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건강염려증, 건강정보, 건강식품, 신비한 완치체험 등등을 믿지 않는 지라 ‘아프면 의료면허가 있는 의사가 진료하고 치료하는 병원에 간다’는 질환에 관한 나의 유일한 상식이고 태도이고 해법이다. 판데믹 시절 백신 개발에 대한 어려움과 과정이 자세히 보도되는 미디어 상황을 보면서 나는 이제야 온갖 의학 미신들이 사멸하고 의학과학적 사고방식이 득세할 것이란 기대를 했다. 내가 기대하는 것이 기대대로 잘 구현된 사례가 드물다는 불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현 상황이 어떤지는 다들 아시니까 구구절절 보고는 넘어간다.
그러니 내가 보는 세상은 의학과학을 신뢰하는 세상과 그렇지 않은 세상이었다. 그리고 이 책을 만나 일부러 한 짓은 아니지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염두에 두지 못한 세상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우고 배운다. ‘아프면 병원에 간다’는 상식을 따를 수 없는 이들. 병원에 도착하지 못하는 아픔. 통증보다 더 어렵고 힘든 병원 가는 여정. 열 장도 못 읽고 일단 조금 울었다. 반성과 감동과 안타까움과 속상함과 무심함과 안도와 기타 등등이 섞인 눈물이 났다.
“목 디스크로 팔이 저린 김 할머니의 침실에서 너무 낮은 베개를 보았을 때, 허리 디스크로 다리를 들 수조차 없던 박 할아버지가 앉은뱅이 밥상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식사하는 걸 보았을 때, 무릎 관절염으로 오전에 통증주사를 맞고 온 송 할머니가 쪼그려 앉아 방에 걸레질하는 걸 보았을 때.”
아주 오래전 진폐증으로 병원을 오는 광부들을 치료해주던 의사가 똑같은 병이 재발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환자들을 돌려보내면서 약을 처방해주기만 하는 자신에 대해, 의료방식의 한계에 대해 무척 고민하고 괴로워하던 일도 떠올랐다. 한 개인이 괴로워하는 것 말고 뭘 더할 수 없게 두는 사회가 함께 원망스러웠다.
“시내에서 멀어질수록 방과 방의 경계선이 점점 사라졌다. 여기가 안방인지 부엌인지 거실인지 알 수 없었다. 먹다 남은 찬거리와 음식들이 펼쳐놓은 이부자리 옆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다가 집과 집 아닌 것의 경계선도 점점 사라졌다. 멀리서 보면 집인데 가까이서 보니 움막이었던 곳도 있었고 컨테이너에 살고 있는 분들도 만났다.”
“돈 없는 환자에 돈 없는 병원.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나는 내게 물었다. 만약 중환자실 입원 기간이 길어져서 입원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 감당할 수 있는가. 자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수술을 못할 것 같다고 할머니께 말씀드릴 용기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600회가 넘는 왕진을 통해 한국에서 남의 집을 가장 많이 드나든 의사 중 하나’가 된 저자가 왕진만이 아니라 자신의 성찰을 이렇게 56편의 글로 만들어 주었다. 의사가 아픈 사람 만난 이야기일 뿐인데 56번 울컥한다.
“진료실에서 나는 환자와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질환과 마주한다. (...) 정체를 밝히는 데 성공하는 일이 대부분이고 간혹 실패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실패에서 ‘사람’을 궁금해하지는 않는다. 궁금해할 여력도 없다. 진료실이라는 창백한 멸균 공간에 환자가 들어올 때 그는 자신의 맥락을 모두 버리고 들어온다. (...) 모든 것이 마술처럼 사라지고 오직 한 가지, ‘증상’만 남는다.”
“아마도 할아버지를 위한 20분 진료가 허락되지 않았을 대학병원은 약 부작용을 약으로 치료하려 했던 것 같다. 지금은 실력 없는 의사보다도 시간 없는 의사가 더 많다. 하지만 세상에는 나처럼 시간이 많은 의사도 필요하다.”
여력이 없다는 글이 핵심이다. 진료대기표를 볼 때마다 절감하는 문제이다. 보호자로 진료실 문 밖에 앉아 나는 진료실 안의 풍경에 난감한 기분이 들 때도 여러 번이었다. 의도하지 않아도 진료 시간에 대기명수를 보면 일인당 배정된 시간 계산이 되기 때문이다. 꼼짝 못하고 할당량을 채워야 하는 여타의 직장인과 다를 바 없는 의사들의 근무환경은 모두의 처지를 안타깝고 불편하게 한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나서야 장의사처럼 나타나서 사망 선고를 하고 가버렸다는 전공의. 그는 결국 그런 수련 과정을 통해 무엇을 체득하게 될까.”
가족 친지 중 의료인이 세 명이다. 심장 외과와 응급 의학 분야이니 소위 상대적으로 편할 수도 있다는 분야도 아니다. 보고 들은 일들로 짐작하건대 20살이 되자마자 의학서적을 독파하는 방식으로 학습하고 전문의가 될 때까지 테스트를 치러야하는, 소위 교양과정조차 허락하지 않는 교육시스템은 옳지 않다. 30살이 훌쩍 넘어 어느 날 ‘직업 이외에 내가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지, 휴가는 어떻게 보내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상담전화를 받은 적도 있다.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생각해보라는 말 이외에 해줄 말이 없어 몹시 난감하고 마음이 아팠다.
“아무런 접촉이 일어나지 않는 세계 속에 갇혀서 오직 자신의 욕망, 자신의 고민만 들여다보는 사람. 그것이 내가 있었던 의사들의 세계다. 진료실은 의사를 자폐적 세계에 가둔다. 타인의 고통에 누구보다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누구보다 둔감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에 가능해진다. (...) 진료실이란 공간은 단순히 환자를 증상의 덩어리로 보게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사로 하여금 환자들의 삶에 눈을 감게 만드는 눈가리개 역할도 한다.”
현직 의사로서 저자가 제안하는 두 가지 해법을 소개한다. 첫째, ‘의사들의 왕진 제도화.’ 왕진 수가를 현실화하고, 왕진 주체를 공공의료 영역으로 바꾼다. 방문진료 전담 센터를 만들고 전문 인력을 양성한다. 둘째, ‘고령층의 정치세력화.’ 일상적인 요구를 정치화할 수 있는 어르신 정당이 절실하다.
“대학병원에 인턴 수급이 되지 않았을 때 어떤 파국적 상황이 벌어지는지 누구보다도 의대생들이 잘 알고 있다. 의대생들이 승리를 자신했던 것은 그들 스스로, 의료가 공공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 모두가 의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의사들에게 힘이 생기는 것이다. 정부가 의사들에게 군 입대를 공중보건의로 대체할 수 있게 허용한 것도, 의대생들이 의사고시를 다시 볼 수 있는 것도 공공의료에서 일할 단 한 명의 의사가 아쉽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부당하게 부과되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온갖 사회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는 가족 간병과 관련된 제안을 소개한다. 가족의 간병을 묵인하고 방치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없이 비겁하고 비열한 사회이다. 부정적 결과로 발생한 사건을 두고 가족애니 효도니 그 따위 수준의 망발은 부디 누구라도 삼가길 바란다.
가족들에게 간병하지 않을 자유를 주지 못하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폭력적인 사회다.
우리에겐 가족을 간병하지 않을 권리가 필요하다.
그 권리를 내가 선택할 수 있도록 사회가 여건을 보장해야 한다.
내가 그를 간병하지 않더라도 사회가 그를 간병해줘야 한다.
만약 내가 간병을 선택한다면
사회가 치러야 할 공동체의 비용을 아무런 조건이나 장벽 없이 나에게 지불해야 한다.
그래야만 선택할 수 있다.
간병 받는 사람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인이나 가족의 '간병하지 않을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간병을 거부할 자유는 간병할 자유, 간병 받을 자유와 같은 말이다.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에서 치료받고 병원에서 죽어가는 삶, 이 중요한 공간과 시스템에 대한 치열하고 심도 있고 실용적이고 선한 의도를 가진, 무엇보다 ‘누구의 희생도 담보하지 않는’ 방식의 논의와 대안과 정책을 기대한다.
“나는 무관하다 말하는 순간 답은 없어진다. (...) 나는 늘 믿어왔다. 한 사람의 이웃이 국가보다 중요하다고. 그렇다면 나는 왜 그 한 사람의 이웃이 되면 안 되는가. 그런 질문들이 길을 만들어줄 것이라 믿으며 나는 다시 왕진가방을 챙긴다.”
지인의 추천으로 구매하게 된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 입니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당연히 병원에 가야한다고 알고 간다.
그게 상식이다.
그러나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에 가는 것이 아파서 병원에서 진찰 받는 것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있다.
교통상의 여건이든 경제적이든 소외된 이들이다...
56가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낫게하는 비법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소통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전공의 시절부터 지금까지 600회가 넘는 왕진을 통해
한국에서 남의 집을 가장 많이 드나든 의사 중 하나가 된 저자는
치열한 성찰과 따뜻한 시선으로 써 내려간 56편의 글을 통해 말한다.
진료실에서 마주하는 것은 ‘질병’이지만 왕진에서 마주하는 것은 ‘사람’이라고.
책 표지에 보면 산골마을로 들어가는 왕진가방을 든 남자가 보인다.책을 지은 양창모 선생님일 것이다. 그가 들어가는 마을은 어떤 마을일까?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 에세이는 우리나라의 의료환경을 고찰하는 것과 동시에, 한 사람의 의사로서 '의사란 누구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개인의 흔적이었다.탁상공론에 머물기보다 현장에서 일하는 활동가의 기록이며 공동체와 인간의 따스함을 소망하는 동네 주민의 소망이었다. 제대로 된 의료교육과 서비스를 받지 못해서, 함께 돕는 공동체가 부족해서질병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을 받을 수 없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읽는다고 생각했을 때는 너무 힘든 이야기, 너무 슬픈 이야기일까봐 솔직히 두려웠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오히려 마음에 밝은 희망이 생겼다면 과한 표현일까. 상황을 '진단'하고 '설명'하는것에서 그치는 책이었다면 해결할 수 없는 사회의 큰 어둠을 마주한 것 같아 독서 후 무기력한 느낌만이 남았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실제로 활동하는 사람이 만드는 작은 기적들, 위로와 웃음들, 따스함이 곳곳에 담겨있었다. 그래서 독서를 마치고 나서도 막연함에 마음이 무거워지는게 아니라 나도 함께 동참하고 싶다는, 나도 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작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살아가면서 의사를 한 번도 마주하지 않고 살기 힘들다.
그리고 내가 여태 만났던 의사들은 모두 병원, 그 의사의 진료실에서였기 때문에 환자를 만나기 위해 진료실을 떠났다는 책 설명이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에 서평단을 신청해보았고 당첨되어서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볼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저번 주 병원에서 차례를 기다릴 때 엄마께서는 예전에 비해서 의사와 면담할 시간이 늘어났다는 그런 말씀이 떠오른, 이번 주 1분도 채 안되는 진료를 받고 진료실을 나온 내가 생각났다.
짧은 시간동안 환자를 판단해서 처방을 내리는 의사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이었다.
자신이 마주하는 환자들의 상황을 더 자세히 알고 더 잘 치료하기 위해 진료실을 떠난 의사는 환자의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모를 때는 보이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직접 마주하고 난 뒤부터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며 나에게 전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듣려주는 책을 계속 읽어가면서 계속 몇 년 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재활을 위해서 오는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부터 꼼꼼하게 살펴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수업 때 흘러가듯 나온 이야기였고 그 때는 별 생각 없이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던 것도..)
재활이 그렇게 환자를 이해하며 치료하는 것처럼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이 환자를 살피는 것이라 이해했다.
물론 재활을 받는 환자보다 의사가 마주하게 되는 환자가 더 많기 때문에 모든 환자를 세세하게 살피는 것은 힘들어도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계셔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병원을 찾아가기 힘든 환자가 줄어들어 선생님께서 진료실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시간이 다가왔으면 좋겠다.
나는 항상 의사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에 대한 동경도 있고 그들이 만난 환자에 대한 이야기들도 궁금했다. 이 책의 저자 양창모 의사는 솔직히 말하면 많은이들이 동경할만한 의사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 듯 하다. 하지만 그 자신만큼은 매우 그다운 삶,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듯 하다.
이 책은 양창모 의사가 강원도에서 왕진의사로 일하면서 만난 환자들 이야기와 그들을 통해 인생을 배운 이야기들, 그가 생각하는 인생, 그리고 그가 소리내어 말한 내용이 담겨있다. 그는 돈만 쫓는 의사가 아니라 혼자보다는 우리 다같이 잘 살기를 추구하고, 또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소리낼 줄 아는 의사였다. 아파트 동대표로 나가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의사결정에 참여했고, 골프장 건설 반대를 위해 천막농성에도 참여했고 무엇보다 의사를 만나러 가지 못하는 의료 취약계층을 위해 본인의 시간을 들여 직접 찾아가는 왕진 의사이다.
밑줄 그은 곳이 너무 많아 옮겨적다가 포기했다. 의사선생님께서 글도 이렇게 잘 쓰시다니..
제일 인상 깊은 문장 2개
p.110 자꾸 내 밥그릇에 밥을 많이 쌓으려 하지 말고 함께 밥 먹을 사람을 만들자. 힘은 거기에서 나오고 미래는 그로 인해 바뀔 것이다.
p.111 세상의 중심은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고통받는 사람'이다. 쓰러져가는 택배 노동자들의 삶이 변할때 우리 삶의 속도가 달라질 수 밖에 없듯이 고통의 중심은 이 사회에 필요한 변화의 중심이 될 것이다. 더 젊고 그래서 덜 위험하고 더 자유로운 세대가 어르신들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모두 운이 좋으면 노인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나라 이야기이길 바랐다. 아니면 아주 먼 옛날 이야기이길 바랐다. 지금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니. 아프면 바로 병원을 갈 수 있는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의료취약계층을 생각할 수 있을까.
저자는 돈을 쫓지도 않고 삶의 정도를 지키며 사회를 위해서도 할말을 다 하는 정의로운 의사다. 자신의 종교도 표현하고 현정부에 대한 의견도 표현하고 솔직한 사람인 것 같다. 나는 그의 이야기가 좀 더 각색되어 드라마화 되어 많은 사람들이 왕진의사에 대해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생각도 해봤다.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알게되었고 나의 시선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옮겨진 것 같다. 이 책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봤으면 좋겠다. 의사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을 포함한 우리 국민 모두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어떻게 하면 이 책을 사람들이 많이 읽을까. 그런 고민을 해보았다.
우리도 언젠가 운이좋으면 노인이 된다.
왕진의사 양창모가 전하는 가장 먼 곳의 통증과 아픔에 대한 이야기다.
21세기에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게 맞는지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내가 얼마나 좁은 세계에 갇혀 있는지 새삼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없는' 이유 때문에 기본적인 진료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찾아 나선 왕진의사가 전하는 이야기는 자꾸만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한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면서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하지만 당연하지 않다는
현실을 알게 되었다. 조금만 불편해도 병원을 찾았고 내 아픔에 더 귀를 기울여 주길 기대했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불만 가득한 마음으로 내가 내는 건강보험료만 떠올렸다.
왕진의사가 찾아가야만 했던 환자들은 이런 내 모습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진료실 너머의 기록은 가난과 소외의 기록이었고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가야 할 커다란 문제를
던져주었다. 의사 개인으로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왕진을 통해 병이 아닌 사람을 마주할 수 있었고 누군가의 고통이 그가 살아온 삶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또한 민간 의료와 공공의료의 문제점과 의료의 공공성 등 의사라는 직업의 본질적인 역할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화두를 던진다.
그의 이야기는 기존 '의사'에게 가지고 있던 불편한 시선을 한껏 누그러뜨려준다.
세상에 이런 의사도 있구나, 이런 의사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갖게 만든다.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돈과 교환해야 하는 현실을 거부하고 일에 대한 가치를 사람에게서 찾으려 하는 왕진의사의 이야기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중요한 진실을 다시 일깨워준다.
사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세월의 무게를 짊어진 사람들을 찾아가서 마주하고
그들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고단한 삶의 흔적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는 왕진의사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이제라도 세상과 이웃에 관심을 가지려 한다.
돈이 없어서 고통을 참아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도움의 손길을 주기 위해
우리 사회 모두가 고민하고 좋은 해법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
예전부터 우리나라 지방의 의료사각지대에 대한 문제를 여러 매체에서 보고 들어 알고 있었는데 그 생생한 현실을 텍스트로 만날 수 있었던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이런 문제를 사회학적 접근이나 르포 방식으로 풀어낸 책이었다면 흥미가 떨어져 쉽게 집어들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대신에 이 책은 요즘도 그런 직업이 있었나 싶은 왕진의사의 에세이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 책이다. 솔직담백, 좌충우돌, 왕진의사의 인생과 일상에서의 경험, 생각, 느낌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 보건의료 정책에 대해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저자는 전공의 시절부터 지금까지 600회가 넘는 왕진을 통해 한국에서 남의 집을 가장 많이 드나든 의사 중 하나라고 한다. 책의 구성은 그런 그의 이야기 56편이 세개의 큰 챕터로 분류되어 있는데 1부 찾아가야 보이는 세계에서는 저자가 왕진의사를 하며 인상적이었던 여러 에피소드를 읽을 수 있다. 흥미로운 이야기면서도 사연을 읽다보면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기도 했었다.
2부 어른거리는 얼굴들에서는 왕진 의사가 되기전 일반 병원에서 겪고 생각했던 고민에 대해 얘기한다. ‘의사 놈들’과 ‘의사 선생님’ 사이의 후회와 반성들에 독자입장이지만 저자와 같이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2분마다 환자가 들어오는 곳에서 정성 어린 진료를 하려면 인공지능 수준의 판단력과 부처님 수준의 마인드 컨트롤이 동시에 가능해야 한다”며 진료실 밖에 환자들이 밀려 있을 때면 당장 앞에 있는 환자를 빨리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며 그는 괴로워한다.
나는 ‘의사 놈들’이 될 수도 있고 ‘의사 선생님’이 되기도 한다. 아무런 접촉이 일어나지 않는 세계 속에 갇혀서 오직 자신의 욕망, 자신의 고민만 들여다보는 사람. 그것이 내가 있었던 의사들의 세계다. 진료실은 의사를 자폐적 세계에 가둔다. 타인의 고통에 누구보다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누구보다 둔감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에 가능해진다. 왕진을 갈수록 의사들의 진료실을 혁파해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진료실이란 공간은 단순히 환자를 증상의 덩어리로 보게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사로 하여금 환자들의 삶에 눈을 감게 만드는 눈가리개 역할도 한다.
표제이기도 한 마지막 장 ‘우리를 마중하는 세계’에서는 이런 여러 이야기들을 사회적 담론으로 끌어낸다. 사회적 고통에 대한 태도는 그 사회 자체를 보여주는 지표이고 아픈 사람이 움직일 때 통증이 일어나는 부위에 온 신경을 집중하듯이 사회가 변화의 방향을 정할 때는 그 사회의 가장 아픈 곳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말 우리 사회에 일침을 날리는 명문장이었다. 것이다. 작년에 한창 첨예했던 논쟁인 의사 파업과 의대생들의 고시 거부에 대해 저자는 ‘밥그릇 싸움’ 이후의 시간에 대해 묻는다.
사실 이 책은 이런 복잡한 설명이 필요없다. 아주 아름답고 멋진사람의 이야기이고 우리 사회가 귀담아 들어야 될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