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스파이를 불러낸 회색 편지 한 통나이 지긋한 전직 요원 피터 길럼은 프랑스의 시골 농장에서 한가로운 은퇴 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집배원이 편지 하나를 들고 오고, 길럼은 그것이 영국 정보부, 즉 [서커스]에서 보낸 편지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다.런던에 도착한 길럼은 정든 케임브리지 서커스의 옛 건물과 달리 템스 강변에 새로 생긴 본부 건물을 보고 경악한다. 그는 법무팀장 버니, 역사 담당 로라를 만나 사정을 듣는다. 냉전 시대 [윈드폴 작전]으로 인해 사망한 한 요원의 아들과, 한 민간인의 딸이 정보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 유족들은 사망의 원인이 정보부, 나아가 스마일리와 길럼에게 있다고 믿고 있다. 스마일리는 연락이 닿지 않는 상태다. 그렇게 길럼은 수십 년 전 자신이 수행했던 일들을, 그리고 [튤립]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렸던 여성과의 기억을 강제로 끄집어내게 된다. 감시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낡은 서류철을 읽어 나가는 길럼. 회상과 문서 속에서 사건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50여 년 후의 이야기『유산』은 『추운 나라』의 프리퀄인 동시에 시퀄이면서 스마일리와 길럼이 등장했던 다른 여러 작품들과도 연관을 맺고 있다. 『추운 나라』를 비롯해 르카레 하면 떠오르는 대표작들은 대부분 냉전 시대 첩보전을 다루고 있다. 냉전은 끝났다. 그렇다면 르카레는 왜 반세기도 넘은 일을 들춰내어 은퇴 생활을 즐기던 길럼을 본부로 소환하고 스마일리까지 불러낸 것일까.르카레의 행보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르카레는 데뷔작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1961)에서부터 최신작 『현장 요원』(2019)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공백기 없이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 왔다. 냉전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리틀 드러머 걸』), 다국적 제약 회사(『성실한 정원사』), 테러와의 전쟁(『영원한 친구』), 콩고 내전(『미션 송』), 불법 이민(『모스트 원티드 맨』), 민간 방위 기업(『민감한 진실』)까지 누구보다 예민한 감각으로 시대 상황을 작품 속에 녹여 냈다.르카레는 『유산』을 통해 바로 지금 이 시점에서 냉전기를 되돌아보며, [그때 우리가 한 일은 무엇 때문이었나]라는 질문을 던진다. 냉전기를 살던 사람들이 냉전이 끝나면 펼쳐지리라 생각했던 이상적인 세계와 달리, 현대 세계에는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고 냉전의 유산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힌다. [그때 우리가 한 일은 무엇 때문이었나]라는 질문은 사실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향해 있는 질문인 것이다.르카레는 고령임에도 최근까지 브렉시트 반대 시위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고, 2019년에는 인권과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올로프 팔메상을 받기도 했다. 르카레가 20세기의 거장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이 바로 르카레를 읽을 때이다.옮긴이의 한마디내 편과 네 편을 가르기 일쑤인 인간의 본성은 우리에게 피아를 가르고 흑백을 구분하라고 자꾸만 요구하지만, 이데올로기든 뭐든 인간다움을 찍어 누르고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없는 회색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평화로운 세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세상에서는 르카레의 스파이들이 지닌 회색도 아마 음지의 회색이 아니라 중용의 회색이 될 것이다.