갖고 있구나 하는 게 곳곳에서 느껴져요. 자폐증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지켜야 하지만, 자폐증이 없는 사람은 지키지 않는 수많은 예의와 규칙에 관한 내용을 읽고 있으면 그게 너무 끔찍하게 느껴지거든요. 예를 들어 주인공인 루는 누군가에게 나쁜 일이 있어났을 때 "괜찮아?"라든가 "유감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꼭 해야 한다고 교육받았는데, 정작 루가 나쁜 일을 당했을 때 그의 상사는 빈말로라도 그런 말을 하지 않고 그래도 괜찮습니다. 왜냐면 그는 자폐증 환자가 아니고, 그게 본인을 낙인 찍는 데 사용되지 않기 떄문이죠. 하지만 자폐증이 있는 사람은, 그게 뭐가 됐든, 사람들은 모든 특성을 자폐증으로 연결시키고, 한 번 찍힌 낙인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곳곳에서 그런 부당함이 느껴질 때마다, 정작 루는 분개하지 않고 다만 이해하기 어려워할 뿐인데 저는 굉장히 분개하게 되더라고요. 마치 루를 사랑하는 톰이나 루시아, 마저리처럼요.
작품을 읽을수록 루라는 사람이 점점 더 좋아졌기 때문에, 결말 부분이 너무 슬펐습니다. 저는 사실 다른 사람은 다 치료를 선택해도 루만은 치료를 선택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남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제 예상과 다른 길을 가고.. 심지어 루의 경우는 그게 꽤 잘 풀린 케이스라고 보이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은 거예요. 제가 톰이라도 된 것처럼 슬펐습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 아닌 거죠. 심지어 루 본인조차도 '예전의 루'라고 표현을 하잖아요. 누군가에게서 하나의 정체성을 떼어낸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거라는 게 너무 분명하게 보여요. 물론 '지금의 루'는 훨씬 더 만족하고 행복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예전의 루' 역시 만족하고 행복해진 걸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괜히 가슴이 아프고 속상합니다. 제 인생이 아니지만, 제가 사랑한 누군가의 인생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요ㅠ
중간중간 오타가 있습니다. 초반에는 귀찮아서 그냥 넘겼는데, 중후반부에 가도 몇 개 있더라고요. 203페이지 셋째 줄 "형을 돕고 시죠"는 싶죠로 바뀌어야 하고, 453페이지 밑에서 열번째 줄 "너에게 대단한 가회군"은 기회군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 앞에도 두세 개 정도 오타가 있었는데 페이지 수를 안 적어놨더니 다시 찾기가 힘드네요.
읽는 내내 제가 얼마나 자폐증이라는 증세에 대해 무지한지, 정상이라는 사람들이 비정상이라는 사람들에 비해 얼마나 폭력적이고 일방적인지, 대부분의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꼭 흠결이나 어둠으로 치부되어야 하는 것인지, 계속 생각하게 되는 작품입니다. 곱씹을수록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책을 덮고 나서도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요! 작가가 노인을 주인공으로 썼다는 다른 작품도 꼭 찾아서 읽어 보고 싶어졌어요. 강추합니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