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쫓던 젊은 의사가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신음하는 오지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펼치면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남부러울 게 없는 것 같은 저자는 자신의 어머니를 한 평생 괴롭혀왔던 우울증이라는 높은 장벽 앞에서 서서히 무너져 갔다. 운명 같은 <국경없는 의사회>를 통해 아르메니아, 레바논, 시에라리온에서 극심한 빈곤과 다재내성 결핵, 에볼라 바이러스로 사투를 벌이고 있는 현지인들에게 의료봉사활동을 하는 동안 수많은 죽음을 마주하며 그동안 저자를 괴롭혀왔던 '왜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그가 찾은 답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었고 그것만으로 살아갈 이유가 충분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의 삶에서 소외되었던 아내와 큰 아들에게 이 책을 헌사함으로써 그 미안함을 대신하고, 저자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아들에게 편지로써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아내와 성인이 된 큰 아들은 이 글로써 지나온 아픔이 모두 치유되진 않겠지만 무책임하게 느꼈졌을 남편과 아버지를 마주할 수 있는 작은 품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올해 읽은 책 중 TOP5 안에 드는것 같습니다.
우울증 걸린 의사가 우울증을 극복하고자 해외 의료봉사를 나가서 현장에서 겪은 내용을 생생히 전달해 줍니다. 현지의 의사들이 얼마나 헌신적이고 열정적으로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지, 사람을 구해야 하나 원칙을 지켜야 하나 딜레마의 빠진 의사들의 결정, 현지 의료가 얼마나 열악한지 등등 현실적인 문제를 직접 맞닥뜨리는 의사의 기록입니다.
'어느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는 저자인 정상훈이 우울증을 계기로 국경없는의사회에 참여하게 되며 겪은 일들을 기록해놓은 것이다. 마치 일기처럼 당시의 상황과 느꼈던 기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서두만 봐도 우울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 수 있다. 한 때 그렇게 열정을 쏟아부었던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인간 관계는 엉망이 되며 왜 슬픈지도 모른 체, 눈물이 계속 흐른다. 부모로서 큰 기쁨이었을, 어린 자식의 존재도 그를 붙들어두지 못했다. 그는 살 이유를 찾기 위해, 또 죽음을 가까이 접하기 위해 국경없는의사회에 뛰어들었다.
마음이 이렇게 암울한 순간에도 몸을 움직여 최선을 다해 살려고 한 그가 대단하면서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동시에 아무리 의사라지만 날것의 죽음이 있는 곳에 가는 게 우려스럽기도 했다.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하면서 그가 사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의료봉사를 위해 도착한 곳은 그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한국에서처럼 의료시설과 기술이 완비된 것도 아니었고 인원과 시간은 부족하기만 했다. 또 그가 사람을 살리려 최선을 다한 결과가 나쁜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의사로서 베태랑이었지만 그 곳에서 그는 아직 새내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이 상황에서 아픈 그의 마음이 더 상처를 받진 않을까 걱정의 연속이었다.
당연하겠지만, 국경없는의사회는 만능단체가 아니다. 나는 TV에서 얼핏 본 것만으로 막연히 대단하다고만 느꼈지 그 내부가 어떤지는 관심도 없었고 더 알려고 하지 않았다. 또 의료봉사를 위해 모인 의사들이 무슨 마음으로 그 곳에 오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였다. '어느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를 통해 우울증이 무엇인지, 국경없는 의사회가 어떤 곳인지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책을 읽으면서 혹 같은 마음의 병을 앓게된다면 섣부른 응원보다는 이 책처럼 공감을 주는 것이 더 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 주위에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이가 있다면, 이 책이 잔잔한 위로가 되길 바라며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의사’와 ‘우울증’, 대개 함께 놓여 있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받을 것이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쩌면 이러한 편견과 고정관념 때문에 더욱 밝히기 힘들었을 것이다. 의사라는 좋은 직업에 배부른 소리라는 말이 따라붙을 테니 말이다. 의사 정상훈은 2년간 지독한 우울증을 앓았고, 치료를 통해 점차 회복되는 듯했지만 끝내 ‘삶’과 ‘죽음’이라는 도저히 정의 내릴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멈춰 서야 했다. 그렇게 죽음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국경없는의사회’의 해외구호활동가로서 죽음과 가까운, 죽음이 가득한 아르메니아, 레바논, 시에라리온으로 떠나게 된다. 『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는 바로 ‘지독한 우울증을 앓던 한 의사가 수많은 죽음 앞에서 발견한 삶의 의미’를 담은 에세이다.
“나는 살아서 이곳에 와야만 했다. 나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이끌린 것이다.”
“의사 생활을 하면서 앓다가 죽는 환자들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병원에서 수련을 받을 때는 시키는 대로 하면 되었다. (중략) 황량한 아르메니아 북부는 상황이 달랐다. 나는 직감했다. 이곳에서 죽음이 장식을 벗고 민얼굴을 드러내리라. 그것이 나는 두려웠다.”
또한 이 책은 저자의 개인적인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어머니와의 어긋난 관계,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 그 모든 해답이 그의 여정에 속해 있다. 처음과 마지막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마치 독자들에게 건네고 있는 이야기 같기도 했다. “나는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이유도 모른 채 산다면 우리가 사는 것일까? 난 죽음을 만나 나를 부른 이유를 물어야 했어. 아빠를 위해 부디 이 책을 끝까지 읽어봐 주겠니?” 그의 편지를 읽으며, 나는 이 책을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다.
“아르메니아에서 만난 어떤 죽음은 자연스럽지도 평화롭지도 않았다. 죽음의 부조리한 민낯은 슬피 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따뜻하고 짭짤한 그 무엇으로 감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환자는 더 강력한 두려움 앞에서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다.”
“트리폴리에서 죽음은 삶과 너무 가까웠다. 그래서 더욱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 어디에서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세상. 두려워할 틈도, 살겠다는 발버둥도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안타까운 사연과 감동적인 이야기가 모두 사치처럼 느껴졌다. 죽음은 그저 시리아 내전으로 이미 목숨을 잃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로 건조하게 기록되었다.”
삶과 죽음. 인간은 삶을 살아가지만, 언제나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일어난 일이고 일어날 일이다. 아르메니아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를 보며 “그는 삶에 대한 애착과 고통이 주는 환멸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 같았다”는 저자의 말처럼, 어쩌면 삶이란 것이 늘 그러한 것 같다. 어떤 날에는 작은 것에 기쁨을 느끼고 행복하면서도, 또 어떤 날에는 삶의 의미를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매일이 끔찍하고 슬프고 불행하기만 하다. 늘 그렇게 사이에서 ‘방황’을 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죽음을 목전에 두거나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피하고 나면, 여실히 삶의 소중함을, 가치를 느낀다. 결국 우리는 가까이 이르러서야 소중함을 깨닫는다. 아끼는 것(또는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현실이 되면.
저자가 어긋나 있던 어머니와의 관계를 깨달은 것 역시 마찬가지다. “나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했던 사람에게 이제 시간이 없었다. 나는 엄마와 친해져야 한다. 엄마가 곧 잊힐 거리를 익히듯이. 희망은 왜 절망과 함께 오는지, 나는 알 것 같았다. 내가 삶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삶은 희망도 절망도 아니다.” 또 죽음이 만연한 나라인 아르메니아, 레바논, 시에라리온에서 피하지 않고 죽음을 마주하고 나서야 다시금 삶을 이야기하고 의미를 찾게 된 것처럼 말이다. 저자의 글을 읽으며 더 늦기 전에, 후회하기 전에, 나에게 묻고 싶어졌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대한민국은 굶는 것을 밥 먹듯 한 지 불과 반세기만에 너무 먹어 성인병을 걱정하는 단계로 경제적 성장을 거두었다. 한국전쟁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후 경제적으로 세계 10~12권의 부자나라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우리 국민의 근면성과 자녀 교육에 대한 열의로 이룬 일이지만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자긍심과 자부심을 가져도 이상할 게 없는 성공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이제 굶는 사람은 없으며 오히려 성인병에 대한 의사들의 경고와 경계심을 강조하는 프로그램들이 줄을 잇고 있다. 안타깝게도 북한은 아직도 굶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우리 마음대로 도움을 줄 수도 없을 정도로 문을 걸어 잠그고 있어 어떻게 해볼 방법을 찾기가 어렵다.
멀리 아프리카나 중동의 일부 국가, 아시아 남아메리카 일부 나라는 기아선상을 헤매고 있다. 하지만 직접 보고 듣진 못하고 가끔씩 뉴스나 TV를 통해 알게 되니 실감도 덜하다. UN 및 민간 구호단체 등의 꾸준한 활동으로 많은 사람이 기아 해방이나 치료 구호활동을 펴고 있지만 돈이나 인력의 한계로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가끔씩 전해 듣는다. 구호활동가들이 현지를 다녀와 전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기아나 치료불가 환자 등 믿기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 '지구촌 한식구'는 헛된 구호에 불과할 뿐이다.
민간구호단체 증 '국경없는 의사회'의 활동 일부를 최근 TV를 통해 본 기억이 난다. 현장에 참여한 의사 중 한 분이 TV에 나와 후원을 부탁하는 공익광고를 통해서다. 이 책 『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의 저자 정상훈은 대한민국 의사다. 그리고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으로 구호활동에 참여한 분이기도 하다. 세상의 어렵고 아픈 사람들에게 무한 봉사를 한 분이 한때 지독한 우울증을 앓았다니 믿기지 않았다. 의사가 세상의 밑바닥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살리고자 고군분투하며 구호활동을 펼치는 것은 여간 결정하기 어려운 일의 하나일 터다.
의사의 '사'자를 '스승 사(師)'를 쓰는 이유다. 의사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지위로나 존경 받는 삶이 보장된 직업이다. 국내에서 환자 치료만 해도 풍요로운 삶이 보장돼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역만리 떨어진 가난한 나라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직접 국내의 풍요로운 삶을 버리고 구호 현장 활동에 뛰어들었을까. 우울증을 치료하러 갔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려운 결정을 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다. 의사 정상훈은 실천했고, 그 일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었다고 술회한다.
이 책은 돈 잘 버는 의사보다 세상을 고치는 의사가 되고자 치열하고 굳건하게 살아가던 의사 정상훈이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담하게 그려낸 에세이다. 책에 따르면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우울증이라는 병이 찾아왔다. 2년에 걸친 치료로 우울증에서 점차 회복되었지만 그의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질문이 있었다.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질문은 허공을 헤맸고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죽음에 이끌리던 그는 국경없는의사회 해외구호활동가가 되어 지구 반대편 죽음이 만연한 나라들로 향했다.
서아시아 빈곤국인 아르메니아, 내전이 한창이던 레바논, 치사율이 50~90%까지 치솟은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한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까지.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다 ‘한국인 최초의 에볼라 의사’가 되어 돌아온 그가 세상의 온갖 아픔을 문자 안에 꾹꾹 눌러 담았다. 이 에세이에는 밑바닥 삶의 황량함, 미화할 수 없는 죽음의 민낯을 절제된 문체로 일관되게 그리고 있다. 한 의사가 비로소 자기 내면의 아픔과 타인의 아픔을 껴안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담았다. 죽음 속에서 분투한 시간을 지나 저자는 스스로 떠올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이제 우리 각자가 삶의 의미를 물을 시간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렇게 썼다. 의사도 우울증에 걸릴까?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의사도 사람일까?’처럼 어리석은 질문인 줄 안다. 하지만 의사가 우울증에 걸릴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이 의사 정상훈에게 쏟아진 질문이었다. “서울대 나온 의사가 우울할 일이 뭐가 있니?”(p. 13) 날카로우면서도 강직한 눈매, 단호하면서도 분명한 발음과 중후한 목소리, 꼿꼿한 자세와 절제된 몸짓, 그는 우울증 환자의 이미지와 어느 하나 닮은 구석이 없다. 그런 그가 어느 순간부터 ‘죽음’을 떠올리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유도 모른 채 살고 싶지 않았던 그는 어느 날 문득 죽음의 부름에 응답하기로 했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죽음이 만연한 아르메니아, 레바논, 시에라리온의 세 나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이 시작된다.
책에 따르면 의사가 처음 도착한 나라는 에이즈보다도 무섭다는 다재내성 결핵이 들끓는 아르메니아였다. 환자를 구하러 간 그곳에서 그가 처음 맡은 임무는 아이러니하게도 환자에게 ‘치료 실패’를 통보하는 것이었다. 치료 실패란 암 같은 위중한 질병을 앓고 있어서 치료 효과가 없는 환자들의 치료를 중지하는 것이라고 한다. 의료 자원이 부족한 가난한 나라의 의료진 앞에 놓인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그는 이렇게 세상 밑바닥 죽음들을 마주한다. 생계 때문에 결핵을 치료하지 못한 채 이주노동을 떠나는 노동자, 가부장 사회의 시선이 두려워 치료를 포기한 아기 엄마, 돈 벌러 떠난 아들을 기다리다 끝내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 국가에 평생 헌신한 군인의 임종 전 고통조차 방치하는 나라…. 치료 중단, 치료 실패와 싸우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환자들을 살리고자 고군분투하는 동안 그가 마주한 것은 죽음이라는 가면을 쓴 불평등한 세계의 민낯이었다.
이어서 그는 시리아 난민이 흘러들고 내전의 화염에 휩싸인 전쟁터 한복판으로 향한다.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총격전을 벌이는 이곳 레바논을 그는 '갈라진 세계'라고 표현한다. 지독한 위생 상태로 굶주리는 난민들, 고작 20킬로그램인 열두 살 아이, 총탄이 몸을 관통한 환자들…. 갈라진 틈새로 서로에게 비난과 침묵을 쏘아대는 세계에서, 저자는 때로 무력감을 느끼고 때로 분노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나. 나는 정말 살리고 있는가.’ 타인을 진정으로 돕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까? 죽음 속을 뛰어다니는 저자의 고민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그가 향한 곳은 ‘죽음의 병’이라 불리는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한 아프리카의 서쪽 끝 시에라리온이었다. 치사율이 90%까지 치솟았던 이 전염병은 백신도 치료약도 없었다. 식구 모두가 한방살이를 하고 천막을 세워 병원으로 쓰는 이곳에서는 ‘거리 두기’조차 요원했다. 환자 격리와 수액 처방이 의료 행위의 전부인 현실 속에서 저자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 앞에 무거운 마음으로 선다. 자신을 ‘엉클’이라고 부르며 애타게 찾는 소년과 에볼라에 걸린 두 살배기 아이를 치료하는 동안, 그는 단 하나만 떠올렸다. 바로 ‘살리고 싶다’는 간절한 외침이었다. 한때 죽음으로 가득했던 그의 마음은 이제 끊임없이 환자가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외치고 있었다.
아르메니아와 레바논, 시에라리온에서 저자는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문제로 신음하는 세계의 반쪽과 마주한다. 살리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만으로는 살릴 수 없는 애타는 현실 앞에서 그는 각각의 환자들이 가진 아픔과 가난을 쉽게 연민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이 가진 아픔의 다양한 얼굴을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자세히 살피고, 그 아픔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예민하고 집요하게 살펴나간다. 저자의 깊은 고민과 성찰은 타인을 향한 피상적인 연민이 얼마나 위험한지, 과연 쉬이 연민하는 마음으로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우리에게 날카로운 물음을 던진다.
우울증을 앓던 때 저자는 ‘분노’와 ‘슬픔’의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리하여 사회구조적 문제로 치료를 포기하고 거부한 환자들, 의료 시스템과 자원의 부족으로 치료에 실패한 환자를 맞닥뜨리며 쉽게 분노하고 깊은 무력감을 느끼고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다양한 아픔의 얼굴들을 가슴에 묻고 난 후, 그는 비로소 쉬이 분노에 빠지거나 무기력해지지 않게 되었다. 태어난 지 고작 두 해 지나 숨을 거둔 아이의 명패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운명보다 강해져야 한다”(p. 240)고. 의사 한 명이 환자를, 그리고 세상을 구하지 못한다는 자책감 때문에 죽음 앞에서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지구 반대편에서 혈혈단신이라 여겼던 그 자신도 이미 혼자가 아니었다. 동료 의료진을 믿고 의지하는 뜨거운 동료애, 내면의 아픔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차가운 의연함, 애증의 대상이었던 엄마의 아픔조차 껴안을 수 있는 강인한 용기가 자신 안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멀고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불행이 과연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저자가 비추는 세계의 아픔은 우리 곁에 공기처럼 떠도는 수많은 아픔을 그대로 비추고 있다.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이주노동자들, 코로나 바이러스에 제일 먼저 노출된 쪽방촌 주민들, 숫자로만 존재하는 전염병 사망자들은 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눈감고 있어서 보지 못하는 것일까. “아르메니아, 레바논, 시에라리온, 그리고 대한민국의 쪽방촌. 엄마의 몸과 내 마음. 그렇게 아픔은 어디에나 있었다.”(p. 257) 그는 그 아픔을 분노와 두려움 없이 마주하고 깊게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아픔이 길이 될 테니. 그의 말대로 아픔은 우울증을 앓으며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던 한 의사에게 길을 비춰주었다. 에볼라에 걸려 ‘엉클’을 찾던 소년 앞에서 그는 고백한다. “나는 살아야 했다. 살아서 이곳에 와야만 했다. 오마르가 엉클을 찾을 때, 그 앞에 있어야 했다. 기꺼이 그의 엉클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의 고통에, 살고 싶다는 열망에 응답해주어야 했다. 다행히 나는 여기에 있었다.”(p. 232)
그렇다. 죽음에 이끌린 줄 알았지만, 결국 그는 삶에 이끌린 것이다. 환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떠났지만, 아픔을 마주하는 길고긴 여정 속에서 구원받는 사람은 결국 그 자신이었다. 이 우연의 연쇄에 대한 빛나는 기록은 죽음에 이끌린 모험 속에서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며 ‘진짜 자신’을 발견하고 정체성을 회복한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를 떠올리게 한다. 이제 이 책을 마주한 우리 스스로가 각자의 답을 찾아갈 시간이다.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이 책에는 아들인 한 인간과, 친밀한 적(敵)으로서의 어머니 이야기가 저자의 긴급구호활동 경험과 평행우주처럼 장면을 교차하며 그려진다.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이 추천사에서 “한 인간이 자신의 아픈 속살을 여과 없이 드러낸 고백록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저자는 누구도 쉽게 꺼내지 못할 법한 내밀한 가족 이야기를 담담하게 써 내려간다. 부모의 갈등으로 인해 상처받았던 어린 시절, 엄마의 기대로부터 도망치고 감정을 피했던 청년 시절, 그리고 성장을 거부하며 지내온 마음속 어린아이가 변화해나가는 ‘가족 로망스’가 빈곤과 내전과 바이러스와의 전투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저자는 자신의 아픔(우울증)에서 시작해 세계의 수많은 아픔을 만난 뒤, 마침내 엄마의 아픔을 껴안게 되는 내면의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내며 리얼리티를 더한다. 이 에세이는 이런 분이 있는데 이 세상은 살 만한 가치가 충분하지 않은가?라는 독자의 물음을 이끌어낸다.
저자 : 정상훈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병원 의료관리학교실 전공의로 재직했다. 돈 잘 버는 의사보다 세상을 고치는 의사가 되고자 의료인 단체 ‘행동하는의사회’를 창립해 남다른 의사의 길을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찾아왔다. ‘우울증’이라는 병이었다. 그는 운명 앞에 좌절했고 세상을 피해 자기 안으로 깊이 침잠했다. 2년에 걸쳐 우울증에서 회복한 후,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 ‘국경없는의사회’ 해외구호활동가가 되어 지구 반대편 가난한 나라들로 향했다. 서아시아 빈곤국인 아르메니아에서 에이즈보다 무섭다는 ‘다재내성 결핵’ 환자들을 치료했고, 내전이 한창이던 레바논에서 시리아 난민을 위한 진료소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더 멀리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죽음의 병’이라 불리며 치사율이 50~90%까지 치솟은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하자 또다시 죽음이 만연한 그곳으로 가 긴급구호활동을 펼쳤다. 이 일로 ‘한국인 최초의 에볼라 의사’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그는 자주 부끄럽다고 말한다. 자신은 시에라리온에 파견된 700번째 의료인일 뿐이라고, 살린 사람보다 살리지 못한 환자가 더 많다고.
이 긴 여정을 마치고 세계의 가장 밑바닥 삶과 죽음을 껴안은 그가 집으로 돌아와 삶의 이유와 존재의 의미를 문자 안에 담았다. 지금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방방곡곡 의료 현장에서 ‘동네 의사’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동네의사의 기본소득』(2020)이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의사에게서 흔히 보는 엘리트 집단의 일원이라는 자의식도 없고, 젊은 시절 세상을 바꾸는 활동가를
꿈꿨고, 그 과정에서 좌절도 하고 우울증에 걸려 분노를 저기에게 쏟아 내기도 했으며 의사가 되면
개업을 해서 돈을 많이 볼거리는 생각이 든다는 앵커의 질문에 '저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것
같아요. 이런 활동을 하면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안도감이 저를 만족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거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저자는 아픔과 아픔이 만나면 두배의 아픔이 아니라
거기서 희망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준다.
우울증. '서울대를 나온 사람이 우울할 일이 있냐?'는 친구의 질문이 무색하리만치 그는 심란 우울증을
겪었다. 운명 앞에 좌절했고, 좌절을 스스로를 가두기 시작했으며, 세상을 피해 자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숨어 버렸다. 이때 그는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공포는 의외로 쉽게 사람에게 다가온다.
부지불식간 간에 찾아와 그대로 손을 잡아 끈다. 이 손을 놀지 못하면 그냥 죽는 것이다. 삶의 의미
조차 없기에 무기력하고 만사가 귀찮았지고 세상을 향해 공격적이 된다. 저자는 그런 우울증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 왔다. 터널은 희망이다.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기에 아무리 길어도 반드시 출구가
나온다. 양양터널이 개통 되었을 때 그 길을 지나며 '죽음'을 생각한 친구가 있다. 다행히 그 터널은
11km가 끝이다. 이렇듯 긴 터널을 지나 그는 새로운 길에 들어 선다. 그의 삶의 변화는 해외구호
활동가가 되면서 시작된다.
서아시아의 최빈곤국인 아르메니아(성경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가 마지막으로 머무른 곳인 아라라트
산이 있는 나라로 1991년 소련의 붕괴 후 독립)에서 에이즈 보다 무섭고 치사율이 높은 '다재내성
결핵'(중요한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결핵 때문에요 생기는 병으로 한웅큼의 약을 하루 두번 2년을
먹어야 치료가 가능)환자들을 치료했다. 그는 이곳에서 국립결핵병원으로 보낸 환자가 정신병동에
갇혀 있는 것을 보고 '존엄'에 대해 생각했다. 평화롭게 존엄을 지키며 죽을 수 있음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그리고 세상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단단하고 개인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곳을 깨달았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아르메니아에서 만난 어떤 죽음도 자유롭지도 평화롭지도 못하다. 심지어
죽음의 부조리한 민낯은 슬피 우는 것 조차도 허락하지 않는다'
'Ebola is real'. 2014년 '사자의 산'이라는 이름의 시에라리온에 에볼라가 창궐했을때 '국경없는 의사회'가
그곳에서 구호 활동을 한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저자도 그곳에 있었다. '몸에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는
괴질'인 에볼라는 의사들 마저도 접근을 하지 않으려 할 정도로 치사율이 높고(실제 초기 치사율은
90%였다) 내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그곳으로 가려고 하는 의사들도 적은 척박한 시에라리온에
저자는 '내가 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지 못하겠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많은
죽음과 마주하고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 보는 시간을 가진다. 그런 그는 '한국인
최초의 에볼라 의사'라는 수식을 받지만 정작 본인은 '시에라리온에 온 700번째 의사'라고 말한다. 둘다
맞는 말이다. 최초이긴 하지만 700번째이기도 하다. 어쩌면 국제구호에 관한 우리의 현주소일수도 있다.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서 죽음을 경험한 그는 이제 죽음이 아닌 '살아냄'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다. 남들이 가지 않고 남들이 걷지 않은 그 길을 먼저 걷는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큰 돈을 벌지
않아도 그의 길은 계속 될것이다. 나는 그의 길을 응원한다.
제목만 보고는 생명을 구하는 현장에서 일하는 의사와 환자의 이야기가 아닌가 했다.
하지만 자신이 의사이면서 자신의 병을 구하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살아왔던 의사가
치열한 죽음의 현장에서 비로소 자신을 바라보는 이야기였다.
국내 최고의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될만큼 영특하고 재능많은 남자였다.
하지만 그에게 찾아온 우울증은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사실 자신이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아니 인정하지 않았다.
부부싸움으로 어린 아들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부모에 대한 애정은 없었다.
도망치듯 선택했던 국경없는 의사회 활동은 많은 사람을 만나고 바쁘게 살아야 하는
보통의 의사생활보다 더 맞았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디에나 사람없는 세상은 없고
벽은 존재한다. 그 벽을 넘기위해 소통해야하고 이해해야하는데 그런면에서 그는
소질이 없는 편이었다. 그래서 더 환자들에게 집중했을지도 모른다.
과거 소련의 치하에 있던 아르메니아란 나라는 지금도 낯선 곳이다.
가난하고 특히 다제내성 결핵환자가 유독 많은 곳이었던가보다. 그러고보면 우리나라는
의료체계가 잘 되어있는 곳이고 적은 비용으로 최고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곳이라는걸
실감하게 된다. 결핵은 약을 잘 먹어야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약에 대한 내성 때문에
쉽지 않은 병이라고도 들었다. 결핵은 전염성이 강하고 특히 보수적인 아르메니아 같은
나라에서는 전염병에 걸린 환자를 멀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난이 질병을 이기지
못하게 했다. 그런 곳에서 만난 사연 많은 환자들과의 1년은 가슴아프게 다가온다.
그 곳에서 만난 자신의 엄마와 같은 나이인 기젤라를 통해 엄마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되고
서서히 다가가는 법을 배운다. 늘 서로를 괴롭히던 모자간의 간격은 좁혀질 수 있을까.
밥을 해먹이겠다고 팔을 걷어부친 기젤라의 모습에서 어린시절부터 자신을 움츠리게 했던
우울의 그림자가 서서히 걷혀지는 것 같았다.
시리아 난민이 몰려드는 레바논. 폭탄이 터지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현장에서도
희망과 기적은 있었다. 하지만 죽음은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실감이 나질 않는다.
왜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고통스럽게 하는가. 결국 모두가 파멸뿐인데 말이다.
코로나보다 에볼라가 더 무서운 병일까.
인류는 늘 이런 위기를 맞곤했다. 물론 언젠가 다시 평화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오늘을 또 버티는게 인간이다.
국경없는 의사회 활동으로 누구보다 가깝게 죽음을 마주보면서 오히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벽을 허물어가는 과정이 아프고 감동스럽다.
책의 처음과 말미에 이제는 아들에게 말하고 싶다는 장면에서 그가 진정으로 다시
치열하게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확신했다. 아들로서는 실패했지만 아버지로서는 이미
좋은 길로 들어섰음을. 코로나 방역의 현장에서 다시 뛰는 그의 모습에서 이제 더 이상
우울에게 잠식되지 않기를 기원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치고 싶다는 그의 말에서
남편으로서도 아주 행복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 느껴졌다. 모두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